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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솔거미술관과 박대성

신라 35대 경덕왕은 어느날 황룡사를 돌아보고 금당(堂)이 너무 소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중신회의를 열었다. “금당 벽에 소나무 하나 그렸으면 좋겠는데…” “솔거라는 환쟁이가 있습니다” “이름이 좀 특별하구려” “어릴때부터 늘 솔숲에 들어가 살다 시피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 화공에 시켜서 소나무를 그리시오” 이렇게 돼서 금당 벽화 노송도가 그려졌고, 새들이 실제 소나무인 줄 알고 날아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솔거`라는 이름과 새들 이야기를 처음 기록한 `삼국유사`. 고려 말 일연스님은 운문사 인근 암자에서 책을 쓰고 있었고, 황룡사 건립에 관한 일화를 자세히 적었다. 몽고군이 경주 시내 사찰들을 불태우고 파괴할 무렵에도 일연은 운문사에 있었고, 경주의 참상을 직접 봤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9층목탑`과 `노송도`가 무참히 불탄 사실을 삼국유사에 기록하지 않았다. `신라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재앙을 차마 책에 써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광복 무렵,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서 박대성이 태어났다. 한의원집 아들로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빨치산의 총격을 받아 부모는 사망하고, 박대성 자신은 팔 하나를 잃었다. 당시 운문산은 빨치산의 은거지였고, 인근 마을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 면장 이장 부자는 총을 맞거나 죽창에 찔려 죽고, 집이 불타고 소를 뺏겼다. 한밤중에 불바다가 된 마을이 많았다.박대성은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 솔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둘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는 소나무를 열심히 그리게 되었고, 16년전부터 경주 서남산 삼릉계곡 아랫마을에 터 잡고 앉아 소나무를 그린다. 그는 자신의 작품 435점과 그림도구 등 총 830점을 솔거미술관에 기증했다. 전시실은 모두 8실인데, 그중 5개실은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솔거는 눈 밝은 새들도 속을 만큼의 극사실화를 그렸으나, 박대성의 그림은 사실성과 추상성이 융화하고, 상징성과 은유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그를 일러 `21세기의 솔거`라 부르는 이유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10

탈출할 자유

탈레반이 거의 박멸돼가니 또 IS가 분탕질이다. 지중해 동쪽 시리아를 점령한 IS가 고대유적지 팔미라시에 있는 신전을 연이어 파괴한다. 바알 샤만 신전을 폭파한지 일주일만에 또 벨신전에 폭약 30톤을 터트렸다. 200m 높이의 돌기둥으로 이뤄진 벨신전은 팔미라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고, 그리스 양식과 로마 양식을 혼합한 그레코로만과 고대 중동의 건축술이 어우러진 세계문화유산이다. 2011년 IS가 시리아를 점령한 후 피난민들이 줄을 잇는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이 준동하는 지역마다 그렇다. 시리아에서 조각배를 타고 지중해를 넘어 서쪽으로 가다가 풍랑에 뒤집혀 수장되는 어린 생명이 1만명이 넘는다. 그 중에서`파도에 떠밀려 나와 모래밭에 얼굴을 묻고 숨져 있는 3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참상을 찍은 터키 해변의 사진 한 장 앞에 세계는 통분하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 전에는`매우 골치아픈 일`이라 여겨 난민들에게 문을 닫아 걸었고, IS박멸에도 소극적이었다.독일은 “오는 난민을 다 받겠다”고 하고, 영국 캐머런 총리는 “난민 1만8천명을 데려오겠다”고 하고, 아일랜드는 당초 600명으로 제한하다가 지금은 1천800명으로 늘렸다. 부자들도 난민수용에 앞장섰다. 핀란드의 IT기업인 출신의 백만장자 시필레 총리는 자신의 거대한 저택을 난민수용소로 쓰겠다 하고, 이집트 통신재벌 나구이브는 지중해에 있는 섬 하나를 사들여서 `난민공화국`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 섬에 주택과 공장 등을 지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주기반을 조성할 생각이다. 3살배기 어린 생명이 인간의 `4단7정`을 불러일으켰다.이런 모습을 보면서, 탈북난민들을 생각한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 그 멀고먼 중국 대륙을 횡단해 인도차이나반도 제3국까지 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거나, 조각배를 타고 내려온 북한 주민들을 우리는 따뜻이 맞고 있지만, 북에서는 “2명 이상 탈북한 가구 전원을 정치범수용소에….”라는 법을 만들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탈출할 자유`라도 가지는데…./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9

