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이 술집에서 만났다. 그때 김동리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시 한 편을 쓴 소설가가 시인에게 그것을 읊어 주겠다고 했다. 취중 시인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가가 짧은 시를 읊었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한 구절을 들은 시인이 무릎을 쳤다. “명작이다, 명작.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울다니!” 꿈보다 해몽이요, 시보다 해설이다. 시인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이성복 시인의 시 `남해금산`첫 구절이다. 젊은 시절 이래로 나는 그 시에 나오는`돌`을 줄곧 `돌멩이`로 이해했다. 해변에 널려 있는 검은 몽돌 정도로 상상했다. 작고 반질거리는 반투명 검은 자갈돌에 들어앉은 여자를 상상했다. 소우주라는 거창한(?) 알레고리로 돌멩이를 해석했다. 남해금산에 대한 그 어떤 지리적·환경적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시를 접했기 때문에 이런 무지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남해금산이 바윗덩어리 산이고, 시에 나오는 돌이 자갈돌이 아니라 `바위`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시적 그림을 바꿔야 한다는 것에 저항감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내게 `남해금산`의 `돌`은 `몽돌`이미지로 남아 있다.
정서적 충만을 유도하는 즐거운 오독은 시적 비약이 허용되는 것만큼이나 독자에게 허용될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왜곡하고 굴절하는 오독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미적 쾌감을 담보하는 오독이라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발화자인 시인들 스스로 그들의 시를 기꺼이 오독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르니까.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