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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김영랑 시인의 기다림의 미학

등록일 2024-12-02 18:15 게재일 2024-12-0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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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첫눈이 대지를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첫눈이 폭설이라고 했다. 여기 경상도에서 누릴 수 없는 겨울 정경이다. 무덥던 한여름 태양의 열기와 꽃비에 젖은 봄이 있었던가 아득해진다.

전남 강진 출신 김영랑(본명 김윤식) 시인이 봄 그리워하는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불현듯 떠오른다.

1935년 무렵 김영랑은 우리 고유의 운율로 미묘한 심상을 그려낸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전라도의 토착적인 방언이 지닌 음악성을 살려내기 위해 방언의 소리와 리듬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 ‘언덕에 바로누어’는 본래 제목이 ‘어덕에 바로누어였다. ‘어덕’은 경남과 충남 일부에도 쓰이지만 주로 전라남도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언이다.

그의 초창기 시의 특색은 토착의 소리를 그대로 살려낸 음악성에 치중했고, 부드러운 가락에 영롱한 심상을 곁들인 거였다. 따라서 표준어로만으로 쓰면 그 의미 구조가 너무 투명해져 버려 재미가 반감된다. 여기서 김영랑이 의도적으로 방언을 쓴 까닭이 드러난다.

김영랑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전문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떠러져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뻐쳐오르던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시간의 흐름 속 소멸의 미학을 노래한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을 때마다 이 시의 절절하고 유정한 시적미학에 나는 깊이 빠진다.

봄을 기다리는 시점은 아마도 지금과 같은 첫눈이 내린 겨울이 아닐까? 찬란히 핀 모란꽃이 낙화하는 꽃처럼 지고 난 시간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은 시인 이형기가 노래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분분한 낙화….”라는 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모란’과 시적 주제로서의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인연의 애달픈 별리라는 상실을 노래한 시이다. 화려한 봄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그냥 별리가 결코 아니길래 더욱 애달프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봄날은 늘 과거에 묻혀 있다. 잊어버렸던 지난날의 추억이 소멸되는 순간에 느끼는 비애를 시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이 시에서 시적 의미를 고양시키는 중심은 바로 ‘기둘리고 잇슬테요’라는 전라도 강진 방언이다. 봄은 해마다 다시 회귀하지만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사람의 봄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래서 아쉽고 슬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모란이 피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모란이 피어 있는 순간이 매우 짧듯이 화려한 인생의 봄 역시 결코 길지 않다. 그래서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서술하는 ‘기둘리다’. ‘(서름에) 잠기다’, ‘울다’ 가운데에서 열 번째 시행에 나오는 ‘우옵내다(울다)’를 주목해야 한다. 객체존대의 ‘-오-’는 주체존대의 ‘-시-’와 겹치는 ‘나’와 함께 ‘모란’도 울어 안타까움을 최고의 정점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시적 주체인 ‘나’와 시적 대상인 ‘모란’이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떨어지는 모란을 보고 그 모란과 함께 다시 모란이 피어날 때까지 울면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三百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에서 ‘하냥’이 지닌 뜻의 절묘함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표준어 ‘늘’, ‘항상’과 같은 부사로 대치해 보라. 전라도에서 사용되는 방언 ‘하냥’은 ‘함께’, ‘같이’라는 의미가 섞여있는 단순한 ‘늘’의 뜻이 아닌 주체인 ‘나’와 대상인 ‘모란’이 함께 같이 다시 꽃이 필 날을 가다린다는 시적 의미를 나타낸다. 시인 오세영은 “사투리 ‘하냥’은 그 뜻에 비추어 보거나 언어 음악성이라는 관점에서 ‘항상’, ‘언제나’ 혹은 ‘마냥’보다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소리 그 자체에 아름다운 미학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평했다.

이 시는 ‘하냥’ 덕분에 주체와 객체가 물아일체가 되어 상실의 봄을 기다리는 아픔을 노래하는 방언시의 절창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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