국감 암시장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은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 헌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 시대에나 힘을 쓰는 헌법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로서는 그런 `완벽한 민주주의 헌법`이 오히려 독이었다. 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걸고, 정부 여당은 제대로 정책을 펼 수 없었다. 이때 독일국민들은 `독재자`를 기다렸고, 히틀러를 선택했다. 그는 강력한 정부·여당을 만들었고, 야당을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패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악성 인플레를 잡아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인종청소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마 `독일의 성군(聖君)`으로 남았을 것이다.“9월이 되면 여의도에 거대한 암시장이 선다” 대기업에서 대관(對官)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내뱉는 탄식이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의원들이 대기업 총수나 임원들을 국회에 불러내려 하면, 기업측에서는 사생결단으로 이를 막기 위해 `장마당`을 열어 뒷거래를 한다.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나오는 장관 후보자나, 국감장에 불려나오는 증인들은 “국회의원이 염라대왕”이다.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는 `망신살`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로서는 국감장에 불려나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업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는 미국의 경우 의회와 경제계의 관계는 甲乙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상시국감을 통해 기업에 해명할 기회를 충분히 준다. 그러나 한국의 국회는 항상 甲이라, 기업총수나 임원을 불러 호통도 치고 망신 주는 것으로 끝이다. “의원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 다시는 같은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이렇게 넘어가는 것이 `정답`이라, 근본적 문제해결과는 아무 상관 없다.`국감 암시장`에서는 “의원님의 선거구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의원님이 가입된 시민단체와 함께 사회공헌재단을 만들겠다” “의원님이 추천하는 인물을 채용하는 등 무슨 요구든 수용하겠다” 등등의 `거래물품`이 등장한다. 재래식 장마당 암거래는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8

패션 외교

동양문화권에는 오방색(五方色) 개념이 있다. 동쪽은 푸른색, 남쪽은 붉은색, 서쪽은 흰색, 북쪽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으로 각 방향에 색깔을 부여한 것이다. 관리가 처음 등용되면 푸른 관복을, 높이 올라가면 붉은색 관복을 입고, 초상이 나면 흰색의 상복과 관모를 착용했고, 질병이 돌거나 전쟁이 나면 관리들은 검은색 관복을 입었다. 그리고 중앙은 노란색인데, “우리는 세상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 황제들은 노란색 곤룡포를 입었다. 그래서 오직 중국 황제만 노란색을 입을 수 있었고, 변방의 왕들은 다만 붉은색 계통의 곤룡포를 착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노란옷을 입고 참석했다. 옛 황제시절 같았으면 `무엄한 행위`였다. 중국인들은 홍복(洪福)과 발음이 같아서 홍색을 좋아하고, 노란색은 황금색이고 황제의 색이라 해서 역시 선호하는 색깔이다. 그래서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는 황색과 홍색으로 돼 있다. 큰 별 하나를 작은별 4개가 둘러싸고 있는데, 별은 황색이고, 바탕색은 붉은색이다. 박 대통령이 이번 만찬 리셉션에는 붉은옷을, 열병식에는 노란옷을 입은 것은 외교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한 `외교적 색깔 선택`이었다. 미술심리학적으로 황색은 평화의 상징색이다.노동당이 장기 집권하는 동안 영국은 `늙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고, 이런 나라를 되살려낸 수상이 대처 여사였다. `대처의 패션 협상`은 유명하다. 노조와의 싸움으로 임기 대부분을 채운 그녀는 진한 색 자켓과 바지 차림에 날카로운 모양의 블로우치를 달고 회의에 나갔다. “나는 당신들과 피터지게 싸우러 왔으니, 알아서 하라”는 경고였는데, 상대방은 대처의 패션만 보고 지레 주녹이 들었다.남자 정상들이 할 수 없는 패션외교를 여성 정상은 할 수 있다. 이번 천안문 행사에서 제일 눈에 확 띄는 옷차림이 박대통령의 노란색 자켓이었는데, 그것은 `황제시대의 곤룡포`를 연상시켰다. 여성 대통령의 옷색깔 하나가 `외교적 성과`를 얻어내는 순간이었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7

이쾌대의 `군상`

극적인 일생을 산 화가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선교사의 가정에 태어나 자신도 목회자가 되려 했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화가가 됐다. 라틴어 시험에서 번번이 낙제했기 때문.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죄로 천덕꾸러기에 거지로 살 수밖에 없었다. 동생 테오가 생활비와 물감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테오의 아내가 시숙의 평전을 쓰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림 한 점에 아파트 몇 채 값`이 나가는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금융회사 중견 사원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던 고갱은 어느날 갑자기 그림도구 챙겨들고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들어갔다. 문명에 때묻지 않은 `원시의 순수`가 그를 매혹시켰던 것. 그러나 고갱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전시회를 열었지만 “외설적이다. 얼굴 뜨거워서 볼 수 없다” “왜 벌거벗은 사람들만 그렸냐” “그림실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혹평만 쏟아졌다. 그는 성병을 치료할 돈조차 없었고, 굶어죽다시피 생을 마쳤다.한일합방 3년후인 1913년 1월에 칠곡에서 이쾌대가 태어났다. 부친은 고위 지방관을 지낸 대지주였다. 형 이여성은 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역사화가였고, 이쾌대도 자연스럽게 화가가 됐다. 6·25때 노모는 병환중이었고, 부인은 만삭이어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공 치하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다.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됐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그는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됐다. 53년 남북 포로교환때 이쾌대는 북을 선택했다. 형이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이쾌대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세때 광복을 맞아 그 기쁨과 희망을 표현한 대작 `군상`연작은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다. 아름다운 여성들의 나신과 건강한 남성들의 육체, 자신감 넘치는 밝은 표정, 서로 어울려 꿈틀거리는 움직임 등 `해방 한국의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분단극복의 동력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4

