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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누가 미괄식을 쓰는가

유영희 작가 칼럼을 쓰기 시작한 지 4년이 되어 가건만, 칼럼의 첫 번째 독자인 딸에게 아직도 핵심 문장이 맨 끝에 찔끔 나온다고 지적받는다. 어떤 때는 의식의 흐름대로 가다가, 어떤 때는 남의 말만 중언부언 인용하다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맨 끝 한 문장일 때도 있다. 미괄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능숙하지 못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두괄식과 미괄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국어 지식이다. 두괄식은 논점이나 중요한 내용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미괄식은 핵심을 맨 뒤에 두거나 숨어 있다는 것, 두괄식은 직설적이고 간결한 반면, 미괄식은 간접적이고 복잡하다는 것, 두괄식은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고 미괄식은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 장르에 적당하다는 것과 같은 사전적인 지식은 알고 있어도 글을 쓸 때는 제멋대로 흘러버린다.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돌아보면, 논문 쓰던 버릇이 너무 깊게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학술 논문은 미괄식이라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낸다. 그래서인지 학회에 가보면, 많은 교수가 발표 시간을 넘겨서 결국 결론을 서두르거나 말하지 못하고 끝낸다. 힘 있는 사람의 글이 길기 쉬운데, SNS조차도 문화 권력자들의 글은 길고 핵심은 맨 끝에 나온다.그러나 이런 미괄식 전달방식은 디지털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뉴스 미디어 기업 ‘악시오스’ 창업자 짐 벤더하이 등 세 사람이 같이 쓴, ‘스마트 브레비티’를 보면, 현대인이 인터넷에서 콘텐츠 하나를 읽는 데 평균 26초 걸리고, 클릭한 것이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는 데는 0.017초 걸린다고 한다. 이들은 현대인들의 이런 읽기 습관을 고려하여, 독자가 200 단어만 읽는다면 200 단어가 그들이 읽어본 중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단어가 될 수 있게 전달하자고 한다. 이 책의 예시문을 보면 평소 우리가 얼마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장황하게 말하고 쓰는지 반성하게 된다.유튜브라는 매체 역시 환경 변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2022년 10월 ‘모바일인덱스’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1%인 4천183만 명이 유튜브 앱을 사용하며, 매월 32.9시간을 시청한다고 한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1분에 4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올라온다고 하니, 시청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핵심을 짧고 간결하게 표현해야 한다. 고급 지식 콘텐츠라도 제한된 시간 안에서 짧고 굵게 보여주는 유튜버는 구독자가 많다.나는 힘도 없고 문화 권력자도 아닌데 미숙한 미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미괄식 습관을 고치려고 일부러 신문 기사의 맨 앞에 나오는 리드 쓰기 연습을 여러 번 해보았다. 역량이 부족한지 여전히 부족해서 갈 길이 멀다. 힘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 미괄식을 쓰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미괄식을 쓴다. 이제 미괄식은 소설가에게 넘기고, 정보 전달에는 계급장 떼고 두괄식을 활용하여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자. 인기 있는 교장 선생님은 훈화가 짧았다.

2023-07-02

삶의 격, 죽음의 격

유영희 작가 요즘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노화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냥 나이만 들면 좋으련만, 수명이 늘어나면서 병원 신세 질 일도 많아지고 치매도 증가 추세다. 하루에도 한두 건, 많을 때는 네 건씩 배회중인 어르신 찾는 문자가 오고, 엄마도 파킨슨 병 합병증으로 치매를 오래 앓다가 돌아가셔서 치매는 특히 신경 쓰인다.2022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897만 명 중 치매 환자가 90만 명으로 추정 치매 유병률이 10%이다. 2040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1천700만 명이 되는데 이 계산대로 하면 170만 명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저런 질환으로 장기요양 등급을 받게 될 인구 추정치는 300만 명이라고 한다. 2040년이면 내 나이도 80세이니 치매에 걸리지 않거나 장기요양등급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다.이런 환자를 관리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환자 본인과 가족들이다. 인지 기능이 떨어진 치매 환자도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엄마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삶이 고통스러워 15층에서 뛰어내리려고 베란다까지 나가셨던 적도 있다.아무리 생명 연장술을 연구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현대 의료의 발달로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환자와 환자의 가족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현대 의료 시스템은 환자가 아무리 고통 받아도 죽는 그 순간까지 치료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나 그 가족도 마찬가지다. ‘왜 나는 75세에 죽기를 바라는가’를 쓴 미국 의사 에스겔 임마누엘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노인 5분의 1가량이 죽음의 마지막 달에 외과 수술을 받는다고 하니,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을 바꾸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이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케이티 잉겔하트의 ‘죽음의 격’은 노년은 물론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사람들이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지 취재한 기록이다.그가 어떤 죽음이 품격 있는 죽음인지에 대해서 직접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 바로 괄약근 조절능력을 잃었을 때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전해준다.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죽음을 치료할 수는 없다. 죽음은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자기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 순간에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노년을 상상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탐색하고,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도 꾸준히 해야 한다. 한 달 전부터 몸 상태를 기록하는 ‘몸 일기’를 매일 쓰고 있다. 2040년 80세를 맞는 어느 하루, 나의 몸을 상상하는 일기도 써봐야겠다.

