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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쾌대의 `군상`

극적인 일생을 산 화가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선교사의 가정에 태어나 자신도 목회자가 되려 했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화가가 됐다. 라틴어 시험에서 번번이 낙제했기 때문.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죄로 천덕꾸러기에 거지로 살 수밖에 없었다. 동생 테오가 생활비와 물감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테오의 아내가 시숙의 평전을 쓰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림 한 점에 아파트 몇 채 값`이 나가는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금융회사 중견 사원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던 고갱은 어느날 갑자기 그림도구 챙겨들고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들어갔다. 문명에 때묻지 않은 `원시의 순수`가 그를 매혹시켰던 것. 그러나 고갱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전시회를 열었지만 “외설적이다. 얼굴 뜨거워서 볼 수 없다” “왜 벌거벗은 사람들만 그렸냐” “그림실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혹평만 쏟아졌다. 그는 성병을 치료할 돈조차 없었고, 굶어죽다시피 생을 마쳤다.한일합방 3년후인 1913년 1월에 칠곡에서 이쾌대가 태어났다. 부친은 고위 지방관을 지낸 대지주였다. 형 이여성은 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역사화가였고, 이쾌대도 자연스럽게 화가가 됐다. 6·25때 노모는 병환중이었고, 부인은 만삭이어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공 치하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다.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됐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그는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됐다. 53년 남북 포로교환때 이쾌대는 북을 선택했다. 형이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이쾌대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세때 광복을 맞아 그 기쁨과 희망을 표현한 대작 `군상`연작은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다. 아름다운 여성들의 나신과 건강한 남성들의 육체, 자신감 넘치는 밝은 표정, 서로 어울려 꿈틀거리는 움직임 등 `해방 한국의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분단극복의 동력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4

보물인지, 재앙인지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해역은 예로부터 난행랑(難行浪·지나기 어려운 뱃길)이라 불렸다. 중국-조선-일본-페르시아 등지를 다니는 무역선과 나라에 바칠 물품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숱하게 침몰된 해역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보물 건져올리기`가 빈번해지고 `수중고고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겼다. 경주시를 `야외 박물관`이라 부르는 것같이 태안해역을 `바다박물관`이라 한다. 침몰한 배에서 고려 청자가 무더기로 발굴됐는데, 최근에 건져올린 `마도4호`에는 조선 백자가 잔뜩 실려 있었다. 이 마도4호선은 조선 태종과 세종시대에 세금으로 받은 쌀과 보리를 실어나르고, 남해안 지역에서 구워진 분청사기를 중앙정부에 공납(貢納)하는 일을 하다가 침몰한 조운선이었다.도자기와 먹글씨로 씌어진 죽간(竹簡)물목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고스란히 `보물`이 됐다. 지금까지 인양된 선박은 모두 14척인데, 고려시대의 것이 10척이고, 2척은 중국 선박이었다. 당시 중국은 도자기가 발달해서 사기그릇을 실은 무역선이 남해에 왔다가 많이 침몰됐다.최근 폴란드에서 `황금열차`가 발견됐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 러시아,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미술품과 황금 300t을 이 열차에 실어 독일로 반출하려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산악지대 터널에 기차를 몰아넣고는 양쪽 입구를 막았던 것인데 이 일에 참여했던 한 노인이 생을 마치는 순간에 그 비밀장소를 알려주었다. 폴란드정부는 땅속을 투시하는 레이더로 현장을 조사했고, 약 100m 길이의 화물차를 발견했다.그런데 이 보물이 재앙이 될 조짐이 보인다. “약탈 문화재는 본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국제규약이 있으니, 러시아와 유대인단체가 “내것 내놓아라”하고, 폴란드는 “어림 없다”고 한다. 당시 독일이 러시아 왕궁에서 약탈한 호박(琥珀)장식품은 약 4천500억원 어치나 되고, 유대인들에게서 뺏은 미술품들은 그 이상의 값이 나가니, 이 보물들을 두고 국제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보물이 재앙으로 돌변하는 것은 잠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3

