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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1세기 광장, 리마에서 피어난 사색

리마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화려한 도심이 아닌, 도시 외곽의 황량한 사막 언덕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푸에블로스 호베네스(Pueblos Jóvenes, 젊은 도시)’라 불리는 빈민 정착촌이다. 1940년대 이후 안데스 산맥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은 물 한 방울, 전기 한 줄 없는 모래바람 속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정부의 도움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길을 닦고 공동체를 세웠다. 돌멩이 행진이라 불리는 집단 행동으로 정부에 정착권을 요구하고, 서로 협력하여 물과 전기를 끌어오고 학교를 세웠다. 판잣집은 벽돌집으로 변했고, 황무지는 마침내 사람 냄새 나는 마을이 되었다. 인간의 의지와 연대가 만든 ‘페루의 기적’이 지금도 그곳에 숨 쉬고 있다. 리마는 인구 천만의 거대한 도시다. 경제 회복과 미식의 수도라는 빛이 있지만, 정치적 불안과 심각한 빈부 격차라는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21세기 광장’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도착 이틀째, 나는 리마의 심장부 산 마르틴 광장을 찾았다. 택시가 멈추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구두닦이들의 풍경이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사라진 장면이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일상이었다. 순간 1970년대에서 1980년 초까지, 서울역 앞에서 구두를 닦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은 결코 같은 속도로 달리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과거가 오늘이고, 누군가에겐 미래가 이미 지나간 어제다. 광장은 그렇게 시간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나는 광장 한쪽 벤치에 앉아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청년, 아이스크림을 나누는 가족, 연금 개혁을 외치는 시위대. 웃음과 분노, 일상의 소소함과 거대한 외침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광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숨결이라는 것을.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껴진 묘한 고독은 관계가 끊긴 현대인의 초상 같았다. 하지만 광장은 원래 고립의 공간이 아니다. 인류의 문명은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로마의 포럼은 시민이 모여 토론하며 민주주의를 싹틔운 자리였다.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말했다. “광장은 공동의 기억과 책임을 나누는 곳이다.” 그 말처럼, 광장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과 윤리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나만의 이기적인 자유(liberty)가 아니라, 공동체의 규범과 책임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freedom)가 살아있어야 건강한 광장이다. 잠시 후, 나는 또 다른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했다. 웅장한 대성당과 대통령궁이 마주 선 그곳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잉카의 돌들은 정복자의 건축 아래 묻혔지만, 그 위에 오늘의 페루가 숨 쉬고 있었다. 광장은 역사의 무대였다. 투쟁과 화해, 외침과 침묵이 얽혀 있는 시간의 무대였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광장은 외침의 공간이기보다, 경청의 공간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광장은 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자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광장은 달라야 한다. 말 잘하는 소수보다, 서로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귀 기울이는 다수의 ‘귀’가 더 필요하다. 경청은 존중이고, 존중은 화해의 시작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바로 그 경청의 순간에서 태어난다. 리마의 석양은 붉은 먼지 속에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빛이 사막 언덕의 집들을 스치자, 벽돌 사이로 흙냄새와 사람 냄새가 섞여 피어올랐다. 나는 그 빛 속에서 ‘경청의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오늘날의 광장은 더 이상 돌바닥 위에만 있지 않다. SNS, 유튜브, 메타버스 등 디지털 세계 또한 새로운 광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가상의 광장은 너무 자주 분열과 혐오의 소용돌이로 변한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소통의 성숙, 공감의 지혜다. 21세기의 광장은 정치적 구호뿐 아니라, 환경 위기, 정신 건강, 세대 갈등, 그리고 웰빙과 같은 삶의 주제가 함께 오가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투쟁의 광장에서, 치유의 광장으로. 이것이 인류가 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방향이다. 한국에도 광장이 있다. 때로는 도로 위에서,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광장에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외침만 있고 경청이 없다면, 광장은 자기 확신만 되풀이하는 공간이 될 뿐이다. 산 마르틴에서 아르마스 광장까지 걸으며 나는 바랐다. 우리의 광장에도 ‘경청의 꽃’이 피어나기를. 침묵을 밭으로 삼고, 존중의 햇살 아래 피어나는 꽃을 의미한다. 리마의 광장에서 나는 그 꽃 한 송이를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소망했다. 언젠가 우리의 광장에서도 분열의 소음이 공존의 합창으로 바뀌고, 차이를 품은 향기가 공동체를 치유하는 날이 오기를. 그것이 바로 21세기 광장이 담당해야 할 진정한 역할이며, 인간이 ‘나’에서 ‘우리’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1-25

