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성
검은 종이에 무엇을 쓰려고 연필을 들었습니다. 우린 너무 멀리 있군요. 하지만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재우고 나를 깨우는군요.
밤에 하늘은 검은 종이처럼 검고 아침에는 모든 것이 희고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무엇을 쓰려다가 그냥 종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은 밤 속의 당신은 너무 검고 흰 종이 위의 당신은 너무 하얗습니다. 밤의 아이처럼 눈을 감고 검은 종이에 무엇을 쓰려고 연필을 들었습니다만,
시인이 무엇인가 쓰는 종이는 밤처럼 검다. 이 ‘밤-종이’의 공간에서 그는 아침의 고요함을 느끼며 당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 숨소리에서 고요히 드러나는 당신의 희면서도 ‘밤-종이’처럼 먹먹한 얼굴. 무언가 쓰고자 하는 건 당신의 그 얼굴에 글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인 것, 하여 시인은 ‘밤의 아이’가 되어 연필을 들고 그 얼굴에 글을 쓰고자 하지만, 한편으로 그 얼굴은 너무 하얘 차마 글을 남기지 못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