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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무야! 왜 사니?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다. 나무 하나와 그 나무에 핀 꽃 하나 있는 화분이다. 홀로 있는 작은 나무를 보니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결국 혼자 사는 것이니. 나무의 삶은 목적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은 목적이 분명하다. 연필은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잘 쓰이는 연필은 자신의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이고 탁월한 삶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이나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무는 왜 사는 것일까? 우리 인간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니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만약 내 삶의 목적을 알 수 있다면 내 삶도 그 목적을 잘 수행할 때 나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 삶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노동과 상호작용. 내 밖의 외부세계와 마주쳐 나의 생존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 등은 모두 노동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만 친구를 사귀고 직장에서 선후배, 상사와 일 외의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는 일을 잘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내가 직업을 선택하고 노동하는 이유, 목적은 무엇일까? 오늘날 아마 많은 이들은 돈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돈 때문에 일을 하나? 아니면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따라 오나? 만약 돈 때문에 일한다면 그 일은 돈으로 보상받을 때만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한 달에 한번 받는 월급을 위해 노동의 수고와 힘듦을 참고 견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노동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끝나고 난 뒤의 시간, 즉 여가, 휴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라 규정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그러나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많은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노동으로 삼는 것. 나무도 나무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때 행복하지 않을까?/이상형(철학박사)

2015-06-16

테러리스트는 누구인가

볕이 잘 닿지 않는 보도 블럭 사이에 이끼가 웃자랐다. 마치 초록 융단처럼 부드러워 보여서 쓰다듬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소위 고층에서 살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육교 위 먼지 틈에도 뿌리 내려 꽃을 피우는 풀꽃이 가슴 아프고, 베란다까지 날아온 풀씨가 귀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화분 귀퉁이 괭이풀을 그대로 두기도 했다.이끼가 자라는 사이 아파트 담벼락 밑으로는 잡초들도 제법 자라고 있었다. 익숙한 들풀이긴 하지만 그들이 눈에 띈 것은 분명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수가 심어진 흙바닥에도 조금, 어쩌다 용기를 낸 몇 포기는 인도의 제법 가장자리까지 진출해 있었다. 되도록 그들을 피해서 발을 내딛던 마음은 역시 고층에서 이십년 넘게 살고 있는 삭막한 배경 탓일까. 그렇게 가끔씩 눈에 혹은 마음에 들어오던 것들이 오늘은 모두 파헤쳐져 연약한 실뿌리를 다 드러내고 누워 있다. 올 것이 오고 만 것,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잘 정돈된 것만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지금까지 참아 넘겨준 것만도 용하다고 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인도 한가운데 성가시고 고집 세게 자라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파악 못한 채 잔디 정원 가운데서 유난을 떤 것도 아니고, 아파트 울타리 밑으로 바싹 붙어 눈치 보며 자리 좁혀 자라던 것들. 그것도 초록이라고 귀하고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길과 마음도 그들과 함께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우리는 산을 깎아서 콘크리트를 높이 세워서는 허공에다 칸을 나누고 도장을 꾹꾹 찍어 다 차지했다. 그것도 모자라 길 끝까지 아스팔트를 깔고 인도에도 빈틈없이 블록을 꼭꼭 덮어놓았다. 도장 하나 갖지 못한 순박한 주인들은 어디까지 쫓겨난 것일까.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청설모며 두더지며 개미들까지 온갖 나무며 들풀과 함께 집을 짓고 살던 터전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고 이주했을 것이다. 풀들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깜깜한 틈사이로 고개 내밀다 오늘은 뿌리째 뽑혀났다. 백 년 쯤 머물다 갈 세상에 너무 대단한 것들을 세워놓은 건 아닌지 문득 돌아본다./윤은현(수필가)