페루의 고요 속에서 만난 ‘나’의 언어

페루는 단순히 관광의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고대의 숨결이 바람에 실려 흐르고, 사람의 손길이 신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땅이다. 마추픽추와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 거대한 콘도르가 나는 콜카 캐니언, 아마존 정글, 신비한 나스카 라인까지. 페루는 고대 문명과 자연의 경이로움이 공존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나 대하드라마였다. 리마의 공항에 내리던 첫날밤, 나는 이국의 공기 속에서 묘한 정적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정적의 결을 따라 한적한 사립(Musco Larco) 박물관을 찾았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한 문명의 발자취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언제나 한 민족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장소다. 그 문을 여는 순간은 늘 설렘으로 가득하다. 마치 수천 년의 역사가 담긴 긴 문장의 첫 단어를 읽는 듯한 순간 말이다. 고요한 전시실 안에서 설명서보다 먼저 내 눈을 붙잡은 것은 ‘색’과 ‘무늬’였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엮인 언어였다. 실 한 올 한 올, 문양의 곡선 하나마다 “나는 여기 있다”라는 존재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잉카인들의 문양은 화려한 예술이기 전에, 혹독한 고산의 삶을 견디게 한 강력한 주문(呪文) 이었다. 거대한 콘도르의 날개 문양에는 하늘과 통하려는 간절함이, 퓨마의 발톱에는 대지를 지키려는 의지가, 뱀의 곡선에는 지혜와 치유를 바라는 잉카인의 기도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무늬 속에서 신화가 아니라 현실을, 장식이 아니라 생존을 보았다. 그들의 예술은 “나는 나대로 충분히 빛난다“라는 조용하고 단호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잉카 여인들의 장신구였다. 귀를 장식한 금속 한 조각,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빗, 자수 한 땀 한 땀마다 그들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꾸밈이 아니라 침묵 속의 저항이자 자존의 표현이었다. 고산의 바람 속에서도 하루를 마감하듯 정성스레 엮은 실 한 올 한 올에는, 억압된 사회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여인들의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잉카의 옷은 단순한 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분증이자 그들만의 신앙 고백서였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비쿠냐 털옷은 권력과 부를 상징했고, 기하학 문양 ‘또 카푸(Tocapu)’는 혈통과 정체성을 새긴 상징이었다. 빨강은 통치의 힘, 초록은 조상의 숨결, 노랑은 풍요의 옥수수를 의미했다. 여인들의 손끝에서 짜인 직물은 신에게 바치는 기도이자 자신을 지키는 방패였다. 그들의 꾸밈은 결코 허영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 권위 앞에서도 굽히지 않으려는 자존, 그리고 자신을 위한 기쁨이 실마다 배어 있었다. 문양은 때로는 사랑의 언어였고, 때로는 외부의 시선을 향한 경고였다. 그들에게 꾸밈은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침묵의 선언이었다. 박물관을 나서는 길, 나는 문양의 잔상이 마음 깊숙이 남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오늘의 여성들이 떠올랐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립스틱을 꺼내 드는 손끝, 작은 귀걸이를 고쳐 다는 순간의 섬세한 동작 속에도, 잉카 여인들의 문양과 닮은 내면의 선언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의 여성들이 화장과 의복, 장신구로 자신을 꾸미는 이유는 단순히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망, 세상 속에서 더 당당하게 빛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숨 쉬고 있다. 립스틱 하나를 바르는 순간 살아나는 자신감, 거울 속 환한 미소가 되살리는 자존감이 된다. 이른바 ‘립스틱 효과’라 불리는 현상은 사실, 수천 년 전 잉카 여인들이 실로 짜 넣은 ‘나다움’의 의식이 현대에 이어진 모습이다. 꾸밈은 외양의 변화를 넘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화장은 상처를 가리는 가식이 아니라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다. 잉카 여인들이 색실 한 올 한 올로 자신들의 세계를 엮었듯, 오늘의 여성들은 작은 색채와 장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수놓는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선언의 본질은 같다. 삶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으로 나를 지켜낼 것인가’의 여정이다. 잉카 여인들은 침묵 속에서 실로 세계를 짰고, 오늘의 우리는 일상의 색으로 자신을 그린다. 거울 앞의 손끝, 박물관의 문양, 그리고 일상의 가장 빛나는 순간마다 수천 년을 넘어 흐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부드럽고도 강렬한 선언이 오늘도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1-13