2023-06-25

나의 사정을 다 말해야 하는 이유

유영희 작가 지난 6월 14일, 4년 만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못 갔고, 작년에는 내 사정으로 못 갔다. 이 행사는 해마다 주제가 있는데 올해 도서전의 주제는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라고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강조했다고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취지문을 읽어 보니, 비인간은 인간이 아닌 자연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년에는 남녀 섞어서 세 명이던 홍보대사 인원을 일곱 명으로 늘리면서 모두 여성 문인만 내세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인간이란 남자가 아닌 존재, 여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이런 주제 때문인지 발걸음이 멈추는 곳마다 여성이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 시를 전문으로 내는 파시클 출판사의 박혜란 대표의 북토크에도 참가하여 디킨슨 이야기도 들었고,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가 담긴 책도 몇 권 샀다.출판사 핌의 ‘어쩌면 너의 이야기’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만난 주부들의 동화 에세이 모음집인데, 동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하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직접 글과 그림을 다 작업한 참여자도 있고, 딸이나 남편이 삽화를 그린 글도 있었다. 자상한 시간에서 펴낸 ‘감정愛쓰다’는 그보다는 직접적으로 자기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글을 올린 참여자들 역시 모임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담다 출판사의 ‘3923일의 생존 기록’은, 저자 김지수가 불안, 공황, 우울장애와 더불어 생존해온 기록이다. 최근 암 생존자 여성의 투병기 ‘엉망인 채로 완전한 축제’도 읽었는데, 사회 통념상 암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의 병이라서 김지수의 고백은 더 인상 깊었다.‘파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세상을 향해 다 말하다’라는 뜻이다. 본래 파레시아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여,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파레시아를 ‘대담한 저항’이라고 요약했는데, 플라톤은 여기에 행복의 의미를 덧붙였다고 한다. 당시 독재자였던 디오니소스 1세가 플라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소크라테스라고 대답하여 독재자에게 추방당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대답에서 우리는 ‘다 말하는 것’이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파레시아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억압받는 사람이거나 사회적 약자일 것이니, 이들의 말하기는 민주주의와도 통한다.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내 사정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라서 사소해보이지만, 글을 쓰다 보면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고 결국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여성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글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연결을 체험하고 있다.여성 문인만 홍보대사가 된 것에 대해 어느 남자 시인은 책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런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은 여성들이 용감하게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움츠리지 말고, 나의 사정을 사정없이 써보자.

2023-06-18

ChatGPT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유영희 작가 두어 달 전 어느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 구성원은 다섯 명이었는데, 명상 안내자와 상담 전문가도 있고, 책을 한두 권 이상 출간한 작가도 두세 명이다. 그런데 그중 작가 두 사람이 ChatGPT를 활용한다면서, 한 사람은 아예 유료로 결재해서 이용한다고 한다. 그동안 ChatGPT 관련 뉴스를 많이 보았어도 인문 분야에서 활용하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고, 게다가 인문학의 최첨단이라고 할 만한 명상 전문가들이 글을 쓰면서 인공지능을 활용한다고 하니 낯설었다.마침 6월3일 한국사고와표현학회의 춘계 정기 학술대회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 사고와 표현 교육의 방향과 과제’여서 참여했다. 인문학 교수와 게임학 교수의 입장 차이가 아주 볼만했다. 인문학 교수는 인공지능이 학습하거나 사고하거나 추론하거나 성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코딩도 배우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자로 나선 게임학 교수는 국가의 정책 목표가 전 국민이 인공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장했다. 학술대회가 종료될 때까지 참여하지 못해서 어느 쪽이 우세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인공지능을 둘러싼 이런 논쟁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인문학자뿐 아니라 일론 머스크 역시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액, 미국의 정치인 앤드류 양 등과 함께 미래생명연구소 명의로 AI 시스템 개발을 멈추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인공지능 열풍을 보면서 정말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던 터라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입장이 솔깃해진다.그러나 AI판 러다이트 운동이라고도 하는 일론 머스크의 이런 주장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영국의 기계 파괴 운동이었던 러다이트 운동도 실패로 끝났으니 말이다. 1876년 영국이 중국에 놓은 오송 철도를 철거했던 청나라도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철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유럽 각국도 앞다퉈 철도를 깔았으니,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 고대의 노자는 철기 문명의 문제를 비판하며 문자 없던 시대로 돌아가자 외쳤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컴퓨터를 쓰지 않겠다는 미국 시인 웬델 베리의 선택은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 존중할 가치가 있지만, 그것을 사회 전반에 적용하기는 어렵다.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부작용을 우려하는 신중한 입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술 발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역사를 보아도 실현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도 우려가 많았고 부작용도 해결되기 어렵지만,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AI 사용 능력 격차와 그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인문 정신의 존재 이유는 기술 발전 속에서 어떻게 사회 통합을 이루고 인간성을 보호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두어 달 전 모임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ChatGPT를 잘 활용하여 명상을 보급하고 저술 활동 하는 데 도움 받기를 바란다.

2023-06-11

중고 거래의 딜레마

유영희 작가 옳고 그름을 무 자르듯이 딱 자르기 어려운 경우는 많지만, 절약이나 친환경 같은 이슈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옳음의 범위에 속한다. 제리 스피넬리의 ‘돌격대장 쿠간’은 초등 고학년이 읽을 만한 동화책인데도, 그 안에 담긴 주제는 비폭력, 친환경, 성 평등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옳음이 무엇인지 편안하게 보여주어서 재미있게 읽고 주변에 많이 추천하기도 했다.주인공 존 쿠간은 언제나 새 옷을 입고 고기를 즐겨 먹으며 특유의 적극적 성격으로 학교에서 ‘핵인싸’다. 그런데 전학 온 펜 웹은 중고 옷만 입고 온 가족이 채식주의자인데 남다른 친화력으로 금세 여자아이들한테도 인기 많은 ‘핵인싸’가 된다. 쿠간은 그런 웹을 싫어하지만 웹이 쿠간의 할아버지를 위해 자기가 너무나 아끼는 흙을 기꺼이 내어주자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그토록 혐오하던 중고 물건을 사며, 백화점 건립 반대 운동에 참여한다. 이 책에는 소비를 반대하는 메시지가 듬뿍 담겨있다.나 역시 당근마켓이라는 중고 거래 사이트를 자주 이용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곳이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이 없어도 슬그머니 들어가 본다. 작은집으로 이사하면서 많은 물건을 판매한 곳이기도 하다. 새 것을 살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착한 소비를 한다는 자부심도 조금은 있다. 옷만 가지고 보면, 2019년 기준 생산량은 대략 1천300억 개, 이중에 버려지는 옷이 최소 920만 톤 이상이라고 한다. 그 중 일부는 소각되는 과정에서 대기가 오염되고, 소각하지 못한 옷은 쓰레기 산을 이룬다고 하니, 나 한 사람이라도 중고 옷을 이용하면 옷 생산량이 줄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요즘 들어 현실에서는 중고 물품 이용이 정말 옳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나처럼 중고 마켓 물건이 싸다고 쉽게 사다가 물건이 쌓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고 마켓을 믿고 소비를 많이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제 유튜버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중고 마켓에 내다 팔 생각에 옷이나 물건을 많이 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중고 물품을 이용하는 것이 친환경적이거나 절약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필요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검색하느라 시간 버리는 것도 문제다.중고 물건 이용의 또 다른 문제는, 분명히 자기 물건을 샀는데도 중고 마켓에 팔기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책도 마찬가지다. 새 책을 사도 나중에 팔 생각에 마치 빌린 책처럼 밑줄도 못 긋고 메모도 못한다. 이러다 보니, 내 책인데도 읽기가 불편하고 읽은 것 같지 않다. 중고 거래를 위해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기이한 소비 현상이 벌어지니, 중고 물품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질문하게 된다.옛사람들이 만든 오래된 그릇이나 가구를 보면, 은근한 감동이 밀려온다. 그 정도의 품질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쓰는 것이 환경도 보호하고 삶의 질도 높인다는 오래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2023-06-04

