20세기 초까지 독일은 인류사상 유례없는 인문학적 성취를 이룬 나라였다.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과 괴테, 실러, 토마스 만, 헤세 등 굴지의 문호들이 독일의 정신세계를 이끌었고, 음악 분야에서도 바흐,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슈만 등 불멸의 작곡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에 열광하며 나치즘의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국가의 파멸로 치달았다.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으로 공산화 되는 과정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세기의 문호들과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있었고, 정신적 지평을 떠받치는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지만,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이념의 광풍 앞에서는 그런 문화적 축적도 한낱 가랑잎에 불과했다. 그 결과 스탈린 집권기에는 수천만 명이 숙청·강제노역·기근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념적 폭력은, 나치즘의 잔혹성과 견줄 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참상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적인 축적이 사회 전체의 이성과 양심을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광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문화적 지성이 오히려 선동과 조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가 소중히 받들어 온 인문학적 가치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현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진영대립 가운데 대선 정국을 맞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대다수 식자층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념적 편향성이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이유로 특정 진영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외면하는 처사이다. 소위 의식이 깨었다는 미명하에 대다수 식자층이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특정 정치세력 옹호의 도구를 자청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비방과 서슴지 않으면서 자기 진영 후보의 범죄 혐의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선 비호하고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비양심적이고 반이성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념은 사유의 출발점이지 판단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자층의 역할은 권력의 감시와 공공성의 수호이지, 특정 진영의 정치적 방패막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지성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자기 성찰의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편이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는 편향된 정치적 광풍에 휩쓸렸다. 그리고 지금은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다. 국민 각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