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서해만이 가진 ‘쓸쓸한 아름다움’이 사무치기도 한다.
고요하고 내밀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서해의 작은 섬 식도로 간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60세대 2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적 0.86㎢의 작은 섬이다.
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여객선 안에는 격포에 장을 보러 갔다가 섬으로 돌아오는 어르신 몇이 전부였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객선이 접안하자 어르신들은 손수레와 보따리를 양손에 짊어지고 다시 섬을 밟았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낚시가방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
식도에 올 때면 늘 찾는 한 민박으로 향했다. 서해의 작은 섬들이 보통 그렇듯 식도에도 변변한 식당은 없고, 그나마 민박과 밥을 겸하는 서너 곳이 다.
그런데 섬에 상수도 공사가 벌어져 공사 노동자들이 지내느라 빈 방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식도리 이장님이 근처를 지나다가 자기네 집에서 묵으라고 하신다. 이장님 집도 민박과 식사를 겸하는데, 공사 인부들이 묵긴 하지만 남는 방이 있다고 했다.
이장님 차에 사모님과 함께 셋이 끼어 타고는 마을 몇 군데를 다니며 멸치를 내려다 줬다. 집에 도착하니 이장님께서 안방을 내어주며 편하게 쓰라고 하신다. 너그러운 인심이 따뜻한 물살을 퍼뜨렸다.
가방을 풀고, 낚시 준비를 해서는 방파제 석축에 섰다. 혼자 고요함을 찾아 온 섬, 마음에서 수런거리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우럭을 먹을 만큼만 잡고 낚시를 접었다.
욕심을 버리는 순간 그동안 내 안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석축에 부딪치는 파도가 뭐라고 말을 한다. 할 말을 오래 참아 붉어진 입술처럼, 저녁노을이 나를 보며 옴짝달싹한다. 일찍 떠오른 낮달이 허밍으로 노래한다. 먼 산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단풍잎이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
외부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와 풍경과 내가, 세계와 내가 경계 없이 몸을 섞을 때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 깊은 곳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우럭 몇 마리 챙겨 이장님 집에 오니 인부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방마다 고단한 몸을 누였고, 이장님 가족은 거실에 앉아 화투 놀이하느라 정신없다. 사모님이 식당에 있는 반찬과 찌개를 마음껏 꺼내 먹으라 하신다.
우럭 회 한 접시 뜨고, 반찬통을 열었다가 그만 황홀해지고 말았다.
꽃게장, 어묵볶음, 장조림, 오이소박이, 방풍나물, 멸치볶음, 버섯볶음, 파김치, 알타리김치, 물김치 등 온갖 맛깔스런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릇 하나에다 반찬 두세 가지씩 함께 담았다. 냄비에는 묵은지와 비계 숭덩숭덩한 촌돼지 고기가 가득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한 그릇 떠서 상에 올리니, 마음부터 배부른 위대한 밥상이 완성되었다.
식도(食島)가 왜 ‘밥섬’인지 이제야 알겠다. 예로부터 어장이 풍부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는 섬, 먹거리보다 인심이 더 풍요롭다.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이재무, ‘위대한 식사’)라는 시가 절로 떠오르는 밥상 앞에서 뭉클해졌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을 밥 한 덩이와 함께 목구멍으로 쑥 넘기고, 차가운 소주로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는 동안 저녁은 깊고, 저쪽 거실에서는 찰싹찰싹, 화투패 달라붙는 소리가 풀벌레 울음처럼 정다웠다.
아침놀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6시 50분. 기상 악화로 7시 20분 첫 배 이후엔 배가 안 뜬다는 방송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서려는데, 사모님이 아침 먹고 가라 하신다. 공사 인부들과 함께 앉아 또 한 번 뜨거운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인부들과 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비록 짧은 몇 분이지만, 나는 낯선 식구들과 말없이 정든 밥상을 떠나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나는 ‘밥섬’ 식도에서 그 밥 한 끼를 먹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생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