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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카르마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온도 차이로 인해 베란다 창문에 물방울이 맺힌다. 물방울이 맺힌 걸 보고 결로를 걱정하여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 곰팡이가 파고들 틈을 없앤다. 그러다 찬 바람이 너무 세다고 느껴지면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물방울이 맺히면…. 이 모든 일들이 연쇄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습도가 높아져 물방울이 생기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창문을 여닫는 건 나의 선택이다. 창문을 너무 오래 열어두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그렇다고 열지 않고 닫아두면 곰팡이가 생길 것이다. 선택은 반드시 결과를 불러온다. 산스크리트어 KARMA에서 유래된 ‘카르마’는 ‘행위’, ‘업(業)’을 뜻하는 말이다. 선한 행동은 선한 결과를,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업보’로도 읽힌다. 우리는 누군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면 업보를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반대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땐 좋은 업보가 돌아왔다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카르마라는 문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행하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한다. 무슨 일을 행한다, 무엇과 작용한다. 이 말에는 어떤 도덕적 평가도 없다. 애초에 선악의 기준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카르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업보’의 뜻처럼, ‘무엇을 잘못해서 무슨 일을 당했는가’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묻는 질문인 셈이다. 여태 나는 선택 하나에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결과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했다.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날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카르마의 법칙은 내 생각과 달리 단기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었다. 카르마는 긴 시간 속에서 천천히 삶을 바꾼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악한 행동이 곧장 나쁜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축적되듯 쌓이고 쌓여 이윽고 거대한 삶을 만들어낸다. 최근 나는 별자리 운세를 보는 일에 꽤나 몰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오늘의 내 별자리 순위를 찾아보고, 그 옆에 달린 코멘트를 꼼꼼히 읽었다. 그날의 행운의 색과 물건이 무엇인지도 확인했다. 어제 1등이었던 내 별자리는 오늘 꼴찌가 되어 있기도 했다. 언젠가 내 별자리가 1등을 했던 날, 나는 나에게 이미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들떴다. 코멘트에는 ‘빛나는 성취가 있을 거예요’라고 적혀 있었다. 빛나는 성취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말이었다. 나는 행운의 색에 맞춰 옷을 입고, 물건을 챙겼다. 그리고 종일 빛나는 성취를 기다렸다. 자정을 넘긴 후에야 나는 기다리는 일을 포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나는 성취는커녕 기분 좋은 연락 하나 없던 날이었다. 다시는 별자리 운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무언갈 깨달았다. 카르마. 성취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달려왔던 사람에게 약간의 운까지 따라주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취였다. 오늘 하루 나는 성취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은 채로 성취가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날 나의 카르마는 작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극적인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카르마가 작용한다고 믿지만, 실은 반복되는 삶의 태도가 카르마 그 자체인 건 아닐까?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선택이 나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삶이 나를 이끌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지금의 삶을 만들어낸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 적절한 곳이 있다.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필라테스 기구 리포머 위에 누운 내 머릿속은 온통 카르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비뼈를 조였다 풀고, 척추를 펼쳤다 다시 모으고, 가슴을 끌어올렸다 내리라는 선생님의 지도 목소리를 들으며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 구부정한 자세로 휴대폰을 보던 나, 다리를 꼬고 몇 시간씩 앉아 있던 나, 목을 있는 힘껏 빼낸 채 컴퓨터를 하던 나. 그 모든 순간의 내가 지금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만들어냈음을 깨달으며, 온몸의 뼈와 근육을 재조립하는 ‘카르마’를 행한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바른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서. 그리하여 끝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기 위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험난한 동작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양수빈(소설가)

2026-02-11

적당한 만큼 ‘혼자 있기’

아침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에 일어난다. 아내의 출근을 배웅하고 세 살 아들 밥을 먹인다. 어린이집에 아들을 데려다주고 15분 정도 차를 달린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아홉 시 반. 그때부터 오후 세시 반까지,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는 일은 혼자일 때만 가능하다. 이 여섯 시간이 없다면 나는 시인도 될 수 없고 싱어송라이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게는 혼자 있는 이 여섯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결혼 전에 나는 혼자 사는 사람이었고 프리랜서 예술인이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TV를 보는 시간 뿐 만 아니라 일 하는 시간에도 대부분 혼자였으므로 ’혼자’는 내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고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무한한 자원이었다. 그러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고, 아기가 태어나며 나는 전혀 다른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득 ‘혼자’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지방처럼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어느 밤, 아기가 잠든 사이 아내와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빔 벤더스 감독)를 봤다. 도쿄에 홀로 사는 중년 남성 ‘히라야마’는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보낸다. 그의 직업은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혼자 사는 집에서 매일 같은 시간 눈을 뜨면 작업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차에 오르면 익숙한 손길로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올드팝을 들으며 일터로 향한다. 성실하게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같은 공원 같은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잠시 필름카메라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을 찍는다. 일을 마치면 한산한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서 가볍게 술 한 잔을 마신다. 깜깜해진 집에 돌아오면 이불을 펴고 작은 등 아래에서 오래된 소설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나날이 매일 반복된다. 그 단조롭고 고요한 일상이 우리 부부에게는 아주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영화를 보는데 히라야마의 일상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그의 조카가 기별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카는 며칠 동안 그의 집과 일터에 함께 머물며 그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다 떠난다. 혼자였지만 충만했던 그의 일상에 뜻밖의 빈자리와 어긋남이 생긴다. 다시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으며 마무리되는 이야기의 끝에는 주인공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울음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시 혼자가 되어 원래의 단조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기쁜 것이었을까 슬픈 것이었을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혼자’가 우리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라면 그것의 적당량이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결핍된 상태만큼이나 그것이 과잉된 상태도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의 적당량은 얼마 만큼일까. 아마 사람마다 다르고 그 사람이 어떤 시기를 관통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일상과 그 안에서 갖게 되는 마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물론 그 적당량을 찾더라도 딱 그만큼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출근해서 또 거기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집에 돌아가서는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그들에게 ‘혼자’는 언제나 그리운 단어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눈을 뜨고 혼자 밥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하거나 안부를 묻는 이가 좀처럼 없는 사람들, 적막 속에서 고독과 싸우며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혼자’가 지긋지긋하고 가슴 아픈 단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사정이 다르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적당량의 ‘혼자’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다. 세상에는 사람에 치여서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너무 오래 혼자 있도록 두지 않는 것은 모두 그의 삶을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스스로 자주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적당한 만큼 혼자인가를 질문하며, 때로는 자신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선물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눠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기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강백수(시인)

2026-02-11

나의 30대는

최근 유튜브에서 에픽하이의 영상을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30대에 접어든 아이돌 가수가 게스트로 출연한 콘텐츠였고, 에픽하이 멤버들이 질문을 던지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 형식이었다. 대화 도중 타블로는 게스트에게 “40대에서 30대를 돌아보니 30대가 정말 좋았다”는 말을 꺼냈다. 다소 의외라는 듯 모두가 의아해하자, 그는 곧이어 “그때는 정말 건강했고,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30대에 들어선지 2년이 흘렀다. 올해 32살인 나는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내 나이를 말하거나 약 봉투에 내 나이 만 31세라는 숫자가 찍혀있을 때마다 흠칫 놀란다. 아주 어린 날, 내게 알파벳을 가르쳐주었던 선생님이 34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숫자가 정말 대단하고 멋져 보였다. 어른이 되려면 34살쯤은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했고, 선생님의 오른손목에 걸린 금시계나 반짝이는 높은 구두를 보며 어른의 삶이란 저런 것이겠구나 하고 몰래 동경하곤 했다. 그런 내가 이제 34살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30대가 되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통장이 더 두둑할 줄 알았고, 직장에서도 자리를 잡아 멋진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고, 자차도 멋지게 끌면서 주말마다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도 멋지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에 가까워서 생각보다 서른이란 별 볼 것이 없는 것 같다가도 실은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의 능력치에 한참 못미치는 것은 아닌지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의 서른이 의미 없거나 초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태껏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곳에서 버티기 위해, 월세를 내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왔다.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자리 잡기 위해 접시를 닦고 음식을 나르고 청소를 하며 버텼던 시간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노력의 형태들은 아직도 내게 너무나 선명하고 소중하다. 30대에서 20대를 돌아보니 20대에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직장도, 직무 경력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식도, 내 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불안을 다루는 방법도 모두 다 서툴렀다. 그래서 하루 빨리 내가 더 성숙해져서 모든 것이 안정화되었음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었으니까. 그렇담 40대가 되어서 30대를 돌아보면 어떨까? 나도 가수 타블로의 말처럼 40대가 되어보니 30대가 정말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30대 초반인 나는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훗날 40대가 되어 30대를 돌아볼 때 “그때 참 좋았지, 정말 씩씩했었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주어진 30대라는 나이를 잘 살아내야만 한다. 확실히 20대에 비해서 나는 조금 더 성숙해졌다. 무엇보다 건강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달라졌다. 예전에는 의사표현이 분명하지 않아 타인에게 이끌려 다니기 일쑤였고, 악의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휘둘리거나 손해 보기 바빴다. 이제는 내 안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해져 사람을 대하는 일에 조금 더 익숙해졌고, 좋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표현할 줄 알게 된 것도 기쁘다. 지난 여름 함께 시를 쓰던 언니를 만났다. 언니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지만 나와 10살 넘게 차이나는 언니는 지금 내 나이가 한참 반짝인다며, 어떤 도전이든 응원한다고 말했다. 언니가 건넨 다정한 말이 언니와 헤어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언니 말대로 늦은 것은 없다. 너무 늦은 애정도, 너무 늦은 후회도, 도전도, 열정도 너무 늦은 것은 없다. 동시에 30대에 무조건 이루어야 하는 목표도 행복이라는 강박도 없다. 법륜스님은 인생에는 해야 하는 게 없고 안 해야 되는 것도 따로 없다고 말한다. ‘뭘 해야 한다’ 이전에 내가 현재 어떤 상태 있는지 알아차리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각 이후 선택만이 있을 뿐. 그러니 요즘은 조금 천천히 살아보려 한다. 불안해지면 억지로 앞서가려 하기보다 지금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면서. 완벽한 30대를 만들기보다 나에게 가장 솔직한 30대를 살아내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모으면 언젠가 돌아본 내 30대가 분명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조급함 대신 오늘의 속도를 믿어보려 한다. 크고 화려한 성취보다, 작지만 단단한 순간들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윤여진(시인)

2026-02-04

그래도 아날로그...