2015-06-15

선택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까?`, `어디갈까?`, `누구를 만날까?`모든 삶이 선택이다. 선택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우선 순위이다. 모든 판단에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작용한다.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일과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중요하지 않지만 빨리 처리해야 할 일과 중요하지도 않고 빨리 처리하지도 않은 일 등을 잘 구분할 수 만 있다면 선택은 용이하다.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들이 나의 선택과 관련없이 주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시점과 장소, 나의 부모, 나의 유전적인 특질 등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다.내가 왜 아프리카나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고, 신라시대나 조선시대가 아닌 이 시대에 살고 있는가? 질병의 원인들도 나의 생활태도 보다도 유전적인 특징으로 부터 더 많이 기인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의 우선순위는 개별적인 상황의 선택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야 한다.토기장이와 그릇 이야기가 있다. 모든 진흙덩이가 그렇듯이 진흙은 질그릇으로서 최고의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잦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꿈을 꾼다. 다행인 것은 토기장이가 이 나라 최고의 장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잦집으로 팔려갔다. 어느 날, 토기장이가 진흙을 반죽했다. 진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모습을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러나 조금 지난 후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 불가마에서 나온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이 토기가 된 진흙이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다.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토기는 또다시 놀랐다. 그 농부는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이 토기를 보고 너무 기뻐했다. 이 토기는 두 손이 잘린 사람이 사용하기 용이한 변형된 토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흙은 자신을 흉측하게 빚은 토기장이의 생각을 깨닫고 그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나무 하나하나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는 숲 전체를 볼 수 없다. 사람이나 진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삶의 우선 순위이다./곽규진(목사)

2015-06-12

노란색의 심리학

요 며칠 사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공포가 나를 텔레비전 앞에 끌어 앉혔다. 평소 지상파방송을 통해서 뉴스를 듣고 나면 종편으로 채널을 돌려 그 `종편스런` 평론(해설, 독설, 섬어 등)을 나름대로 즐기면서 듣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아니다. 불안한 마음은 그 어떤 섬어조차 괜스레 솔깃해진다. 이런 차에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여러 공무원들이 입은 노란 점퍼가 눈에 띈다. 메르스 확산방지 비상회의, 기자회견, 국무회의 등 모든 회의 때마다 그들은 노란점퍼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 점퍼의 노란색이 새뜻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연의 색깔이 아니라 비상상황임을 보여주기 위한 대국민용 맞춤 색깔이어서 일까. 아니면 사태의 긴박함이나 다급한 대응이 없어서일까. 그들은 늘 입고 있던 양복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노란점퍼로 바꿔 입고는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안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 노란색에는 혼선과 불안만 보인다.노랑은 눈의 피로를 줄이고, 정서순화와 안정성을 높여준다는 심리학적 분석이 있다. 흰색이 순수함의 이미지라면, 노랑은 포근함으로 우리의 가슴에 닿아 있다. 노랑의 따뜻함과 배려가 함께 어울릴 때 주변은 풍성해 진다. 이른 봄 거뭇한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가 주변을 환하게 하며 희망을 몰고 오듯이. 가을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황금들판이 풍성하고 넉넉함으로 다가오듯이.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꼬마아이의 노란 원복이 앙증맞고 귀엽게 보이듯이. 또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노란리본의 물결이 저민 가슴을 달래주듯이. 색깔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닿아있다.다시 먼 훗날, 우리가 국가적인 재난이나 비상사태에 빠졌을 때 공무원들이 입고 나오는 그 노랑점퍼에서 우리는 그들의 `다급함`과 `땀`을 보고 `안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땐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함이 배어 있는 노랑이기를 기대한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11

자유 그리고 자유인

자유에 대한 사유가 자못 깊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표증이리라. 자유를 사전에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풀이하고 있다.매주 목요일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서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열린다. 30여 년 전통의 인문학 강좌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00여 명의 수강자 중 상당수가 ― 남녀 할 것 없이 육칠십 대의 고령이라는 점이다.주관자인 노교수는 풍재(風裁)가 남달랐다. 단순히 동안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십여 년을 초월한 젊음보다는 예의와 겸양이 일상화된, 말 그대로 퇴연(退然)함이 물 흐르듯 하는, 해맑은 표정과 몸에 밴 화사한 겸손의 절제된 자유 의지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노교수는 주어진 일상의 하루하루가 수도였으며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자유인의 삶 자체로 보였다.노교수와의 만남은 자유에 대한 사유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자유를 `자타의 다름을 인정하고 비교 분석하지 않으며 투쟁에서 놓여나는 일, 비우고 내려놓는 일이다. 비운다는 것은 멸시와 배척, 회한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내려놓는다는 것은 연민과 동정, 안타까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는 말로 새롭게 정의를 내렸다.두 사람의 자유인을 만났다. 한 사람은 목요철학 인문포럼의 노교수이고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그 동창생은 “친구란 하루 열 번 만나도 경제력 있는 사람이 돈을 써야 된다”라는 말을 아주 당연하게 주장하는 색다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 또한 진정한 자유인임에 틀림없다.자유는 일정 부분 도(道)와 공통분모를 지향한다. 일상 속에서의 개념이 그러하고 대중 속에서의 개념이 또 그러하다. 거기에 공유(空有)의 개념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을 전제하지 않는 자유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유란 홀로 걸어가며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타가 함께 평형을 이루어, 군중과 함께 중화(中和)의 호흡을 하는 가운데 자유 본연의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10