선학평화상

최근 제1회 선학평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상금은 100만 달러(약 11억원)이고, 매년 시상하며, 세계평화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한다. 2012년 타계한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초대 총재의 염원을 기려 2대 한학자 총재가 제정했다. “인류는 한 가정” “내 평생 목표는 굶주림과 가난을 줄여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란 문 총재의 정신이 깃든 상이고,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운영위원장이다. 이번 시상식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참석했고, 성악가 조수미씨와 리틀엔젤스가 축가를 불렀다. 북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문 총재 타계 3주기를 맞아 “문선명 선생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추모메시지와 김양건 명의로 조화(弔花)를 보냈다. 문 총재는 김일성 주석 초상때 조문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때는 제2인자가 갔다. 그들은 미국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북한 입국이 자유로웠다. 이 조문메시지와 조화는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회장을 통해 전달됐다.88서울올림픽이 열릴 무렵, 문 총재와 이건희 삼성회장은 야신 소련 선수단장을 만찬에 초대했다. 그때 문 총재는 “내가 선수들에게 자동차 2천대를 선물하겠다”고 제안하고 “단 한국 운전사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거쳐 소련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그때 김일성 주석이 길을 빌려주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문 총재는 “북한에 평화자동차 공장을 짓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김 주석이 화답하면서 둘은 평양에서 만나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자동차 2천대`와 `북한 평화자동차`는 한·소 수교의 밑거름이 됐고,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틔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본격 논의되다가 김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됐지만 `대화와 협력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었다. 정치이념과 인종과 종교와 국경을 넘어 `인류 한 가정`의 꿈이 활짝 꽃피울 때가 가까워지는 조짐인데, 선학평화상이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2

문화재의 저주

`반달리즘`이란 말은 `문화파괴자`란 뜻이다. 북방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5세기 로마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당시에는 `문화유산`이란 개념이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천재들도 당시 장인(匠인)이고 `미술재주를 팔아 생활하는 막노동자`였다. 고려 말 몽고군도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경주 황룡사와 영묘사 등이 그때 사라졌다. 불가사의한 9층목탑,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솔거의 `노송도`, 에밀레종보다 몇배나 큰 대종 등이 그때 없어졌다. 황룡사 복원 계획이 있지만, 원형 복원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생겼다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주 동남산 옥룡암 옆에 있는 암벽에 9층목탑과 7층목탑이 음각돼 있어서 어렴풋이 짐작이나 할 뿐이다. 현대기술로도 9층목탑은 태풍에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은 곳인데, 그 위치만 겨우 짐작할 뿐이다.요즘에는 이슬람극단주의 IS가 문화파괴로 악명을 떨친다. 옮겨갈 수 있는 것은 팔아서 무기를 사고, 건물은 폭파시킨다. 그들은 일체의 인물상을 `우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수년전에는 아프간 간다라문화지역의 거대한 석상을 로켓포를 쏘아 부숴버리더니, 지금은 시리아의 팔미라 신전에 폭약을 잔뜩 쌓아놓고 터트려버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유산이다.고고학자 알아사드(82)는 IS가 팔미라를 점령할때도 피난가지 않고 유물 숨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체포돼 “유물 있는 곳을 대라”는 심문에 굳게 입을 다물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됐고, 목 없는 시신은 신전 기둥에 매달렸다. 유네스코는 “IS는 2차세계대전 이래 가장 야만적으로 문화재를 파괴했다”고 비난하고 “IS가 파는 유물을 절대 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판매대금이 그들의 군자금으로 쓰이기 때문이다.인류가 공유할 문화유산을 파괴한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반달족은 사라졌고, `정복자 몽고`는 지금 없다. IS도 곧 망할 것이다. 이것이 `문화재의 저주`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9-01

경주예술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인 경주예술학교는 해방 이듬해 1946년에 설립됐다. 경주출신의 서양화가 손일봉 손동진 최현태 이기섭, 한국화가 박봉수, 공예가 김한천 김무종, 서예가 최현주 등이 `서라벌예술가협회`를 결성하면서 이들이 주축이 돼 세운 예술학원이다. 명칭은 `학교`로 돼 있지만 사실 `대학`이었다. 미술과, 음악과, 국악과로 편성됐고, 2년제 전문대학으로 출발해 이듬해 3년제로 승격했고, 장차 4년제로 갈 계획이었으나, 불행히 실현을 못 봤다. 당시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이념대결이 치열했다. 좌익들은 이 예술학교가 순수예술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난동을 부렸다.그들은 모택동의 `문예강화(講話)`이념에 따라 “예술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에 도움이 안 되는 예술`은 무용하니 타도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결국 경주예술학교는 6·25동란이 한창이던 1952년 폐교됐고, 교수진들과 학생들은 홍익대학으로 옮겨갔으며, 사회주의 예술론에 공감하는 일부는 북으로 갔다. 서울대 미술학과가 개설되기 전의 일이다. 오늘날 홍대 미대가 최고 명문이 된 것은 경주예술학교가 그 밑거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경주에서는 문화예술행사가 홍수를 이룬다. `실크로드 경주 2015`와 `솔거미술관 개관`, 그리고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경주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화가1세대들의 작품 2~4점씩을 모아 전시한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당시에 태어나 36살에 요절한 황술조, 2살 적은 손일봉, 조각가 김만술, 설경과 잉어의 화가 박지홍, 서양화가 손택수, 손동진 등 7명의 작품 28점을 모은 것이다.이들은 실로 경주미술의 `아침 햇살`이었다. 황술조는 경주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주로 개성 등지에서 고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2세에 경주로 돌아와 신라문화 선양에 기여했다.손일봉은 경주미술학교 초대 교장, 한국화의 박지홍은 2대 교장을 지냈다. 이 선구자들의 작품은 상설전시할만 하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31

