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엔 조선시대 정자와 고택들이 즐비하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를 보유한 봉화엔 조선의 선비문화뿐만 아니라 삼한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의 소라국, 그리고 구리왕의 흔적과 성터가 남아 있다.
태백산 구룡산, 문수산 등 고산에서 발원한 물길 운곡천을 따라 부족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가본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고대 부족국가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춘양면 도심리 황터마을 일대로 고산준령이 에워싼 가운데 구리왕이 살았다는 황터마을은 낮은 산기슭 북쪽 숲을 등지고 터를 잡았다. 마을 앞 운곡천이 흐르는 주변으로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으니, 국가를 세울 입지 조건에 적합해 보인다.
황터마을은 구리왕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던 곳이라 하여 황터라 부르게 되었으며, 1980년대까지 마을 숲에 당집이 있었고, 구리왕의 위패와 구리왕의 기록이 있는 문서, 높이 15cm 길이 20cm의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가 함께 보존돼 있었다.
매년 음력 대보름이면 마을에서 나는 곡식으로 5일간 근신한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왔었는데,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는 분실되었고, 위패와 기록문은 새마을운동의 목적으로 당집을 불태워 소실됐다.
그후 황터 주민들이 새로 성황당을 짓고 ‘구리왕위비묘기성황위’ 위패를 모셔 옛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황터마을 입구 우측 소라리로 넘어가는 재 이름은 성재다. 부족 국가시절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재에서 가까운 운곡천의 강돌을 운반해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약 60m 정도의 성 형체가 남아 있으며 일명 장고개라고 하는데 장수가 태어날 장소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부족국가 시대 형태의 고분이 남아 있다. 이 고분은 197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그릇, 숟가락 등이 도굴됐고 두께 50cm 1평 정도의 넓은 바위가 덮고 있다.
소라국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데 “구령왕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해 소라국을 토벌하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구령국은 서벽2리 금정골 안 고직령 밑에 있었다고 하며, 소라국은 소라리라는 동명으로 미루어 볼 때, 소라리 아니면 황터에 부족국가가 있어 두 나라가 싸운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된다.
황터를 지나는 운곡천 물길은 도심 애당을 거쳐 춘양면 소재지 소로리로 흐르는데 이곳에서도 부족국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지명도 소라국에서 유래한 듯한 소로리로 소라리와 비슷한 지명이다.
본소로리의 동쪽 산에는 성터가 남아 있으며 칠성이 표시된 고인돌 2기가 있는데 1기는 마을 안쪽에, 1기는 본소로리로 들어가는 다리 옆 둑길 밑 밭에 있다. 그리고 소로리 동쪽 독산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무덤으로 바윗돌 3개가 덮인 고분이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정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조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형태나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삼한시대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작지와 새롭게 들어선 시설 등으로 유물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 조사와 보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류중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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