보물인지, 재앙인지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해역은 예로부터 난행랑(難行浪·지나기 어려운 뱃길)이라 불렸다. 중국-조선-일본-페르시아 등지를 다니는 무역선과 나라에 바칠 물품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숱하게 침몰된 해역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보물 건져올리기`가 빈번해지고 `수중고고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겼다. 경주시를 `야외 박물관`이라 부르는 것같이 태안해역을 `바다박물관`이라 한다. 침몰한 배에서 고려 청자가 무더기로 발굴됐는데, 최근에 건져올린 `마도4호`에는 조선 백자가 잔뜩 실려 있었다. 이 마도4호선은 조선 태종과 세종시대에 세금으로 받은 쌀과 보리를 실어나르고, 남해안 지역에서 구워진 분청사기를 중앙정부에 공납(貢納)하는 일을 하다가 침몰한 조운선이었다.도자기와 먹글씨로 씌어진 죽간(竹簡)물목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고스란히 `보물`이 됐다. 지금까지 인양된 선박은 모두 14척인데, 고려시대의 것이 10척이고, 2척은 중국 선박이었다. 당시 중국은 도자기가 발달해서 사기그릇을 실은 무역선이 남해에 왔다가 많이 침몰됐다.최근 폴란드에서 `황금열차`가 발견됐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 러시아,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미술품과 황금 300t을 이 열차에 실어 독일로 반출하려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산악지대 터널에 기차를 몰아넣고는 양쪽 입구를 막았던 것인데 이 일에 참여했던 한 노인이 생을 마치는 순간에 그 비밀장소를 알려주었다. 폴란드정부는 땅속을 투시하는 레이더로 현장을 조사했고, 약 100m 길이의 화물차를 발견했다.그런데 이 보물이 재앙이 될 조짐이 보인다. “약탈 문화재는 본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국제규약이 있으니, 러시아와 유대인단체가 “내것 내놓아라”하고, 폴란드는 “어림 없다”고 한다. 당시 독일이 러시아 왕궁에서 약탈한 호박(琥珀)장식품은 약 4천500억원 어치나 되고, 유대인들에게서 뺏은 미술품들은 그 이상의 값이 나가니, 이 보물들을 두고 국제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보물이 재앙으로 돌변하는 것은 잠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3

선학평화상

최근 제1회 선학평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상금은 100만 달러(약 11억원)이고, 매년 시상하며, 세계평화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한다. 2012년 타계한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초대 총재의 염원을 기려 2대 한학자 총재가 제정했다. “인류는 한 가정” “내 평생 목표는 굶주림과 가난을 줄여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란 문 총재의 정신이 깃든 상이고,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운영위원장이다. 이번 시상식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참석했고, 성악가 조수미씨와 리틀엔젤스가 축가를 불렀다. 북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문 총재 타계 3주기를 맞아 “문선명 선생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추모메시지와 김양건 명의로 조화(弔花)를 보냈다. 문 총재는 김일성 주석 초상때 조문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때는 제2인자가 갔다. 그들은 미국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북한 입국이 자유로웠다. 이 조문메시지와 조화는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회장을 통해 전달됐다.88서울올림픽이 열릴 무렵, 문 총재와 이건희 삼성회장은 야신 소련 선수단장을 만찬에 초대했다. 그때 문 총재는 “내가 선수들에게 자동차 2천대를 선물하겠다”고 제안하고 “단 한국 운전사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거쳐 소련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그때 김일성 주석이 길을 빌려주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문 총재는 “북한에 평화자동차 공장을 짓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김 주석이 화답하면서 둘은 평양에서 만나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자동차 2천대`와 `북한 평화자동차`는 한·소 수교의 밑거름이 됐고,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틔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본격 논의되다가 김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됐지만 `대화와 협력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었다. 정치이념과 인종과 종교와 국경을 넘어 `인류 한 가정`의 꿈이 활짝 꽃피울 때가 가까워지는 조짐인데, 선학평화상이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2