여러모로 나는 참 느린 아이였다. 걸음걸이, 수학 문제를 푸는 시간에 홀로 가득한 백지, 말하는 속도까지 참 느렸다. 학교에 지각할 것 같아도 절대 뛰지 않았다고 하니 부모님은 정말이지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모든 면에 있어서 느렸다. 유행하는 장난감이나 인기 있는 드라마와 영화 등에 딱히 열광하지 않았다. 계속 열광하지 않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 장난감의 열기가 제법 식었을 때 비교적 싸게 구매해서 놀곤 했다. 드라마도 나중에 재방송으로 보다가 뒤늦게야 푹 빠져드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신념이 있어서 그랬다기보단, 그냥 느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대부분의 신문물과 낯선 사이다. SNS는 특히 내게는 너무 빠르다. 눈으로 단어 하나를 파악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다. 조금 더 멈춰 있다고 싶은데, 계속 밀물이 밀려드는 것만 같다. 그렇게 세상 참 빠르다란 생각을 하면서 근처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이 집 가까이에 있는 게 좋다. 도시에 맛집들이 많아서 좋다. 맞다. 모순이다. 내가 느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다. 그럼 뭘까. 아날로그가 아니라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 걸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전자책(e-book)으로 읽어본 적이 없다. 싫어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크게 시도해보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 손 안에 들어오는 책의 크기, 무겁거나 가벼운 책 각각의 무게, 새 책이나 헌책에 밴 특유의 냄새, 표지부터 만져지는 질감, 펼쳤을 때 양손에 들어오는 페이지의 감각. 공교롭게도 그런 것들을 빼놓고 나는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지인이 쥐어준 리더기로 시집이나 소설집을 한 권은 읽어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리더기로 이북을 읽는 게 좋아지면 진짜 편할 것 같은데. 가방을 무겁게 만들지 않고도 어디에서나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몇 번쯤 더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커피잔 옆에 단정하게 책이 놓여 있는 게 좋다. 손끝으로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게 좋다. 그러다 잘못 접어서 접은 부분이 살짝 비뚤어지는 것도 좋고, 다시 접다가 접은 흔적이 두어 개 정도 남는 것도 좋다. 종종 느끼지만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사랑하기보단 책이 지닌 물성과 그 안의 텍스트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노래를 검색만 하면 바로 들을 수 있는 시대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한 곡에 몰입하는 힘이 조금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1절만 듣고도 음 내 취향이 아니군, 하고 넘겨버리기 일쑤다.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 몇 단계의 검색만 거치면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뭘까. 배고플 때 먹은 에이스 과자 하나가 고급 베이커리의 다쿠아즈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까. 아직도 나는 어릴 때 침대 옆 탁상에 놓여 있던 커다란 검은 라디오 하나를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근 10년간 그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잤다. 물론 심야 라디오를 켜고 자는 일이 많았지만, 내가 유독 아끼고 많이 들은 건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였다. 나는 중학생이 된 다음에도 아이돌, 연예인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라디오를 자주 틀고 잤지만 특별히 음악에 관심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다가 너무 심심해서 누나와 함께 휴게소에서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구매했을 뿐이었다. 하나는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가 타이틀로 수록된 앨범, 하나는 신화의 ‘너의 결혼식’이 타이틀로 수록된 앨범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 두 앨범을 내내 들었다. 가사에 담긴 뜻은 전혀 몰랐다. 누나한테 “왜 아틀란티스야?”, “영화 ‘졸업’에서 생기는 일이 뭐야?”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누나도 잘은 모른다고 했다. 지금처럼 많은 곡을 자유롭게 접할 수 없었기에 나는 심심하거나 잠들기 전에 두 카세트테이프를 번갈아 틀곤 했다. A면과 B면을 계속 돌려가며 수록곡들의 음과 가사까지 다 외울 정도로 들었다. 그때 나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화자가 되어 웃거나 울었다. 되감기를 하며 한 곡에 빠져 흥얼거리던 기억.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날로그적으로만 살아갈 자신은 없지만 아날로그 감성은 계속 곁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자주 아틀란티스 소녀와 너의 결혼식을 듣는다. 그 노래를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그 노래를 들었던 그 시절을 함께 사랑하는 것이다. /구현우(시인)

2026-02-04

진짜 두려운 것

어느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건조기였다. 전날 저녁, 건조기를 돌려놓고는 잠들어버린 것이다. 며칠 치의 수건이 겹겹이 몸을 포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건을 꺼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건조기가 있는 베란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밤새 꼭꼭 닫아두었던 베란다 창문을 열고 건조기를 열었다. 건조기 깊숙이 상체를 밀어 넣고 건조된 수건 뭉치를 품에 안던 때였다. 오른발에 무언가 밟혔다. 바삭. 말 그대로 바삭한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에서 감자칩을 먹은 적이 있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불 꺼진 베란다는 어두웠고, 나는 손에 든 수건을 우선 거실 소파 위로 옮겨두었다. 그러곤 베란다 불을 켰다. 그곳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공포’라는 단어에는 ‘두려울 공(恐)’과 ‘두려워할 포(怖)’라는 한자가 쓰였다. 말 그대로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공포라는 뜻인데, 두려운 것이 두 배가 될 때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두려운 것과 두려운 것. 평소에 나는 겁이 별로 없는 편이다. 공포나 고어 영화도 잘 보고 무서운 놀이기구도 즐겨 탄다. 높은 곳도 겁내지 않는다. 이런 내가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인데, 바로 어둠과 벌레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목격했다. 하나, 내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바퀴벌레. 둘, 그 바퀴벌레를 어둠 속에서 내가 밟았다는 사실. 나는 곧장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바퀴벌레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반쯤 울먹이며 화장실에서 발을 깨끗이 닦고, 살충제로 바퀴벌레를 익사시켰다. 겨우겨우 사체까지 치우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한 채 소파에 누워 세스코 무료 상담을 검색했다. 가장 이른 날짜로 방문 신청을 하곤 며칠간 베란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는 이 일을 무용담처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인데,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도 친구 한 명에게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뜨끈한 샤부샤부를 먹기로 했다. 식사하는 동안엔 만나지 못하는 동안 있었던 근황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계획 중이었다. 친구의 애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은 어디에 구하기로 했어? 음료를 마시며 가볍게 던진 질문에 친구가 잠시 머뭇거렸다.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괜히 민감한 주제를 던졌나 고민하던 찰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같이 집을 보러 다녔는데, 오빠가 나는 바퀴벌레 나오는 집만 아니면 돼, 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 친구가 유리잔에 꽂힌 빨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오빠는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았거든.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종종 나오곤 했는데 오빠한테 말하면 아마 기겁할걸. 자기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대.” 친구가 빨대를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이럴 때 조금 무서운 것 같아. 우리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게.”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 또한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비롯한 벌레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여름엔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서 날파리가 들끓고 몰래 침투한 모기가 가족들을 괴롭혔지만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므로 제외하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내가 사는 집에선 당연히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바퀴벌레가 징그러운 해충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평생 겪은 적 없는 미지를 앞으로 수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막막함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든 건 아닐까. 내가 진짜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 순간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살면 또 살아지더라.” 나는 친구를 위로하듯 말했다. 친구가 빙긋 웃었다. “그렇겠지? 그리고 바퀴벌레쯤이야 내가 잡으면 되니까.” 나는 친구에게 세스코 정기 구독료에 대해 알려주고, 친구는 바퀴벌레를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약을 소개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어두웠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걸었다. 살면 또 살아지더라. 친구에게 건넨 말이 부드럽게 몸을 돌려 내게 다가오는 걸 느끼며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양수빈(소설가)