핵보다 무서운 확성기

막대한 돈을 들여 핵무기를 개발해놔봐야 별 소용이 없다. 역사적으로 원자탄이 실제 사용된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떨어진 2개 밖에 없다. 여러 나라들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지만 다`위협용`이지 `실용성`은 없다. 북한의 핵무기도 마찬가지다. `협박용`으로 가지고 있다가 돈이 궁할때 “내가 핵폭탄 가진 것 알지?”라며 `노상 강도행각`에나 쓰일 뿐이다. 좌파정권 시절에 “한국은 북한의 현금 자동 지급기”란 소리를 들었다. 달라는대로 고분고분 퍼주었다. 그러나 MB정권·박근혜정부에 들어서면서 그 돈줄이 끊어지자 천안함 폭침, 연평해전을 자행하더니 목함지뢰 도발까지 왔고 결국 `확성기 방송 재개`를 불러왔다.북을 향해 불어대는 확성기 방송은 지난 11년간 중지됐었다. 마이크도 철거됐다. 그것이 목함지뢰 사건 이후 다시 설치되고 방송이 시작됐는데 북의 핵무기보다 무서운 남측의 고성능 방송임이 입증됐다. 폐쇄체제와 거짓말정치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진실의 전달`이다. `최고존엄 원수님`의 치부(恥部)와 초라한 실체가 고스란히 폭로되니 대북방송은 체제를 뒤흔들고, 세습독재체제의 허약함을 여지없이 까발기는 `가공할만한 무기`란 것이 이번에 알려졌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다.굶주리는 북한 전방 군인들이 한국의 발전상을 알면 탈북을 결심할 수 있고 한국 K-POP 아이돌들의 자유분방한 공연에 눈이 뒤집힐 것이니 `전방 장병들의 탈북행렬` 때문에 휴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듯이 그래서 확성기 방송이 핵무기나 미사일보다 무섭다.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고 돈뭉태기를 주어야 유감표명 정도 하는 북한이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 순순히 “확성기 방송을 중지해주면…”이란 조건으로 “북측은 유감으로 생각하며…”란 합의문에 서명했다.방송은 중지하되 마이크를 철거하지는 않았다. 북쪽을 향하여 염라대왕 처럼 버티고 서서 “도발만 해봐라. 또 불어제킬터이니” 한다. 북의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대북 전단지보다 힘이 없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8

양심과 비양심

박기춘 의원은 업자로부터 3억5천80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수감됐다. 국회의원은 회기중 불체포특권이 있지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그는 며칠간 집에도 가지 않고 사무실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철야기도를 하며 3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기자에게 “내 잘못이다. 경계심이 풀렸다. 돈을 받는 것이 겁이 났는데도 뭐가 씌었는지….”라고 했다. 형님 동생하는 사이이고, 아이들도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으며, 선거때는 아무 대가 없이 성심껏 도와줬던 한 분양대행업자가 주는 금품이라 `무심코` 받은 것이 바로 `뭐가 씌었던`것이다. 수년 전 중국의 한 고위관리가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사형이 선고됐는데,“내가 처음 받은 뇌물은 담배 한 갑이었다. 그것이 차츰 불어나고, 뇌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억대 금품까지 받으면서도 죄의식이 없었다. 뇌물의 본성이 그런 모양이다”란 최후진술을 했었다. 뇌물은 본래`선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박기춘 의원이 그것을 깨달았는 때는 이미 `교도소 담장 안쪽`을 걸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값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참여정부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한명숙 의원은 불법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고, 대법원의 판결까지 무려 5년1개월이나 끌었다. 정치인에 대한 재판은 늘 질질 끄는 것이 관례지만, 이것은 유례 없는 최장기여서 그는 국회의원 임기를 다 찾아먹었다. 그러고도 구치소에 수감될 때 검은 옷을 입고 “사법정의가 죽었기 때문에 그 장례식에 가기 위해 상복을 입었다”고 했다. 1심에서는“돈을 준 사람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며 무죄, 항소심에서는 유죄, 그리고 대법원 상고심은 2년 징역에 추징금 8억8천만원을 선고했다.한명숙 의원은 이것을 `야당 탄압 정치재판`이라 했다. 5년 여를 끌며 `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전혀 없었다. “그 사람들은 본래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 생각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7