문화재의 저주

`반달리즘`이란 말은 `문화파괴자`란 뜻이다. 북방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5세기 로마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당시에는 `문화유산`이란 개념이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천재들도 당시 장인(匠인)이고 `미술재주를 팔아 생활하는 막노동자`였다. 고려 말 몽고군도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경주 황룡사와 영묘사 등이 그때 사라졌다. 불가사의한 9층목탑,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솔거의 `노송도`, 에밀레종보다 몇배나 큰 대종 등이 그때 없어졌다. 황룡사 복원 계획이 있지만, 원형 복원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생겼다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주 동남산 옥룡암 옆에 있는 암벽에 9층목탑과 7층목탑이 음각돼 있어서 어렴풋이 짐작이나 할 뿐이다. 현대기술로도 9층목탑은 태풍에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은 곳인데, 그 위치만 겨우 짐작할 뿐이다.요즘에는 이슬람극단주의 IS가 문화파괴로 악명을 떨친다. 옮겨갈 수 있는 것은 팔아서 무기를 사고, 건물은 폭파시킨다. 그들은 일체의 인물상을 `우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수년전에는 아프간 간다라문화지역의 거대한 석상을 로켓포를 쏘아 부숴버리더니, 지금은 시리아의 팔미라 신전에 폭약을 잔뜩 쌓아놓고 터트려버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유산이다.고고학자 알아사드(82)는 IS가 팔미라를 점령할때도 피난가지 않고 유물 숨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체포돼 “유물 있는 곳을 대라”는 심문에 굳게 입을 다물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됐고, 목 없는 시신은 신전 기둥에 매달렸다. 유네스코는 “IS는 2차세계대전 이래 가장 야만적으로 문화재를 파괴했다”고 비난하고 “IS가 파는 유물을 절대 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판매대금이 그들의 군자금으로 쓰이기 때문이다.인류가 공유할 문화유산을 파괴한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반달족은 사라졌고, `정복자 몽고`는 지금 없다. IS도 곧 망할 것이다. 이것이 `문화재의 저주`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1

경주예술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인 경주예술학교는 해방 이듬해 1946년에 설립됐다. 경주출신의 서양화가 손일봉 손동진 최현태 이기섭, 한국화가 박봉수, 공예가 김한천 김무종, 서예가 최현주 등이 `서라벌예술가협회`를 결성하면서 이들이 주축이 돼 세운 예술학원이다. 명칭은 `학교`로 돼 있지만 사실 `대학`이었다. 미술과, 음악과, 국악과로 편성됐고, 2년제 전문대학으로 출발해 이듬해 3년제로 승격했고, 장차 4년제로 갈 계획이었으나, 불행히 실현을 못 봤다. 당시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이념대결이 치열했다. 좌익들은 이 예술학교가 순수예술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난동을 부렸다.그들은 모택동의 `문예강화(講話)`이념에 따라 “예술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에 도움이 안 되는 예술`은 무용하니 타도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결국 경주예술학교는 6·25동란이 한창이던 1952년 폐교됐고, 교수진들과 학생들은 홍익대학으로 옮겨갔으며, 사회주의 예술론에 공감하는 일부는 북으로 갔다. 서울대 미술학과가 개설되기 전의 일이다. 오늘날 홍대 미대가 최고 명문이 된 것은 경주예술학교가 그 밑거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경주에서는 문화예술행사가 홍수를 이룬다. `실크로드 경주 2015`와 `솔거미술관 개관`, 그리고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경주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화가1세대들의 작품 2~4점씩을 모아 전시한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당시에 태어나 36살에 요절한 황술조, 2살 적은 손일봉, 조각가 김만술, 설경과 잉어의 화가 박지홍, 서양화가 손택수, 손동진 등 7명의 작품 28점을 모은 것이다.이들은 실로 경주미술의 `아침 햇살`이었다. 황술조는 경주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주로 개성 등지에서 고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2세에 경주로 돌아와 신라문화 선양에 기여했다.손일봉은 경주미술학교 초대 교장, 한국화의 박지홍은 2대 교장을 지냈다. 이 선구자들의 작품은 상설전시할만 하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31

핵보다 무서운 확성기

막대한 돈을 들여 핵무기를 개발해놔봐야 별 소용이 없다. 역사적으로 원자탄이 실제 사용된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떨어진 2개 밖에 없다. 여러 나라들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지만 다`위협용`이지 `실용성`은 없다. 북한의 핵무기도 마찬가지다. `협박용`으로 가지고 있다가 돈이 궁할때 “내가 핵폭탄 가진 것 알지?”라며 `노상 강도행각`에나 쓰일 뿐이다. 좌파정권 시절에 “한국은 북한의 현금 자동 지급기”란 소리를 들었다. 달라는대로 고분고분 퍼주었다. 그러나 MB정권·박근혜정부에 들어서면서 그 돈줄이 끊어지자 천안함 폭침, 연평해전을 자행하더니 목함지뢰 도발까지 왔고 결국 `확성기 방송 재개`를 불러왔다.북을 향해 불어대는 확성기 방송은 지난 11년간 중지됐었다. 마이크도 철거됐다. 그것이 목함지뢰 사건 이후 다시 설치되고 방송이 시작됐는데 북의 핵무기보다 무서운 남측의 고성능 방송임이 입증됐다. 폐쇄체제와 거짓말정치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진실의 전달`이다. `최고존엄 원수님`의 치부(恥部)와 초라한 실체가 고스란히 폭로되니 대북방송은 체제를 뒤흔들고, 세습독재체제의 허약함을 여지없이 까발기는 `가공할만한 무기`란 것이 이번에 알려졌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다.굶주리는 북한 전방 군인들이 한국의 발전상을 알면 탈북을 결심할 수 있고 한국 K-POP 아이돌들의 자유분방한 공연에 눈이 뒤집힐 것이니 `전방 장병들의 탈북행렬` 때문에 휴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듯이 그래서 확성기 방송이 핵무기나 미사일보다 무섭다.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고 돈뭉태기를 주어야 유감표명 정도 하는 북한이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 순순히 “확성기 방송을 중지해주면…”이란 조건으로 “북측은 유감으로 생각하며…”란 합의문에 서명했다.방송은 중지하되 마이크를 철거하지는 않았다. 북쪽을 향하여 염라대왕 처럼 버티고 서서 “도발만 해봐라. 또 불어제킬터이니” 한다. 북의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대북 전단지보다 힘이 없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8