잉카의 돌길에서 되찾은 내 안의 목소리

나는 지금, 계절이 엇갈리는 대륙의 초입에 서 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머물렀던 뉴욕은 새로운 계절의 활기로 가득했다. 거리마다 활기가 넘실거렸고, 기운이 부드럽게 감돌았다. 하지만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페루 리마는 이미 차가운 가을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의 계절이 시작되는 낯선 땅에서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밤의 공항은 낯설었고, 언어와 표정 또한 생경했다. 그 낯섦은 내 안의 고요마저 흔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섦 속에서 오히려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마도 자발적 고립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에너지일 것이다. 나는 이번 여정을 ‘자발적 고립’이라 명명한다. 가족을 떠나 홀로 다른 대륙을 밟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는 늘 내 곁에서 삶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던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녀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했고, 동시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했다. 체력의 한계를 핑계 삼아 늘 익숙한 일상에 안주하려 했던 아내와는 달리, 나는 이번에는 홀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 고립 속에서 잊고 지냈던 ‘진정한 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자발적 고립이라는 표현은 다소 쓸쓸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가 아닌 귀향이다. 익숙한 이름과 역할,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잊고 지냈던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귀향. 그 목소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는 시간이 바로 이번 여정이다. 정든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떠나는 트레킹이나 여행과 같은 자발적 고립은 일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발적 고립의 가장 큰 장점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타인의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과의 대화에 몰두하며 내면을 깊이 성찰할 수 있다. 또한, 일상에 지친 심신을 평온함 속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자신감과 독립심을 키워준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낯선 환경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독립심을 길러주고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준다. 더불어 평소에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장점과 단점, 진정한 취향 등을 발견하며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트레킹이라는 활동 자체가 지닌 치유력과 고립된 자연 환경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휘한다. 디지털 기기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을 거닐며, 외부의 자극 대신 오감을 통해 자연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는 마음챙김(Mindfulness) 능력을 향상시키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웅장한 자연 경관과 고요함 속에서 걷는 것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특별한 치유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자발적 고립을 통해 떠나는 혼자만의 트레킹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을 성장시키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대학에서 수십 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육자이다. 그 길은 책임과 헌신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잊고 살았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교수로서의 역할은 분명했지만,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본래의 나’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페루의 땅은 낯설지만, 묵직한 침묵이 감도는 곳이다. 잉카의 돌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오래된 돌벽에 새겨진 고요와 조우한다. 그 고요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문득 가족을 떠올린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과거에는 주저 없이 ‘헌신’이라고 답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희생하는 것이 가족의 의미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족은 단순히 전통과 의무라는 무거운 짐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각자 고유한 리듬으로 살아가는 작은 우주와 같다. 내가 그들을 보듬는 방식 또한 이제는 ‘헌신’뿐만 아니라 ‘경청’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야말로 가족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해답은 아마도 이 여정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잉카의 산책길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혹은 낙엽처럼 조용히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깨달음 하나하나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 고립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떠남은 끝이 아닌, 진정한 나를 되찾기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잉카의 돌길 위에서 깨달아간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깊고 진실한 귀향임을. 떠남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아닌,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임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길 위를 걷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0-28