2026-01-28

글쓰기를 권함

나의 여덟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천천히 내 신간이 나왔다고 소문을 내야 한다. 주변에 책 나왔다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준다. 처음에는 머쓱했는데 이제는 그냥 싱긋 웃는다. 누군가 자기 일을 하고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어 놓는 모든 일들은 사실 모두 칭찬받을 만 한 일이다. 휴대폰이나 자동차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사람들, 흙 밖에 없는 땅에서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사람들, 맛있는 스파게티나 떡볶이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 칭찬받아 마땅하다. 신간 소식을 전하는 내게 질문을 건네는 사람들도 있다. 먼저 자기도 언젠가 책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책을 낼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일단 글을 쓰라고 말한다. 책을 채우는 기본적인 내용물은 결국 글이다.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 중 실제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책은 낼 수 없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에 글을 잘 쓰는 방법과 운동을 잘 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은 결국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잘 한다. 약간의 재능을 타고 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운동이란 것은 그것을 많이 해 보지 않으면 도저히 잘할 수 없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잘 쓰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 글쓰기도 운동도 직접 행동으로 옮겨야 그것을 잘 하기 위한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권한다. 꼭 어디 발표하거나, 책을 내거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러닝 열풍에 힘입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황영조나 이봉주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 중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조금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이다. 나는 생활 속의 글쓰기 역시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생각을 모아야 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쉽게 잘 정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이 구체화되고 또렷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으나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생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사람의 행동은 결국 생각의 산물이다. 생각이 정돈되면 확신이 생기고 행동에도 체계가 생긴다. 생각이 다양해지면 행동의 반경도 넓어진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또한 글쓰기는 휘발되고 마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저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은 점점 더 소중해진다. 그런데 그것들이 허망하게 잊혀지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과 그 안에서 품은 감정들을 짧게나마 글로 남기고 머리와 가슴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보다 촘촘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장황하고 거창하게 써 내려간 대단한 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몇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수필도 좋고, 솔직한 마음을 담아 몇 줄의 시를 써 보는 것도 좋다. 그것도 조금 막막하다면 몇 단어의 메모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해보면 아주 글을 쓰지 않고 쓰는 삶이라는 게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지지 않았는가. 인터넷 기사에 쓰는 댓글도 글이고 SNS에 휙 던져놓는 몇 마디도 글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건네는 메시지도 글이고 업무를 위해 주고받는 이메일도 모두 글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왕 쓰는 것 잘 쓰고 싶은 분들을 위해 비결을 조금 공개하도록 하겠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글이건 일단 써 보고 요즘 널리 사용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교정·교열을 요청한다. 그러면 맞춤법 오류와 비문 같은 것들을 수정한 새로운 문장을 내어 놓을 것이다. 기존에 쓴 문장과 수정된 문장을 비교하는 일을 반복한다면 문장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글은 좋은 글감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좋은 글감을 찾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지면이 부족하다. 강백수의 신간 《뭘 쓸까》에 상세히 적어두었으니 참고하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백수(시인)

2026-01-28

물건을 버리는 일

옷장 앞에서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15년 넘게 입어 낡고 헤진 검정 패딩을 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 손을 잡고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버린 시내에 나가 고민 없이 산 옷이었다. 입자마자 몸에 꼭 맞는 듯했고 두터운 두께 탓에 몸이 두 세배는 더 커 보이던, 투박하지만 무늬 하나 없이 깔끔한 검정 패딩이었다. 나는 그것을 고등학교 교복 위에 입었고 대학교에 가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이후 직장에서까지 꾸준히도 입었다. 나는 물건도, 옷도 잘 사지 않는 편이다. 새로운 옷을 사는 데에 피로감을 느낄뿐더러 어떤 스타일이 내게 잘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타일 이랄 게 없는 깔끔하고 기본적인 옷을 주로 입는다. 무난한 기본 티셔츠나 바지를 발견한다면 색상별로 두 장씩 구비해 두곤 한다. 그리곤 옷을 더 이상 입지 못할 때까지 수선하다 결국 더는 입지 못할 때에 버린다.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혀를 내두르고 엄마는 내 옷장을 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다양하게 구비해놓기란 늘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그래서 옷의 개수도 자연스레 적다. 사계절을 모두 합쳐도 일반적인 옷장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다. 하지만 비슷비슷하게 정리된 옷들은 편안하고, 매일 아침 옷을 고를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에 좋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가볍게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하루를 한결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달까. 처음부터 옷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기심 많던 직장인 초년생이던 시절, 형편에 맞춰 여러 저렴한 옷을 사 입었다.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거나 유행이 지나버리거나, 혹은 원단이 너무 저렴해 금세 보풀이 일고 망가지는 경험을 반복했다. 결국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옷을 버릴 때마다, 낭비에 대한 허무함과 소비 습관에 대한 실망감이 들었고, 더는 이러지 말자고 마음먹게 됐다. 또 신중한 성격 탓에 옷뿐만 아니라 물건을 살 때 정말 많은 고민 끝에 고르게 된다. 무언가 필요하면 가격과 상세 페이지, 제품 후기 등을 여러 번 읽고 난 후, 장바구니에 며칠씩 담아두었다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껴질 때쯤 구매한다. 그렇게 고른 물건일수록 후회가 적고 잘 골랐다는 뿌듯함과 기쁨에 더 오래 물건을 사용할 수 있다. 또 다시 맞이하는 겨울의 계절. 날이 추워지면 나는 익숙한 검정 패딩을 꺼내 입고선 잔뜩 움츠린다. 비록 보온성은 많이 떨어졌지만 15번의 겨울이라는 그 많은 시간을 함께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옷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다. 지퍼 부분은 이미 고장 나서 잘 잠기지 않고 벗어두면 안쓰러울 정도로 축 저진 모양새지만 유난스럽지 않고 과시 하지도 않는, 내가 추구하는 삶과 꼭 닮았기에 애정이 간다.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유행에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본에 충실한 내 옷. 내 몸에 꼭 맞는 오래된 물건들은 속도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굳건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오래된 물건은 조금 안쓰러운 구석이 있다. 15년 넘은 검은 패딩은 걸을 때마다 안감 속 솜털이 빠져 나오고, 10대 때부터 머리맡에 두고 있는 토끼 봉제 인형은 이곳저곳 꿰맨 자국과 거뭇한 얼룩들로 가득하다. 이제는 쓰임의 실용성은 잃고 숨만 겨우 붙은 채 명분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물건들을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 오래된 물건에 애정이 쌓일수록 버리는 일에는 더 서툴러지는 것이다. 여전히 무언가를 정리해야 할 때면 오랜 시간 망설이고, 결국 물건이 초라해질 때까지 붙잡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쓰임의 본질을 잃은 물건들은 생명을 잃은 식물과 닮았다. 오래된 물건들은 대개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보기에 측은해지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오랜 시간 곁에 머물러 있어 당연히 여겨지지만 실은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오래된 물건을 버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잠시 멈춰 진지한 이별 의식을 치른다. 그러고 나면 그 물건의 존재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해진다. 이미 내 손을 떠나보냈지만 기억으로 남아 내 곁을 머무는 물건들이. 물건을 버리는 일은 아직도 녹록치 않지만 어쩌면 오랜 물건과 잘 이별하는 것이 삶에서 필요한 한 과정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요즘의 겨울은 그런 이별들로 채워지고 있다. /윤여진(시인)

2026-01-21

코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요즘 조향이 유행이래요. 알고 계셨어요?” 한 출판사 편집자 선생님이 통화 중에 내게 물었다. “아뇨. 처음 들어요.” 정말 몰랐다. 변변한 취미 생활 없이 쉬는 날엔 그저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는 내겐 생소한 얘기였다. 조향, 그러니까 천연의 향과 인공적인 향 어떤 것이든 섞어서 새로운 향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나만의 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네의 아담한 카페에서 풍겨오는 커피 향을 맡으며 나는 향과 관련한 온갖 기억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이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글씨만 읽었는데 후각이 먼저 작동한 건 ‘향수’가 처음이었다. 결말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인공의 이름인 그루누이를 입에 담으면 코에 무엇이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향은 이름에도 묻어 있는 걸까. 나에게 짙게 남은 향은 초등학교 옆 시장의 골목 초입에 있던 꽃집에서 늘 나오는 그 향이었다. 장미, 백일홍, 프리지아, 안개꽃 등이 공기 중에 마구 섞여 코끝을 찌르곤 했다. 강렬함이라고 한다면 꽃집 바로 근처의 분식집에서 우리를 유혹하던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튀김 냄새를 말해야겠으나, 이상하게 아주 멀리서도 맡아지는 건 꽃집의 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꽃집이 아닌 시장의 향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또 얼마 후에는 동네의 향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유달리 공사장이 많고 아이들이 갈 곳이라고는 문방구 외에는 딱히 없던 그 동네가, 꽃집의 향으로 내 안에 남게 된 것이다. 기묘하게도 비슷한 꽃들이 있는 꽃집이라도 그 꽃집과 향이 같지 않다. 그 향을 단지 장미 향이라거나 안개꽃 향이라고 부를 순 없다. 장미 21.6%, 튤립 16.3%, 안개꽃 15.2%, 거베라 11.5%, 수국 8.9%…. 내 안에는 이런 식으로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꽃집의 향을 다시 오롯이 맡는 것은 불가능할 일일 텐데, 지금도 가끔, 어느 꽃집을 지나다 맡게 되는 향기가 기억 속의 그 꽃집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향과 관련한 직접적인 에피소드는 따로 있다. 친구의 생일이나 지인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자주 향을 선물하곤 했다. 향수, 향초, 디퓨저, 인센스, 핸드 크림과 같은 것들. 좋은 향으로 그때를 기억하라거나 더 좋은 일상이 되길 바란다는 등의 멋진 이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이유까지는 없었다. 우선 가격이 괜찮았다. 오 만원 내외로도 충분히 있어 보이는 게 가능했다. 포장지까지 더하면 제법 예뻤다. 또 부피가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너무 큰 선물은 방에 두는 일만으로도 짐이 될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꽤 오래 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고기는 한 번 먹으면 사라지지만 향수나 디퓨저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으니까. 특별하지는 않아도 센스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일에 수많은 향수를 선물 받기 전까진. 그러니까 향을 선물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단 것이다. 모두가 향수와 디퓨저를 나쁘지 않은 선물로 여겼기 때문에, 서로서로 기념일에 향만 주고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심지어 나는 단순히 BEST가 붙은 향이나 ‘이런 숲속의 나무 향을 싫어할 리는 없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향을 고르곤 했다. 그것도 나중에 알았다. 향이야말로 취향이 아주 크게 나뉘는 장르라는 것을. 우드 계열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개인의 취향은 또 디테일하게 다르다는 것을. 당신 혹은 당신들에게 제대로 향을 선물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나는 코가 지닌 감각을 아주 단순하게만 사용해왔다. 상쾌하다, 맑다, 맵다, 시리다, 구리다, 아리다, 이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물의 색이 단순한 파랑이 아니듯 집 앞 나무의 향 또한 하나가 아니다. 해가 떠 있는가 달이 떠 있는가에 따라, 겨울인지 봄인지에 따라, 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봐도 좋겠다. 단순히 모든 바닷가에서 전해지는 바다 냄새와 짭짤한 공기를 좋아했다기보단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 앉아서 바라보는 일몰과 은은히 날아드는 밥 짓는 냄새, 새들이 날갯짓하며 떨어뜨리는 구름의 일부, 식어가는 캔맥주의 향이 한데 섞인 바다 냄새를 특별히 좋아했다. 마음을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코끝으로는 조금 맡을 수 있는 것 같다. 가끔 어떤 향은 좋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향 하나가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울컥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때로는 슬픔 때문에 코끝이 찡한 게 아니라 코끝이 찡해서 슬픔이 오는 걸지도 모른다. /구현우(시인)

