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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6) 꽃가루날려야 은사시나무지

첫새벽에 시를 쓴다. 껍질 벗겨진 은사시나무의 실존에 대하여. 아니, 반성문을 쓴다. 그 나무껍질 벗긴 내 죄에 대하여. 내 죄는 부끄러움이나 자책에서 끝날 수 있지만 상대의 실존은 치명타를 입거나 고사(枯死)할 수 있음에 대하여. 어느 봄날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 영내 은사시나무 삼십여 그루가 허리 껍질이 벗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단다. 은사시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려 식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둥치에서 사람 허리만큼 올라온 부분의 껍질을 벗겨 방치하면 나무는 고사하는 모양이었다. 꽃가루 날려야 하는 건 은사시나무의 생존방식이고, 그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거창한 생태주의자나 자연보호주의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실존`의 문제로 생각해봤을 때도 그 기사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방치`가 `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노라마는 은사시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차라리 적법한 절차나 당국과 협의를 거쳐 은사시나무를 벌채했다면 이런 쓰라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방치와 고사가 주는 끔찍한 비열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은사시나무가 말라가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 것이다. 뿌리나 둥치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자책이나 미안함보다 제 밥그릇에 꽃가루 날리지 않는 무탈함에 대한 수다를. 은사시나무는 적어도 해목(害木)이 되기 위해 자라지는 않았다. 자라기 전 곧장 뽑아주어야 할 나무로는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로 족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번식으로 어린왕자의 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에 비하면 은사시나무는 무죄다. 햇빛 아래, 앞뒤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잎들은 뭇 사람들에게 노래가 되고 쉼터가 되었을 뿐이다. 제 생존 본능을 위해 봄 한철 꽃가루 날린 것이 유죄라면 그건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양보 못해 순한 죽음도 아닌 `고사하기 까지 방치`하는 그 비열함에 반성문을 쓰고 싶을 뿐이다. 더러 비열하고, 자주 자책하는 게 인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이기에 양심 있는 자는 그 자책이 오래간다. 그 때 망가진 제 영혼을 순진무구한 풀밭에 마냥 풀어놓고 싶어지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 2003)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이란 점에서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닮았고, 자연 친화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왕자`에 가깝다. 인간 속성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자연에의 향수를 쉽게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다. 단순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모습은 `방치`와 `고사`를 일삼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침이 오고 있다. 은사시나무를 위한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다만 나는 밑줄을 그을 뿐이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소설가)

