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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등록일 2023-02-07 18:27 게재일 2023-02-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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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 오랜만에 만난 흥미로운 연극이었다.

연극 ‘독’(최보윤 작, 김진욱 연출)을 관람했다. 정말 오랜만에 본 소극장 연극이었다. 10주년을 맞은 극단 ‘웃어’의 신작이다. 극단은 안혜경, 정애화, 허동원, 한은선 등 오랜 연기 내공을 지닌 탄탄한 배우들과 실력파 작가, 연출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학로 드림시어터 소극장은 평일임에도 객석이 꽉 찼다. 지난해 12월 29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1월 21일 폐막 예정이었지만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2월 5일까지 연장 공연을 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관객 기근에 시달리던 공연 예술계에 싱그러운 봄비의 마중물이 되어준 듯하다.

혜영은 촉망 받는 화가다. 경매에 출품한 작품이 수억 원에 거래되고, 여러 미술 전문 저널에 소개되는 등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모두 받고 있다. 남편 정호는 미술품 경매 업체의 임원으로 아내의 그림에 날개를 달아준다. 둘은 미대 선후배 사이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화목한 결혼 생활 가운데 두 사람의 커리어도 점점 탄탄해지고, 혜영의 임신까지 경사가 겹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연락이 끊긴 대학 후배 서현이 나타난다. 혜영 혼자 있는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무례하게 행동하다가 묘한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집을 나선다. 그 한마디 말에서부터 혜영의 의심과 불안이 피어난다. 처음엔 작은 불씨였던 것이 나중에는 커다란 불길이 돼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남편과 다투고, 급기야 임신 중절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혜영과 정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때 무대는 다시 혜영과 서현이 등장하던 첫 장면으로 전환된다. 거기서 연극은 혜영과 서현의 시점을 첫 장면과 정반대로 바꾸면서 모호한 분위기의 열린 결말로 끝난다. 최보윤 작가의 말대로 “하나의 현상은 여러 얼굴을 갖고, 진실은 여러 겹이다”라는 메시지를 묵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기억이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며, 진실이란 늘 상대적 가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같은 현상이나 사건이라도 저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너무 맹신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도 서늘하지만 보다 섬찟하게 다가온 것은 ‘생각 하나의 파괴력’이다.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장석남, ‘맨발로 걷기’)는 시구는 낭만적으로 읽히지만, 생각 끝에서 꽃이 피고, 그 꽃은 덤불이 되고, 덤불은 점점 자라나 사방을 휘감아 숲을 이루고, 덤불숲에 불이 붙는 순간 커다란 산불이 돼 모든 걸 태워버린다.

지옥은 마음에 심겨진 작은 생각 하나에서부터 만들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에서 멜(마리옹 꼬튀아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심겨진 그 단 하나의 생각, 세계가 세계가 아니고 현실이 현실이 아닐 거라는 그 어처구니없는 의심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남편인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평생 동안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연극 ‘독’에서도 서현이 혜영의 마음 안에 떨어뜨린 독 같은 한 방울의 의심이 모든 걸 마비시킨다. 생각 하나가 삶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사실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독’이 위험한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의심만큼 무서운 게 편견이다. 특정 지역민들에 대한 편견, 일부 직업군에 대한 편견,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등 독 같은 생각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편견은 결국 ‘나’에게 익숙한 것 외에는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보수주의가 되고 만다. 불신, 의심, 편견은 관계를 망치고, 나를 망치고, 결국 세계를 망친다.

어느 시인은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라고 토로한 바 있다. 지금 당신이 고통스런 번민으로 괴롭다면, 지옥 같은 나날들 가운데 있다면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마음 깊은 곳으로 가는 길에 쳐져 있는 장막들을 헤집고 나면, 그 안에는 좁쌀만큼 작은 생각 하나가 시퍼런 독을 뿜고 있을 것이다. 티눈처럼 작고 하찮은 그 생각 하나 때문에 지옥을 짊어지고 있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 생각 하나를 뽑아내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는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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