2026-01-21

더 좋은 미래

본가 아파트 단지 내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는데 때가 되면 여의도나 석촌호수 부럽지 않을 만큼 꽃잎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벚꽃 보러 멀리 안 가도 되겠다. 그냥 집 앞에 돗자리 깔고 벚꽃 구경하면 되지, 뭐. 우리 가족은 그런 말을 하며―실제로도 벚꽃 개화 시즌에 맞춰 피크닉을 한 적은 없다―바람에 흩날리는 분홍 꽃잎들을 지켜보곤 했다. 벚꽃이 마음에 든 건 우리 가족뿐만이 아닌 듯했다. 벚꽃 개화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면, 단지 곳곳에서 벚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부모들은 아이를 나무 아래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댔다. 아이들이 그만 찍겠다며 투정을 부릴 때까지 계속. 그래서인지 그 집에 사는 동안 내게 봄은 아이들을 보는 계절로 인식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 이런 내가 아이들을 주시하게 되는 때가 있으니, 바로 꽃잎이 사방에 뿌려진 봄에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갈 때이다. 다른 강아지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 강아지는 이따금 길가의 꽃잎을 주워 먹는다. 집안의 화분들엔 관심도 없으면서 밖에만 나가면 코를 들이밀고 입을 벌려 꼭꼭 씹다가 퉤 뱉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봄에는 마음이 들뜨는 걸까? 그래서 안 하던 짓도 하고 싶어지는 걸까. 여름, 가을, 겨울에도 꽃은 있지만 봄꽃이 아니면 뜯지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으니 희한한 일이다. 강아지가 봄바람에 코를 씰룩이는 것처럼, 아이들도 봄에는 유독 활기가 넘친다. 아이들 대부분은 강아지를 보는 순간 스위치 켜진 장난감처럼 눈을 번뜩이며 다가온다. 강아지다! 외치는 것에서 그친다면 다행이지만 강아지를 만지려고 겁 없이 작은 손을 뻗을 때면 식은땀이 절로 난다. 그럴 때 보호자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강아지 귀엽지? 만지고 와도 돼, 하고 멋대로 지시하는 보호자와 강아지 귀엽지? 그래도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지면 안 돼, 하고 제지하는 보호자. 반려인으로서는 당연히 후자의 경우를 선호하고 또 지지한다. 그런데 몇 해 전, 전혀 예상 못 한 세 번째 유형의 보호자를 만났다. 정확히 그를 만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의 엄마였다. 이른 점심을 먹고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온 엄마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가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서너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와 아이 엄마가 옆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강아지를 본 아이는 대번에 흥분해선 자기 엄마의 팔을 잡아당기며 강아지, 강아지,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휴대폰을 보고 있던 아이 엄마가 몹시도 엄격한 얼굴로 크리스, 엄마가 영어로 말해야 한댔지? 강아지가 아니라 퍼피라고 해야지, 말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다른 곳을 보는 척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이도 엄마도 한국인임이 분명해 보였다. 스피크 잉글리시. 올웨이즈 스피크 잉글리시. 아이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가 따라 할 때까지 퍼피, 퍼피, 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이가 말이 없자, 급기야 아이의 손을 낚아채더니 손바닥에 퍼피 스펠링을 하나하나 그리기까지 했다. Puppy, puppy. 결국 아이가 더듬더듬 퍼피, 하고 말하자 아이 엄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멀어지는 두 사람 사이로 리멤버, 크리스. 스피크 잉글리시, 하고 단호히 되뇌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도 엄마는 종종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애한테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친다더니 진짜인가 보다, 하며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웃음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딱딱하게 굳어가던 그 얼굴이. 강아지든 퍼피든 뭐가 중요할까. 애가 그렇게 웃는데, 그렇게 환하게 웃었는데.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엄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후로 몇 번의 봄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잊었다가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은 이런 때이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나를 무시하고 포기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날의 아이 엄마도 아이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 그토록 단호했던 거겠지. 그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을 테니까. 옆에서 아이가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집요하게 미래를 보고 있던 거겠지. 그렇지만 강아지든 퍼피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지금 얼마나 환하게 웃는가, 얼마나 기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일 테니까.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좋은 미래가 아닌 더 중요한 지금을 보고 싶다. /양수빈(소설가)

2026-01-14

영포티 말고 ‘굿포티’

2026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단지 달력을 바꾸어 다는 것 말고 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내가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만 나이 보다는 우리식 세는 나이가 익숙하다. 그런 식으로 따져 보면 경북매일의 ‘2030, 우리가 만난 세상’의 독자님들께는 죄송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되었다. 2020년, 칼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서른 네 살이었기에 마흔 살이 되는 날이 온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볼 일도 없었고 그때까지 이 연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기에 이런 제목의 연재를 맡게 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금세 마흔 살이 되었다. 서른아홉이 마흔이 되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인생을 나보다 오래 살아온 선배들은 마흔도 충분히 젊고 심지어 어린 나이라 이야기 해주시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청춘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에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청년이라는 단어 역시 여러 법령과 지방자치단체 정책에서 다양하게 규정되지만 마흔은 거기 속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부분에 있어 약간의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사실 그런 것들보다 마흔 살에 접어든다는 사실이 반갑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요즘 우리나라에 팽배해 있는 사십대 남성에 대한 조롱 문화다. 영포티(Young Forty)는 사십대 남성에 대한 조롱을 마주할 때 가장 흔하게 접하게 되는 단어다. 원래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자기 관리나 패션, 취향 면에서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십대를 일컫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젊어 보이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하고 20대 감각을 무리하게 흉내 내는 사십대 남성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울리지 않는 스트리트 패션으로 무장한 채 이십대-삼십대 초반 여성에게 추근대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곤 한다. 밈으로 많이 돌고 있는 영포티 패션에 대한 조롱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나이키, 스투시 같은 브랜드는 지금의 사십대가 이십대 때부터 선호하던 것들이다. 이제와 젊은 척 하려고 입는 게 아니라 원래 입던 것을 입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젊을 때 돈이 없어서 못 입던 것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에야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입는 것이다. 그다지 조롱받을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하는 영포티의 행동방식에 대해서는 딱히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아직도 자기가 어린 줄 알고 이삼십대 노는 데 끼어들어서 젊은 척 하고 돈 자랑 하고 어린 이성의 환심을 사려 하는 사십대는 나도 종종 목격하고 있다. 그런 것에 대한 조롱은 마냥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친구들과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굳이 영포티 대열에 합류하지 말자는 것이다. 영-하지는 않아도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굿포티’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굳이 어떤 것을 사십대 다운 것이라고 정의하고 꼭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이삼십대를 거치며 새롭게 알게 된 것,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나는 마흔 살을 맞아 굿포티가 되기 위해 몇 가지 새해 다짐을 해 보았다. 먼저 하루하루 좋은 루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의 생활을 무절제하게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노하우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 다음으로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대하기. 이제는 종종 사회에서 나보다 어린 사람과 어떤 관계를 쌓아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하곤 한다. 비록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간혹 우리에게 무례하곤 했을지라도 나는 지금부터라도 나보다 늦게 출발한 친구들에게 예의를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말을 절제하는 것도 필요해졌다. 지저분하거나 거친 말들로부터 이제는 멀어질 것이며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는 일도 자제할 생각이다. 그 외에도 고민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 많지만 말을 절제해야 하므로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조롱받는 영포티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태까지 살아온 내 삶이 조롱받을 만큼 하찮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살아온 삶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삶도 잘 살아가야 한다. 영포티 말고, 굿포티로 살아갈 내 또래들을 응원한다. /강백수(시인)