나를 위해, 나를 바꾸자

본지는 10월 15일부터 ‘김상국의 Wellness와 삶의 질'을 격주로 연재한다. 이 칼럼은 건강지식과 필자의 경험, 여행 체험 등을 함께 담아낸 하이브드리 에세이 형태를 갖추고 있다. ‘웰니스’란 단순한 건강 정보가 아니라, 신체적·정서적·사회적·영적 균형을 아우르는 통합적 삶의 철학을 의미한다. 필자인 포항 청하면 출신의 김상국은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정년퇴임 때까지 세종대 교수로 일했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 편집자 주 좋은 습관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조용한 혁명과 같다. 혁명이라고 하면 흔히 깃발과 함성, 피와 땀의 투쟁을 떠올리지만, 진정한 혁명은 삶 속에 스며 있는 작은 반복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아침 일찍 눈을 뜨는 선택, 술 한 잔 대신 동네 산책을 택하는 선택, 짧은 명상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택 등이 있다. 바로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인생의 큰 흐름을 바꾼다. 결국 인생은 ‘나다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고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무거운 책임과 일상의 굴레가 커질수록 우리는 간절히 꿈꾸던 모습과 점점 멀어지곤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끝내 자신이 바라던 삶을 현실로 만들어간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또 역사의 무대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보며 깨달았다. 성공은 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습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뇌는 익숙한 습관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벽을 넘어서는 순간, 습관은 우리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오프라 윈프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명상하며 자신을 지켜냈다. 그러한 습관들이 그녀를 미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세웠다. 한국 축구의 자랑 손흥민 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양발 훈련, 수천 번의 슛 연습, 철저한 식단 관리라는 습관을 지켜왔다. 지금의 손흥민은 타고난 재능보다 꾸준한 습관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내 곁의 제자들 역시 이를 증명한다. 매일 영어 일기를 쓰던 학생은 훗날 교수가 되었고, 또 다른 학생은 글로벌 기업에 당당히 입사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특별한 천재성이 아니라, 흔들림 없는 지속적 실천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메타인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 그리고 노력하면 능력이 향상된다고 믿는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이 그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반대로 실패하는 이들은 대체로 고정된 마인드셋(fixed mindset)을 갖고 있었다. “타고난 능력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믿음은 변화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단순한 다짐을 넘어 몸과 마음을 거듭 단련하는 과정이다. 한 지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늘 불평과 불만이 많았고, 타인의 단점을 먼저 지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12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걸으며 완전히 달라졌다. “걸으면서 나쁜 습관을 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했다“라는 그의 고백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후 그의 얼굴에는 늘 잔잔한 미소가 머문다. 습관 하나가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오늘은 그냥 한잔할까?”와 “밖에 나가 걸을까?”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그 작은 선택 하나가 내일의 나를 만들고, 결국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삶의 질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에서 갈린다. 워런 버핏은 세계적인 부호이지만 검소한 습관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는 여전히 중고차를 타고, 햄버거와 체리 콜라를 즐기며,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이웃에게는 관대하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매일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까지 지켜왔다. 지금의 워런 버핏을 만든 것은 돈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최근 나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며 습관의 힘을 다시금 떠올렸다. 잉카 문명의 길을 따라 홀로 떠나는 여정은 내게 하나의 문답식 여행이다. 길 위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은 결국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힘으로 이어진다. 여행은 일상의 껍질을 깨뜨리고, 낯선 나와 마주하게 한다. 그 만남 속에서 새로운 습관의 씨앗이 싹트고, 돌아와 일상 속에 심어진다.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을 재정비하는 습관의 연습장이 된다. 좋은 습관은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명한 목표, 전략적인 계획, 그리고 “될까?”가 아닌 “반드시 된다“라는 결심이 있으면 충분하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포기하지 않는 한, 습관은 반드시 우리를 바꾼다. 나를 위해, 나를 변화시키자. 그 시작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늘 하루, 내가 내리는 작은 선택과 발걸음 속에 내일을 바꿀 혁명이 숨어 있다. 습관은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 인생을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