양심과 비양심

박기춘 의원은 업자로부터 3억5천80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수감됐다. 국회의원은 회기중 불체포특권이 있지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그는 며칠간 집에도 가지 않고 사무실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철야기도를 하며 3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기자에게 “내 잘못이다. 경계심이 풀렸다. 돈을 받는 것이 겁이 났는데도 뭐가 씌었는지….”라고 했다. 형님 동생하는 사이이고, 아이들도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으며, 선거때는 아무 대가 없이 성심껏 도와줬던 한 분양대행업자가 주는 금품이라 `무심코` 받은 것이 바로 `뭐가 씌었던`것이다. 수년 전 중국의 한 고위관리가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사형이 선고됐는데,“내가 처음 받은 뇌물은 담배 한 갑이었다. 그것이 차츰 불어나고, 뇌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억대 금품까지 받으면서도 죄의식이 없었다. 뇌물의 본성이 그런 모양이다”란 최후진술을 했었다. 뇌물은 본래`선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박기춘 의원이 그것을 깨달았는 때는 이미 `교도소 담장 안쪽`을 걸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값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참여정부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한명숙 의원은 불법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고, 대법원의 판결까지 무려 5년1개월이나 끌었다. 정치인에 대한 재판은 늘 질질 끄는 것이 관례지만, 이것은 유례 없는 최장기여서 그는 국회의원 임기를 다 찾아먹었다. 그러고도 구치소에 수감될 때 검은 옷을 입고 “사법정의가 죽었기 때문에 그 장례식에 가기 위해 상복을 입었다”고 했다. 1심에서는“돈을 준 사람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며 무죄, 항소심에서는 유죄, 그리고 대법원 상고심은 2년 징역에 추징금 8억8천만원을 선고했다.한명숙 의원은 이것을 `야당 탄압 정치재판`이라 했다. 5년 여를 끌며 `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전혀 없었다. “그 사람들은 본래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 생각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7

해촌 김용주

해촌(海村) 김용주(1905~1985)는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던 식산은행에 취직하면서 `포항사람`이 됐다. 그는 기업인으로,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포항의 현대사를 주도한 지사`였다. 그는 은행원을 사직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어업이 크게 발달했는데, 정어리와 청어 산란지였다. 구만리 해변은 까꾸리로 고기를 끌었다 해서`까꾸리깨`라 불렀다. 그는 사업 초기 `三日商會`란 간판을 내걸었다. `三一 상회`라 짓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일제가 허가를 해줄 리 없었다. 해촌은 독립의지를 속으로 감추며 三日이라 지어 `작심3일`을 연상시키는 기업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그의 어업활동은 최첨단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어군(漁群)을 탐지했는데, 공중에서 어군을 발견하면 어선들에 통지하고, 그때 어선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퍼레이드는 장관이었다고 한다.1933년 당시 포항읍의 인구는 3만 여명으로 대구시에 버금갔다. 그런데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1개와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 1개 뿐이었다. 그러니 초등학교 입학에도 시험을 봤는데 당시 경쟁률이 8대1이나 됐다. 의무교육제도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나마도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일제는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하라. 일장기를 게양하고 경례하라”고 명령하는데,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가 따를 수 없었으니, 탄압이 극심해져 결국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다.그 학교를 인수한 사람이 해촌이었다. `학교`라 하나, 건물은 없고, 예배모임이 없는 시간대에 학생들이 교회로 와서 공부를 했다. 해촌은 사업으로 번 돈 절반을 떼내어 판자집 학교를 지었으니 이것이 영흥초등학교였다. 그는 어업에서 운수사업으로 규모를 확장하고, 정계에 진출해 민선 경북도의원이 됐으며,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다가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해방후 해촌은 상당한 땅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해촌의 아들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했던가./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6