2026-01-14

흑백요리사, 일상을 플레이팅하는 방식

현재 가장 핫한 예능을 꼽으라면 넷플릭스에서 독점 스트리밍 중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가 아닐까. 시즌 1에 더없이 몰입했던 나이기에 시즌 2 또한 공개 당일부터 기대감을 갖고 보았다.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요리 계급 전쟁’이므로 백수저와 흑수저의 대립 구도가 큰 테마라고 할 수 있다. 20명의 백수저와 80명의 흑수저가 참가하는데, 1라운드에는 이 20명의 백수저와 2라운드에서 붙을 20명의 흑수저를 선정한다. 80명의 셰프들이 동시에 요리를 시작하며 펼쳐지는 광경은 ‘흑백요리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화려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백수저들은 본래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반면 흑수저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닉네임을 써야 한다. 오직 결승에 진출하는 순간에만 흑수저인 자신의 이름을 공개할 수 있다. 나폴리 맛피아, 장사천재 조사장, 요리하는 돌아이, 중식 여신, 급식 대가, 고기 깡패 등 닉네임만으로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셰프들이 첫 시즌부터 넘쳐났다. 닉네임이 찰떡같고 재밌기도 해서인지 모든 셰프들의 이름이 알려진 지금에도 권성준 셰프는 “나폴리 맛피자”(심사위원 안성재 셰프가 ‘맛피아’를 잘못 부른 것)라고 심심찮게 불리고 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권성준이라는 석 자만으로는 연결하기 어려웠을 “나폴리”라는 지명이 쉽게 연결되는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명명(命名)의 힘이다. 시즌 2에도 눈길을 끄는 흑수저의 닉네임이 많다. 뉴욕에 간 돼지곰탕, 바비큐연구소장, 아기 맹수, 중식 마녀, 요리괴물, 술 빚는 윤주모 등 닉네임만으로도 캐릭터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그중 칼마카세라는 일식 셰프가 있다. 요리하는데 쓰는 “칼”과 코스의 재료, 종류, 요리 방식을 모두 셰프에게 일임하는 일을 뜻하는 “오마카세”를 합친 닉네임처럼, 그는 칼을 유려하게 잘 다룬다. 주어진 100분이라는 시간 안에 주특기를 활용해 ‘칼맛 나는 오마카세 코스 4품’을 만들었다. 무를 얇게 썰어 오이를 만 오이매실마키, 마를 아주 얇게 썰어 겉보기엔 소면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마소면, 금태구이, 금태 찹쌀밥 이렇게 네 가지 요리를 멋지게 완성했다.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에게 칼마카세는 맛보는 순서를 설명했다. 금태구이를 먼저 먹고, 금태 찹쌀밥, 오이매실마키, 마소면 순서로 맛보기를 권했다. 처음에 간이 세고 식사가 되는 금태로 먼저 주고, 입가심을 한 뒤에 마지막에 마소면으로 끝내는 것이 그의 구성이자 구상이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가진 바를 최대한 강하게 보여줘야 하는 경합인 만큼, 임팩트를 먼저 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식사 순서가 강한 것부터 이뤄지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의 음식들이 묻히는 효과를 주고 만 것 같았다. 안성재 심사위원은 순서에 대한 의문을 표하며 보류를 주었다. 뒤이어 찾아온 백종원 심사위원 또한 왜 처음부터 기름진 것으로 시작하는지 물어보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결과에 대해서는 여기 쓰지 않겠으나, 그의 첫 심사 결과가 보류인 것은 결코 맛 때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보며 나는 밴드 공연 전에 친구들과 고민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여섯 곡인데, 순서를 어떻게 하지? 첫 곡은 무조건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멤버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나, 디테일한 순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첫 곡부터 세 번째 곡까지 빠르고 빵빵 터지는 곡이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누군가 아니다, 그럼 여섯 번째 곡이 나올 때쯤엔 너무 축축 처지게 된다, 강한 곡들 사이에 미디엄 템포나 발라드를 넣어서 완급 조절을 해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눴지만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럼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지. 다 해보자! 우리는 여섯 곡으로 배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의 수 안에서 합주하고, 또 합주했다. 그러다 공연 직전에야 중간중간에 완급 조절하는 곡들을 배치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공연은 무사히 잘 끝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순서가 정답이었는지 모른다. 더 나은 순서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묘한 씁쓸함만 입속을 맴돌 뿐이다. 순서에 옳음과 그름이 있진 않겠으나 순서와 배치에 따라 이미 있는 것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결과와 무관하게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모든 요리사를 응원하고 있다. 새롭게 명명되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멋지다. 에피소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화면 너머의 요리를 맛본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 또한 나의 하루를 책임지는 요리사로서 허투루 ‘플레이팅’하지 않겠다 마음먹게 된다.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정이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다만 나의 최선이 중요한 것이므로. /구현우(시인)

2026-01-07

리듬을 찾아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일시 정지 해두었던 노래를 다시금 튼다. 곧이어 새해를 알리는 장기하와 얼굴들 밴드의 ‘새해 복’ 노래가 방 안에 울려 펴진다. 밝고 경쾌하고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A4용지를 반으로 나누어 선을 긋는다. 왼쪽 칸엔 2025년도에 이룬 일들, 오른쪽 칸엔 2026년도에 이룰 일을 하나씩 적는다. 작년보다 더 목표는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써내려간다. 종이 위 활자를 손으로 쓸어 보며 인간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이러한 물음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소울’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는 답을 던져 준다. ‘소울’ 속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꿈을 이루려는 순간 사고로 죽게 되어 영혼의 세계로 가게 된다. 영혼의 세계에선 태어나기 전 세상이라는 구역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아직 태어나기 전의 존재인 ‘22’번을 만나게 된다. 태어나기 전 세상 구역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영혼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자신의 멘토에게 성격과 기질, 흥미를 배우고 마지막으로 스파크를 채우게 되면 비로소 지구로 향해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멘토는 조 가드너가 맡게 되고 22번의 스파크를 발견해야 하는 일종의 강제 임무를 맡게 된다. 22번은 수 천 년 동안 영혼의 세계를 방황하며 지구에 가는 것을 거부한다. 지구로 향하기 위해선 ‘스파크’를 발견해 내야만 했는데, 어떠한 재능이나 목적이 있어야 스파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2번은 자신에게 재능과 특별한 목적이 없음을 깨닫고 아주 오랜기간 태어나길 거부하며 결국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자기 불신에 갇히고 만다. 동시에 그의 멘토인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겠단 목표 하나로 22번에게 상처주고 소외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구로 향하게 되고 결국 원하던 무대에 서게 된다. 결국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린 순간, 그는 일순간 허탈감에 빠진다. 그가 사랑하는 재즈는 인생의 정답이자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이라 믿었건만, 생각 외로 그가 이룬 꿈은 자신의 생각만큼 대단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가슴이 뛰질 않았기 때문이다. 삶은 때때로 인간의 발버둥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듯,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루게 한 뒤 예상치 못한 텅 빈 공허함을 건넬 때가 있다. 그간의 노력을 보상 받는 듯한 기쁨과 보람은 아주 찰나일 뿐, 해냈다는 안도와 동시에 그 다음을 생각하게 한다. 벌거벗긴 채로 내쫓긴 아이처럼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누르며 ‘그래서 이젠 어쩌지?’ 묻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길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표, 그것을 이루려는 꿈은 결코 단 하나로 귀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 가드너 역시 성공하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겠단 목적 하나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해온 것은 무대 위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연습하는 시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순간, 뉴욕의 소음과 햇빛 그리고 가을 낙엽 같은 사소한 삶의 풍경들이었음을. 그렇게 자신이 애정 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게 될 때에 비로소 삶은 하나의 목적을 넘어, 살아갈 이유와 가치를 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2번은 스파크를 발견해서 지구로 향하게 될까? 그것은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적진 않지만, ‘소울’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삶의 가치는 목적 달성에만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삶은 반드시 잘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 명확한 꿈이 있어야만 살아갈 자격이 생기는 무대가 아닌, 그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감각과 순간들’을 누리며 하루하루 소중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삶임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이유 없이 눈길이 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 좋은 상태에 놓이는 것이 하나쯤은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무던해진다면 좋음을 알아차리는 감각은 점점 무던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심심하고 건조한 삶일는지. 그렇다면 새해엔 닫힌 문을 두드리듯 조심스레 때로는 대담하게 내가 애정 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완벽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그저 나로서 살아가려는 감각을 찾을수록 나의 삶은 더욱 다채로운 리듬을 갖게 될 것이다. /윤여진(시인)

2026-01-07

감각 차단술의 함정

이상하게도 나는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하고 반갑지도 않은 만남을 자주 겪는 편이었다. 대뜸 팔을 붙잡히거나,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람을 마주치거나 사이비 종교인들이 순수한 의도인 척 설문조사를 부탁해 오거나 하는 유쾌하지 않은 만남의 연속. “그냥 무시하면 돼. 대꾸도 하지 말고 눈길도 주지 말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최고야.” 한 친구는 해탈한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그게 잘 안되던데, 내가 말하자 친구는 그것도 기술이야, 연습해야지, 대꾸했다. 친구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이상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나만의 기술을 연마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건 아니었다. 그저 정면에서 살짝 아래로 시선을 내리깐 채 그곳에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말을 걸어오는 낯선 목소리 따위가 아득히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 기술을 익힌 후로는 웬만한 사람들을 손쉽게 차단한 채 지나칠 수 있었다. 한 교육 업체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국가 지원 사업을 통해 온라인 강의를 개설하고 교육을 진행했는데, 중간에 낙오되는 수강생이 없도록 독려하여 강의를 무사히 마무리 짓도록 돕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대부분의 강의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사무실에는 교육팀 직원들뿐이었으나, 예외로 오프라인 강의가 한 번 개설된 적이 있었다. “거기 좀 이상한 사람 있어요.” 어느 날 직원 한 분이 조심스레 말했다. “왜요?” 다른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웬 남자분인데, 목소리도 엄청 크고 강사님한테도 막 시비를 건다네요. 생긴 것도 영…”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무실이 있던 건물은 보안이 좋은 편이었고, 각 층을 지키는 보안 직원들까지 있었다. 그냥 목소리가 좀 괄괄하고 경우 없는 사람인가 보다, 짧게 생각하곤 넘겼다. 마주칠 일 없는 이상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당장 내게 닥친 업무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로부터 며칠 후, 사무실 근처를 서성거리는 검은 인영을 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며칠 전 들었던 ‘이상한 남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목소리가 크고 강사에게도 시비를 걸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 생긴 것도 영… 그렇다는 사람. 사무실 앞을 기웃거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통화하는 척 핸드폰을 볼 옆에 갖다 댔다. 어, 여보세요? 낯부끄러운 연기도 펼쳤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깜짝 놀란 나는 감각 차단술을 펼쳤다. 그는 이젠 내게 “야! 야!”라고 소리치며 손을 있는 힘껏 흔들었다. 안 보인다, 안 보여.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피해 무사히 카드키를 찍은 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문밖을 내다보니,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붙박인 듯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그 이상한 사람 봤어요, 내가 직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던 찰나,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중얼거리며 나간 그녀를 막을 새도 없었다. 나는 엉덩이만 들썩이며 그녀가 무사히 사무실 안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몇 분쯤 지났을까, 홀가분한 얼굴을 한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에요?” 옆자리 직원분이 물었다. “수강생인데 오늘 처음 오는 거라 강의실을 못 찾고 있었대요.” 나는 놀라 되물었다. “그런데 왜 소리를 지르셨대요?” 직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대답했다. “청각장애인 분이시더라고요. 손에 노트를 들고 계셨는데, 그거 봐달라고 그러신 거였어요.” 아아, 다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업무를 이어갔다. 익숙한 타자 소리와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소리를 질렀던 것은 길을 묻기 위함이었고, 손을 흔들며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손에 든 노트를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문밖을 조심스레 건너다보았다.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하고 텅 빈 바깥만 보였다. 감각 차단술은 나의 위안이자 보호막이자 안전장치였다.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곤란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낯선 이에게 내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서, 다양한 이유로 많은 이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중에는 정말 무시가 최선인 상황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도움이 간절한 사람도 있지는 않았을까? 내가 차단한 것이 정말 ‘이상한 무언가’였는지, 아니면 그저 내 주위를 돌고 있던 세상 그 자체였는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어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양수빈(소설가)

