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르치려 드는 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한수 가르쳤음을 인정받으면 좋아하게도 되는 게 사람이다. 적에게 배우는 것조차 안전하다는 말은 적 입장에서 보면 한수 가르쳤음에 대해 뿌듯해하는 것이 되고, 친구를 가르치려는 것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르치려드는 자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로 남기 어렵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가르치기를 좋아하면 적의 안전을 담보해가며 가르치려 들 것이며, 얼마나 가르치려는 사람을 싫어하면 친구의 안전을 위협해서라도 가르치려는 것을 방어할 것인가.
저 명언을 이제 `배우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보다 누군가에게서 배우겠다는 태도가 훨씬 맘이 편하다. 적에게서도 배우겠다는 자세는 겸허함에서 나온다. 악의 없이 오로지 배울 것을 선언한 사람에게 불안이나 공포를 선사할 적은 없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겠다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으면 가르치려 들던 친구조차 그 배우겠다는 아우라에 흡수되어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만다.
인용한 명언의 내 식 결론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가르치려드는 나쁜 본성이 있다.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그 태도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그 본성을 누르고 수련해라. 누구를 만나든, 특히 약자 앞에서 한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가르침의 허세로 인정받기보다 배우겠다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일이 언제나 우선이다. 공평한 신의가 있는 사람은 배우려하고,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가르치려 든다. 타인을 통해 배움을 얻으려 하는 자는 실로 지혜롭고, 먼저 나서서 가르치려 드는 자는 실은 가장 바보 같다. 뭐, 이런 단상을 얻었다. 적고 보니 이조차 가르치는 풍월이다. 부끄러워라, 내 인품도 어지간히 뻔뻔하도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