2009-10-06

(5) 모든 걱정은 사소하다

오늘 하루 그대 일과는 위대하였고 거기에 파생하는 걱정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충분히 위대할 수 있었던 그대 일과를 망쳐버렸다. 실은 일과를 망친 것도 아니다. 망쳤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가 느끼는 `사소함이란 유령` 때문이다. 대부분의 걱정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그대 하루를 번민하게 만들므로. 오늘 하루 얼마나 사소함이 그대 영혼을 너덜거리게 했는지를 증명해보자. 한 달에 한 번 봉사하러 가는 그대, 오늘도 상담자의 편지를 개봉한다. 기름을 먹인 듯한 반질거리는 편지지에 세로로 정갈하게 써내려간 글엔 가을을 맞는 사내의 우수가 담겨 있다. - 어김없이 가을이 왔네요.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예전처럼 집중되지 않아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면담자의 아픔은 깊고, 그대 자질은 얕기만 하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건만 결과는 그대의 이러한 사소한 걱정이 그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 영혼이 아프다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책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자책은 불필요하다. 그대는 성실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어쩌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친 그대는 급하게 공식 자리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제야 그대는 복장을 살핀다. 살짝 찢은 청바지에 흰 점퍼를 입은 그대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공식의 밥상에 권위주의라는 주요반찬이 빠진 적이 없으므로 자기검열에 빠진 그대는 또 사소함에 목매기 시작한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갈색 원피스를 갈아입고 나오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운전대를 잡은 그대는 빨간 신호등에서 교차로를 건널 만큼 찢은 청바지 패션에 골몰한다.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건만, 마음이 편치 않으므로 꼬리뼈는 아파오고 지루한 시간이 지속된다. 옆자리 누군가가 흘깃 쳐다만 봐도 찢어진 청바지를 탓하는가 싶어 식은땀이 난다. 실은 갈색 원피스와 찢어진 청바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투명 비닐 따위를 첨단패션이라고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대의 고민은 그대가 혹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지표를 따라야 한다는 부담에 지나지 않는다. 행사가 끝난 뒤 그대는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당신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인의 눈신호를 보면서 그대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사할 사람은 많이 남았고, 그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그대는 자책한다. 의례적 인사는 접어두고 지인의 얘기를 먼저 들어줄 걸. 하지만 이 역시 사소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지인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이고, 그 부탁이라는 것은 꼭 오늘 이 자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는 정작 그 행복을 위해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책이 여기 있다.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창작시대, 2000)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의 일상에 얽매여 사는지를 곱씹게 해준다. 사소한 오해가 가져다주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생각과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분별성, 자기 능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피곤함, 수시로 변하는 기분에 집착하는 자기연민,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환경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아 등은 모두 인간이 가지는 특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허상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 우물에서 질퍽거리는 동안 우리 섬세한 영혼은 잘 보이지도 않는 우물벌레에게 야금야금 갉히고 만다. 작가는 말한다. `몸의 주인이 당신인 것처럼 감정의 주인도 당신이다. 행복은 현재 당신 마음속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엔 우리 생이 아직은 환희와 풍요의 나날이므로.(소설가)

2009-09-29

(4) 아버지를 부탁해

과히 신드롬이다. 아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투정을 가벼이 웃어넘기듯 백만부 판매라는 빅뉴스를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주기까지 한다. 올해 포항의 원북 역시 `엄마를 부탁해`이다. 원북 행사란 전국 몇몇 공공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범시민 책읽기 운동의 일종이다. 시민들이 접수한 후보 도서 중 한 권을 각계에서 위촉된 원북 심사위원들이 토론으로 선정하고 도서관측은 그 책을 올해의 원북으로 선포한다. 한마디로 `책을 가까이 하는 시민`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원북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측에서는 도서대출 및 교환, 원북 작가와의 행사 그 외 공개토론회 등을 마련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의 원북 도서로 정해진 도시는 서너 곳이 된다고 한다. 백만부가 팔리기까지 이러한 원북 운동도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주에 공개독서토론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시립포은도서관 주부독서회팀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자유로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출간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이 책의 미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역시 신경숙 소설의 문체미학과 감성미학이 빠질 수 없었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나 `흙담 밑에서 뻗어가는 호박넝쿨`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미시적 눈썰미와 `엄마를 잃은 게 아니라 잊었다`는 감성적 성찰이 그미 소설의 특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외 시점 변화의 독창성과 다소 신파인 곰소 아저씨와의 로맨스 등이 충분한 공감과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은 엄마의 희생은 과연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나눴다. `엄마는 멀리서 생각하면 눈물 나고, 가까이서 보면 화가 난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부터 (희생만 하는)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애초에 엄마는 여자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어법일 것이다. 엄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온전한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의 기록은 그대로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많은 독자를 울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려이기도 하다. 혹여, 이러한 모성의 희생이 가부장적 혐의가 짙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의 미덕으로 칭송되거나 강요되지나 않을까 하는. 맏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과 나머지 아들들의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의미 있었다. 장자인 형철이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동안 나머지 두 아들은 둘째놈, 또는 아우라는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가 쓰던 밥그릇을 큰아들이 물려받고, 장독에 숨겨둔 `귀한` 라면을 큰아들만 먹고, 고구마 캐는 노동에서 맏아들이 면제될 때 나머지 아들들은 절규한다. `형만 장땡이냐`고. 남은 두 아들들을 보듬는다고 너희들도 장땡이다, 라고 엄마가 말한들 남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상처는 성장한 뒤의 트라우마가 되니까. 가족애란 이름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라는 주제도 패널과 방청객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신경숙 가족소설에는 빈번하게 `아버지의 부재`가 나온다. 그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부분은 의도적이라기보다 경험적,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젊은 여자 때문이든, 역맛살이 낀 팔자 때문이든 집 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아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 어떤 아내의 힐난도, 이렇다 할 자식들의 반항도 없이…. 집안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지만 언제나 그 아버지는 면죄부를 받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감히 부탁해본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맏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맏딸이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에게 엄마를 부탁하듯 이제 아버지를 부탁해본다. 아니, 아버지께 부탁한다. 이 세상 아버지(남성)들아, 이 책을 읽고 싱겁다거나 뻔한 얘기라고 옆으로 밀어놓는 일만은 제발 없기를!(소설가)