‘마처 세대’를 위하여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우연히 SNS 친구의 담벼락에서 노후 빈곤에 대한 고민을 읽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월급만으로는 노후대비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투자를 해야 한다.’는 재테크 유튜버의 말을 인용하면서 투자의 위험이 만만치 않으니, 과연 투자가 답일까?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딱히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미 작년 집값 상승 시기 무리하게 주택을 구입하여 고통 받는 영끌족도 많고, 빚투한 사람들도 주식 하락으로 영혼이 털리고 있다. 게다가 회복 기회가 적은 중장년에게 투자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SNS를 보며 다른 사람 따라하지 말고, 할인한다고 사지 말고, 주식이나 코인 같은 투자도 하지 말고 오로지 저축으로 1억을 모으라는 돈쭐남 김경필의 조언이 더 실속 있어 보인다.이렇게 돈 벌기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유는 현재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2020년 국민연금연구원 조사와 2022년 신한미래설계보고서에서를 보면, 노후 필요자금으로 가장 많은 응답은, 퇴직 후부터 30년 정도 더 살 것을 가정하고 5억에서 10억이었다고 한다. 최소한 5억이 있으면 어느 정도 노후가 안전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최선일까 의문이 든다.아버지는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13년간 투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웃공동체가 없었던 것을 더 힘들어하셨다. 물질적 궁핍은 절약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웃공동체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노년이 되면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사례도 많다.노년 1인 가구의 급증 역시 노년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2021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체 가구에서 1인 가구 비율이 33%이고, 그 중 60세 이상의 1인 가구 비율이 35%라고 한다. 그런데 2050년에는 전체 가구의 40%가 1인 가구이고, 그중 60세 이상의 가구가 59%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전 연령대에 걸쳐 1인 가구가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취약한 상황이니, 노년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는 제도적으로 사회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사회 안전망 못지않게 사회 연결망도 중요하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봉양 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고 이름지어진 ‘마처 세대’에게 적절한 크기의 사회 연결망은 노년의 어려움 해결에 도움이 된다. SNS를 잘 활용하면 생활에 활력이 된다. 혼자 있는 법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적절하게 사회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것도 노년의 지혜이다. 국가는 사회 안전망을 탄탄하게 갖추고, 개인은 자기에게 맞는 사회 연결망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후의 공포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일에 기여하고자 지난겨울 동네 통장에 지원했다. 4대1의 경쟁률에 탈락했지만, 그 자체로 사회 연결망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어 의미 있었다.

2023-05-21

공자와 법륜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어버이날이 지났다. 작년에 아이들에게 어버이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귀가하는 사람들 손마다 카네이션과 케이크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면서 꼭 그럴 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유교 문화의 뿌리가 참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교는 사상을 넘어 생활문화로 깊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제는 애증이 교차하는 딜레마가 되어가고 있다.사실은 두어 달 전부터 브런치스토리에 ‘주주금석 논어생각’을 매일 한 편씩 올리고 있다. 김도련의 저서 ‘주주금석 논어’를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주주금석’에서 주주는 주자의 해석이고, 금석은 정약용의 해석을 중심으로 저자가 풀이한 것인데, 브런치스토리에서는 두 해석을 비교하면서 내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학창 시절 때 ‘논어’를 읽으며 느낀 감흥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그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이 새롭게 보여서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효에 대한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공감하기 힘들다.‘논어’에 나오는 효에 관한 유명한 구절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 뜻을 살펴보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실을 살필 것이니,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어야 효라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 문장에 대해 금석이 주주와는 풀이가 약간 다르지만, 자식이 부모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그러나 이런 공자의 이야기를 현대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자녀에게 부모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녀의 진학이나 진로 선택에 부모가 강하게 개입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했거나 집 떠난 자녀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요구하거나 주말마다 찾아오기를 바라는 부모도 있다.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방청객의 고민을 즉석에서 풀어주어 인기가 많다. 방청객 사연 중에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 문제도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자식에게 서운한 부모나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진 자녀의 이야기다. 법륜 스님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은 의무이므로 착한 행동은 아니다. 대신 자녀가 스무 살이 되면 독립시켜라. 이제 부모와 자식은 모두 성인이므로 자신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의무가 아니므로 착한 행동이다. 착한 행동은 하면 좋지만 안 한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부모의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해라.’유교 사상에 비추어보면 말도 안 되는 답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생활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유교가 지배하던 농경사회에서는 경험 많은 부모의 뜻이 옳은 경우도 많았고, 부모가 죽기 전까지 재산은 모두 부모의 것이었다. 반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부모의 경험은 무용지물이기 십상인데다, 자녀 또한 부모와 독립하여 재산을 가질 수 있어서 온전히 성인으로 독립할 수 있다. 유교의 ‘중용’은 때에 맞게 한다는 ‘시중’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논어’는 많은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지만, 가족 윤리에서는 ‘시중’의 의미를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3-05-14