계몽의 시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점차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하며 어느 때보다 건강에 조심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은 퇴근해 집에 들어갈 때마다 손 씻으라 재촉한다.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때 불안하며 그것에 대해 두려워한다.인류사를 계몽의 역사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도 모르는 것을 차츰 알게 됨으로써 인류의 지식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아주 예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자연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거나 신화를 만들어 우리가 이해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합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미신이나 신화를 우리의 이성이 납득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이다.따라서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자유와 비판적 정신, 과학의 힘으로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인간의 이성이 어둠을 정복해나가는 역사이다.예전에 아버지와 나 둘만이 산에 간적이 있다. 텐트를 치고 밤에 홀로 산길을 올랐다.그러나 깜깜한 밤에 처음가본 그 길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나의 상상력에 의해 나무의 그림자는 거인이나 귀신이 되고 풀벌레의 작은 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결국 얼마 못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시 올라간 그 길은 너무도 평범한 산길이었다. 환한 빛 아래 어떤 상상의 여백도 남겨 놓지 않은 공간은 두려움이나 불안과는 거리가 멀었다.메르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우리가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이 필요한 시기이다.왜냐하면 계몽은 언제든 다시 미성숙이나 야만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상형(철학박사)

2015-06-09

웃음의 힘

기차를 타고 작은 역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수화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연인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얼마나 화사하게 오직 웃기만 하던지. 남자의 손은 도대체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에 연인을 저렇게 아름답게 웃게 할 수 있는지, 할 수만 있다면 다가가 엿듣고 싶을 지경이었다. 역사 마당엔 오래된 벚나무가 있고 신록은 꽃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이고, 연인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찌르며 빠르게 전파되었다. 기차 안이 조금씩 환해지고, 누구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웃어주고 싶어졌다. 자신을 망가뜨려서라도 여러 사람을 웃게 해주는 지인이 있다. 채신 좀 지키고 조용히 해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배려이며 친절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웃지 않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 그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그는 몇 달 째 웃음을 잃고 있다. 눈치만 살피며 그가 다시 부산하게 웃어주길 기다리느라 살얼음판을 건넌다. 그가 온 몸으로 녹이고 깨어주던 얼음이었을 것이다.웃음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호르몬을 조절하여 스트레스를 날리고, 여러 개의 근육을 활용하는 운동효과를 주고, 혈액순환을 도와주기도 한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좌절과 분노의 배출구가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바보로 만들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개방하여 사람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유머는 신뢰이며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던질 수 있는 편안함이야말로 자신감과 여유가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반칠호 시인의 시 구절이다. 중동에서 출발한 흉흉한 것보다 우리의 웃음이 이리저리 담을 넘고 더 빨리 날아 다녔으면 좋겠다./윤은현(수필가)

2015-06-08

선한 영향력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곳이다. 작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을 따 교황명을 지었다 해서 더욱 그러하다.1253년 완공된 성당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리고자 건립됐다.이 성당은 1997년 9월26일 두차례의 강진으로 크게 붕괴되고 조토 등 유명화가의 벽화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하지만 2년 정도의 짧는 기간 안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 5년이 지나고도 복원의 헛점을 드러낸 숭례문 복원과 대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향력은 건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800년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고 끊임없이 전설이 되었다.아시시 수호성인을 넘어 심지어 반려동물들을 축복하는 환경보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축일인 10월 4일 세계의 애완견들이 성당으로 모여든다.성서에 기록된 `전대를 갖지 말고 빈손으로 전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받아 걸식수사가 된 프란치스코는 1210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알현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98년 37세의 젊은 날에 교황에 올라 교황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교회사에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교황은 프란치스코의 남루한 옷을 보고 무시하는 자세로 그를 시험코자 “형제, 돼지들한테나 가 보시오. 그들과 함께 구르며 당신이 그렇게 훌륭하게 만들어 놓은 수도회칙을 돼지들에게 설파해 보시오”라고 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돌아와서 “성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황은 그 수도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해 주었고,그로 인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서거한지 8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세계에는 그의 영향력이 상상할 수 없이 지대하다.사람의 영향력은 두 종류가 있다. 계급과 지위가 주는 권력의 영향력과 인품과 섬김이 주는 권위의 영향력이 있다. 우리 인생은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본질적인 힘은 선한 영향력이다. 좋은 영향을 끼치자./곽규진(목사)

