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업 초기 `三日商會`란 간판을 내걸었다. `三一 상회`라 짓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일제가 허가를 해줄 리 없었다. 해촌은 독립의지를 속으로 감추며 三日이라 지어 `작심3일`을 연상시키는 기업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그의 어업활동은 최첨단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어군(漁群)을 탐지했는데, 공중에서 어군을 발견하면 어선들에 통지하고, 그때 어선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퍼레이드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1933년 당시 포항읍의 인구는 3만 여명으로 대구시에 버금갔다. 그런데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1개와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 1개 뿐이었다. 그러니 초등학교 입학에도 시험을 봤는데 당시 경쟁률이 8대1이나 됐다. 의무교육제도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나마도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일제는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하라. 일장기를 게양하고 경례하라”고 명령하는데,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가 따를 수 없었으니, 탄압이 극심해져 결국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 학교를 인수한 사람이 해촌이었다. `학교`라 하나, 건물은 없고, 예배모임이 없는 시간대에 학생들이 교회로 와서 공부를 했다. 해촌은 사업으로 번 돈 절반을 떼내어 판자집 학교를 지었으니 이것이 영흥초등학교였다. 그는 어업에서 운수사업으로 규모를 확장하고, 정계에 진출해 민선 경북도의원이 됐으며,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다가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해방후 해촌은 상당한 땅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해촌의 아들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했던가.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