포항 연극의 정신

포항시가 2016년도 `문화특화지역`으로 지정됐다.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의 특화된 문화자원을 창조적으로 발굴 육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경쟁시대이고, 문화가 경제를 선도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상상력의 산물이고, 창조경제 또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와 경제는 `함께 가는 동행자`일 수밖에 없다.포항의 문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포항의 연극`이다. 3·1만세운동 3년 후인 1922년 포항 영일 출신 유학생회는 동빈동 가설무대에서 5막극 `은하수를 아십니까`를 공연했고, 출연진 1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들은 20일간 잔혹한 고초를 겪었는데, 이것이 한국인 최초의 `연극인 구속사건`이다. 연극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켜 나가려는 움직임을 일제는 철저히 차단했다. 그러나 포항의 연극운동은 면면히 이어졌으니, 1925년 대송면 출신 동경유학생들이 여름방학때 `순회연극`을 감행했다. 특히 김정진은 문맹퇴치운동을 병행, 부녀자 120여명에게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쳤다. 그 무렵 포항 여성청년회와 기계청년회도 `연극은 통한 계몽운동`에 나섰다.이같은 연극정신은 60년대 초 신상률, 최동주, 김삼일로 이어져 포항연극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김삼일은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며 포항 최초의 `소극장운동`을 펴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때 포항문화의 근간은 연극에 있고, 그 근원적인 정신은 고려조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효정신과 임진왜란 당시 김현룡 창의대장의 저항정신과 구한말 최세윤 의병장의 구국정신에 닿아 있다.포항시가 문화특화도시 조성사업에 선정돼 5년간 예산지원을 받는다면, 포항의 소극장운동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극인 중의 극히 일부라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연극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포항문화의 특화`를 바로 짚어나가는 방향이 될 것이다. 광복 70년·한일국교정상화 50년이 되는 올해, 포항연극정신을 되새겨본다.  /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5

이상한 한국인

삼성의 사회봉사단인 `드림캠프`가 여름방학 동안 농어촌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지도를 하려고“참여할 학생을 모집해달라”고 하자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은 “삼성의 기업이미지를 주입시킬 목적”이라며 거절했다. 3년 전에는 관내 마이스트고와 특성화고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에 우리 전북지역의 학생들을 취업시키지 말라”고 지시했고, “재벌은 온갖 추악한 가면을 쓰고 국민을 기만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국정감사장에서 삼성전자 노트북을 사용했다. 한 네티즌은 “나쁜 기업 삼성 노트를 쓰시네요” 비아냥거렸다.현대중공업이 7분기 연속 적자를 보고 있다. 해양부문 해외 현장 설치 공사비는 불어나고, 일부 공사는 공기가 지연되는 탓으로 올해 2분기 영업손실 1710억원을 기록했고, 2013년부터 7분기 동안 연속 영업적자이고, 지난해의 적자 총액은 3조원으로 창사 이래 최악이다. 그런데 노조는 기본급 6.77% 인상, 성과급 250%, 직무환경 수당 100% 인상, 고용안심협약서 등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겠다고 한다. “회사는 임금동결 등 기존 제시안을 철회하고 납득할 만한 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별다른 진전이 없으면 결의에 찬 행동에 나설 것”이라면서 `날짜별 파업계획`까지 발표했다.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가졌고,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되나”란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인지, 참 이상한 한국인이다.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겉과 속이 다른 사례가 또 있다. 영덕군 `바르게살기협의회`가 “바르게 살자” 구호를 내걸고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회장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매년 군·도비 3천300여만원의 보조금을 받는데, 회장의 회계부정 의혹 등으로 회원간 마찰을 빚고, “독선적 운영을 하는 회장 물러가라”는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과거 어떤 여성 탈렌트가 노래했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4

장수 수당

공식적인 은퇴나이는 60세지만, 실질적인 은퇴는 71세다. 11년을 더 일해야 겨우 먹고산다는 뜻이다. 80세 넘을 때까지 노동시장을 헤매는 비율도 16%나 된다. 천대 받아가면서 값싼 일자리를 기웃거리고, 폐지를 줍는 빈곤노인이 그렇게 많다는 말이다. 이런 막일조차 못하는 병든 노인들은 자살을 택한다. 자식 바라지에 모든 것을 던져넣느라 자신의 노후대책은 뒷전에 밀린 탓이다. `새벽 노동시장에 나가는 노인, 집에서 노는 대졸 아들`이 있는 `캥거루 가정`이 드물지 않다.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8% 넘는데, OECD국가 중 가장 높다. 또 고령자 간 소득 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국회의원 등 권력층은 `현대판 음서(陰敍)`로 좋은 일자리를 독점·세습하지만, 힘 없는 서민층은 가난밖에는 물려줄 것이 없다. 권력층이 돼버린 10%의 귀족노조는 제 몫을 지키기 위해 임금피크제도 반대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반대한다. 대기업·공기업·공공기관에 들어가야 `귀족`이고, 중소기업에 가면 `천민` 취급 받은 지가 오래다.조선시대에는 `기로연`이 있었다. 70 이상 노인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푸는 경로효친 행사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 지자체들은 `장수수당`제도를 만들었다. 전국 87개 지자체가 80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3만원씩 용돈을 주는 제도이다.그런데 정부 사회보장위원회가 이 제도를 없애라고 압박을 가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복지제도가 중복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장수수당이란 것이다. “장수수당을 없애지 않는 지자체에는 기초연금 지원금을 10% 깎겠다”고 한다.80세 이상 노인들은 `노조`를 조직할 힘이 없어서 `조직적 반대`를 할 수 없고, 선거때가 돼도 `거동이 불편`해서 투표장에 가기 어렵다.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공짜점심을 주면서, 그 알량한 장수수당은 줬다 뺏는다. 선거때 마다 `무상복지`를 외치는 소리는 높지만 노인복지 소리는 없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돼” 탄식만 들릴 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1

