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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더스트 볼, 분노의 포도…

등록일 2023-07-25 20:02 게재일 2023-07-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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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기후 변화로 인한 환란의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다. /Pixabay

영화 ‘인터스텔라’의 기억에 남는 한 장면.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운동장 너머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황급히 집으로 대피한다. 이윽고 모래 폭풍은 마을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옥수수 밭을 바라본다.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한 장면에 불과해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재앙을 재현한 것이다. 1930년대 초 미국의 중부 곡창지대를 덮쳤던 더스트 볼(Dust Bowl)이 그것이다. 미국 중부의 대규모 곡창지대인 콜로라도, 캔자스, 오클라호마, 뉴텍사스를 덮친 모래폭풍은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했고, 마차·자동차 따위에서부터 창고·집·우물·전신주와 같은 시설물마저 날려버릴 만큼 강력했다.

더스트 볼은 직접적으로 휘말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 이재민 또한 발생시켰다. 모래폭풍은 1937년, 미국 중부에 많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근방을 떠돌며 토지를 더욱 황폐화시켜갔다. 경작도 생활도 불가능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도시로 이주하였지만, 극단적인 가난과 주거의 불안정, ‘오키(Oki)’(뜨내기)라는 멸칭을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 시기, 오클라호마를 비롯한 미국 중부의 서민과 노동자들이 겪은 극단적인 가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스트 볼로 인해 황폐화된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이주할 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헐값에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렇게 도착한 서부에서조차, 그들은 가난한 이방인이라는 멸시와 홀대에 직면한다. 모든 것을 잃고 설움에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존 스타인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놀란 감독이 이와 같은 더스트 볼의 모습과 그 후의 폐허를 영화 속에 차용했을 때, 영화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현실 속 더스트 볼도, 영화 속 모래폭풍도 모두 인간에 의해 빚어진 대재앙이라는 것. 사실 1930년대 초 미국 중부에 닥친 심각한 가뭄이 더스트 볼의 직접적인 방아쇠이기는 하지만, 방아쇠는 결코 총알 없이 발사되지 않는다.

식량 증산을 위해 수십 년간 계속된 난개발은 숲과 습지를 비롯한 생태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으며, 미숙한 건조농법의 영향으로 경작지 또한 빠르게 황폐화되었다. 대략 20년간의 난개발과 무리한 경작이 미국 중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더스트 볼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자연 파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데에는 채 반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러한 인과를 눈치챈 것은, 이미 그것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게 되었을 때였다.

이처럼 우리는 거듭 자연 파괴로 인한 재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구한 표정으로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한 컨퍼런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기후변화는 지구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를 비롯한 일부 생물종에게만 치명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 기후 변화로 인해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게 되겠지만, 지구에서의 생명활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살아남은 생물들이 다시 번성하여 지구는 다시금 푸른 별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듭 기후 변화를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희귀동물의 멸종 따위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세대 이후에 발생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린 이미 기후 변화로 인한 환란의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 여름에도 끔찍한 수준의 비가 내리고 있다. 기후학회에서는 ‘장마’라는 개념 대신 ‘우기’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여름 기후를 바라봐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올 해에도 예상된 호우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겹쳐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을 애써 흐린 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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