2009-09-22

(3) 상처를 위하여

독서 치료 프로그램 중에 빠지지 않는 추천 도서 중의 하나가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푸른숲, 2006)이다. 도서관 입구 책꽂이, 눈높이 맞춤하게 꽂힌 그 책이 욕심나긴 했지만 다른 책에 우선순위가 밀리곤 하였다. 분권 두 권짜리가 아무래도 부담이 됐나 보다. 긴 제목만큼이나 사랑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걸까? 그미의 다른 소설 `세월`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작가는 기본적으로 길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굳이 두 권짜리일 필요가 있을까 싶게 동어반복에 중언부언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별 불만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건 상처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단물 같은 치유의 힘 때문이다. 이 책의 본질은 상처에 관한 치유이고 곁다리는 권력에 대한 속성쯤이다. 사랑이 세상을 움직일까? 아니면 휴머니즘이? 천만에! 덧씌운 사랑의 환상을 걷어내고, 어쩌면 겉치레일지 모를 휴머니즘의 꺼풀을 벗겨내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속성은 권력에의 욕망이란다. 따라서 사랑의 실체 또한 환상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욕망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욕망은 다다르기 힘들고, 그 뒤끝은 상처로 남기 쉽다는 것이다. 그 상처가 주체적 삶의 밑거름이 되느냐 아니냐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상처의 치료과정을 작가는 소설 형식을 빌려 얘기하고 있다. 유능한 건축사 세진은 누가 뭐래도 작가의 분신이다. 세진의 정신 분석 내용을 토대로 여성들의 성과 가치관, 타인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면담자인 의사와 세진의 정신분석 과정은 경직되어 있지 않고, 현실감 있게 묘사된다. 세진의 여러 문제,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이십대의 성폭행 에피소드 등은 충분한 공감대를 얻어낸다. 세진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결핍이다. 그것도 유아기의 상처에서 오는 결핍. 그녀로선 부모의 이혼이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겠다. 결핍의 원인은 자신이 아니라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이다. 심리치료책을 읽기 전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이런 공공연한 비밀을 깨칠 때마다 마음 밭이 환해진다.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주변인들과의 상충 과정에서 자신의 콤플렉스가 형성되고, 그것이 또 다른 욕망의 출발선이 된다는 점은 매우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아버지 같은 무심한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남성관이나, 엄마처럼 희생적인 길을 걷지 않겠다는 내면화 과정도 유아기 이래의 이런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게 작가의 관점(아니, 심리학자들의 관점)이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인혜는 단순하고, 관계지향적인 반면, 독신녀인 세진은 완벽주의자이며 독립적인 캐릭터이다. 내가 볼 때 두 주인공 다 일정부분 작가의 이중분신이다. 작가가 체험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그래도 비판적 책 읽기를 한다면 세진과 인혜에게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장악력마저 지닌, 그토록 자주적인 세진이 왜 자신의 상처만큼은 동어반복할까 싶었다. 또한 세진에 비해 단순하고 온정주의자이며 남성 포용주의자이기도 한 인혜가 너무 세진의 입김에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뭍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여성들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있다. 두 주인공이 활동하는 `오여사`클럽을 통해 사랑에 대한 그녀들의 자의식을 들여다보자. 권력욕, 생존 본능, 미적 체험, 인간 사이의 소통 - 그녀들은 사랑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피력한다. 한데,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 세진이 이 모든 견해를 엎어버릴 만한 명쾌한 정의를 내린다. 사랑은 노이로제나 광기이며, 자기 콤플렉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예를 들면 가난을 상처로 가진 사람은 부자를,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고학력자를,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자를 선망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곧 자신의 상처나 콤플렉스가 된다`는 말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삶은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부산물이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권하는 책인 만큼 그 시행착오의 마음 밭에서 언 상처를 일구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가)

