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문명이 찬란하다. 원자력 발전소, 석탄 발전소가 곳곳에 있어 어디를 가든 휘황한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이 세상을 밝힌다.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컴퓨터, 자동차, 누구나 불의 문명을 구가한다. 하지만 지하에 묻혀 있어야 할 화석연료가 열로 바뀌면서 빙하가 녹고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고 미세먼지가 창궐해 숨통을 조인다. 문명의 역습이다.
화마(火魔)의 습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대지진으로 일본에서 원전이 폭발해 주변이 온통 방사능으로 뒤덮였다. 일본 정부는 폐발전소의 오염수를 처리하지 못해 바다에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은 채 죽어가고 있다. 재앙이 재앙을 낳는 것이다.
밥을 하고 쇠를 녹여 쟁기를 만들던 인류의 불장난은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화약으로 폭탄을 만들고 핵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생산하고 우라늄을 농축해 핵폭탄을 만드는 불장난은 문명을 한 방에 파괴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이라크전, 후쿠시마, 사고가 나면 통제하지 못할 기술을 남용한 대가이다. 무모하게 불장난하는 자에게 불은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불의 기억은 따뜻했다. 아궁이, 부뚜막, 구들, 아랫목, 호롱불, 화롯불, 군밤, 군고구마…, 모두 온기를 지닌 낱말이다.
대보름날이 다가오면, 버려진 깡통을 주우러 다녔다. 못으로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고 철사를 이으면 불통이 되었다. 깡통 안에 불이 붙은 나무를 넣고 빙빙 돌리면 내 머리 위에도 보름달이 떴다. 오른팔로 돌리고 왼팔로 돌리고 거꾸로 돌리고, 몸도 따라 돌다 어지러워 머리도 빙글빙글 돌고,
망우리 망우리야 대보름날 망우리야
가난한 살림살이 달님처럼 부풀어라
별똥별 별똥별아 밤하늘에 별똥별아
오늘은 별비되어 머리위에 쏟아져라
밤이 새카맣게 타도록 쥐불놀이를 하다가 불통을 하늘로 던졌다. 불통은 긴 불꼬리 날리며 떨어지고 별똥별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나면 화톳불 곁에 모여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지직지직 화톳불을 꺼지면 얼굴에 검정을 묻힌 도둑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꿈에 집에 불이 났고 오줌을 누어 시원하게 불을 껐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지랑대 높이 지도 한 장 올렸다.
불땡 - 화력(불땀).
불질 - 아궁이 등에 불을 때는 일 또는 총·포 등을 쏘는 일.
알불 - 재가 섞이지 않은 불씨.
불목 - 온돌방 아랫목의 가장 따뜻한 자리.
부삽 - 아궁이나 화로의 재를 치거나 불을 담아 옮기는 데 쓰는 작은 삽.
잉걸불 - 장작에 불이 붙어 이글거리는 모습을 일컫는 말.
후림불 - 불똥이 튀어 번지는 불, 비화(飛火).
불머리 - 불길의 위쪽 부분.
부넘이 - 아궁이 안쪽 구들 아래로 불이 넘어가는 고개.
화톳불 - 한데서 장작을 모아놓고 태우는 불.
소줏불 - 소주를 너무 마셔 코에서 알콜 기운이 푹푹 나오는 현상.
모깃불 - 모기를 쫓기 위해 풀 따위를 태워 연기를 내는 불.
불땀머리 - 나무가 자랄 때 남쪽을 정면으로 향했던 부분.
불소나기 - 불똥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부지깽이 -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거나 하는 데 쓰는 막대기.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나중에 잉걸불이 남는다. 발갛게 달아오른 숯을 화로에 가득 담아 방안에 놓으면 차가운 외풍이 물러갔다. 화롯불에는 알밤이 빠지지 않았다. 알밤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며 식구가 둘러 않았다. 잘 익은 밤을 까며 도란거리는 이야기는 따뜻하고 정겨웠다. 호롱불 아래 앉아 해진 양말을 깁던 어머니는 밤 한 톨 먹고도 배가 부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태백산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겨울바람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은 어찌나 매서운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먼 산길을 구불구불 걷다 보면 아랫목 생각이 굴뚝같았다. 소년들은 화톳불을 피우고는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렸다. 돌멩이가 뜨거워지면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 한 줌이 얼마나 소중한지 온몸으로 느낀 추억 한 토막이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차가운 세상으로 나갔을 때 36.5°의 체온을 지키기 위한 연습이었다.”(김이랑 수필 ‘구들’부분 발췌)
여름밤에는 모깃불이 타닥타닥 잔별을 튀기고, 겨울에는 밥그릇이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당에는 호야등이 환히 밝히고, 방안에는 호롱불이 그림자를 흔들고, 고기 잡는 개울에는 관솔불이 비추고, 골짜기에는 서리한 강냉이 구워먹는 화톳볼이 타오르고, 보슬비 오는 날에는 앞산에 도깨비불이 번쩍거리고,
불을 적절히 쓰던 시절의 불장난은 따뜻했다.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