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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날로그...

등록일 2026-02-04 15:24 게재일 2026-02-0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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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으로만 살아갈 자신은 없지만 …/챗GPT

여러모로 나는 참 느린 아이였다. 걸음걸이, 수학 문제를 푸는 시간에 홀로 가득한 백지, 말하는 속도까지 참 느렸다. 학교에 지각할 것 같아도 절대 뛰지 않았다고 하니 부모님은 정말이지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모든 면에 있어서 느렸다. 유행하는 장난감이나 인기 있는 드라마와 영화 등에 딱히 열광하지 않았다. 계속 열광하지 않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 장난감의 열기가 제법 식었을 때 비교적 싸게 구매해서 놀곤 했다. 드라마도 나중에 재방송으로 보다가 뒤늦게야 푹 빠져드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신념이 있어서 그랬다기보단, 그냥 느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대부분의 신문물과 낯선 사이다. SNS는 특히 내게는 너무 빠르다. 눈으로 단어 하나를 파악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다. 조금 더 멈춰 있다고 싶은데, 계속 밀물이 밀려드는 것만 같다. 그렇게 세상 참 빠르다란 생각을 하면서 근처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이 집 가까이에 있는 게 좋다. 도시에 맛집들이 많아서 좋다. 맞다. 모순이다. 내가 느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다. 그럼 뭘까. 아날로그가 아니라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 걸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전자책(e-book)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싫어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크게 시도해보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 손 안에 들어오는 책의 크기, 무겁거나 가벼운 책 각각의 무게, 새 책이나 헌책에 밴 특유의 냄새, 표지부터 만져지는 질감, 펼쳤을 때 양손에 들어오는 페이지의 감각. 공교롭게도 그런 것들을 빼놓고 나는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지인이 쥐어준 리더기로 시집이나 소설집을 한 권은 읽어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리더기로 이북을 읽는 게 좋아지면 진짜 편할 것 같은데. 가방을 무겁게 만들지 않고도 어디에서나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몇 번쯤 더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커피잔 옆에 단정하게 책이 놓여 있는 게 좋다. 

 

손끝으로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게 좋다. 그러다 잘못 접어서 접은 부분이 살짝 비뚤어지는 것도 좋고, 다시 접다가 접은 흔적이 두어 개 정도 남는 것도 좋다. 종종 느끼지만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사랑하기보단 책이 지닌 물성과 그 안의 텍스트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노래를 검색만 하면 바로 들을 수 있는 시대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한 곡에 몰입하는 힘이 조금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1절만 듣고도 음 내 취향이 아니군, 하고 넘겨버리기 일쑤다.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 몇 단계의 검색만 거치면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뭘까. 배고플 때 먹은 에이스 과자 하나가 고급 베이커리의 다쿠아즈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까. 아직도 나는 어릴 때 침대 옆 탁상에 놓여 있던 커다란 검은 라디오 하나를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근 10년간 그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잤다. 물론 심야 라디오를 켜고 자는 일이 많았지만, 내가 유독 아끼고 많이 들은 건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였다. 

 

나는 중학생이 된 다음에도 아이돌, 연예인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라디오를 자주 틀고 잤지만 특별히 음악에 관심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다가 너무 심심해서 누나와 함께 휴게소에서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구매했을 뿐이었다. 하나는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가 타이틀로 수록된 앨범, 하나는 신화의 ‘너의 결혼식’이 타이틀로 수록된 앨범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 두 앨범을 내내 들었다. 가사에 담긴 뜻은 전혀 몰랐다. 누나한테 “왜 아틀란티스야?”, “영화 ‘졸업’에서 생기는 일이 뭐야?”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누나도 잘은 모른다고 했다. 지금처럼 많은 곡을 자유롭게 접할 수 없었기에 나는 심심하거나 잠들기 전에 두 카세트테이프를 번갈아 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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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우 시인

A면과 B면을 계속 돌려가며 수록곡들의 음과 가사까지 다 외울 정도로 들었다. 그때 나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화자가 되어 웃거나 울었다. 되감기를 하며 한 곡에 빠져 흥얼거리던 기억.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날로그적으로만 살아갈 자신은 없지만 아날로그 감성은 계속 곁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자주 아틀란티스 소녀와 너의 결혼식을 듣는다. 그 노래를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그 노래를 들었던 그 시절을 함께 사랑하는 것이다.
/구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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