2015-06-05

말의 변비증

“한 쾌의 혀가 /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 막대기 같은 생각 /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최승호 `북어` 부분)지난 토요일, 서울역사(驛舍)를 빠져 나오는데 풍물소리가 신명나게 들렸다. 광장에는 만장 같은 깃발이 펄럭이고, 한 무리 풍물잽이들의 가락에 뜨거운 햇살도 출렁출렁 흔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광장에는 두 무리만 있었다. 머리띠를 두르고 노란 조끼를 입은`그들`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신명도 나고 시끄럽기도 한 그 풍물소리를 들은 척 만 척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최승호 시인의 `북어`라는 시가 떠올랐다. “자갈처럼 죄다 딱딱”해 진 혀와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그리고 “빳빳한 지느러미”를 가진 식료품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북어.`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여기저기 걸어 둔 현수막의 글귀로 봐서`그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회원들이다. 그들은 얼마 전 헌재가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판정한 것에 대한 규탄 시위를 벌이는 모양이다. 그간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전교조가 교사들의 단체라는 것은 안다.`그들`이 불법단체의 회원이라면 과연 이것이`그들`만의 문제일까. 교사는 학생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학생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이 단순한 도식은 교사의 문제는 우리(또는 우리 아이들)와 직결된 문제이다. 그런데도 `그들`만이 모여서 뜨거운 햇살을 출렁이며 분풀이 하듯 신명나게 풍물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만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치고 싶은 것일까. 북어가 소리친다. 귀가 먹먹하도록.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귀 닫고, 눈 감고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고 복잡한 서울역 광장을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그 광장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헤엄쳐야 하는 것은 “꼬챙이에 꿰어진 북어”가 아니라 광장을 오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6-04

21세기의 소방, 그 얼굴

유월이다. 유월이 되면 짙푸른 녹음이 절정을 이룬다. 그 녹음이 새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지도 모른다.짙푸른 녹음 속 특별히 경건해지는 곳이 있다. 호국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그 현충원에 2012년 5월, 소방공무원들의 오랜 숙원인 소방공무원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었다. 경찰공무원들이 1985년부터 별도 묘역에 안장된 것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길고 긴 각고의 세월이었다.소방 조직은 부침을 거듭해 왔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경찰 산하에서 개청된 조직은 1975년 다시 민방위본부 산하로 흡수되었고, 200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 기관인 소방방재청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해양경찰청의 해체와 더불어 2014년 본의 아니게 국민안전처로 통합되고 만다.현재 대한민국에는 18개 소방본부, 200개 소방서에서 4만여 명에 이르는 소방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묵묵히 `안전한 나라, 행복한 국민`이라는 비전 아래 일제히 공동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최근 5년간, 매년 평균 6명의 소방공무원이 순직하고 3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현실이 숨어 있다.소방공무원은 분명 품위 있는 직종이 아니다. 더욱이 소방공무원은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칭찬해 주지 않아도 묵묵히 그 소임과 사명을 다해 왔다. 재난과 자연재해의 절박한 현장,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소방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았던 것이다.모든 일에는 변환의 시점이 있다. 또한 독립관청만이 지고선일 수도 없다. 그러나 소방의 변천사와 소방공무원묘역 등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왠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중심축 가시권 핵심 분야에서 언제나 동떨어져 온 소방의 이정(里程)에 우직한 소방공무원들의 자화상이 클로즈업 되기 때문이다. 호국보훈의 달, 그 짙푸른 녹음 아래서 바라본 소방의 얼굴이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6-03

