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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11-18 02:01 게재일 2014-11-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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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

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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