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헌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
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
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
(….)
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植字)해 놓았나
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
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
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
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
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
저 하늘에 새겨진 ‘천문-당신’을 사랑하는 애인이라고 읽어본다면, 당신은 천문이 써진 푸르디푸른 하늘을 아득하게 펼쳐내고 있는 우주다. 애인의 영혼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우주. 그렇다면 위의 시는 당신의 영혼 속 멀고 깊은 지점에 도달하고 죽고자 한다는, 당신을 향한 기막힌 사랑을 펼치고 있는 일종의 연애시다. 위의 시에서 느끼게 되는 아득한 아름다움은 그러한 사랑의 절절함과 관련될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