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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을 기다리며

이병철 시인
등록일 2025-04-27 20:46 게재일 2025-04-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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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테라스에 수국 묘목을 심었다.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중략)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득 나 자신에게 “내 삶은 나의 것인가?”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데 늘 불안하다.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실패일까 봐서. 아니 그것이 성공이라 하더라도 그 성공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어서. 좋은 회사, 큰 집, 고급승용차, 명품… 남들이 다 선망하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게 좋다고들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욕망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고독한 군중’을 쓴 데이비드 리스먼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따라 행동하는 ‘타자지향형’ 인간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린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긴다. 처음엔 “내가 좋아서”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 타자가 원하는 걸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나’는 점점 지워져간다.  

 

세상에서 내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을 때 이원하의 시를 읽는다. 화자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있다. ‘혼자’는 고독의 상태이므로 ‘제주’는 유배지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배지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인 것에 비해 시인의 제주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장소다. 그러나 “화가의 기질을 가”진데다가 “얇고 연약”한 감수성을 지닌 화자는 타자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라는 혼잣말은 남들과 비슷한, 보편적 인간이 되지 못해 고독해진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자기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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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존재성을 유지한 채 타자와의 소통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사회 집단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취향, 생각을 포기하고 타인과 비슷하게 스스로를 맞춰가는 대신 “나의 정체는 끝이 없”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이 건강하고 활달한 소통의 방법론은 개인을 획일화되고 일률적인 틀에 종속시키려는 제도 사회와 타인들의 욕망을 무력화한다.  

 

고독을 견디기 힘들 때면 보편적이고 평범한 교류 사회인 ‘김포’로 도망가거나 그곳을 훔치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라고 이내 마음을 고치는 순간,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진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특별한 라이프 스타일을 버릴 수 없다는 유쾌한 태도가 동력이 되어, ‘제주’라는 ‘혼자’의 장소에 새로운 유대의 가능성을 움트게 하는 것이다.  

 

남들이 욕망하는 걸 똑같이 욕망하며 비슷하게 살려고 하는 대신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 되길 선택할 때 “나의 정체는 끝이 없”다. 타인에 의해 무엇으로 쉽게 규정되지 않는 개성적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파도가 밀어 오는 수국 향기 맡으러 제주 종달리에 가고 싶어진다. 아니다. 이른 봄 테라스에 수국 묘목을 심었는데 그동안 작은 변화도 없이 고요하던 나무에 어느새 초록잎이 돋아났다. 초여름이면 꽃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 집 테라스에도 곧 수국이 만발할 테니 꽃을 기다리며, 나를 지키며, 나답게 살아야겠다.

/이병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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