해촌 김용주

해촌(海村) 김용주(1905~1985)는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던 식산은행에 취직하면서 `포항사람`이 됐다. 그는 기업인으로,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포항의 현대사를 주도한 지사`였다. 그는 은행원을 사직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어업이 크게 발달했는데, 정어리와 청어 산란지였다. 구만리 해변은 까꾸리로 고기를 끌었다 해서`까꾸리깨`라 불렀다. 그는 사업 초기 `三日商會`란 간판을 내걸었다. `三一 상회`라 짓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일제가 허가를 해줄 리 없었다. 해촌은 독립의지를 속으로 감추며 三日이라 지어 `작심3일`을 연상시키는 기업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그의 어업활동은 최첨단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어군(漁群)을 탐지했는데, 공중에서 어군을 발견하면 어선들에 통지하고, 그때 어선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퍼레이드는 장관이었다고 한다.1933년 당시 포항읍의 인구는 3만 여명으로 대구시에 버금갔다. 그런데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1개와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 1개 뿐이었다. 그러니 초등학교 입학에도 시험을 봤는데 당시 경쟁률이 8대1이나 됐다. 의무교육제도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나마도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일제는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하라. 일장기를 게양하고 경례하라”고 명령하는데,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가 따를 수 없었으니, 탄압이 극심해져 결국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다.그 학교를 인수한 사람이 해촌이었다. `학교`라 하나, 건물은 없고, 예배모임이 없는 시간대에 학생들이 교회로 와서 공부를 했다. 해촌은 사업으로 번 돈 절반을 떼내어 판자집 학교를 지었으니 이것이 영흥초등학교였다. 그는 어업에서 운수사업으로 규모를 확장하고, 정계에 진출해 민선 경북도의원이 됐으며,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다가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해방후 해촌은 상당한 땅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해촌의 아들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했던가./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6

포항 연극의 정신

포항시가 2016년도 `문화특화지역`으로 지정됐다.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의 특화된 문화자원을 창조적으로 발굴 육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경쟁시대이고, 문화가 경제를 선도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상상력의 산물이고, 창조경제 또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와 경제는 `함께 가는 동행자`일 수밖에 없다.포항의 문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포항의 연극`이다. 3·1만세운동 3년 후인 1922년 포항 영일 출신 유학생회는 동빈동 가설무대에서 5막극 `은하수를 아십니까`를 공연했고, 출연진 1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들은 20일간 잔혹한 고초를 겪었는데, 이것이 한국인 최초의 `연극인 구속사건`이다. 연극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켜 나가려는 움직임을 일제는 철저히 차단했다. 그러나 포항의 연극운동은 면면히 이어졌으니, 1925년 대송면 출신 동경유학생들이 여름방학때 `순회연극`을 감행했다. 특히 김정진은 문맹퇴치운동을 병행, 부녀자 120여명에게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쳤다. 그 무렵 포항 여성청년회와 기계청년회도 `연극은 통한 계몽운동`에 나섰다.이같은 연극정신은 60년대 초 신상률, 최동주, 김삼일로 이어져 포항연극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김삼일은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며 포항 최초의 `소극장운동`을 펴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때 포항문화의 근간은 연극에 있고, 그 근원적인 정신은 고려조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효정신과 임진왜란 당시 김현룡 창의대장의 저항정신과 구한말 최세윤 의병장의 구국정신에 닿아 있다.포항시가 문화특화도시 조성사업에 선정돼 5년간 예산지원을 받는다면, 포항의 소극장운동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극인 중의 극히 일부라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연극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포항문화의 특화`를 바로 짚어나가는 방향이 될 것이다. 광복 70년·한일국교정상화 50년이 되는 올해, 포항연극정신을 되새겨본다.  /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5

이상한 한국인

삼성의 사회봉사단인 `드림캠프`가 여름방학 동안 농어촌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지도를 하려고“참여할 학생을 모집해달라”고 하자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은 “삼성의 기업이미지를 주입시킬 목적”이라며 거절했다. 3년 전에는 관내 마이스트고와 특성화고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에 우리 전북지역의 학생들을 취업시키지 말라”고 지시했고, “재벌은 온갖 추악한 가면을 쓰고 국민을 기만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국정감사장에서 삼성전자 노트북을 사용했다. 한 네티즌은 “나쁜 기업 삼성 노트를 쓰시네요” 비아냥거렸다.현대중공업이 7분기 연속 적자를 보고 있다. 해양부문 해외 현장 설치 공사비는 불어나고, 일부 공사는 공기가 지연되는 탓으로 올해 2분기 영업손실 1710억원을 기록했고, 2013년부터 7분기 동안 연속 영업적자이고, 지난해의 적자 총액은 3조원으로 창사 이래 최악이다. 그런데 노조는 기본급 6.77% 인상, 성과급 250%, 직무환경 수당 100% 인상, 고용안심협약서 등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겠다고 한다. “회사는 임금동결 등 기존 제시안을 철회하고 납득할 만한 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별다른 진전이 없으면 결의에 찬 행동에 나설 것”이라면서 `날짜별 파업계획`까지 발표했다.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가졌고,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되나”란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인지, 참 이상한 한국인이다.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겉과 속이 다른 사례가 또 있다. 영덕군 `바르게살기협의회`가 “바르게 살자” 구호를 내걸고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회장은 바르게 살지 않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매년 군·도비 3천300여만원의 보조금을 받는데, 회장의 회계부정 의혹 등으로 회원간 마찰을 빚고, “독선적 운영을 하는 회장 물러가라”는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과거 어떤 여성 탈렌트가 노래했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4

