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방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상왕 태종이 외척 숙청을 위해 영의정 심온을 역적으로 몰 때 세종은 그를 구하고자 그 집 노비 석삼에게 밀지를 보낸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다. 하지만 반대세력이 은밀한 구호 계획을 눈치 채 밀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석삼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석삼은 지적장애를 가진 노비로 주인공 똘복의 아버지다. 평생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며 무예를 갈고 닦아 겸사복이 된 똘복은 궁에 입성해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종을 보며 피를 토하듯 외친다. “높으신 분들의 그 잘난 대의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고. 이 장면은 국가라는 대의명분이 한 개인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여곡절 끝에 2020 도쿄 올림픽이 개막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개최가 불투명했으나 해를 넘겨서 겨우 성화대에 불이 붙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올림픽 취소니 보이콧이니 운운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는데, 코로나에 대한 우려보다는 ‘NO 재팬’ 운동과 겹친 반일감정이 주된 동기였다. 나는 올림픽이 반드시 개최되어야 한다고 내내 생각해왔으므로 무관중으로나마 17일간의 열전이 시작된 것이 꽤 반갑다. 스포츠 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개인주의자인 까닭이다.
올림픽 취소와 보이콧을 주장한 이들의 논리 안에는 오직 올림픽 무대만을 위해 평생을 땀 흘려 준비해온 선수들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혀 없었다. ‘대의’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된다는 전체주의가 반일의 정치적 감정 뒤에서 작동했다. 국가라는 낡은 망령이 개인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일이 왜 올림픽 때마다 발생하는 걸까? 직접 경기에 참여하는 한 사람의 선수보다 ‘국가대항’이니 ‘국가대표’니 ‘스포츠외교’ 같은 거대담론을 중요시하는 탓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정부가 ‘남북 평화’라는 대의를 내세워 강제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은 여전히 뒷맛이 씁쓸하다. 그때 단일팀을 반대한 청년들을 향해 “세계 평화와 긴장 완화보다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기적인 철부지들”이라거나 “올림픽 정신을 모른다”며 비난한 기성세대들에게 묻고 싶다. 남북 평화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선수들의 희생 뒤에서 당신들은 남북관계가 악화될 동안 대체 무얼 했느냐고 말이다.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에게 비난을 쏟아내던 무식하고 폭력적인 가부장적 근대는 저물었다. 예선에서 탈락한 선수에게도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개인’과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 세대의 감수성이다. 하지만 아직도 과제가 많다. 성숙한 개인주의사회는 국가대항의 성격을 띤 올림픽에서조차 ‘국가보다 위대한 개인’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2016 리우 올림픽에서 ‘할 수 있다’라는 혼잣말로 감동을 준 박상영이나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마지막 바벨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선 바벨에 키스를 한 장미란, 또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다 국가보다 위대한 개인이다.
아무리 국가의 지원과 육성을 통해, 국민의 세금을 통해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국가’라는 무게를 과도하게 짊어지우지 말아야 한다. 선수도 국민들도 ‘국가’와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권도 종목에서 탈락했다고 ‘종주국 망신’이라든가 2018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 불거진 우리 대표팀의 내홍을 두고 ‘나라 망신’이라고 적은 뉴스 헤드라인과 댓글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손흥민이 골을 넣으면 ‘손흥민 골 해외 반응’이 검색어 상위에 오른다. ‘세계 속의 한국’,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유럽 어딘가에서 삼성전자 광고판을 보고 가슴 벅찬 눈물을 흘리던 ‘국뽕’의 시대가 아니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스포츠로서 국가의 가난과 비참을 ‘정신승리’하려던 새마을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 육상 대표팀에는 케냐 출신의 귀화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 한국 이름 오주한 선수가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각국 선수들은 차별에 반대하는 ‘무릎꿇기’ 세리머니를 펼치는 중이다. 메달을 획득했든 그러지 못했든 올림픽에 출전한 것만으로 모든 선수들은 ‘올림피언’의 영예를 입어야 하고, 그들의 경쟁은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개인을 존중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