2025-12-17

중립기어의 필요성

마피아게임이라는 놀이가 있다. 사회자가 참가 인원 중 몇 명을 마피아로 지목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 숨어든다. 선량한 시민들은 회의를 통해 의심 가는 사람을 마피아로 지목하고 투표로 그의 생사를 결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피아를 모두 색출해내면 선량한 시민이 승리하고, 마피아는 잡지 못한 채 선량한 시민만 죽이다 보면 마피아가 승리하는 놀이다. 이 놀이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다. 선량한 시민들이 누군가를 마피아로 지목하면 투표 이전에 최후의 변론 시간을 준다는 점이다. 지목된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선량한 시민임을 주장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량한 시민들의 판단은 반드시 그 변론이 끝난 뒤에 이루어진다. 선량한 시민이 선량한 시민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여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억울함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지목된 사람의 주장 또한 귀 기울여 듣는 것. 시민의 선량함은 거기서 나온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이 시점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학교폭력, 갑질, 연애스캔들 등등 다양한 이유로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매체들은 보통 톱스타 A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거나, 그에 대한 제보가 있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그것이 모두 사실인지, 아니면 일부만 사실이거나 아예 사실무근인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된다. 그러나 일단 그런 기사가 올라오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강력한 비난과 질타를 마주해야 한다. 많은 대중들이 그러한 기사 속 의혹과 제보, 주장 같은 것들을 빠르게 사실로 받아들이는 탓이다. 물론 정말로 그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는 하다. 그러나 때로는 최초의 의혹 중 일부 혹은 전부가 왜곡된 것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사실을 바로 잡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고 작성되더라도 의혹을 제기했던 그 기사에 비하면 훨씬 주목을 덜 받게 되곤 한다. 당사자의 억울함이나 손해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대중은 다소 섣부르게 의혹과 주장을 받아들이고 비난부터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향해 비난의 스탠스를 취하고 그러한 의도를 담아 댓글 하나 달고 게시물 하나 올리는 것이 별로 심각한 것이라고 인지하지 않는 탓이 있을 것이다. 내가 쓴 몇 마디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질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하나가 다른 비난을 부르고 또 그것이 다른 비난을 불러 결국 당사자는 눈덩이처럼 커다란 비난을 마주해야 한다.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 탓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믿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글을 다시 게시하거나 자신이 던진 비난의 화살을 거두어들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비난은 그대로 거기 남아있게 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며 묘한 쾌감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떤 유명인이나, 심지어 별 관심도 없었던 누군가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보며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던 적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한 경험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어떤 일이 사실이기를 바라게 만들고, 또 끝내 그것이 사실이라 믿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끔 요즘 언어로 ‘일단 중립기어 박는다’는 댓글을 마주하면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 말은 아직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중립의 태도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득달같이 달라들어 재빠르게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아도 언론이 움직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것이다. 법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라면 그 결론을 기다린 뒤에 나의 의견을 정리해도 늦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고, 그 중에는 당연히 당사자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아니면 억울함을 호소하는지 들어보고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따져보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피아게임 같은 걸 할 때도 최후의 변론을 할 기회를 주는데,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면 그 정도 시간은 할애할 수 있지 않을까. 죄 지은 모든 이들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란다.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비난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적절한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억울한 한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수천 명의 죄를 밝혀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기에. /강백수(시인)

2025-12-17

말과 헤어질 결심

여전히 덥지만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 분다. 소나기 그친 저녁, 빗물 고인 거리에 비친 가로등 불빛에서 단풍을 예감하는 지금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떠올리는 건 박해일과 탕웨이의 트렌치코트 차림이 근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여름 그리스와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나는 언어의 한계를 체감했는데, 언어의 불완전함 속에서 비언어는 오히려 언어보다 더 풍요로운 소통의 도구가 되어주곤 했다. ‘헤어질 결심’은 비언어 소통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비언어에 의한 소통도 있다. 재밌는 것은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보다 비언어에 의한 소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웃음, 울음, 표정, 눈빛, 몸짓, 스킨십, 노래, 춤 등이 모두 비언어에 해당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언어 소통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비언어적 신호는 언어적 표현에 비해 의식의 검열이나 통제가 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언어는 때때로 감정과 생각, 정서를 언어보다 더 진실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극중 한국인 엘리트 형사 해준과 중국인 여성 서래의 첫 만남은 형식적인 대화로 시작된다. 사망자의 유족으로 경찰 조사에 응하는 서래와 수사관으로서 그녀를 대하는 해준은 의례적인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서래가 일반적인 어법에서 벗어난 엉뚱한 한국어 “마침내 죽을까 봐”를 발화한 순간 해준의 사무적인 태도는 해제되고 둘의 거리는 급격히 밀착된다. 언어적 세계에 있는 해준이 비언어적 세계의 서래에게 이끌린 이 사건은 상징계의 질서에 길들여진 주체가 자기 앞에 불현듯 열린 비언어적 상상계를 경험하고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인 실재로서의 사랑을 욕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서래는 한국어가 질서로 작용하는 언어적 세계에서 눈빛, 표정, 몸짓 등의 비언어를 활용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앞서 말했듯 소통은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보다 비언어를 통해 훨씬 풍부한 소통이 가능하다. 이성적 존재인 해준과 감성적 존재인 서래는 서로에게 비언어에 해당하는 한국어(해준에게는 서래의 어눌한 한국어, 서래에게는 해준의 유창한 한국어)를 통해 가까워진 후 표정과 몸짓, 숨소리, 침묵을 통해 농밀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모티프가 된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의 윤희중과 하인숙이 노래라는 비언어를 통해 가까워진 것과 닮아 있다. 해준은 언어소통이 원활한 아내와 감정 없는 잠자리를 갖지만, 대화가 쉽지 않은 서래와는 스킨십 없이도 풍부한 감정적 교류를 한다. 언어적 세계에는 상징계의 의미질서, 논리, 이성, 합리성, 제도, 사회적 규범 등이 있고 비언어적 세계에는 상상계의 몽상, 감성, 비합리, 자유, 초월, 위반 등이 있다. 언어적 존재인 해준이 비언어적 존재인 서래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기도수 사망사건’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서래의 정체 또한 짙은 안개와도 같은 불확실성을 점점 더해가게 된다. 김승옥의 고향이자 무진의 모티프가 된 장소인 순천의 송광사에서 펼쳐지는 해준과 서래의 데이트 장면에서 두 사람은 말보다 몸짓과 표정, 침묵으로 더 많은 대화를 한다. 해준이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서래가 해준의 입술에 립밤을 칠해주는 행위는 언어보다 훨씬 직설적으로 감정을 전한다. 이러한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서래의 세계에 적응하게 된 해준은 서래가 기도수 살인사건의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마해버리며 자신이 원래 속해있던 언어적 세계를 망가뜨리게 된다. 이때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라는 해준의 대사는 환상을 쫓느라 현실을 파괴한 자의 고백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해준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어색한 한국어 문법으로 자신의 절망감을 발화하는 장면은 그가 서래의 세계, 즉 어눌한 한국어로 함의되는 비언어, 감성, 환상의 세계로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나이 들수록 옛날 광고 카피처럼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가 소중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 속에, 의미와 개념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 않나. 수다스러운 매미 울음이 귀뚜라미의 나지막한 허밍으로 바뀌는 이 계절, 말없이 그냥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함께 노을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냥 일어나 걸으면서 말없이 헤어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가을엔 말과 헤어질 결심을 세워본다. /이병철(시인·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2025-08-31