장수 수당

공식적인 은퇴나이는 60세지만, 실질적인 은퇴는 71세다. 11년을 더 일해야 겨우 먹고산다는 뜻이다. 80세 넘을 때까지 노동시장을 헤매는 비율도 16%나 된다. 천대 받아가면서 값싼 일자리를 기웃거리고, 폐지를 줍는 빈곤노인이 그렇게 많다는 말이다. 이런 막일조차 못하는 병든 노인들은 자살을 택한다. 자식 바라지에 모든 것을 던져넣느라 자신의 노후대책은 뒷전에 밀린 탓이다. `새벽 노동시장에 나가는 노인, 집에서 노는 대졸 아들`이 있는 `캥거루 가정`이 드물지 않다.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8% 넘는데, OECD국가 중 가장 높다. 또 고령자 간 소득 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국회의원 등 권력층은 `현대판 음서(陰敍)`로 좋은 일자리를 독점·세습하지만, 힘 없는 서민층은 가난밖에는 물려줄 것이 없다. 권력층이 돼버린 10%의 귀족노조는 제 몫을 지키기 위해 임금피크제도 반대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반대한다. 대기업·공기업·공공기관에 들어가야 `귀족`이고, 중소기업에 가면 `천민` 취급 받은 지가 오래다.조선시대에는 `기로연`이 있었다. 70 이상 노인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푸는 경로효친 행사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 지자체들은 `장수수당`제도를 만들었다. 전국 87개 지자체가 80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3만원씩 용돈을 주는 제도이다.그런데 정부 사회보장위원회가 이 제도를 없애라고 압박을 가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복지제도가 중복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장수수당이란 것이다. “장수수당을 없애지 않는 지자체에는 기초연금 지원금을 10% 깎겠다”고 한다.80세 이상 노인들은 `노조`를 조직할 힘이 없어서 `조직적 반대`를 할 수 없고, 선거때가 돼도 `거동이 불편`해서 투표장에 가기 어렵다.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공짜점심을 주면서, 그 알량한 장수수당은 줬다 뺏는다. 선거때 마다 `무상복지`를 외치는 소리는 높지만 노인복지 소리는 없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돼” 탄식만 들릴 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1

상주 곶감테마공원

옛이야기를 지역마케팅에 활용하는 대표적 사례가 남원의 `춘향전`이다. 해마다 춘향제를 열어 `올해의 춘향`을 뽑고 국악대전을 연다. “춘향은 남원 사람이지만, 이몽룡은 강원도 사람 성이성이다” 해서 강원도가 `이몽룡제`를 열고, `김삿갓`이 살았던 곳이 강원도라 해서 `김삿갓마케팅`을 벌인다. 심지어 `조선시대 대표적 음란물`인 `변강쇠`를 두고도 경쟁한다. `청석골`이 경기도와 전라도에 있는데, 두 곳이 “변강쇠가 살았던 곳이 여기”라며, 불에 그슬린 장승을 `증거`로 들이댄다.아이가 하도 울어서 할머니가 “울면 호랑이가 물어간다”고 협박했으나, 울음을 그치지 않자, 할머니가 “곶감 주랴?”하자 뚝 그쳤다. 문밖에서 이 말을 들은 호랑이가 “곶감이란 자가 나보다 더 무섭구나” 생각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곶감으로 유명한 곳이 `씨 없는 반시감의 청도`와 `항아리 같이 생긴 동이감의 상주`인데, 이 동화를 `활용`한 곳은 상주다.상주시에는 감연구기관인 경북도농업기술원 감시험장이 있는데, 여기서`상주감 품종보호 출원`을 했다. 2012년 `국제식물신품종보호협약` 발효에 따른 조치다. 출원을 해두면, 아무도 함부로 상주 동이감 종자를 가져가 재배하지 못하고, 반드시 로얄티를 내야 한다. 상주감시험장은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전역의 감나무 유전자원 274종을 수집 보존하면서 그 특성을 조사, 우량종을 선별해 품종보호 출원을 했다.또 상주시 외남면 소은리에 `곶감테마공원`을 개장했다. 이 곳은 720살 먹은 `하늘아래 첫 감나무`라 불리우는 `감나무 조상`이 있는 마을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을 테마로 하고, 범모형 7개와 곶감모형 6개를 세우고, 우는 아이 `연지`와 호랑이 그림을 벽에 그렸고, 감따기 체험을 위해 모형 감나무도 만들었다.옛이야기 `곶감과 호랑이`를 상주시가 발빠르게 선점해버렸으니, 아이디어 경쟁 시대에 청도군은 그만 한 발 늦었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20