어린이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

유영희 작가 바야흐로 5월이다. 기후 변화로 계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은 4월에 내준 것 같지만, 기념일이 많아서 그런지 여전히 5월은 일 년 중 가장 활기찬 것 같다. 5월 기념일의 시작은 ‘근로자의 날’이지만,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첫 기념일은 아무래도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은 아동이 독립적인 인격체로 활약하는 ‘칠칠단의 비밀’ 같은 소설을 쓰면서 어린이의 인격을 높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지난 100년 동안 어린이의 인권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때와 양상은 다르지만 아직도 어린이를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부모가 많다. 자기 아이를 때리거나 굶겨서 죽게 하는 사례는 너무 극단적이니 예외로 하더라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학대 아닌 학대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언젠가 동네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엄마와 아들이 앞에 올라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어 보이는 그 아들이 엄마에게 자기 희망을 이야기했더니, 그 엄마가 느닷없이 ‘너한테 그동안 들어간 돈이 얼만데 지금 너 성적을 봐라, 네 주제에 무슨…’ 하면서 야단을 쳤다. 그 엄마 말에 하도 놀라서 그 아이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며칠 전 지하철에서 만난 아기 엄마도 생각난다. 그 엄마는 한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유모차에 앉혀놓고 태블릿을 세워놓고 만화 영화를 보여주며 아이는 쳐다보지 않고 자기는 일행과 대화하며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하는지 그 엄마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지난주 어린이날 방영된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145화에서도 오은영은 상담하는 6살 아이에게 엄마가 오랫동안 영상을 틀어준 것을 지적하면서 24개월 미만의 아이에게 영상을 틀어주면 ADHD 발병률이 높아지고 자폐 증상처럼 상호작용을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나무랐다. 실제로 그 아이는 사회성 발달에 문제를 보였고 알파벳에만 집착했다.자녀가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정상적인 발달을 촉진할 수 있는 적절한 자극을 주는 부모는 많지 않다. 어설픈 육아 지식으로, 부모의 고정관념으로, 바쁘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에게 무리하거나 잘못된 자극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리거나 굶겨야만 학대는 아니다. 존중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학대다. 그런데 많은 부모가 무지 때문에 또는 탐욕 때문에 아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한다.오은영은 잘못된 양육으로 가장 피해보는 사람은 아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모 역시 고통받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난 그 아이가 커서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없다. 지난 주 방영된 아이의 부모 역시 고통 받다가 방송에 출연한 것이다. 아이를 존중하는 데 거창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국 고전 ‘시경’에 ‘아이를 키울 때 정성을 다하면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슴으로 아이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

2023-05-07

합법과 정의 사이

유영희 작가 2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범택시’가 얼마전 시즌 2로 돌아와서 시청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모범택시’의 인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드라마에서 다룬 사건이 모두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사건 중에는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 사건도 있어서 시청자들에게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준 셈이다.4월 27일 진통 끝에 간호법과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특히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범택시 2’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눈에 띈다. 모범택시 9화와 10화에서는 의사 안영숙이 손이 떨려 수술을 못하게 되자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로 수술을 시키다가 걸려서 면허가 정지되었지만 6개월 후 재교부받아 다시 같은 의료 사고가 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의료사고에 대해 안영숙이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병원을 차리려고 하자 모범택시 팀이 단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에피소드는 의사가 반복적으로 범법을 저질러도 면허가 유지되는 점을 악용한 사례를 고발하고 있다.게다가 현행 의료법은 허위진단서 작성이나 허위 진료비 청구와 같은 의료 행위와 관련된 일부 범죄에 대해서만 의료인 결격사유로 보고 있어서 일정 기간 자격 제한을 하지만, 강력범죄나 성범죄 경우는 아예 결격사유로 보지 않아 그런 죄를 지어도 바로 의사로 복귀할 수 있어서 논란이 많은 상황이었다.그래서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인이 결격사유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범죄’로 넓혀서 선고유예를 포함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면허를 취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금고형 한 번에 영원히 면허를 취소하는 것은 아니고 금고 이상의 형으로 면허 금지되었다가 재교부 받은 후 다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10년간 재교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현재 변호사 법무사 회계사는 모든 범죄에 대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결격사유가 된다. 그런데 이런 개정안에 대해 의사협회에서는 의사들의 의료행위를 위축시킬 수 있고 과잉 입법의 여지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이런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드라마와 현실이 이렇게 다를까 의문이 생긴다. 시청자들은 안영숙이 심각한 범법 행위를 저질러도 계속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현행 의료법에 공분했지만, 현실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을, 그것도 두 번째 면허 정지를 받고서야 10년 금지하는 조항이 부당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 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한편으로는 택시 기사 김도기의 활약이 판타지에 가까운 영웅적인 모습이라 이런 방식이 오히려 현실의 합법적 해결을 외면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제대로 심판받지 못한 사건이 해결되기 어렵다면, 드라마에서만이라도 응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범택시 2 블랙썬 에피소드에서 김용민 기자가 김도기의 해결 방식에 대해 ‘합법은 아니지만 정의로웠다’는 대사가 나온다. 합법과 정의가 일치하는 사회는 언제쯤 올까?

2023-04-30

인간이기에 기억한다

유영희 작가 초등교사 이현길은 춤추는 선생님이다. 혼자서만 추는 것은 아니고 아이들과 같이 춘다. 그는 교사 생활 17년 차로, 그동안 계속 아이들과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에 특별히 뜻깊은 졸업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대를 만들어 SNS에 올리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그가 올린 영상마다 이런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하는 현직, 퇴직 교사들의 감동 댓글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어서라고 한다. ‘기억’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돋보인다.지난주에, 암 투병 중이신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을 동창과 함께 만나고 왔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 말씀 하신다. 지금도 내 눈에는 너그들 고등학교 때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네는 내 맘 모를끼다.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기억과 다르기는 하겠지만, 우리 역시 그때를 눈에 선하게 기억한다.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의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뇌과학자 조지프 르두는 ‘우리 인간의 깊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뇌가 발달해온 과정을 설명해준다. 새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반응을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적 유연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바탕으로 영장류는 숙고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언어를 가진 인간은 그냥 숙고보다 뛰어난 심사숙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은 심사숙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서 목표의 가치를 저장할 수 있고, 이것을 이용하여 미래에 더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좋은 경험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에 그런 일을 기억하는 것은 즐겁고 자연스럽다. 반면 나쁜 경험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고 비용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잊고 싶은 사람, 잊으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심한 경우, 나쁜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을 조롱하기도 한다. 학폭을 오래전 장난으로 치부하거나 학폭 당한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런 걸 여태 기억하느냐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기억하는 것이다.4월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념일이 많다. 조금 멀리는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기념일이 있고, 가까이는 9년 전, 4·16 세월호 참사가 있다. 그러나 이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게 저장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신동엽의 마음을 우리는 이미 잊은 지 오래되었고, 4·16 참사의 기억 역시 기억의 저편으로 넘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고 심사숙고할 줄 아는 인간이다. 나쁜 경험이라도 미래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해야 한다.좋은 경험으로 기억되는 데는 대화가 있다. 아이들은 이한결 선생님과 춤을 추면서 대화했고,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수업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5분 스피치 기회를 주었다. 4월의 경험에서 알맹이만 남기고 미래의 유익한 결과를 선택하는 심사숙고 과정에서도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하고 대화해야 한다.