2009-09-15

(2) 동굴 속 여자를 위하여

가끔씩 헛갈릴 때가 있다. 가족제도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내 연민의 근원이 제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 때문인지,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인지. 지난 주말에 친정 엄마의 팔순모임이 있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즐거움에 앞선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행사의 행동요원(?)격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불합리한 상황과 그것에 대한 내 연민 때문이다. 우리집 여성 요원들의 간략한 행태를 소개해보자. 자유분방한 큰올케가 대안 없이 뒤로 빠지는 동안, 전통적 가부장질서에 충실한 둘째올케의 가없는 효부정신이 발휘된다. 좋은 게 좋은 셋째올케와 멀리 사는 언니는 묵묵히 대세를 따른다. 전 여성행동요원의 정신적, 노동적 민주화를 꿈꾸는 나는 나름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집안이 아닌 밖에서 모여, 여성들도 우아하게 즐기자는 내 의견은 효 문화의 온당한 기치 앞에서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웃자란 신인류의 감성쯤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안 어른들의 행동요원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유교적 가풍의 끄나풀을 놓을 맘이 전혀 없는 그들은 더 야무진 도리를 하는 요원에게 찬사의 입말을 아끼지 않는다. 뒷전에서 그 찬사를,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쪽에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겉으로 보기에 행사는 무사히 치러진다. 하지만 뭔지 모를 미묘한 앙금이 남는다. 관심과 노동과 시간을 많이 할애한 쪽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제 맘을 다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 생기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는 행사의 주체적 실체가 되지 못한데 대한 자격지심과 소외감 때문에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합리적 대안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 또한 그 과정을 도출하는데 대한 위험부담 때문에 이런 갈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남자는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혼선에 있는 여성 행동대원들을 위해 (실은 나를 위해) 나는 기어이 잔다르크가 되기를 자청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모든 식구들이 함께 즐기자는 내 요구가 받아들여져 우아한 잔칫상을 마주한 뒤에라도 그놈의 `도리`의 끝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여성(특히 며느리 입장)에게 집안 행사는 즐기는 자로서의 여유보다는 도리로서의 의무감을 요구하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들은 이런 감정에 무신경하기조차 한데, 여성들만이 감지하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타계한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학습된 우리의 가족제도는 한국형 남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적 삶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동굴 속 황제` 라는 인간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성에 대해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를 전제하는 이러한 권위는 충격적이게도 여자 특히, 한 집안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적 가정에서의 남자의 권위는 아버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차린 동굴 속 황제를 위한 밥상에 아버지가 숟갈을 들면서 가부장질서가 고착되고 그 과정에서 모성의 희생과 여성의 도리라는 개념이 고착되어 왔다는 것이다. 별 비판 없이 여성들이 이러한 학습과정의 동굴에 머무르는 동안 남성들은 또 다른 자신들만의 동굴 속 황제로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백적, 반성적 회고를 통해 작가는 말한다. `내 안의 남성을 죽여라`고. 이미 남성들 스스로 그 부담스런 `남성적 권위`를 반납하는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제 안의 부조리한 남성을 죽여 가며 고백하는 남성들 앞에서 여자들 스스로 통렬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나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여성적 의무 이데올로기라는 동굴을 벗어나려는 최적임자는 누구인가? 명쾌한 답이 여기 있다. 그 답이야말로 여성 스스로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소설가)