창업정신

창업1세대들은 `신화`를 창조했다. 이병철 삼성회장은 해마다 `동경구상`을 했다.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경제전망 레포트를 받아 보고 이를 투자에 참고했다. 당시 73세이던 이 회장은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다. `처음 가는 길`이고, “기술도 없는 작은 기업이 과욕”이란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당시 산업은행 김준성 총재와 의기투합해서 `험난한 바다`에 들어섰고, 오늘날 세계1위의 삼성전자를 이뤄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의 `해봤어?! 정신`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며 “우리에게 투자하면 갑절로 불려주겠다”고 큰소리를 쳤고, 결국 차관을 이끌어냈다. 기술도 없고 시설도 없는 허공에 지은 회사가 `유조선 2척 주문`을 얻어낸 것은 기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중공업은 오늘날 세계1위에 올랐다.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우향우 정신”도 영일만의 기적을 일궈냈다. 현장사무실 오른쪽이 바다인데,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바다에 빠져죽자!”는 것은 목숨 걸고 종합제철소를 건설하자는 결의였다. 당시 대부분의 정관계 인사들은 “반대”였고, “그 철공소 대못이나 만들겠지” 했다. 박정희-박태준 `양박`의 `이순신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기술력 1위, 조강생산량 5위`도 없었을 터.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기업정신은 “남들이 안 한 것 중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산 라디오 1호 `A-501`이 탄생했다. “라디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첨단산업이라 힘듭니다”란 임원들의 반대를 제치고 만든 라디오가 팔리지 않자 그는 5천대를 농촌에 그냥 주었고, 그것이 `라디오방송시대`를 열었다.지금 IT인재들이 `창업` 대신 김밥집을 `개업`한다. 성공 보장이 없고, 한번 실패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실패도 `자산`인데 정부는 계속 지원에 인색하다. 창업1세대들은 다들`무모한 출발, 실패, 재도약`이란 과정을 거쳤다. 우리의 인재들이 이런 창업정신을 이어받을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9

증거는 차고 넘친다

중국 산시(山西)성 `위현`은 청나라 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는 두매산골이다. 이곳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퇴직한 장솽빙(62)씨는 “이 깊은 산간벽지에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 수백 명이 숨어 산다”는 말을 듣는다. 장씨가 지금 하는 일은 이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일이다. “억울하지도 않느냐. 한국 할머니들은 낱낱이 증언해서 일본의 간악한 범죄를 고발한다. 사과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설득끝에 127명의 증언을 익명으로 녹취했고, 최근 한국 국회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해서 이를 공개했다.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전쟁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혹은 “성 매매 여성”으로 왜곡 비하하지만,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거짓말로 회유하거나, 강제로 나포해서 끌고간 그 악행을 증명할 증거는 계속 나온다. 중국 위현의 일도 장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원히 묻힐 뻔했다. 중국은 이런 증거들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일본이 사과에 인색한 만큼 중국은 더 많은 증거들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철증여산(鐵證如山)이다. 쇠같이 야문 증거가 산처럼 쌓였다는 뜻이다.독도가 한국땅임을 입증하는 사진 한 장이 최근 발견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휴전협정 다음해인 1954년 8월 10일 독도 동도에 세워진 등대가 점등됐다. 이 등대를 1956년 7월 사진작가 김근원이 찍었다. 이 사진 속에는 등대 벽에 ROK(Republic Of Korea·대한민국)란 영어가 크게 씌어 있고, 다른 한 벽에는 성걸봉(聖傑峰)이라 쓴 한자가 뚜렷하다. 울릉도에 있는 성인봉(聖人峰)과 짝을 이룬 봉우리란 뜻이니,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란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지도와 사진이 실로 `철증여산`인데, 일본은 여전히 억지를 부린다.“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지에 조선인 위안부 시설이 없는 곳이 없었다”는 당시 일본군 군무원의 증언도 나왔다. 손바닥으로 자기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늘을 가릴 수 없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8

독립투사의 후손

최근 `인터넷 고서 경매`에 1953년에 쓰여진 편지 한 통이 올라왔다. 수신인은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였고, 발신인은 서왈보의 유가족 서진동이었다. 서왈보는 함경남도 원산 출생의 한국 최초의 비행사였으며,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김원봉의 의열단 단원이었고, 1926년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신익희와 형님 동생하던 사이였다. 편지에서 서진동은 신익희를 백부(伯父·큰아버지)라 불렀다.서진동은 당시 부산 신애원(信愛院)에 있었다. 전쟁 고아 중에서도 장애인들을 수용했던 복지시설이다. 6·25전쟁이 휴전될 당시 서진동은 장애인으로 이 고아원에 살면서 신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백부 대인 각하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저에게 돈 1만원만 주시옵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바라옵니다”로 끝맺었다. 국회의장에게 취직을 부탁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도장 파는 재주를 익혀 도장포를 내려 해도 돈이 없으니, 1만원만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독립운동가의 집안은 3대가 망한다 했다. 숨어 다니는 처지라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고,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에 투입했으니 교육받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수 배호의 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는데, 부산 피난시절에 굶어죽다 시피했고, 배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노래를 불러 생계를 이어갔지만, 서왈보의 아들 진동은 장애인으로 도장포 하나 낼 형편이 못됐다.`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3년째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해외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에게 주택알선, 정착훈련, 국민연금 가입 등 지원을 확대하자는 것이 골자이다. 독립운동가의 손자·손녀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도 2년이나 국회에 묶여 있다. 보상금 외에 생계급여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의 유가족들에게 한국국적을 주는 일만 겨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이 정착할`돈 1만원`을 줄 형편은 되는데도 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8-17