2023-04-23

습관인가, 창의성인가

유영희 작가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자기계발은 선택 아닌 필수가 되었다. 자기계발 방법의 부동의 1순위는 바로 습관 만들기다. 자기계발의 목표는 대부분 부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상위 0.1% 부자들의 루틴 따라 하기, 초대형 1조 부자들의 5가지 습관 등등 습관 만들기 영상이 넘쳐난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들의 습관을 따라 하라는 것이다.그러나 부자들의 공통 습관을 따라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엄청나게 두뇌가 명석한 이도 있고, 물리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그들만의 환경과 경험이 있다. 그들의 습관은 부자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요소일 수는 있어도 전부는 아니다.여기서 중요한 의문은, 과연 그들의 행동을 습관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습관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익혀진 행동 방식 또는 학습된 행위가 되풀이되어 생기는 비교적 고정된 반응 양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파고들어가 보면,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은데도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을 습관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는 ‘습관’을 부정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뇌과학자 앤서니 디킨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에는 ‘습관’과 ‘목표지향적 행동’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쥐를 며칠 굶기고 표시등이 깜박이는 동안 그 쥐가 레버를 누를 때 먹이를 공급해주면, 쥐는 표시등이 켜질 때마다 레버를 누른다. 이때 배가 많이 고프거나 먹이에 대한 경험이 좋다면 레버를 더 잘 누른다. 그런데 배가 안 고프거나 그 음식을 먹고 배가 아팠는데도 레버를 누른다면 그것은 습관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담배가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기침하는데도 담배를 계속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목표지향적 행동은 그 행동을 처음 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기억을 가지고 계속 그런 결과를 내기 위해 하는 의식적 행동이다.일찍 일어나기, 독서, 행복한 상상, 규칙적인 운동, 명상 등 부자들이 한다는 행동이 그들에게 활력을 주고 창의성을 준다면, 그것은 습관이라기보다 목표지향적 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목표지향적 행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목표에 대한 인식이 또렷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올해 들어 심신의 안녕을 목표로 뜻맞는 친구들과 매일 5분 이상 명상을 80일째 하고 있고, 매일 A4 한 장 쓰기 모임에 참여하여 글을 쓴 지 60일이 넘었다. 명상이든 글쓰기든 목표가 또렷하기 때문에 하고 있을 뿐,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어쩌랴, 그런 행동이 어떤 유익한 결과를 내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을.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습관이라면 더욱 어렵다.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자기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또렷하게 갖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의식적으로 찾아서 꾸준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창의적인 자기계발이다.

2023-04-16

존재 증명하기와 존재하기

유영희 작가 몇 년 전 어느 예능 프로에서 이경규가 어떤 어린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자 이효리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한 말에 시청자들의 공감이 이어졌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결과이고, 아무나 된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 ‘청춘스케치’에서 레이나가 ‘23살에는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고 하자, 친구 트로이가 ‘23살 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한 말도 이효리의 반문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전 근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서 나로 존재하기만 해도 나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이제는 그것을 남에게 알려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성공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심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회의감과 괴리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존재하기’가 절실해지고 있다.그러나 존재하기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트로이가 아무리 치즈버거와 커피, 담배 몇 개비, 그리고 약간의 대화로 충분하다고 해도 그런 삶이 지속가능하기는 어렵다. 이효리 역시 어떤 순간에는‘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겠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인생에는 뭔가 이루는 것도 필요하고,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필요하다.오랜 기간 서예를 연마한 동창이 시간이 갈수록 상 받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면서, 그래서 출품에는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 서예를 즐기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온전하게 존재하기를 원할 뿐, 대회에 작품을 내는 일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상화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작품을 출품하는 순간, 인격은 사라지고 등수라는 대상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며칠 전 종강한 EBS1의 ‘존재와의 대화’에서 심리학자 김정규 역시 존재를 회복하기는 해야 하지만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한다. 칸트 역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써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여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도 인정한다.‘존재를 증명하기’와 ‘존재하기’, 다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비율로 하면 좋을까? 이 질문에 김정규는 삶에서 80% 정도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나머지 20% 정도는 존재하기로 하자고 말한다. 지나친 존재 증명도 문제지만, 존재하기에 너무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회피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셀럽의 한마디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자신의 형편에 맞는 비율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

2023-04-09

쓸수록 또렷해진다

유영희 작가 그동안 주먹구구로 살아온 것을 반성하며 몇 달 전부터 가계부를 착실히 쓰고 있다. 그런데 앱에 기록해서 그런지 갑자기 유튜브에서 소비 생활 관련 영상이 뜨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영상이 뜨더니, 요즘에는 무조건 아끼기부터 해야 한다는 영상이 뜬다.그러나 어디까지가 자기 계발인지 경계를 정하기가 어려워 투자인지 과소비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무조건 아끼다 보면 궁상맞거나 인색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 데다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소비 잘하기가 쉽지 않다. 얼핏 보면 두 가지 주장이 달라 보이지만,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든 알뜰 소비든 모두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조회수가 엄청난가 보다.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농부 빠홈이 땅 욕심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빠홈은 바쉬끼르라는 곳에 아주 싸고 좋은 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간다. 바쉬끼르의 이장이 하루치 걸은 땅값이 1천 루블뿐이라고 하자, 빠홈은 무리하게 걸어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죽는다.그러나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그린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빠홈은 가난하기는 해도 일확천금에는 관심 없는 소박한 사람이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지주에게 수확을 다 빼앗기는 러시아 농노가 땅 욕심 좀 냈기로서니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오히려 빠홈에게 동정이 갈 지경인데다, 설사 빠홈이 많은 땅을 탐냈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적은 땅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많은 땅을 원할 수도, 필요할 수도 있다.빠홈의 문제는 오직 하나, 자기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만, 그 땅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걸어야 하는지, 중간에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가계부를 쓰다 보니, 내게 필요한 땅은 얼마만큼인지, 어떤 속도로 걸어야 하는지,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 보인다.어디 가계부뿐이야? 사실은 모든 쓰기가 다 그렇다. 가계부 쓰듯이 그저 있는 그대로 쓰면 보이는 것이 많다. 기록학 전문가 김익한 교수가 알려주는 글쓰기 방법 하나는, 들은 것, 본 것, 맛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라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반성하는 글쓰기는 죄책감만 늘고 자기 비하에 빠지니, 그것만 경계하면 된다.삶이 팍팍할수록 욕심만 크면 불행해진다. 나에게 맞게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내 삶의 지향과 규모를 잘 알기 위해서는 가계부든 일기든 10분 쓰기든 무엇이든 쓰는 것이 좋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로 10분만 글을 써도 문제가 보이고 답이 보인다. 쓸수록 삶이 또렷해진다.