상주 곶감테마공원

옛이야기를 지역마케팅에 활용하는 대표적 사례가 남원의 `춘향전`이다. 해마다 춘향제를 열어 `올해의 춘향`을 뽑고 국악대전을 연다. “춘향은 남원 사람이지만, 이몽룡은 강원도 사람 성이성이다” 해서 강원도가 `이몽룡제`를 열고, `김삿갓`이 살았던 곳이 강원도라 해서 `김삿갓마케팅`을 벌인다. 심지어 `조선시대 대표적 음란물`인 `변강쇠`를 두고도 경쟁한다. `청석골`이 경기도와 전라도에 있는데, 두 곳이 “변강쇠가 살았던 곳이 여기”라며, 불에 그슬린 장승을 `증거`로 들이댄다.아이가 하도 울어서 할머니가 “울면 호랑이가 물어간다”고 협박했으나, 울음을 그치지 않자, 할머니가 “곶감 주랴?”하자 뚝 그쳤다. 문밖에서 이 말을 들은 호랑이가 “곶감이란 자가 나보다 더 무섭구나” 생각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곶감으로 유명한 곳이 `씨 없는 반시감의 청도`와 `항아리 같이 생긴 동이감의 상주`인데, 이 동화를 `활용`한 곳은 상주다.상주시에는 감연구기관인 경북도농업기술원 감시험장이 있는데, 여기서`상주감 품종보호 출원`을 했다. 2012년 `국제식물신품종보호협약` 발효에 따른 조치다. 출원을 해두면, 아무도 함부로 상주 동이감 종자를 가져가 재배하지 못하고, 반드시 로얄티를 내야 한다. 상주감시험장은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전역의 감나무 유전자원 274종을 수집 보존하면서 그 특성을 조사, 우량종을 선별해 품종보호 출원을 했다.또 상주시 외남면 소은리에 `곶감테마공원`을 개장했다. 이 곳은 720살 먹은 `하늘아래 첫 감나무`라 불리우는 `감나무 조상`이 있는 마을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을 테마로 하고, 범모형 7개와 곶감모형 6개를 세우고, 우는 아이 `연지`와 호랑이 그림을 벽에 그렸고, 감따기 체험을 위해 모형 감나무도 만들었다.옛이야기 `곶감과 호랑이`를 상주시가 발빠르게 선점해버렸으니, 아이디어 경쟁 시대에 청도군은 그만 한 발 늦었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0

창업정신

창업1세대들은 `신화`를 창조했다. 이병철 삼성회장은 해마다 `동경구상`을 했다.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경제전망 레포트를 받아 보고 이를 투자에 참고했다. 당시 73세이던 이 회장은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다. `처음 가는 길`이고, “기술도 없는 작은 기업이 과욕”이란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당시 산업은행 김준성 총재와 의기투합해서 `험난한 바다`에 들어섰고, 오늘날 세계1위의 삼성전자를 이뤄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의 `해봤어?! 정신`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며 “우리에게 투자하면 갑절로 불려주겠다”고 큰소리를 쳤고, 결국 차관을 이끌어냈다. 기술도 없고 시설도 없는 허공에 지은 회사가 `유조선 2척 주문`을 얻어낸 것은 기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중공업은 오늘날 세계1위에 올랐다.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우향우 정신”도 영일만의 기적을 일궈냈다. 현장사무실 오른쪽이 바다인데,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바다에 빠져죽자!”는 것은 목숨 걸고 종합제철소를 건설하자는 결의였다. 당시 대부분의 정관계 인사들은 “반대”였고, “그 철공소 대못이나 만들겠지” 했다. 박정희-박태준 `양박`의 `이순신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기술력 1위, 조강생산량 5위`도 없었을 터.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기업정신은 “남들이 안 한 것 중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산 라디오 1호 `A-501`이 탄생했다. “라디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첨단산업이라 힘듭니다”란 임원들의 반대를 제치고 만든 라디오가 팔리지 않자 그는 5천대를 농촌에 그냥 주었고, 그것이 `라디오방송시대`를 열었다.지금 IT인재들이 `창업` 대신 김밥집을 `개업`한다. 성공 보장이 없고, 한번 실패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실패도 `자산`인데 정부는 계속 지원에 인색하다. 창업1세대들은 다들`무모한 출발, 실패, 재도약`이란 과정을 거쳤다. 우리의 인재들이 이런 창업정신을 이어받을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9

