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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상처만 남은 도시들 ② 옛 헝가리 땅 노비사드

등록일 2025-07-01 20:07 게재일 2025-07-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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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바라딘 요새. 노비사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땅이었다. 현재도 노비사드에는 헝가리 사람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노비사드는 세르비아말로 ‘새로운 정원’이라는 뜻. 오스만트루크의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뒤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기 위한 근거지로 소수의 첨병으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세르비아 제2의 도시, 베오그라드 북부 노비사드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도나우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이자, 철도망과 도나우강 운하를 통하여 중부 유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다. 그런 만큼 파괴를 부르는 전쟁의 역사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그 옛날 중부유럽을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땅이라는 뜻이다. 요새에서 시작되어 확장을 거듭한 도시라 이민족 방어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견고하게 남아 있다. 도나우강을 1차 자연방어막으로 두고 그 뒤에 튼튼한 성벽을 높게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곳 노비사드의 역사적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땅이라는 데 있다. 나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주축국에 가담했고, 패전을 당하면서 헝가리의 국토를 좁게 만든 원인이었다. 현재도 노비사드에는 헝가리 사람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오스만제국이 발칸의 맹주로 떠오르자, 베오그라드 주민이 오스만을 피해 이곳 노비사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요새취락이 형성되었다. 그래선지 노비사드는 세르비아말로 ‘새로운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스만트루크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뒤 90km 떨어진 노비사드를 그냥 둘리 없었다. 놀랍게도 쉴레이만 대제가 가톨릭 세계 본거지 오스트리아 빈을 침략할 때 소수 병력을 첨병으로 보내 페트로바라딘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성벽의 견고함이나, 지형지물을 보았을 때 그리 쉽게 공략당할 성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랬다고 하면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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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바라딘 요새, 이 안경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기 위해 찾는다니 이 또한 까닭을 알 수 없다.

18세기가 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가면서 절정기를 맞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곳으로 보이보디나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주민이 몰려들면서 도시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그런 이유로 노비사드에는 정교 사원을 비롯해 유대교 사원, 가톨릭 성당 등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17개의 사원이 사이좋게 서로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일명 세르비아의 아테네로 알려진 노비사드 중심가이자 번화한 광장 ‘슬로보데(Slobode·자유) 거리’는 역사를 반대로 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남녀노소 누구랄 것도 없이 광장에 모여서 즐긴다. 사람들 얼굴에는 즐거움이 넘치고 웃음꽃이 만개했다.

레스토랑에 북적임도 한 몫 더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와 춤, 축제랄 것도 없는 이들 일상이다. 생소하게 생긴 길손은 귀동냥으로 흥을 얻어 어깨춤이 들썩였다. 그러던 중 파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눈의 중년 여성과 마주쳤다. 이방인을 향한 더없는 미소에 낯선 인간의 향기가 스며든다.

광장 맞은편 네오르네상스식 시청사의 웅장한 건물이 무척 매혹적이다. 중심부에 지상 60m 높이, 뿔 같은 탑이 불쑥 솟았는데, 도시 경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다. 개방 시간이 지난 탓에 이방인은 은혜를 입지 못했다.

이때 구름에 잔뜩 가렸던 하늘이 열리고 뾰족한 첨탑의 ‘성 마리성당’이 명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반겼다. 하늘이 하나를 닫으며 하나를 열어 보인 게다. 파란 하늘과 성당 건물의 네거티브한 선이 매혹적이다. 구름이 심술을 부리기 전에 앵글에 담았다. 단 한 컷! 구름이 하늘을 급하게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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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 슬로보데 거리. 뾰족한 첨탑이 있는 건물이 시청사다.

상념을 깨듯 일렬횡대로 행진하듯 걸어오는 남녀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 같이 손과 입에는 담배를 물거나 들었다. 그 중 한 명은 채 여섯 살도 안 돼 보였다. 기이한 장면에 동방의 이방인은 이 땅에 난립한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만두어야 했다.

즈마이 요비아 거리 역시 매일 축제날이다. 끝을 모르는 골목, 즐비하게 들어선 레스토랑의 이국적인 정취는 이방인을 더 외롭게 만든다.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의 동상이 이방인의 발길을 잡는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인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곳 거리를 산책하였다. 1984년에 그를 기리고자 그때 모습을 재현된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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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우 작가

이내 도나우공원 녹색의 한적한 공간을 지나면 도나우강 너머 페트로바라딘 요새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 은빛 물길이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곳이 피의 역사가 자행된 역사의 현장이다. 강변에 서 있는 ‘희생자조각(Raid The Family)’이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월 21일부터 3일간 행해진 헝가리 파시스트들의 만행, 이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살육을 했다. 지구촌 어디에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의 현장, 동상에서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하게 잔상처럼 나타나는 상상의 기억에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다.

이처럼 비극적인 역사를 노비사드 출신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1920~2005)가 조각했다. 밝고 경쾌하기만 한 세련된 도시에 이처럼 아픈 과거가 있다니? 숙연한 마음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인간은 창조보다 폭력에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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