2023-04-02

어떤 경제적 자유인가?

유영희 작가 3천890원, 이 금액은 얼마 전 N이 SNS에 올린 이번 3월 도시가스 요금이다. 이 액수는 같은 기간 우리 집 요금의 50분의 1이고, 작년 8월 요금 4천180원보다 적다. N은 십여 년 전 어느 모임에서 만나 가끔 소식을 전하는 남자 후배인데 지방 출장이 자주 있어서 1년 365일 집에서 지내는 나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손이 너무 시릴 때만 조금 온수를 켰다고 하니 엄청난 근검 절약이다. 그가 한 만큼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을 보고 자극받아 나도 실내 온도를 2℃ 낮췄다가 이틀 만에 감기에 걸려 바로 원위치했다. 그의 친구들이 건강 걱정을 할 만하지만, 그래도 그가 이토록 절약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요즘 일찌감치 경제적 자유를 얻어 파이어족이 되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많다던데, 혹시 N도 파이어족이 되고 싶은 것일까?경제적 자유란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 자산소득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이고, 파이어족은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이 조기 은퇴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경제적 자유가 있다고 파이어족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파이어족이 되려면 경제적 자유는 있어야 한다.어쨌거나 자산소득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 코인 등에 투자해서 100억 자산가가 되었다는 개그맨 황현희도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좋은 점이 시간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아무리 자산소득이 충분하다고 일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국 최고의 부자라는 이재용도 일하고, 1년에 100억원 이상을 번다는 일타 강사들도 이미 충분한 자산소득이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전히 장시간 일한다. 황현희 역시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겠지만, 좋은 투자 종목을 찾기 위해 온 시간을 다 썼을 것이며 앞으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자유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는 상태이다. 소극적 자유라고 하는 이 상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조건이다. 경제적 자유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일 뿐이다. 경제적 자유를 얻었어도 계속 일하기도 하고, 파이어족이 되어 더 이상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활동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시간을 통제하고 싶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시간이 필요한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내가 하고 싶은 일이 1억 드는 일이라면 1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그러면 괜한 일에 힘 빼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남들이 좇는 경제적 자유를 따라 하느라 내게 필요한 것보다 더 힘을 쓴다면, 그만큼 내 꿈도 지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N은 분명한 자신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한겨울 도시가스 요금 3천890원은 빛이 난다. 이참에 남은 시간 나의 경제생활의 목표는 무엇일까, 새삼 다시 점검해본다.

2023-03-26

춤을 춘다는 것

유영희 작가 어느 유투버가 4, 50대가 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세 가지는 외로움, 돈, 건강이라고 한다.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김민식 전 MBC PD도 50 중반에 사표를 내고 나서 외로움 문제가 심각했나 보다. 그가 퇴사하고 2년 만에 올해 초 ‘외로움 수업’이라는 책을 냈으니 말이다. 자신이 쓴 칼럼 일부 내용이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되자 스스로 벌주기 위해서 퇴사했다고 하니, 그렇게 혼자 있게 된 시간은 많이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니 외로움은 치매의 원인이 된다면서 자신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노력 몇 가지를 소개해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가장 먼저 춤을 꼽은 것을 보고 반가웠다. 사실은 나도 한 달 전부터 춤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식은 줌바를 춘다는데, 내가 배우는 것은 현대 무용이다.발목이 안 좋아서 60분 걷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춤이라니 정말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고, 일반인 대상 수업이라 더 편하게 진행할 텐데도 남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것이 아직도 쑥스럽고 어색한 상태다. 그러나 90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배우는 것도 많다. 줌바나 에어로빅 같은 운동은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지만, 현대 무용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흐느적거리는 것은 아니다. 기본 동작을 알려주면 음악에 따라 자기가 동작을 만드는데, 코어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처럼, 속은 강건하지만 겉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움직이다 보면, 내가 주로 하는 동작의 패턴을 알게 된다. 게다가 줌바는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서는 시도하기 힘든 격렬한 운동이지만, 지금 배우는 현대 무용은 자기 몸 상태를 돌보면서 한다.더 중요한 순간은 가끔 음악을 틀지 않고 움직일 때이다. 음악이 있으면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가기 쉬운데, 음악이 꺼지면 그야말로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나만의 동작을 알게 된다. 그렇게 나오는 내 몸의 움직임은 또 다른 나의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몇 주가 지나자 선생님은 내 동작이 많이 커졌다며 보기 좋다고 하신다.무엇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목적이 있고 의식적으로 하지만 몸 언어의 특별한 점은 나의 의도가 많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로 가야지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동작을 해야겠다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 동작이 나온다. 현대 무용의 이런 춤 방식은 노자가 말한 ‘일부러 하지 않는 함’인 것 같다. 그래서 90분을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50대 중반의 남자에게는 줌바가 적당할 수도 있지만 60이 넘은 여자에게는 이런 현대 무용이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몸의 언어를 들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줌바든 현대 무용이든 노년의 자신에게 춤을 허하자. 외로움도 극복하고 건강도 만들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일석이조 아닌가.