해방 70주년의 비애

올해 8월15일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는 물론 민간단체서도 자축행사를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다. `해방 70주년 기념사업 준비 위원회`까지 만들어놓고 또 외교적으로는 일본 수상인 아베 신조의 정치적 메시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휴전선 철책을 수색하던 우리 장병 두 명이 지뢰를 밟아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북한군의 소행이란다. 70년 전 해방이 가져온 분단의 비극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서 목숨도 마다않고 내놓았다. 이 한복판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을 때 정작 임정은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 임정요인들은 왜 미군정에 대해 제2의 독립투쟁을 하지 않았을까. 조선총독부에는 온몸으로 저항을 했던 그들이 미군정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너그러웠을까? 또 궁금하다. 전범국인 일본은 천황도, 국토도 그대로 두고 피식민지국가로써 피해당사자인 우리나라는 왜 국왕도 없애고, 국토마저 분단시켰는지. 열강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말은 `남의 탓`에 불과하다. 무장 항일투쟁도 불사했던 임정으로서는 더 강력한 저항을 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찾았어야 했다. 당대 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러지 못 했다.해방직후의 이런 정국을 이원수는 그의 동시`돌다리`에서 “비는 개었지만 물이 불어서,/ 건너가는 이마다 옷 적시는 시냇물”에 비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利慾)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 장군처럼 사방에서 큰 소리를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나의 문학 나의 청춘`중)라고.그날의 이욕 때문인지 무능 때문인지 몰라도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늘날 휴전선에서 지뢰가 터지고, 대북확성기가 울분의 소리를 터뜨리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것이 해방 70주년을 맞아 축하 이벤트에만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이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8-13

광복 70주년, 대한의 산상 노인을 찾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부침의 격변 속에서도 세계 10위권 경제국으로 발돋움한 사실만은 높이 평가해야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질긴 당쟁의 사슬에 얽매여 갈팡질팡하고 있는 현 정세(政勢)는 안타까움 바로 그 자체다.국회의원들의 속내가 자못 궁금해진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에서 300명인 국회의원 수를 369명으로 증원(안)을 내자 원내대표가 즉각 390명으로 화답하고 나섰는데 요지는 36명인 비례대표를 서너 배 늘리자는 발상이다. 국민들의 시선이 차갑다. 국가 경제 현실과 동떨어진 한심함과 대리운전 기사 폭행 등 사건과 막말의 중심에 항상 비례대표 의원들이 첨병처럼 포진해 왔기 때문이다.세월호대책위원회 예산안이 설왕설래하고 있다. 금년 6개월 분 요구 예산 160억원이 동호회비 등 절사로 89억 원으로 삭감된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9·11테러조사위원회가 21개월 동안 165여억원을 쓴 것과 비교해 보면 진위의 파악이 어렵지 않다. 참척의 슬픔은 크다. 그러나 그만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어쨌든 그들이 독립군이나 천안함 전사자 등에 우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당시 유치원생 사상자 28명과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사상자 343명의 경우도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산상 노인은`하산 사바흐`의 별호다. 그는 11세기 말 이란 엘부르즈산맥에 알무트 요새를 구축한 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칸에게 함락될 때까지, 정예 암살단을 이끌며 배후에서 160여 년 동안 중동의 질서를 지배했다. 혼돈을 넘어 그만의 정의와 가치의 깃발을 드날린 것이다.신중년이라는 용어가 대두되고 있다. 60~75세의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만큼 수명이 증가했다는 표증이리라. 그러나 이면에는 노인들의 생활고와 각종 범죄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나는 기대해 본다. 노인들 중 그 누구라도 한 사람, 대한의 산상 노인이 되어 탕평보다는 질서를, 방자보다는 염치의 힘찬 깃발을 세워 주기를./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8-12