행복에 대해서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과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는 와중 자꾸만 이 질문을 떠올렸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며 비슷비슷한 생각에 갇혀 숨 막힌 이 기분. 대체 언제 행복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냈었지? 라는 생각에 겁이 나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꾸준히도 행복해지고 싶은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행복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단순한 즐거움은 쾌락에 더 가깝다. 맛있는 음식, 좋은 음악, 웃음, 휴식 같은 것은 쾌락에서 얻을 수 있다. 지속성이 짧고 반복하지 않으면 금세 허무하게 사라진다. 행복은 쾌락보다 더 넓고 지속적인 상태다. 삶 전체에 대한 만족감과 충만감을 반영하기에 개인의 삶에서 만족감이나 의미 있는 성장에 연결된다. 힘든 때를 극복하고 성취감을 느끼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될 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렇기에 행복은 어렵다. 나는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종종 놓이지만 때때로 그 상태를 불행하다고 착각한다. 쇼파에 심드렁하게 누워 행복은 무엇이기에 현재 내게 없느냐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스스로를 자꾸만 불행의 편에 놓는다. 그러면서 요즘 하는 고민에 더욱 깊게 빠져 든다. 때때로 타인은 나의 아주 일부분만 보고 쉽게 속단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기준을 통해 타인을 해석하려 하지만 여기에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할수록 ‘내가 옳다’라는 생각을 기본값으로 두게 된다. 결국 자신의 기대나 가치관에서 벗어난 타인을 쉽게 ‘틀린 사람’으로 단정 짓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불안과 통제욕에서 발현될 수도 있고 또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타인의 다름을 위협적으로 받아 들여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재단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기도 한다. 나와 타인의 다른 지점을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성숙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꽤나 고단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선으로 통제하고 재단하려는 쉽고 간단한 루트를 선택하려 한다. 옳지 못한 방식으로 관여하는 일들에 때때로 견디기 힘든 날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사회에서 어리기 때문인걸까? 그들의 능력치와 다르게 나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미숙함을 내비칠수록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부족한 부분을 애써 가르치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올바른 피드백보다 판단이 앞서는 관계는 무척 아쉽지만 관계 자체를 개선하는 일은 한계가 있으므로 심리적인 거리 유지와 회복 루틴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이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5박 6일동안 일본의 작은 소도시 속에서 마주한 적막 속에서 행복은 완벽하게 기쁘거나 즐거운 상태가 아닌, 나에게 중요한 가치가 맞닿아 있을 때에 오는 충만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새롭게 도전한 음식이 입맛에 맞을 때의 기쁨, 숨이 막힐 정도의 더위 속에서도 내게 우선 그늘을 내어주려는 사람과 마음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아름답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인간이 되어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 등등. 내 기준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행복을 쌓는 것이 행복으로 향하는 방향임을 느끼게 됐다. 그러므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발견하고 계속해서 행복을 쫓으려는 과정 속에서 형태가 갖추어진다. 단순한 쾌락만을 추구해 살아남는 삶의 방식이 아닌 살아가려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에선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아들이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처음엔 ‘넌 못할 거야’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스스로 깨닫고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뭔가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남들도 못한다고 말하지. 절대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마.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해내야 해.” 이 대사는 행복과 가능성은 타인이 규정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믿고 붙잡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내가 원하고, 내가 믿는 것’을 붙들 때 삶은 비로소 나아갈 힘을 얻는다. 붙잡고 싶은 삶의 의미를 믿고 가는 용기에 달려 있는 것. 나는 그것이 내가 가진 젊음과 행복의 가능성이라 생각한다. /윤여진(시인)

2025-08-31

가슴 울리는 ‘골 때리는 그녀들’

챙겨 보는 TV프로그램이 딱 하나 있다. SBS에서 방영중인 ‘골 때리는 그녀들’이다. ‘골때녀’라고도 부르는 이 프로그램은 2021년 6월부터 현재까지 방영중인 축구 예능이다. 여성 출연진들이 팀을 이루어 축구(엄밀히 말하면 풋살에 가까운)경기를 펼치는데 보통 한 주에 한 경기씩 방영 해 주곤 한다. 한 팀에 6명씩 등장 예정인 팀을 포함하여 11팀이 등장하며 각각의 팀은 국가대표팀 출신 전직 축구선수들이 감독을 맡아 이끈다. 나는 요즘 방영하는 그 어떤 TV쇼보다 이 프로그램에 더 열광하고 있다. 프로그램에서는 각각의 출연자들을 ‘선수’라고 일컫는다. 합당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출연자들 중에는 ‘구척장신’팀의 허경희, ‘국대패밀리’팀의 박하얀, ‘액셔니스타’팀의 정혜인과 박지안, ‘원더우먼’팀의 마시마 유 같은 에이스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동호인인 그들을 엘리트 선수들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그다지 민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들이 축구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이 ‘선수’들은 본인들이 정말로 선수인 것처럼 축구에 미쳐있는 것 같다. 훈련이 많은 팀은 거의 한 달 내내 모여서 훈련을 한다고 하고, 경기시간 동안 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깨를 부딪치고 몸을 날린다. 무릎이 깨지고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나도 이들은 이내 털고 일어나 그라운드를 누빈다. 아깝게 골을 놓치면 월드컵 16강이 걸린 경기에서 골 포스트를 맞추는 슛을 때린 양 분개하고, 골을 넣으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골을 넣은 듯 진심으로 환호를 한다. 모두가 이렇게 축구에 진심인데, 선수라는 호칭 좀 붙여주는 일에 굳이 인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전원 모델로 구성된 구척장신 팀의 주장이자 스트라이커인 이현이. 어느덧 불혹을 넘은 그는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는, 골때녀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출연자다. 지금이야 출연자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매우 향상되어 있지만, 프로그램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초보 수준의 축구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현이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섭게 성장하더니 지금은 다른 모든 팀들이 두려워하는 공격수가 되어 있다.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뜨거운 선수이기 때문이다. 큰 눈을 희번덕거리며 긴 다리로 경기장을 겅중겅중 누비는 그의 모습은 가끔 감탄을 넘어서 애처로움마저 자아내곤 한다. 다리에 쥐가 나면 주먹으로 내리치며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모두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보이면 크게 소리치며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곤 한다. 이기면 누구보다 뜨겁게 기뻐하고 지면 누구보다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가 샤넬, 구찌, 에르메스 등의 패션쇼에 등장하던 탑모델이라는 사실이나,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엄마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뛰어들었던 어느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 역시 그의 땀과 눈물을 보면 시인을 꿈꾸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머리를 쥐어뜯던 어느 밤과 밤새 합주를 하다가 손끝과 기타 줄에 맺힌 피를 닦아내던 어느 새벽의 감각이 떠오르곤 한다. 개개인의 열정 외에도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동료애다. 지난 주에는 ‘월드클라쓰’ 팀과 ‘개벤져스’ 팀의 경기가 방영되었다. 이 경기에서 진 팀은 당분간 리그에서 퇴출되어 경기를 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는데 분전 끝에 ‘개벤져스’가 김혜선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패배했다. 팀에서 가장 열심히 뛰었던 김혜선은 경기가 끝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져서 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임이 분명했다. 동료들은 패배로 쓰린 자신의 마음을 챙기기보다는 먼저 김혜선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주로 개인 작업에 골몰하곤 하는 내가 한때 밴드 동료들과 웃고 울던 시절이 떠올랐다. 함께 웃고 울어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뜨거웠던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가슴에 잠들어있던 어떤 마음을 다시 깨워내는 것은 모든 문학과 음악의 꿈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그들은 공 차는 행위를 통해 매주 해내고 있다. 그들은 매주 내게 한 주 동안 필요한 만큼의 도파민과 어떤 문학과 음악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모든 선수들이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오랫동안 뜨거운 경기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강백수(시인)

2025-08-24

낭만 끝에 마감

소설 쓰신다고요? 낭만 있네요. 최근 어떤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업무를 하면서 늘 문장을 다루고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에만 있다 보니 작가라는 직업이 대단할 것 없이 느껴졌는데, 전혀 다른 업에 종사하는 그에게는 글 쓰는 직업이 신비로운 일처럼 다가온 모양이었다. 어느덧 일상의 지루한 노동이 된 글쓰기가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영역으로 다가갔다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묘한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상념은 나를 교실 속으로 데려간다.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가는 예술고등학교에서 나는 지금 고3 수험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푸릇푸릇한 아이들의 두 눈. 작가가 되겠다던 열망으로 반짝이던 눈빛이 원고지와 씨름하는 나날 속에서 묘하게 흐릿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가끔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의 눈빛처럼 공허하게 번져 보이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나는 이 아이들이 낭만 대신 지루함과 지난함을 먼저 배워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마음, 왜 모르겠는가.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영영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벽 앞에 서 있는 기분. 소설 쓰기는 쉽게 열리지 않는 문과 같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좌절하게 순간은 새삼스럽지 않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기미가 없는 문 앞에 놓인 무력감.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창작 이론 대신 백지와의 눈싸움을 더 빨리 습득해 버렸다. 온종일 문장과 씨름하다가 책상 위로 풀썩 쓰러지는 것은 기본. 연필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가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뿜어 내기도 한다. 내게 획기적인 방법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참 난감하다. 마치 일부러 비기를 숨기고 일부러 제자를 괴롭히는 스승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더 좋은 소설을 쓰는 방법은 계속해서 읽고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것뿐인 걸. 지루함을 견디고 한 줄을 써내는 힘.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창작 기술이다. 만일 그날 그에게 소설을 쓰는 과정에 관하여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삶과 예술에 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을 달래보자면 이렇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것으로 글쓰기는 시작된다. 멀리서 봤을 때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서로 치고받는 중이다. 마침내 그중 하나를 골라 쓰면 곧바로 후회가 따라붙는다. 필연적으로 다시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 한 문장을 고르기 위해 열 문장을 버려야 하고 가끔은 쓴 걸 모조리 날려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선택과 후회의 굴레 속에서 결국 남는 건 단 한 줄의 문장이다. 어린 시절 내가 상상한 소설가는 경쾌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가졌더랬다. 건반을 두드리듯 빠른 속도로 소설 한 편이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상상했던 삼십 대의 모습이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듯, 작가가 된 내 모습 역시 맞춤법조차 헷갈리는 허술함으로 가득하다. 그런 나 자신을 미덥지 않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허술함이 내 글의 출발점이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이어가며 허공에 대고 말을 걸듯 문장을 적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불 꺼진 방에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는 모습은 분명 누추한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어떤 희열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글쓰기는 손익 계산의 바깥에서 작동한다. 수익과 손해로 따져 보자면 낭비의 극치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곧 생존이니까. 굳이 한 문장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라니. 주식이라면 진즉 손절하고도 남았어야 옳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계산법이 통하지 않는다. 더딘 성과를 받아 들여야 하는 노동. 쓸모없는 것들의 총체. 그리고 그 무용함 속에 인생의 쓸모를 발견하는 시선. 이런 점에서 쓰는 행위는 정말 낭만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함을 기꺼이 껴안고 책상 앞에 앉는 마음. 그러한 집념 자체가 곧 낭만일 수도 있겠다. 낭만 혹은 지루한 노동. 둘 중 무엇으로 명명하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낭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마감조차 반짝여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그가 그러한 대사를 내뱉는 순간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날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속으로 생각했었지. 아, 이번 주 칼럼은 이걸로 쓰면 되겠다! /문은강(소설가)