증거는 차고 넘친다

중국 산시(山西)성 `위현`은 청나라 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는 두매산골이다. 이곳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퇴직한 장솽빙(62)씨는 “이 깊은 산간벽지에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 수백 명이 숨어 산다”는 말을 듣는다. 장씨가 지금 하는 일은 이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일이다. “억울하지도 않느냐. 한국 할머니들은 낱낱이 증언해서 일본의 간악한 범죄를 고발한다. 사과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설득끝에 127명의 증언을 익명으로 녹취했고, 최근 한국 국회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해서 이를 공개했다.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전쟁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혹은 “성 매매 여성”으로 왜곡 비하하지만,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거짓말로 회유하거나, 강제로 나포해서 끌고간 그 악행을 증명할 증거는 계속 나온다. 중국 위현의 일도 장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원히 묻힐 뻔했다. 중국은 이런 증거들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일본이 사과에 인색한 만큼 중국은 더 많은 증거들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철증여산(鐵證如山)이다. 쇠같이 야문 증거가 산처럼 쌓였다는 뜻이다.독도가 한국땅임을 입증하는 사진 한 장이 최근 발견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휴전협정 다음해인 1954년 8월 10일 독도 동도에 세워진 등대가 점등됐다. 이 등대를 1956년 7월 사진작가 김근원이 찍었다. 이 사진 속에는 등대 벽에 ROK(Republic Of Korea·대한민국)란 영어가 크게 씌어 있고, 다른 한 벽에는 성걸봉(聖傑峰)이라 쓴 한자가 뚜렷하다. 울릉도에 있는 성인봉(聖人峰)과 짝을 이룬 봉우리란 뜻이니,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란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지도와 사진이 실로 `철증여산`인데, 일본은 여전히 억지를 부린다.“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지에 조선인 위안부 시설이 없는 곳이 없었다”는 당시 일본군 군무원의 증언도 나왔다. 손바닥으로 자기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늘을 가릴 수 없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8

독립투사의 후손

최근 `인터넷 고서 경매`에 1953년에 쓰여진 편지 한 통이 올라왔다. 수신인은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였고, 발신인은 서왈보의 유가족 서진동이었다. 서왈보는 함경남도 원산 출생의 한국 최초의 비행사였으며,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김원봉의 의열단 단원이었고, 1926년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신익희와 형님 동생하던 사이였다. 편지에서 서진동은 신익희를 백부(伯父·큰아버지)라 불렀다.서진동은 당시 부산 신애원(信愛院)에 있었다. 전쟁 고아 중에서도 장애인들을 수용했던 복지시설이다. 6·25전쟁이 휴전될 당시 서진동은 장애인으로 이 고아원에 살면서 신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백부 대인 각하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저에게 돈 1만원만 주시옵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바라옵니다”로 끝맺었다. 국회의장에게 취직을 부탁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도장 파는 재주를 익혀 도장포를 내려 해도 돈이 없으니, 1만원만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독립운동가의 집안은 3대가 망한다 했다. 숨어 다니는 처지라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고,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에 투입했으니 교육받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수 배호의 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는데, 부산 피난시절에 굶어죽다 시피했고, 배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노래를 불러 생계를 이어갔지만, 서왈보의 아들 진동은 장애인으로 도장포 하나 낼 형편이 못됐다.`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3년째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해외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에게 주택알선, 정착훈련, 국민연금 가입 등 지원을 확대하자는 것이 골자이다. 독립운동가의 손자·손녀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도 2년이나 국회에 묶여 있다. 보상금 외에 생계급여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의 유가족들에게 한국국적을 주는 일만 겨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이 정착할`돈 1만원`을 줄 형편은 되는데도 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7

해방 70주년의 비애

올해 8월15일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는 물론 민간단체서도 자축행사를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다. `해방 70주년 기념사업 준비 위원회`까지 만들어놓고 또 외교적으로는 일본 수상인 아베 신조의 정치적 메시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휴전선 철책을 수색하던 우리 장병 두 명이 지뢰를 밟아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북한군의 소행이란다. 70년 전 해방이 가져온 분단의 비극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서 목숨도 마다않고 내놓았다. 이 한복판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을 때 정작 임정은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 임정요인들은 왜 미군정에 대해 제2의 독립투쟁을 하지 않았을까. 조선총독부에는 온몸으로 저항을 했던 그들이 미군정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너그러웠을까? 또 궁금하다. 전범국인 일본은 천황도, 국토도 그대로 두고 피식민지국가로써 피해당사자인 우리나라는 왜 국왕도 없애고, 국토마저 분단시켰는지. 열강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말은 `남의 탓`에 불과하다. 무장 항일투쟁도 불사했던 임정으로서는 더 강력한 저항을 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찾았어야 했다. 당대 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러지 못 했다.해방직후의 이런 정국을 이원수는 그의 동시`돌다리`에서 “비는 개었지만 물이 불어서,/ 건너가는 이마다 옷 적시는 시냇물”에 비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利慾)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 장군처럼 사방에서 큰 소리를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나의 문학 나의 청춘`중)라고.그날의 이욕 때문인지 무능 때문인지 몰라도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늘날 휴전선에서 지뢰가 터지고, 대북확성기가 울분의 소리를 터뜨리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것이 해방 70주년을 맞아 축하 이벤트에만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이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