갑질공화국

대한민국이 갑질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이 올해 6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갑을관계나 갑질의 횡포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놓여 있다는 소리이다. 아무래도 법에 의해 상대적으로 엄격히 보호받는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고용주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용주에게 감히 불평할 수 없는 피고용인뿐만 아니라 빈곤과 파멸을 피하기 위해 채권자나 은행직원의 관대함에 의존해야만 하는 채무자, 그리고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세입자도 이런 갑질에 놓여 있다. 오늘날 어떤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새로운 지배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예전에 있었던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이제 모두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주인과 노예라는 사회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일상에서 새로운 지배와 노예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생존을 위해 경제적 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오늘날 고용주는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경험하는 것은 지배의 일상화인가?지배와 예속의 반대는 자유이다. 그렇기에 현대 공화주의자들은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외치고 이 자유를 위해 법과 규칙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법이나 규칙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갑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치가 아니라 법치가 존재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라는 것도 법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들이 그 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사마천의 `사기`에도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10배 많으면 헐뜯고, 100배 많으면 두려워하고, 1천배 많으면 그의 심부름을 하고, 1만 배가 많으면 그의 종이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전과 오늘날의 사람관계는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평등한 국민, 모두가 주인인 회사, 서로가 존중하는 가정을 꿈꾸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이상형(철학박사)

2015-06-02

민들레처럼 별처럼

권정생 어린이 문학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를 선생 1주기에 맞추어 다녀온 기억이 있다. 당신을 추모하는 어떤 일도 말리셨다지만, 고무신 한 켤레 놓여있던 댓돌에 영정 사진 놓고, 소박하게 모인 사람들이 국화꽃 한 송이씩을 바쳤다. 그저 선생을 기억하고 싶어 모인 사람들은 여느 추모식장과는 분위기를 달리했다. 먼 길 마다않고 찾아온 독자들, 혹은 아이들, 아니면 동네 할머니들이 슬리퍼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마당가에 앉았다간 눈물을 닦으며 코를 길게 소리 내어 풀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고 했다. “고무신 신고 추리닝 입고 망태기를 들고 다니면서, 이웃들을 잘 도와줘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아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장례식 때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선생은 평생 교회종지기로 사셨지만, 이 땅 위의 우상과 마귀는 마을 앞 서낭당이나 성주단지 혹은 고시레와 까치밥, 차례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전쟁 혹은 핵무기와 독재와 폭력과 자기밖에 모르는 욕망이며 독선이라고 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느냐`는 나무푯말이 그가 치던 종탑 아래에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우리가 고루고루 잘 살려면 많이 벌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적게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다. 내 것을 나눠준다는 자선이란 말을 정당화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다고도 했다. 그저 남 탓이나 하고,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퇴락해가는 탑이 있는 작은 마을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중심이 되는 것을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남기신 뜻대로 고인의 유골이 뿌려진 빌뱅이 언덕을 돌아내려왔다. 바람이 눈비를 몰고 지나갔을 테지만, 한때는 선생의 몸을 이루었던 하얀 가루가 꽃씨처럼 강아지 똥처럼 힘없고 작은 모습 그대로 발밑에 남아 있었다. 또 다시 민들레꽃을 피우고 별빛이 되어 흐르고 있을 것이다./윤은현(수필가)

2015-06-01

섬김과 나눔

그녀는 홀몸노인들에게 10년째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고 있다. 이 마을 유일한 고등학생인 그녀의 아들은 준비해 놓은 식재료와 야채들을 다듬고, 씻고, 칼로 자르고, 빻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잔심부름도 하고 완성된 반찬을 통에 담아서 배달한다. 집에서는 잘 해보지 않는 일이라서 학생에게 그리 쉽지는 않다. 한 가지의 반찬이 만들어지기까지는 1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가정마다 배달할 때 이 학생은 참 보람되고 뿌듯하다. 할머니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며 손을 꼭 잡고 열심히 공부하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챙겨놓은 과자도 주고, 빨간 앵두를 따서 비닐봉지에 넣어 건네주기도 한다.겨울이면 연탄불을 피우는 분들이 있어서 연탄불을 갈아주기도 하는데, 덤으로 해 드리는 그 만의 서비스이다. 말로만 듣던 연탄불 갈기. 뚜껑을 열면 연탄가스가 마구 올라온다. 손으로 입을 가린 뒤 아궁이에 있는 연탄을 꺼내고 새 탄을 넣는다. 가스냄새를 맡아야 하고 뜨거운 불을 가까이 하는 일이 매우 힘든다.한 분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다. 걷지도 못하는 그 할머니가 교회에 가고 싶어 하신다. 그녀의 유일한 외출 기회다. 미안해서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워 한다. 학생이 반찬을 나누면서 주위 어른들과 협력하여 휠체어를 밀어드리기 시작했다. 귀가시간이 되면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차로 이동한 후 집에 도착하여 다시 휠체어에 태우고 집안까지 모셔 드린다. 할머니는 그에게 “학생 고생시켜서 미안해”라는 말로 고마움의 인사를 하신다. 휠체어 봉사를 통해 장애인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가까이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할머니들은 반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립다. 이 학생은 반찬을 드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빈 반찬통에 할머니의 사랑을 가득 담아 돌아온다. 작은 나눔은 큰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효(Hyo)는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의 조화이다(Hamony of Young Old).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효도가 세대간 섬김과 나눔으로 실천 확산되기를 바란다./곽규진(목사)

