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벌어지는 작고 소박한 얘기를 독서를 통해 걸러지는 사유와 함께 갈무리하는 문학산책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소설가 김살로메는 영남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 이래 포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울로 코엘료식 소설 문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린 그의 작품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확고해졌다. 소설 형식을 빌린 인생 지침서내지는 바른 생활 길잡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재미와 감동(교훈)이라는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게 소설의 일반적 기능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며 알레고리와 아포리즘을 남발하는 방식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설명(직접 가르침) 보다는 묘사(현상)의 매혹이 한층 더 소설답다는 근거 없는 편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필요에 의해 독서치료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권장도서 중의 하나가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 2001)였다. 예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뭉근한 가르치기 방식, 순진한 독자로 하여금 밑줄 긋기의 욕망을 부추기는 아포리즘의 향연 등은 이 책에서도 여전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엘료의 그 진부한(?)방식에 길들여지고 끝내 몰입하고 있었다. 뻔한 얘기잖아, 혼잣말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밑줄을 긋고, 그도 모자라 좋은 구절을 다시 못 찾기라도 할까봐 군데군데 책 모서리를 접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원래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은 아지만 그리 두껍지 않은 새 책이 밑줄 긋기와 접은 흔적 때문에 너저분하게 돼버렸다.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한다. 뻔한 삶, 무소용하고 무가치한 자기 삶 때문에. 구체적 이유는 다를지라도 누구나 젊어 한 때 그런 삶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적이 있기에 공감하기 쉽다. 심리치료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인간 모든 갈등의 공통 원인에는 어린 시절 부모 및 주변 환경이 주는 억압과 상처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베로니카도 예외가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은 엄마의 현실적 판단에 의해 유보된다. 여자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남자의 낭만적 정서를 자극하는 사교용은 될지언정 직업적 자아 성취욕으로는 너무 먼 그대라는 것을 지적이고 냉철한 엄마는 주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조차 어쩌지 못하는 자신만의 삶, 그저 그런, 오늘 같은 내일이 기다릴 바엔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베로니카는 생각하게 된다.
수면제 과용으로 입원하게 된 정신 병동에서 베로니카는 일주일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때부터 그녀는 삶에 대한 치열한 욕구를 느낀다. 저마다의 이유로 미쳐서 들어온 정신병동의 타인을 통해 삶의 욕구 본능이 충만해진 것이다. 우울증을 앓는 제드카도, 강박에 사로잡힌 에뒤아르도, 공황장애를 앓는 마리아도 베로니카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들 모두는 억압의 희생자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추악시되는 부분이야말로 위선이 될 가능성은 높다. 타인을 위한 그러한 가면을 벗고 본질적 욕망을 위해 달려가는 자만이 진정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열망이다. 타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자각이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코엘료가 말하는 이 소설의 의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코엘료가 말한다. 교육은 우리에게 오로지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갈등을 피하라고 가르친다고. 하지만 우리 맘속 수많은 베로니키들-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들은 그런 길들여지고 획일화된 삶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럼 어떻게? 그건 `사람들이 당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치광이가 되어도 좋으니 모범적인 삶의 표본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 자신의 욕망,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코엘료는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미친다는 것과 정상의 경계야말로 얼마나 모호하고 부질없는 것인가.
어느 날 문득 죽음에 대한 자각이 솟구쳐오거든 그건 삶에 대한 미친 열망의 다른 말임을 명심하자. 삶에 대해 가르치려 든다고 코엘료를 좋아하지 않았던 독자로서의 미안함을 변명하려는 이유가 이 한마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