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신축공사장 폐유드럼통을 널름거리던 불꽃도 잦아들고
또 하루를 일당에 팔라버린 길은 갈 곳이 없다
피눈물 나는 쌍소리 속으로 미친 꽃들은 피어나고
차체부 이십년, 공장의 불빛은 지척인데
웬일로 친구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담벽
그 너머 어두운 소문으로 몰려와 나를 부르는 소리
길 위에 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
천막 농성장엔 아내가 있을 게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길 위에서라도 몸을 눕혀 살아가리라는 시인의 다짐은 목적지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그가 몸을 눕히려는 곳은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장인 길 위의 집 아닌 집, 즉 천막이다. 그곳에는 그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 떠돌이의 사랑은 안정된 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사랑은 행려의 흐르는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