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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마치고 난 후

등록일 2025-08-20 19:39 게재일 2025-08-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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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 수필가

오늘 정호승 시인의 문학강의가 있는 날이다. 나는 그의 시로 여는 시낭송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신경을 많이 썼다. 시인은 필요한 이것저것을 요구했으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깐깐하다고 생각한 점은 시작하기 전부터 빔을 설치해서 화면을 보며 강연을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미술관에는 전혀 그런 것이 준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라는 고집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며칠 동안 멤버 중의 한 명이 고생해서 겨우 완성한 상태였다. 당일이 되어 강의가 시작되자 시인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옳았다.

강의장에 도착한 정호승 시인을 마주했다. 7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 시인들이 대부분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맑고 깔끔한 이미지가 십 여 년 전에 봤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인사와 함께 추억을 남기고자 줄을 잇는 사람들 틈에 나도 끼여 한 장의 추억사진을 찍었다. 함께 시낭송을 하게 된 지인은 본인이 십 오년 전에 사무국장을 하면서 선생님과 찍은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세월은 언제 또 이렇게 흘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정호승 시인의 특강은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그의 강의는 간결하면서 핵심을 사진과 함께 설명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시는 은유다. 시는 개인의 창의성을 보여야함을 강조했다. 그의 시처럼 이해하기 쉽고 음악적 리듬을 살린 시어와 문장이 와 닿았다. 백여 명의 사람들이 고요히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에 외가가 있었고 대구 사람이고 외할머니의 추억을 얘기 할 때는 오래된 사진을 보는 느낌이었고 에밀레종 속에 들어간 개구쟁이고 정말 귀엽다는 생각과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기억과 추억과 그리고 사물의 독창성을 깨닫고 시어를 찾아내는 무한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정호승 시인이 낸 시집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작가로 굳건한 이미지로 본다면 시인의 강의처럼 연기자로써 살아온 김혜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정점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영화배우 김혜자는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할 때 했던 말들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책을 펴낼 만큼 작가의 기량을 갖고 있던 그녀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두고두고 나는 그녀의 대사를 기억하려 한다. 놓친 기억의 일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가져온 구겨진 메모지를 꺼내 읽는 것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여든이 넘은 그녀가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란 작품을 통해 84세의 나이를 뛰어 넘는 연기력과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 뭉클했다. 자상한 어머니로 사랑스런 아내로써 치매를 앓는 노인의 역할까지 무수한 역할을 수없이 많이 하면서도 전혀 질리지 않는 그녀의 탄탄한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정호승 시인의 많은 저서를 통해 그의 탄탄한 시어들의 탄력성과도 유사하게 느낀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익히 하던 일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어제 같은 일상이더라도 살면서 우린 나 자신이란 몸에 에너지를 넣으며 하루를 비슷하지만 다른 연속된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이나 김혜자 배우처럼 자신의 길을 걸으며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 그것이 바로 참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잔잔하게 나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던 정호승 시인의 시 낭송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낭송 시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섬세한 내면을 잘 담고 있다.

/배문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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