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나보코프 찬미가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5-02-11 02:01 게재일 2015-02-11 19면
스크랩버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만큼 흡인력 있는 작가도 드물다. `롤리타`에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가 꾸린 글의 향연에 취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가버린다. 나보코프라는 문장의 블랙홀에 빨려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풍부한 어휘가 정제된 문장이 되고 그것이 서늘한 통찰로 다가올 때, 등장인물들이 겪는 욕망과 상처는 금세 내 것이 되고 만다.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쓰지도 않는, 적나라한 솔직함으로 진군해오는 그를 미워하려도 미워할 수가 없다.

최근에 그의 자전 에세이 `말하라, 기억이여`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가 새로운 잔재미까지 발견했다. 내용에만 치중했을 때는 지나쳤던 나보코프의 소설가적 감수성이 잘도 보였다. 책 중간에 수록된 가족사진에 주석을 단 나보코프의 표현이 솔직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페테르부르크의 집 정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에는 자신을 비롯해 여덟 명이 등장한다. 부모 외에도 동생 세 명과 친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보인다. “친할머니는 내 두 여동생들을 장식용으로 불안정하게 안고 있는데, 실제로 사는 중엔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 이모는 부모님이 여행을 간 동안 우리를 돌보아 주었고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남동생이 이모의 왼쪽 팔꿈치에 달라붙어 있고, 이모의 다른 쪽 팔은 나를 안고 있다. 나는 내 칼라와 스트레사를 미워하면서 벤치의 팔걸이에 올라 앉아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도 그려낼 수 있는 한 집안의 미시적 가계사라니. 작가 덕에 독자는 그의 친할머니는 인정이 메마르고, 이모할머니는 다정다감하며, 엄마는 두 어른에게 자식을 양보(?)한 채 가족과 동떨어져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개나 보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갑지 않은 차림새로 카메라를 응시해야 했던 어린 작가의 심사도 이해하게 된다. 나보코프 같은 당사자이자 해설자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사진 속 생명력은 포장되고 과장된 낭만이 아니라, 진솔하고 적나라한 기억으로 작동한다. 천상 소설가인 나보코프에게 그런 `찌름`을 전하는 일은 눈 비비고 책상에 앉는 일처럼 습관화된 쉬운 일이었으리라.

/김살로메(소설가)

팔면경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