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기억되고 각인되는 건 이를테면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죽음이 닥치는 순간, 그는 매끄러운 책상 위에 놓인 클립을 집으려고 책상 위를 긁고 있었고, 미끄러운 클립 때문에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이며, 고통으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 한 구절이다. 챈들러 소설의 묘미는 묘사와 대사에 있다. 그런 그의 글쓰기 방식을 선호하지 않은 편집자는 더러 작가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그 부분을 빼곤 했다. 편집자는 독자들이 오로지 `행동`(결과)에만 주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편집자나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 섞인 예를 들어 챈들러는 저런 편지를 썼다.
챈들러에 백번 공감한다. 우리 삶이 그렇다. 행동의 결과가 모든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소소하게 쌓인 이미지에서 그 의미가 살아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고달프고 힘들었다 치자. 과연 `오늘 하루는 몹시 피곤하고 힘겨웠다.` 이 말로 내 하루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휘발되고 말 회상이다. 몹시 피곤하고 힘겨운 하루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풍경으로 남는 이미지는 오래 각인된다. 고춧대를 뽑아내던 엄마의 등 뒤로 번지던 쑥부쟁이 향기, 장날마다 맨발로 신작로를 달리던 애꾸눈 총각의 낡은 런닝셔츠, 깜짝 학교를 방문해 내 기를 살려주던 곁방 새댁의 자주색 주름치마, 어스름 안개를 뚫고 어깨동무 잡지를 싣고 오던 둘째오빠의 고달픈 어깨. 이 모든 이미지는 명백한 풍경이 된다. 그 풍경을 되새기면 구체적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곧 삶이 된다. 의미가 부여되는 삶.
거기 고통이 있었고, 거기 환희가 있었다. 이렇게 결과론적 서술만으로 삶이 다 설명되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건 풍경과 묘사이다. 순간의 선명한 이미지가 모여 삶의 모자이크를 이룬다. 미끄러운 클립 하나의 풍경이 끝내 의미가 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