2025-08-24

여행을 떠나요

곧 여행을 떠난다. 사실 이주 전쯤 급히 계획한 여행인지라 갑작스레 떠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이왕 떠나는 여행, 그간 가고 싶었던 교토로 가기로 했다. 이 년 전 방문했던 교토의 여름은 뜨겁고 습했지만 아름다웠다. 오래된 담벼락과 새파란 하늘, 좁은 골목과 고택, 사이사이의 기찻길 등 마주하는 곳마다 오래된 것들이 많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한 풍경이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단 점이 무척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는 일본의 소도시에서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며 내가 지금 어떤 걸 위해 살고 있고,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끝마치기 위해 간다. 하루하루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책상에 앉아 비슷한 업무를 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잠자기 전까지 생각하는 것도 잠이 드는 자세도 모든 게 똑같은 하루. 비슷한 굴레 속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짜증과 화를 삼키고 있다. 급작스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황까지 미처도 그저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고, 출근을 해야 하고, 정해진 업무가 있기 때문에 묵묵히 일을 한다.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고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고, 흔들리고, 또 단순한 것에 마구 웃어버리는 요지부동의 날들. 모두가 이렇게 산다면서, 모두가 비슷한 힘듦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의미 없이 도망을 치다보니 내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퍽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많다면 많고 적으면 적은 나이. 어떤 이는 내게 새로운 도전은 너무나 늦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아직 한참 좋을 나이이기에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응원한다는 말을 한다.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않아야 할테지만 나는 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좋아하는 게 없어서 무슨일을 할지 모르겠는데, 어떡하죠? 말을 꺼낼 때마다 나보다 더 듣는 이가 난처해한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는 것도 언제부턴가 편하지 않다. 집은 계속 살아가는 곳이기에 해결해야 할 집안일, 이메일 확인, 생활비 걱정 같은 현실적인 부담들이 언제나 쌓여있다. 우리 뇌는 매일 반복되는 환경과 자극에 익숙해지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그 자극들을 ‘자동모드’로 처리한다고 한다. 이러한 뇌의 습관적 패턴은 우리가 매일 걷는 출근길의 행동을 자동으로 수행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아끼고, 더 중요한 자극에 집중할 준비를 한다. 이러한 습관적 패턴이 많을수록 일상은 단순해지고 생각은 간결해진다. 익숙한 패턴 속에 갇히는 순간부턴 새로운 생각이나 깊은 사유, 내면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 속 자기연민에 호되게 빠져 있다면, 호기롭게 쇼파에서 몸을 박차고 일어나 ‘때가 되었군’ 생각해야 한다. 잠들어있던 여권을 깨우고, 캐리어의 먼지를 닦고, 가장 요란스러운 네임택을 캐리어에 달고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를 찾는다. 더는 지체 없이, 더 많은 인지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 뇌를 깨워야만 한다. 여행은 일하지 않는 상태를 선언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아닌, 삶의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기 위해 택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맞는 것인지, 현재 나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는 늘 삶의 방향을 정하기 전, 답답할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처음은 집 근방의 작은 소도시들, 그리고 점차 나아가 기차를 타면서 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을 골라 누볐다. 혼자 하는 여행은 때로 위험했고 외롭고, 맛있는 걸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열망과 집요함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을 끝끝내 했고, 끝까지 행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삶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꿈과 일상은 다른 것이라고 누군가 선을 딱 그으며 말해도 결국 내가 나의 삶을 결정하고 정의해야 하기에 또다시 중요한 여행을 앞두고 있다. 다가오는 가을엔 하프 마라톤을 뛸 것이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속력이다. 단거리처럼 순간적인 속도가 아닌 오랜 시간 꾸준히 달리는 힘이 필요하기에 체력과 페이스조절이 핵심이다. 체력과 페이스조절을 하기 위해선 우선 같이 뛰는 라이벌들이 아닌 나의 호흡과 마음가짐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린다면 후반에 지쳐버릴테고 너무 느린다면 제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기르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힘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 때론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낯선 곳까지 찾아가 ‘나’를 집중하다 보면 결국 지금보다 훨씬 편안함에 이르를 수 있지 않을까? /윤여진(시인)

2025-08-17

유럽 콤플렉스 너머

여름방학을 맞아 지중해에 다녀왔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시작으로 아테네, 몰타 발레타와 고조섬 블루라군, 스페인 몬세라트와 바르셀로나까지 12일간의 여정이었다. 한국은 폭염과 폭우가 계속됐지만 지중해의 여름은 청량했다. 햇볕은 뜨거워도 습하지 않아 돌아다닐 만했다. 걷고 먹고 마시고 더우면 풀장이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직장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2주 휴가를 얻은 친구와 동행해서 더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렇게 썼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2005년, 2015년에 이어 2025년까지 10년 주기로 세 번씩이나 그리스를 여행한 나는 행운아인 셈이다. 처음 여행했을 때에 비해 지나치게 관광지가 돼 버린 산토리니가 생경하긴 했지만 깎아지른 칼데라 절벽에 금빛 폭포수처럼 넘쳐흐르는 석양은 역시나 장관이었다. 스무 살 무렵의 가난한 배낭여행은 이제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체력과 용기가 고갈됐기 때문이다. 돈은 좀 들어도 일몰이 아름다운 해안 절벽의 레스토랑에서 차가운 산토리니 와인과 함께 문어와 생선 요리를 먹었다. 일정 내내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거 다 마셨다. 예전에는 유럽에 가면 부러운 것만 보였다. 중세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거리에는 음악과 예술이 가득하고 거길 걸어 다니는 사람들 얼굴엔 활력과 여유가 넘쳤다. 음식은 맛있고 맥주의 풍미는 그윽했다. 유럽 문학과 미술, 클래식 음악의 아우라에 기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가 보니 오히려 한국의 좋은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껏 열 번쯤 유럽을 여행했는데 20대와 30대 초반에 들끓던 선망이 이제 잔잔해졌다. 경험의 누적과 반복 탓만은 아니다. 여러 면에서 유럽보다 나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치안, 위생, 공중도덕, 환경, 경제력, 의료, 대중교통, 서비스업, 시민의식 등은 유럽 대부분 국가를 훨씬 상회한다. 그토록 기가 죽던 문화예술도 꿀리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다. 케이팝의 세계적인 인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국립중앙박물관도 있다. 제일 사무치게 감각한 건 음식이다. 예전에는 유럽 음식이 다 맛있었다. 여행 다녀온 후에는 왜 한국에는 유럽 맛을 내는 레스토랑이 없을까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 음식이 훨씬 맛있다. 양식에 비해 한식이 맛있다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먹는 유럽 음식이 현지보다 뛰어나다는 말이다. 방문한 도시마다 심사숙고해 레스토랑을 골랐다. 잘한다는 집들 대부분 실망스러웠다. 짜거나 달거나, 파스타면에 소스가 배지도 않고, 식은 고기는 질기고, 해산물의 선도도 떨어졌다. 몰타 발레타의 페루 식당에서 먹은 남미음식 ‘상코초’, 바르셀로나에서 먹은 애저구이 ‘코치니요 아사도’와 먹물 빠에야, 아테네에서 먹은 베트남쌀국수 정도가 인상적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랬다. 피자, 파스타, 스테이크, 스튜, 스시, 디저트 모두 한국이 더 잘한다. 그러고 보면 세계화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여러 면에서 유럽과 대등하거나 넘어섰다. 유럽의 전통과 근대성을 동경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열심히 학습해서 넘어서고 나아가 한국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마저 따라하다 넘어설까 봐 걱정되는 게 있다. 그리스 국가부도 이후 아테네 경제는 거의 회복됐지만 중심지인 오모니아는 슬럼화되어 재생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번화하던 상점가는 온통 공실이고 젊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거리엔 노숙인, 부랑자, 이민자들로 가득하다. 10년 전 참 활력 넘치고 아름답던 곳이 이제는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방문 자제를 권하는 지역이 됐다. 하필 호텔을 그쪽에 잡았는데 대낮 길거리에 널브러진 채 팔에 주사기를 꽂고 마약을 투약하는 중독자들을 계속 마주쳤다. 겉으로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이지만 민생 경제는 갈수록 곪아간다. 상점들이 폐업하고 거리에 활기가 없고 청년들의 얼굴은 어둡고 출생률마저 바닥이다. 하물며 여러 어둠의 경로로 마약이 유통돼 여기저기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피자, 파스타 맛있는 걸로 만족하고 싶다. 따라할 걸 따라하자. 오모니아 거리의 살풍경을 서울에서 보고 싶지 않다. /이병철(시인)

202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