2015-05-29

지식의 설사

한 문학 강연회에서 월북 아동문학가 윤복진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청중이 질문을 했다. 윤복진은 월북했는데, 그 사상을 검토하지도 않고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곤란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일제 강점기 남한에서의 문단 활동과 월북이전의 작품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냐고 답을 했다. 그래도 그는 월북동기를 따져야 하고, 월북이후 친북 성향의 활동까지 포함시켜 판단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언쟁이랄 것도 못되지만, 그 사람과 불쾌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설사를 떠올렸다. 이른바 설사는 내 몸 안에 들어온 음식이 소화를 못할 때 생기는 `배탈`이다. 아랫배가 살살 도는 게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괴롭다. 이 청중은 지금 `지식의 설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식의 설사는 머리에 들어온 정보를 충분히 곰삭히지 못한 채, 과시욕을 부리며 들어온 말을 자기방식대로 내뱉는 `뇌탈`이다. 그는 자기의 문학적 소견이 넓은 것을 과시하듯이 몇몇 유명시인의 시를 줄줄 외워가며, 누구는 어떻고 또 누구는 친일을 했으니 반역이라고 했다.설사는 장 속에서 흡수가 안 되는 물질에 의해서 발생되기도 하지만, 염증 등 장 질환에 의한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설사도 두뇌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어려운 용어들이 들어와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주장 등 이데올로기적인 증상인 경우도 있다. 설사에 대한 처방은 약물로도 가능하지만, 끼니를 굶고 따뜻한 보리차 등으로 장을 달래주면 된다. 지식의 설사도 마찬가지다. 현학적인 용어를 받아들이지 말고,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나 개념 등을 차분히 곰삭히는 사색의 시간을 가져서 뇌를 달래주면 된다.소화가 덜 된 음식의 설사는 구린내를 풍기기는 하지만 본인 혼자만 괴롭다. 그러나 지식의 설사는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정작 본인은 즐겁다. 최근 각종 문화강좌가 확대되면서 강사도 청중도 뇌탈현상이 자주 나타나는 것 같다. 오늘 내 강연이 지식의 설사는 아니었는지, 그 청중을 보며 돌이켜본다./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5-28

도인(道人)들의 나라

아침 산행길이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를 보낸다. 촉촉한 머릿결이 흡사 오월의 산자락처럼 풋풋하고 싱그럽다. 여인은 내리면서 다시 고개를 숙여 목례를 보낸다. 목례가 이처럼 고상하고 우아하게 느껴진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오월의 밝은 햇살아래 서너 발 앞서 걸어가는, 스커트에 감춰진 여인의 커다란 엉덩이가 더없이 건강해 보인다.산길은 각양의 사람들이 마주하는 공간이다. 때로 정감이 가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중 산에 비견되는 풍도(風度)를 갖춘, 80대 초반 신사 할아버지와 명랑 할머니를 만났다. 인사말을 건넬 때마다 할아버지는 절도 있는 거수경례로, 검은빛 선글라스를 낀 할머니는 두 옥타브쯤 높은 톤으로 답례를 한다. 산새들이 후드득 날아가고 “안·녕·하·세·요!….” 한껏 높아진 할머니의 고성은 작은 파편 조각으로 흩어져 산자락 바위 절벽에 콕콕 들어박힌다.편부 슬하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대학생인 그는 학비 충당을 위해 방학 때마다 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와 저녁을 함께 했다. 3일 휴가를 받아서 행복하다는 그는 명절 때마다 친가와 외가 할머니에게 용돈과 선물을 잊지 않는다. 고된 일을 하다 보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발심이 든다며, 이십 대의 나이를 부모에게 기댈 나이가 아닌 부모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될 나이라고 했다.경제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다. 특히 젊은이들이 힘든 시절이다. 비정규직과 파트타임을 전전하는 갓 서른의 여성으로 다시 백수가 된지 한 달여 가까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오륙 년째 매달 삼사만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희사해 오고 있다.일상이 도(道)라는 말이 있다. 중국 명(明)시대 왕간(王艮)의 “백성일용즉도(百姓日用卽道)”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 도란 산속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침에 잠을 깨어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일상 속에 도가 있는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 국회(國會)스러운 사람들을 제외해 보면 ― 대한민국은 알게 모르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도인(道人)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眞易 전병덕(수필가)

