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을 목표로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