2009-09-08

미쳐야 사는 거지

이번 9월부터 소설가 김살로메의 `밑줄 긋는 창가`를 새로이 연재합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고 소박한 얘기를 독서를 통해 걸러지는 사유와 함께 갈무리하는 문학산책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소설가 김살로메는 영남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 이래 포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울로 코엘료식 소설 문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린 그의 작품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확고해졌다. 소설 형식을 빌린 인생 지침서내지는 바른 생활 길잡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재미와 감동(교훈)이라는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게 소설의 일반적 기능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며 알레고리와 아포리즘을 남발하는 방식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설명(직접 가르침) 보다는 묘사(현상)의 매혹이 한층 더 소설답다는 근거 없는 편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필요에 의해 독서치료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권장도서 중의 하나가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 2001)였다. 예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뭉근한 가르치기 방식, 순진한 독자로 하여금 밑줄 긋기의 욕망을 부추기는 아포리즘의 향연 등은 이 책에서도 여전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엘료의 그 진부한(?)방식에 길들여지고 끝내 몰입하고 있었다. 뻔한 얘기잖아, 혼잣말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밑줄을 긋고, 그도 모자라 좋은 구절을 다시 못 찾기라도 할까봐 군데군데 책 모서리를 접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원래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은 아지만 그리 두껍지 않은 새 책이 밑줄 긋기와 접은 흔적 때문에 너저분하게 돼버렸다.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한다. 뻔한 삶, 무소용하고 무가치한 자기 삶 때문에. 구체적 이유는 다를지라도 누구나 젊어 한 때 그런 삶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적이 있기에 공감하기 쉽다. 심리치료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인간 모든 갈등의 공통 원인에는 어린 시절 부모 및 주변 환경이 주는 억압과 상처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베로니카도 예외가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은 엄마의 현실적 판단에 의해 유보된다. 여자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남자의 낭만적 정서를 자극하는 사교용은 될지언정 직업적 자아 성취욕으로는 너무 먼 그대라는 것을 지적이고 냉철한 엄마는 주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조차 어쩌지 못하는 자신만의 삶, 그저 그런, 오늘 같은 내일이 기다릴 바엔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베로니카는 생각하게 된다. 수면제 과용으로 입원하게 된 정신 병동에서 베로니카는 일주일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때부터 그녀는 삶에 대한 치열한 욕구를 느낀다. 저마다의 이유로 미쳐서 들어온 정신병동의 타인을 통해 삶의 욕구 본능이 충만해진 것이다. 우울증을 앓는 제드카도, 강박에 사로잡힌 에뒤아르도, 공황장애를 앓는 마리아도 베로니카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들 모두는 억압의 희생자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추악시되는 부분이야말로 위선이 될 가능성은 높다. 타인을 위한 그러한 가면을 벗고 본질적 욕망을 위해 달려가는 자만이 진정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열망이다. 타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자각이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코엘료가 말하는 이 소설의 의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코엘료가 말한다. 교육은 우리에게 오로지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갈등을 피하라고 가르친다고. 하지만 우리 맘속 수많은 베로니키들-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들은 그런 길들여지고 획일화된 삶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럼 어떻게? 그건 `사람들이 당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치광이가 되어도 좋으니 모범적인 삶의 표본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 자신의 욕망,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코엘료는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미친다는 것과 정상의 경계야말로 얼마나 모호하고 부질없는 것인가. 어느 날 문득 죽음에 대한 자각이 솟구쳐오거든 그건 삶에 대한 미친 열망의 다른 말임을 명심하자. 삶에 대해 가르치려 든다고 코엘료를 좋아하지 않았던 독자로서의 미안함을 변명하려는 이유가 이 한마디에 있다.

200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