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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나

등록일 2022-02-02 19:51 게재일 2022-02-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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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록

받기로 한 돈이 입금되지 않은 날

짧은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이 깨진 날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인연이 다한 날

 

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렸고

끓어 넘칠 듯한 신열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문득

어떤 굴욕에도 반응할 것 같지 않은

 

물기 없는 고목들의 한숨을 상상했고

그저 따신 밥 먹고 제 영혼을 이불 속에 가두어

 

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향해 끝내 유치한 뉴스를 향해

입바른 소리나 해대는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

나는 후회보다 끈질긴 습관이 싫은데

 

오늘 하루 양심 없이 하늘만 청명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였고

 

시인의 삶은 현재 “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린 시간에 놓여 있다. 삶의 꽃은 져버렸고, 그래서 삶은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만 아이들에게 해대는 습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나”가 되었다. 하나 시인은 이 현실에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몸에 신열이 난 것은 그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굴욕에 반응하지 않는 ‘고목’과 같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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