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과격한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가슴에 파고드는 표현을 잘했다. 그는 여러 유행어를 남겼다. 가장 유명한 게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다.
그 이전 ‘로맨스와 스캔들’이라는 비유가 있었다. 이문열의 ‘구로아리랑’(1987)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하기사 지가 하믄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 문재인 정부는 ‘내로남불’ 정부라 불렸다. 검찰총장이 갑자기 대통령이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만 본다. 성경에도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적혀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아슬아슬한 차이로 당선됐다. 국민의힘은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야당의 입법 독주로 이재명 정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화가 난 이재명 대통령이 비상계엄으로 야당 정치인들을 잡아 가두고, 독재하려고 한다. 운이 좋게도 국회가 비상계엄을 해제해, 이재명 대통령은 탄핵소추되고, 수사받게 됐다. 당신은 어떤 느낌인가.
국민의힘 지지자라면, 비상계엄이 성공했기를 바랄 건가. 그래야 나라가 잘 됐을까. 그게 민주주의인가. 나훈아 식으로 “니는 잘했나”라고 빈정댈 건가. 물론 이 기회에 잇속을 챙기려는 민주당 태도도 문제가 있다. 이재명 대표 재판과 속도 경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비상계엄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정략 차원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꼴이다.
선거 국면에서는 수사가 어려워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말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야당 총재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중단시켰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검찰 수사도 당선 이후 모두 취소됐다. 그러니 오히려 ‘이재명 포비아(공포증)’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보수 세력도 비상계엄이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상상을 하니 그건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40~50년 뒤로 돌렸는데도, 이대표 지지율이 30%대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윤석열에서 이재명으로 옮겨가면서 여론이 뒤집힌다.
보수 세력은 민주당이 탄핵을 서두는 이유가 선거를 앞당기기 위해서라고 의심한다. 진보 세력은 윤 대통령이 시간을 끌면서 탄핵과 수사망을 빠져나가려 한다고 의심한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선거를 앞당기는 게 목표겠지만, 야당 지지자가 모두 그런 건 아니다. 특히 중도층은 비상계엄을 정당화하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길이 열릴까 봐 두려워한다.
헌법재판소 심리 정족수는 7명이다. 한때 국회 몫 3명을 임명해 주지 않아 헌법재판관이 6명밖에 없었지만, 헌재 스스로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면서까지 심리를 이어왔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한 문제도 6명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다행히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여야 추천 2명을 추가로 임명했다. 9명 중 8명을 채웠다.
그런데 4월 18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과 이미선 재판관이 퇴임한다. 두 사람은 대통령 추천 몫이다. 대통령이 직무가 정지돼 후임 임명이 어렵다. 헌법재판관 6명이 남는다. 다시 심리 정족수 문제가 제기된다. 더구나 2명이 퇴임하면 남은 6명이 모두 찬성해야 탄핵이 인용된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기각된다. 최근 국민의힘이 추천한 재판관까지 찬성해야 한다. 대통령 추천 2명과 국회 추천 몫 1명은 공석이다. 국회 몫 한 명을 둘러싸고 여야가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이유다.
역지사지해 보자. 탄핵을, 수사를, 무리하게 서두르지는 말자.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를 오래 끄는 건 국정에 큰 타격이다. 그렇더라도 논란의 소지는 없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재명 포비아’ 때문에 탄핵 심판과 수사 자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정권은 수시로 교대한다. 그때 민주당 대통령이 비상계엄으로 국회를 마비시켰을 때를 생각하라. 역사는 반복된다. ‘내로남불’을 생각하라.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