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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를 바라보며(부분)

등록일 2024-05-26 18:33 게재일 2024-05-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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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다리 밑에는 다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리만의 풍경이 있다

 

다리 위로 지나가는 전철의 속도보다

 

고요와 정지 속에서 빠르게 변하는 그림이 있다

 

완성되지 않는 그림이 있다

 

한낮에도 다리 밑에는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그으며 꿈을 꾸듯이

슬픈 그림이 그려졌다 지워진다

 

나는 선사시대 공룡의 다리를 보는 느낌으로

 

거대한 교각들이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다

 

저 먼 건너편에서 아득하게 비밀스런 문으로 남는 것을 본다

 

(중략)

 

단지 하나의 사람으로 문 앞에 다다라,

 

그 너머에서 신화 속의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다리 아래의 어둠 속에 머물면서 ‘성냥팔이 소녀’가 된다. 성냥을 그으면 ‘슬픈 그림’으로 환영들이 나타난다. 시인은 그 환영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면서, 그의 눈은 저 소실점까지 이르는 ‘거대한 교각들’을 악착같이 따라간다. 그가 결국 다다른 비밀스런 문 너머에서는 “신화 속의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울부짖을까. 그 동물들이 문 안쪽 세계를 인간들에게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 아닐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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