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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고요 속에서 만난 ‘나’의 언어

등록일 2025-11-13 08:52 게재일 2025-11-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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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을 형상화한 모체 문명의 황금 제사장.

페루는 단순히 관광의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고대의 숨결이 바람에 실려 흐르고, 사람의 손길이 신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땅이다. 마추픽추와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 거대한 콘도르가 나는 콜카 캐니언, 아마존 정글, 신비한 나스카 라인까지. 페루는 고대 문명과 자연의 경이로움이 공존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나 대하드라마였다.

리마의 공항에 내리던 첫날밤, 나는 이국의 공기 속에서 묘한 정적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정적의 결을 따라 한적한 사립(Musco Larco) 박물관을 찾았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한 문명의 발자취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언제나 한 민족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장소다. 그 문을 여는 순간은 늘 설렘으로 가득하다. 마치 수천 년의 역사가 담긴 긴 문장의 첫 단어를 읽는 듯한 순간 말이다.

고요한 전시실 안에서 설명서보다 먼저 내 눈을 붙잡은 것은 ‘색’과 ‘무늬’였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엮인 언어였다. 실 한 올 한 올, 문양의 곡선 하나마다 “나는 여기 있다”라는 존재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잉카인들의 문양은 화려한 예술이기 전에, 혹독한 고산의 삶을 견디게 한 강력한 주문(呪文) 이었다. 거대한 콘도르의 날개 문양에는 하늘과 통하려는 간절함이, 퓨마의 발톱에는 대지를 지키려는 의지가, 뱀의 곡선에는 지혜와 치유를 바라는 잉카인의 기도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무늬 속에서 신화가 아니라 현실을, 장식이 아니라 생존을 보았다. 그들의 예술은 “나는 나대로 충분히 빛난다“라는 조용하고 단호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잉카 여인들의 장신구였다. 귀를 장식한 금속 한 조각,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빗, 자수 한 땀 한 땀마다 그들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꾸밈이 아니라 침묵 속의 저항이자 자존의 표현이었다.

고산의 바람 속에서도 하루를 마감하듯 정성스레 엮은 실 한 올 한 올에는, 억압된 사회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여인들의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잉카의 옷은 단순한 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분증이자 그들만의 신앙 고백서였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비쿠냐 털옷은 권력과 부를 상징했고, 기하학 문양 ‘또 카푸(Tocapu)’는 혈통과 정체성을 새긴 상징이었다. 빨강은 통치의 힘, 초록은 조상의 숨결, 노랑은 풍요의 옥수수를 의미했다. 여인들의 손끝에서 짜인 직물은 신에게 바치는 기도이자 자신을 지키는 방패였다.

그들의 꾸밈은 결코 허영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 권위 앞에서도 굽히지 않으려는 자존, 그리고 자신을 위한 기쁨이 실마다 배어 있었다. 문양은 때로는 사랑의 언어였고, 때로는 외부의 시선을 향한 경고였다. 그들에게 꾸밈은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침묵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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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문명의 신화를 재현한 형상.

박물관을 나서는 길, 나는 문양의 잔상이 마음 깊숙이 남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오늘의 여성들이 떠올랐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립스틱을 꺼내 드는 손끝, 작은 귀걸이를 고쳐 다는 순간의 섬세한 동작 속에도, 잉카 여인들의 문양과 닮은 내면의 선언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의 여성들이 화장과 의복, 장신구로 자신을 꾸미는 이유는 단순히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속에는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망, 세상 속에서 더 당당하게 빛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숨 쉬고 있다. 립스틱 하나를 바르는 순간 살아나는 자신감, 거울 속 환한 미소가 되살리는 자존감이 된다. 이른바 ‘립스틱 효과’라 불리는 현상은 사실, 수천 년 전 잉카 여인들이 실로 짜 넣은 ‘나다움’의 의식이 현대에 이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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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국 세종대 명예교수

꾸밈은 외양의 변화를 넘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화장은 상처를 가리는 가식이 아니라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다. 잉카 여인들이 색실 한 올 한 올로 자신들의 세계를 엮었듯, 오늘의 여성들은 작은 색채와 장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수놓는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선언의 본질은 같다.

삶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으로 나를 지켜낼 것인가’의 여정이다. 잉카 여인들은 침묵 속에서 실로 세계를 짰고, 오늘의 우리는 일상의 색으로 자신을 그린다. 거울 앞의 손끝, 박물관의 문양, 그리고 일상의 가장 빛나는 순간마다 수천 년을 넘어 흐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부드럽고도 강렬한 선언이 오늘도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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