2015-05-27

성년의 날 선물

몇 일전 아침에 학교에 들어서는 데 꽃을 파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어버이날도 지나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왜 꽃이지 하며 잠시 궁금했었다. 나중에 동료가 이야기해 준 사실이지만 성년의 날이란다.우리나라는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기념한다. 그런데 올해는 그 성년의 날이 5·18 민주화운동기념일과 겹치게 되었다. 1980년, 그때의 광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스러졌지만 그 중에는 성년이 막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기념일을 정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5·18, 그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또 하나는 새로운 동료가 된 성인의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누군가의 현재 모습을 알고 싶다면 우리가 물어볼 것은 그의 과거이다. 과거를 보면 지금의 그를 알 수 있다.왜냐하면 나의 지금 모습은 과거에 내가 했던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미래의 자기 모습을 궁금해 한다. 그러나 굳이 점을 볼 필요까지 없다.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많이 노력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현재의 내가 모인 결과이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우리가 5·18을 얼마나 기억하고 보존하며 계승했는가에 달려 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지 본다면 미래의 세상도 알 수 있다. 만약 민주화 운동이 단지 정부나 정치권의 연례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면 올해 성년이 된 미래의 주인공들이 누릴 세상도 민주화된 세상과 거리가 멀 것이다.성년의 날 선물은 장미와 향수, 키스라고 한다. 장미는 젊음의 열정과 사랑을 계속하길 바라며, 향수는 타인에게 좋은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고, 키스는 책임감 있는 사랑을 바란다는 의미란다. 사랑, 책임, 매너가 있길 기원하는 것도 좋지만 민주화된 사회를 물려주는 것도 좋은 선물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며 사랑일 것이다./이상형(철학박사)

2015-05-26

막말

막말논란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개그맨 장동민이 그렇고, 한 정치인이 그렇다. 그 개그맨은 과거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 쌍욕, 여성비하, 삼풍백화점 피해자 모욕 등이었다며 비난을 받고 있다. 또 국회의원 정청래는 공식회의 자리에서 상대 의원을 향해 `공갈치는` 등의 막말을 하였단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그 정도에 차이가 있다. 전자가 사고 피해자인 약자를 겨냥한 발언이었다면, 후자는 회의과정에서 예의를 갖추지 못한 발언이라는 점이다. 또 그 발화의 의도도 다르다. 개그맨의 막말이 웃기려는 의도였다면, 정치인의 막말은 실천 없이 말로만 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의도가 강해 보인다.그러나 다르면서도 같은 점이 있다. 개그맨은 안일하게 `재미`만을 생각했단다. 그런데 정치인은 그 의도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면 `작정`하고 한 말 같다. 이것은 다른듯하지만, 막말을 통해 지지자(혹은 팬)를 모으는 인기몰이의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약자를 조롱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개그가 될 수 없으며, 독설에 가까운 막말로 정의를 세우려는 것은 비판이 될 수 없다. 어쨌든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치욕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언어폭력이다.그런데 막말을 `솔직한 발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독설`과 `직언`을 혼동하여 동일시한 나머지 그것이 마치 정의를 말하는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타자이해를 바탕으로 문제적 상황을 지적하는 용기와 타자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처지(인기 혹은 이기)만을 생각하는 막말은 다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이런 막말이 `용기 있는 직언`으로 오인되어 그 행태가 사회전반으로 번지는 듯하다. 정치인, 연예인, 그리고 시민단체 회원들까지 그 층위도 다양하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막말을 일삼고, 그 말을 되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김종헌(아동문학가)

