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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아무리 검다 해도”

등록일 2025-08-24 18:14 게재일 2025-08-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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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시인

학창 시절 나와의 주먹질에서 패배했던 친구가

차에 치여 죽었을 때

난 알았다 내가 진 것이었다

 

상갓집에서 육개장을 앞에 놓고

맥없이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눌러도 고개를 드는 오래된 죄책감에 대해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혼자 미안해하다

다시 영정 사진을 올려다봤다

속엣말로 미안하다고

사실은 내가 졌다고

독한 척했던 내가 사실은 더 겁쟁이였다고

 

아직 앳된 상주의 어깨를 다독이며

상갓집을 걸어 나오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절대적으로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득의양양한 나를 올려다보던

그 영양의 눈빛

그날 나는 사악했다

 

상갓집을 나와 걷는 길

등 뒤에서 찬바람이 오고

기억들이 폐지처럼 몰려날아다니고 있었다

―허연, ‘패배’ 전문 (‘우리는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문학과지성사)

“눌러도 고개를 드는 것”이 있다. “악마가 아무리 검다 해도” 결코 이기지 못하는 게 있다. 지고도 “득의양양한”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그 영양의 눈빛”이란 기표만으로도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그날 나는 사악했다”라는 기표로 오래된 패배를 독백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어리석다. 위기 앞에 자신의 약함을 들키지 않으려 “독한 척” 위악을 하거나 달아나는 것으로 비겁을 일삼는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그 작품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떠올려 보면 분명하게 보인다. 이 세계는 평범한 사람, 패배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로 인간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한순간에 박제되기를 원하는 욕망에 굴복되기 쉽다.

한편으로, 시인의 인용되지 않은 시에는 “악마보다 힘이 센” ‘그것’이 있다. 시인은 그것을 ‘눈물’이라고 했다. 눈물은 “한적한 골목/ 자전거에 실려 가는 파 한 단 앞에서도/허물어진 폐가 귀퉁이/버려진 앨범 앞에서도 충분히” 흐른다고 했다. 자신이 노래하는 줄도 모르고 노래하는 새처럼 “눈물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흘리는 대책 없는 생의 밀도”로 시인의 인간 이해는 인간과 악마 사이의 전통적 거래 방식을 비틀어버린다.

이때 시인은 “오래된 죄책감”에 대해 “원했든 원치 않았든 / 절대적으로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반추하는데,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며 오래된 친구의 얼굴 표정을 떠올리며 자신의 사악함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인간에 대한 조야한 비관주의로만 끝을 맺는 것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조차 인간성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를 발견할 기회를 가진다. 그것이 시인의 고백 ‘패배’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하여 허연 시인의 시는 육성에 가깝다. 박형준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시에는 “김종삼의 후신이라 느껴질 정도로 담백하고 슬픈 기운”이 서려 있다. 시인의 정신과 가슴이 맞닿은 시 앞에 서면 글과 삶에 대한 간절함과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을 속이거나 빠트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믿는 것으로 자신을 속인다. 이때 사람은 기억을 가졌다는 것으로, 혹은 고백만으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성을 지졌기에 점점 더 밝은 쪽으로 나은 쪽으로 나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등 뒤에서 찬바람이 오고 / 기억들이 폐지처럼 몰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희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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