인문학협동조합

며칠 전 인문학협동조합에서 정의(正義)에 대해 강의했다. 그때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전에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어떤 상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개인의 업적에는 좋을 수 있으나 조직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참으로 열심히 일하기도 한다. 성과급제가 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기도 하니,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때로 이런 개인의 행복추구가 다른 이의 행복을 방해하기도 한다. 나의 행복이 공동체 전체의 복지에 관련될 때 정의문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개인의 행복추구가 정의를 해치거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개인은 불행해질 수도 있을까?협동조합은 아무래도 조합원뿐만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협동조합의 정의에 의하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체를 통해 조합원들 공동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 결사체를 말한다. 따라서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 민주적 관리, 자율과 독립, 협동조합 간의 협동,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등의 원칙을 가진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고 지금까지 수많은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있다. 그전부터 있던 소비자중심의 협동조합뿐만 아니라 문화협동조합, 예술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얼마 전에는 협동조합을 가장해 조합원의 돈을 가로챈 다단계업체가 많은 이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그럼에도 협동은 원래 서로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의 정신은 자기의 개인의 이익을 공동의 이익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내가 생활하는 곳을 잘 살게 하면 나도 곧 잘사는 것이 아닐까? 나의 행복추구가 공동체의 행복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이상형(철학박사)

2015-08-11

요정은 없을까요

영화 `극비수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한 번 더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범인을 잡고 공적을 올리고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이를 찾고 구하기 위해 극비수사를 선택하고, 형사와 도사는 콤비를 이룬다.소위 도사라고 불리는 무속인 김중산은 사주풀이를 통해 유괴된 아이가 살아있음을 확신하고 또 `공길용 형사의 사주여야만 아이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공길용이 유괴 사건을 맡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개수사를 종용할 때, 소신을 굽히지 않고 공길용의 뒤에서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다.빙의된 처녀 귀신이야기, `오 나의 귀신님`도 장안의 화제다. 역시 무속적인 소재에서 출발하는 환타지다. 주인공 나봉선은 평소에는 이성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다가 처녀 귀신과 함께라면 낯 뜨거운 돌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늘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봉선. 저렇게 소극적이고 유약하다면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고 나쁘게 만드는 죄가 될 것 같다. 무거운 고개를 푹 숙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걷던 아가씨가 씩씩하고 적극적으로 눈빛부터 달라지는 것을 보면 오히려 신이 난다. 아주 밝고 활기찬 요정이 여리고 착한 주인공의 사랑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드라마가 재미있어졌다.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손바닥 안에서 확인하는 세상에 이 무슨 역설인가? 종교적으로도 전혀 용납 안 되는 이야길 수도 있겠다.하지만 요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요정이 없다면 마음이 무너질 듯 답답하고 쓸쓸하던 산책길 숲 속의 위로는 누가 들려준 것일까? 꽃잎이나 바람 속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목소리와 손길은 또 누구의 것일까?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아이를 자라게 하던 주인공들은 다 누구일까? 오늘 같은 날 여기저기 얼음 요정들이 둥둥 떠다녔으면 좋겠다. 덥고 짜증나는 마음이 시원해졌으면 참 좋겠다. 만만찮은 납량특집이겠다./윤은현(수필가)

2015-08-10

웰다잉

웰빙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웰다잉(Well-Dying) 논의가 한창이다. 웰다잉 교육이 정부 차원에서 실시된다. 죽음을 이해하고 존엄을 유지하면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미리 준비시켜주는 체계적인 죽음 준비 교육 프로그램을 정부산하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국민건강보험공단은 `아름답고 존엄한 나의 삶`을 주제로 6주짜리 죽음준비교육 시범사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사업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바꾸려는 취지라고 설명한다.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동물과 다르게 인간만이 죽음을 선취하여 존엄한 최후를 선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삶을 채우는 열정 못지않게 죽음을 준비하는 열정 또한 아름답다.연일 폭염이 대지를 달구고 있다. 결실을 위한 자연의 마지막 열정이다.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죽음을 아름답게 할 인생의 컨텐츠는 무엇인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열정은 무엇인가?열정이라는 말의 영어 `enthusiasm` 은 보통은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속에 있던 것을 밖으로 화끈하게 내보는 것`을 뜻한다. 즉 `out` 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어 `enthusiasm` 은 `en`이란 말과 `thusiasm` 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en은 `in` 이란 뜻이고 `thusiasm`은 `theos`에서 나왔다. 즉 열정은 `신(神) 안에 있는 것`이다. 신적 영감 속에서 신명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신적 위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인생을 행복한 열정으로 채우는 것이리라.죽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맞이한 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난다. 내가 집을 방문했을 때 말기암으로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하루 앞둔 고통 가운데서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와 나의 가족들의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몇 장의 지폐를 꺼내어 주면서 나의 어린 자녀들에게 과자를 사 주라고 했다. 임종 몇 개월 전의 어느 새벽에는 예배당에 혼자 남아 천국에 대한 소망을 담은 긴 노래를 끝절 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환한 오전 햇살이 비치는 날 그녀는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갔다./곽규진(목사)

2015-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