2015-05-22

무지의 감옥

영국 빅토리아시대 여성작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은 사람에게 다섯 가지 감옥이 있다고 했다. 감정의 감옥, 근심의 감옥, 향수의 감옥, 비교의 감옥, 증오의 감옥이 그것이다. 이기적인 감정, 생의 염려, 지난날에 대한 집착, 타인에 대한 부러움, 누군가에 대한 증오는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무형의 감옥이다.이 창살 없는 감옥은 자신의 편견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그 편견의 뿌리는 생에 대한 무지, 지혜의 결핍이다.매를 좋아하는 왕이 궁궐에서 애완용 매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로 임명된 신하가 왕궁의 뜰을 거닐다가 매를 보았다. 한 번도 매를 본 적이 없는 그는 그것이 못생긴 비둘기인 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위를 가져다가 매의 발톱을 깎고 부리를 잘라 주었으며 깃털도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그런대로 볼만하군. 왕궁의 사육사가 그동안 게으름을 피웠던 모양이야!”옛말에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한밤중에 길을 가는 것과 같다(人生不學,如冥冥夜行)`고 했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가끔 나이가 든 사람이 평생 교육의 일환으로 모종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학위가운을 입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찍는다. 즐겁고 흐뭇한 일이다.그러나 자칫 그가 받은 어떤 수료증이 배움에 대한 만족감과 안도감을 주고 심지어는 교만함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제 다 배웠으니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식으로 겸손함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지식은 추가했으나 지혜의 문은 오히려 닫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학자가 자신이 배운 것이 도리어 편견을 만들고 다시 스스로 무지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배움과 익힘을 통해 인생의 무지를 밝힐 등불, 무지의 감옥을 환히 비추는 지혜의 빛을 찾자.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 乎).` 진리가 우리를 언제나 자유케 한다. 날마다 진리의 등불을 들자./곽규진(목사)

2015-05-21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

나흘 후가 사월 초파일이다. 부처님은 2천559년째 이 땅에 자비와 광명,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며 대중들을 피안의 세계로 이끌어 왔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더욱 뜻깊은 을미년의 오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종교 단체가 있다. 2003년 이들은 “감춰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1987년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온갖 매체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6개월여 동안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다. 그러나 2005년 국정원 과거진상규명위원회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서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지금까지 누구 한 사람 사죄한 적이 없다.일본이라는 나라는 더욱 가관이다. 역사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현 정부 들어 그 정도를 넘어섰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일본 연구서다. 저자는 일본인의 모순적인 이중성을 부각시키면서 한 손에는 평화라는 국화를, 한 손에는 전쟁이라는 칼을 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국화와 칼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논리와 노예근성이다.“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는 말이 있다. 불교 경전 해설서인 `Milinda王問經`에 나오는 말이다. 죄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망설임과 뉘우침의 여지가 있으나, 죄를 모르고 행하는 사람은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벌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예로 들었는데 일면 타당한 것 같으면서도 수긍할 수 없는 괴리가 숨어 있다.시절이 달라진 것일까.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세상 모두가 아는 잘못을, 저 혼자 아니라고 우겨대며 꾸역꾸역 죄를 더해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 인도에서 불교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은 `미린다왕`과 `나가세나 존자`는 분명 21세기의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몰랐음에 틀림없다./전병덕(수필가)

2015-05-20

직업에 대해

여름이 가까워졌다. 아이스크림이나 아이스커피를 찾는 나에게서 여름을 느낀다. 지난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인터넷에 스승찾기가 요란하다. 그러나 이제 많은 선생님들은 이 날이 조용히 지나가길 기대한다. 한편에서는 스승찾기가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교사를 폭행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도 있기 때문이다.아마 많은 직업 중에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모두가 함께 기념하는 직업은 교사뿐일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직업을 갖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직업의 의의는 생계유지, 자아실현, 사회봉사로 이해된다. 여기에 한때 서양에서는 직업이 신이 부여한 것이라는 직업소명설이 있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신의 소명에 부응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직업에 자긍심을 가지고 직업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직업소명설은 서양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자본주의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했다.오늘날 직업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일 것이다. 돈이 우선일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졸업생 1천500명을 대상으로 직업 선택 동기에 따른 부의 축적을 추적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SBS 다큐멘터리에서도 방영된 것인데, 돈을 보고 직업을 선택한 1천245명이 83%,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255명이 17%. 그러나 20년 후 101명이 백만장자가 됐는데 그 중에 100명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17%에서 나왔다는 내용이다. 이 사회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많이 남진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없지 않을까? 이 세상에 이유 없이 던져진 우리는 스스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직업을 통해 이를 실현해야 한다.오늘날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기 어려운 세상이다. 진로교육, 직업교육은 많지만 진정한 자아실현으로서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휴대폰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이상형(철학박사)

201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