2023-03-19

박사님, 박사님

유영희 작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대행사’의 주인공 고아인은 지방대 출신이라는 차별에 굽히지 않고 불굴의 도전으로 대표가 되었고, 그에 만족하지 않고 머슴으로 살기 싫다며 직원이 주주인 독립 대행사를 차렸다. 드라마의 완성도도 높았지만, 특히 자기 능력을 믿지 못하고 주저앉고 싶은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물론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몇 년 전, 자원 활동으로 참여하던 H 생협에 박사 학위가 있는 남자 실무자가 들어왔는데 모두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보다 못해, 나도 박사인데 왜 내게는 ‘박사님’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물었지만, 약간 난처해하면서도 별다른 설명 없이 그 관행은 계속되었다.그런데 문제는 나의 속마음이었다. 그렇게 항의한 것은, 다른 실무자들과 구별되게 그에게만 굳이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당해서 한 말일 뿐, 나를 박사님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속으로는, 그 실무자는 그의 연구 분야와 연관 있는 업무를 하고, 나는 전공과는 별 상관없는 자원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굳이 ‘박사님’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던 중 며칠 전, SNS에서 밸러리 영의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라는 책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두어 달 전, S여대 교수가 내게 능력에 비해 성취가 적다며 몇 가지 제안해준 것을 잊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이 책은 ‘가면 증후군’을 다룬 것인데, 가면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1978년 미국의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잔 임스가 처음 붙였다고 한다.가면 증후군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경험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여자에 집중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자들이 남자에 비해 자신의 재능과 성취를 행운이라고 생각하거나, 실제 자기는 형편없는데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재능 있고 어느 정도 성취도 한 사람들이 증후군에 빠지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기가 실패하면 ‘거봐, 남들이 알고 있는 나는 가짜거든. 나는 실패할 만해.’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위해 가면 증후군에 빠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여배우 르네 젤위거도 밤에 일어나 ‘그 사람들은 왜 나한테 이 역할을 준 거지? 내가 자기들을 속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밸러리 영은 먼저 ‘가면 증후군’이 내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인식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게 ‘박사님’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다는 의심하는 것이나 낙제 한번 없이 학위를 받은 것, 유명한 대학에서 오래 강의한 것 모두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면 증후군’의 작동 방식이다.더불어 실패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힘도 필요하다. 내게 능력이 있는지 자신을 의심할 시간에, 그동안 내가 성취한 일이 무엇인지 목록을 만들어서 균형 감각을 만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보자. 그러니,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자들이여, 자신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의심은 이제 그만 거두자.

2023-03-12

언어폭력 ‘정도’라니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초등학교 때 장면 하나, 하늘은 파랗고, 길 양옆에는 벼가 넘실거리는 초가을, 경운기가 다닐 만한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꼬마 서너 명이 ‘돼지야’ 하고 소리쳤다. 나를 놀리는 말이다. 그날 나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장면 둘, 마루 끝에 앉아 있는 나를 가리키며 방에서 엄마가 이웃집 아줌마에게 ‘덩치는 인왕산만 한 것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나는 마루 밑으로 사라지고 싶었다.이 두 장면의 ‘맥락’을 보자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 꼬마들의 놀림은 위협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장난이었고, 엄마의 인왕산 비유는 나의 심한 낯가림을 걱정하면서 나온 말이라 학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돼지’와 ‘인왕산’이라는 단어에 심하게 위축되고 이후 성격 형성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의 ‘기질’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언어폭력이라고 죄를 묻기는 어렵다.그러나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경우는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순신의 아들은, 내가 길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꼬마가 아니라, 기숙사에서 피해자와 같은 방을 쓰는 동급생이었고, 아버지의 권력을 자랑하며 피해자에게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라고 했다. 8개월 이상 지속된 혐오 표현은, 피해자가 호소한 고통을 고려했을 때 명백한 언어폭력이다.그런데 그 부모는 학교의 전학 조치에 불복해서 무죄를 주장하며 대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가서 가해 학생은 1년 이상 학교에 더 있었다. 피해자가 자살 시도까지 하고 학업을 포기했는데도 변호인 측은 ‘맥락’을 봐야 한다거나, 피해자의 ‘기질’의 문제로 몰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 중에 특히 내 눈에 들어온 부분은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일반적으로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입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인간은 ‘말’로 서로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한 실험을 보면, 실험 참가자들에게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의 위험 상황을 단순히 말해주기만 했는데도 심박수, 호흡, 신진대사, 면역체계, 호르몬은 물론이고, 체내 여러 가지를 제어하는 뇌 시스템의 활동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혐오스러운 말을 들으면 뇌는 위험을 예측하여 다량의 호르몬을 혈류로 보내어 생존에 필요한 신체 예산을 탕진하게 된다.이렇게 ‘말’은 인체를 조절할 수 있어서 몇 달 이상 지속적이고 강력한 언어폭력은 만성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뇌를 갉아먹는다고 한다.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이런 피해를 입을 수 없다’가 아니라 ‘언어폭력만으로도 누구나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충분히 입을 수 있다.’그러나 피곤할 때 한마디 격려의 말이 마음을 진정시키듯이, 배럿은 말로 망가진 뇌는 말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가까운 이의 따듯한 말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피해자의 회복에 제일 중요하다. 그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2023-03-05

독서율 높이는 법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올해 EBS에서는 우리나라가 문해력 등 사회적 소통 능력이 부족한 이유가 독서율이 낮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 ‘역사를 바꾼 책’을 선정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독서율이란, 15세 이상 중에서 일반도서를 일 년간 한 권 이상 읽거나 들은 사람의 비율이다. 교과서, 학습 참고서, 수험서나 잡지와 만화는 제외되지만, 단행본으로 발행된 것이라면 그림책이든 동화든 소설이든 상관없다. 웹소설도 도서에 포함된다.그러고 보니, 독서와 관련된 에피소드 두 개가 생각난다. 하나는, 동네에서 20여 년째 독서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초창기 독서 모임에 참여하던 한 지인이 서울대 나온 자기 이웃에게 권했더니 책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손사래를 치더라는 일화이다. 지금 생각하니 거절하는 핑계였나 싶기도 한데, 그때는 명문대 졸업생이 얼마나 책에 질렸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놀랐다.다른 하나는 작은애 이야기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읽은 책은, 절반은 그림으로 된 ‘구렁덩덩 신선비’와 ‘나무꾼과 선녀’ 딱 두 권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 폭발적으로 독서량이 늘더니 지금도 직장에서 독서 동아리에 들어 책을 읽고 있다. 학년에 맞는 책 읽어야 한다고 강요받지도 않고, 자기가 선택한 책을 책장이 떨어질 정도로 읽은 것이 즐거운 기억으로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19세부터 종이책 독서율은 40%이고,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종합 독서율은 47.5%라고 한다. 성인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의 책이든 1년에 단 한 권도 안 읽은 셈이다. 독서율 기준이 이렇게 낮은 것을 보면, 독서율이 낮다는 것은 문해력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책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실제로 2018 책의 해 기념으로 진행된 ‘독자 개발 연구’에 따르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강압적인 독서로 인한 독서 혐오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각종 기관에서 정해주는 추천 도서로 학습용 독서를 하다 보니 독서가 즐거운 활동이라는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성인이 되면 독서에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즐거운 독서 체험은 독서율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핀란드가 세계에서 독서율이 가장 높은 이유도 어렸을 때부터 즐거운 독서 체험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2018년 국제독서콘퍼런스 영상을 보니, 핀란드에서는 책 읽어주는 할머니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독서 도우미 개를 이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있단다. 유치원과 학교는 도서관과 연계하여 독서를 촉진하며, 도서관은 지하철 역 근처에 있어 이용 편의성도 높다. 이런 제도 속에서 즐거운 독서가 생활화되다 보니, 자기가 원하는 책을 스스로 발견해나가게 되고 나이가 들어도 책을 찾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19세 이상의 독서율을 높이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즐거운 독서 경험을 많이 하게 하는 것, 그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2023-02-26

역사를 바꾼 책이 독서율을 높일까?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4년 전쯤, 중장년을 위한 사회 교육 기관에서 강의할 때 대학원 수료 학력 수강생의 포부를 들은 적이 있다. 연세가 60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는데 죽기 전에 서울대 추천 도서 100권을 다 읽고 싶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서울대에서 추천했으니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그런데 며칠 전 EBS에서는 역사를 바꾼 책 100권을 선정하여 전 국민에게 홍보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를 보니, 그때 수강생도 생각나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해서 서울대 목록과 비교해보았다. 과연 서울대 100권 중에는 과학책이 10권인데 비해 EBS의 과학책은 19권이었다. 두 기관의 추천 목적도 달랐다.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서울대 목록에서는 “고전이란 모름지기 인류의 지혜가 집약된 보고이므로 고전에 대한 독서를 통해 판단력과 사고력을 함양하는 한편 성숙한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기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반면, EBS는 독서율 저하 때문에 문해력이 부족하고 개인 역량이 떨어지며 사회적 소통 능력이 낮다고 보고,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역사를 바꾼 책으로 독서율을 높이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작년에 방송된 ‘당신의 문해력+’13부작에서 나온 문해력 문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 방송에서는 업무용 이메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휘력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등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보여주었다.그런데 역사를 바꾼 책 선정 기준이 학제 간 의미를 중시하고 특히 과학책의 비중이 높다면서 이전의 다른 목록과 차별성이 있다고 강조해도, 서울대 목록과 25권이 겹치고 나머지 75권도 서울대 목록과 난이도는 비슷하다. 철학 비중이 높아서 그런지 오히려 더 어려워 보인다. 칸트의 저작 중 서울대에는 ‘실천이성비판’한 권이 있는데 비해, EBS에는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 두 권이 있다. 칸트의 저작이 왜 두 권이나 들어갔는지도 의아하고,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이 ‘실천이성비판’보다 당대 사조를 바꾸는 데 더 기여했다는 것인지도 궁금해진다.‘역사를 바꾼’을 앞세운 것을 보면, 아무래도 EBS에서 기대하는 문해력 수준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력과 판단력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그냥 읽기만 해서는 높아지지 않는다. ‘이 말이 맞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문제는 없나?’,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숙고하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핵심 메시지를 전문가가 설명하는 홍보 영상까지 만든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질문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이렇게 숙고할 기회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어떤 목적을 위해 도서를 선정할 때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 고학력자의 교양 쌓기 목록 같은 고전 읽기 운동으로 독서 진흥이 잘 될지, 한 방향 홍보 영상이 문해력 향상과 사회적 소통 능력 제고라는 목적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2023-02-19

행복한 청소부의 노동 시간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율곡로, 퇴계로, 세종로 등 서울에는 위인 이름을 딴 거리가 많다. 독일도 그런가 보다. 독일 작가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에 나오는 청소부는 예술가 이름을 딴 거리에서 표지판을 닦는 사람이다. 그래서 표지판이 바흐 거리, 베토벤 거리, 토마스 만 광장 등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어느 날 청소부는 꼬마가 하는 말을 듣고 표지판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 후 5시에 퇴근하면 음악회와 오페라 공연에 다니면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쌓는다. 나중에는 대학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청소부는 청소부로서의 삶이 너무나 행복해서 그 요청을 거절하고 변함없이 표지판을 닦았다고 한다.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른에게 시사하는 바는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부가 이렇게 행복한 것은 청소부가 5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적정한 노동과 퇴근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참고로, 2021년 현재 독일의 연간 근로 시간은 1천349시간으로 한국보다 566시간이 적다.시간적 여유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례는 네덜란드다. 얼마 전, 티비 프로그램 ‘물 건너온 아빠들’에서 네덜란드 사람 톨벤이 25개월 된 딸을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딸의 손놀림이 느려도 아빠가 전혀 재촉하지 않고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주자, 패널들이 모두 톨벤의 여유에 감탄한다. 이런 육아법 때문인지 네덜란드는 아이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고 한다. 반면, 한국 아이의 행복지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OECD 국가 중 꼴찌를 맴돈다. 톨벤은, 이렇게 네덜란드 부모들이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이유는 근로 시간이 적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실제로 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평균 노동 시간은 주 28~33시간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네덜란드는 이런 제도를 1980년대부터 실시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우리 정부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주 12시간까지만 연장 근로를 허용하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제대로 실시한 지 2년이 안 되었는데, 올해부터 정부는 연장 근로 방식을 월 단위나 분기, 반년, 1년 등으로 다양하게 적용하여 최대 69시간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문제는, 2021년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 시간은 1천915시간으로, 지난 26년간 멕시코의 2천128시간에 이어 2위를 고수해왔다는 것이다. 최근 5위로 밀려났지만, 근로 시간이 개선된 것은 아니고 한국보다 근로 시간이 많은 페루,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가 OECD에 가입했기 때문이다.작년 10월, SPC 계열사 공장의 여성 노동자 사망은 연장 근로로 인한 과로 때문이었다. 2016년 IT업계 노동자의 연이은 자살도 과로 때문이었다. 어른의 연장 근로는 아이의 행복은 물론, 한 가정의 행복을 결정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행복한 청소부’는 책에나 있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행복한 청소부는 현실에 있어야 한다.

2023-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