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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노 사회와 휴머니즘

유영희 작가 1월 4일 오전 6시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용차 기사가 경사로에서 택배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다 택배차와 주차된 차량 사이에 끼어서 사망한 것이다. 용차 기사는 택배 기사가 쉴 때 투입되는 재위탁 기사이다. 아내는 임신중이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더 크게 안타까운 것은 택배 기사들은 소속 택배 회사와 노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용차 기사는 아르바이트 같은 개념이어서 사후 보호 조치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노동 형태를 긱 노동이라고 한다.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인 1회성 계약을 맺고 일하는 플랫폼 노동이다. 현대 사회의 노동이 파편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나노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나노 사회란, 이렇게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은 모래알처럼 부스러져 고립된 섬이 되어가는 사회를 말한다. 나노 사회 현상은 산업화 이후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더 심각해지고 있다.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산하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다음 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트렌드 코리아’를 2008년부터 매년 발간하고 있는데, 며칠 전 나온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도 내년 10대 키워드로 나노 사회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노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감 능력을 키우고 우연한 경험의 폭을 넓히며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춰나가자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휴머니즘의 회복이라고 말한다.휴머니즘은 인간다움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세련된 로마인만 인간이었고, 인도인과 흑인, 아메리카 인디언은 1537년에야 인간으로 인정받았던 것을 보면, 누구까지 인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역사의 발전으로 인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풍속, 습관, 사상이 자기와 같은 사람만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만 ‘존중할 만한’ 인간이라고 은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해야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하지만, 그런 휴머니즘을 장착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무엇보다 나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 패턴이 다양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만나지 못하니 공감할 기회도 없다. 낯선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길을 묻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도 노선을 완벽하게 짜서 떠나니,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우연한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파트에서는 몇 년을 살아도 옆집조차 모른다. 이웃과의 공동체도 만들기 힘든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불행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시인에게나 가능해 보인다.용차 기사의 죽음 앞에서, 아쉽게도 인문학적 처방은 힘이 될 것 같지 않다. 공감은 스쳐 지나가는 감상에 그치고, 휴머니즘은 공허한 구호에 머물 가능성이 많다. 모래알처럼 존재하면서 파편화된 노동자로 살아가는 나노 사회의 문제는 공감이나 휴머니즘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2022-01-16

만남과 마주침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또 어떤 일이 있을지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기대된다. 삶이란 수많은 만남의 연속이지만, 그 만남에는 약속한 만남도 있고 뜻밖의 만남도 있다. ‘만나다’에는 ‘두 강줄기가 만나다’처럼 물리적인 맞닿음의 의미도 있고, ‘불운을 만나다’처럼 ‘당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앞뒤 맥락 없이 ‘만나다’만 있을 때는 사람이 일부러 가거나 와서 마주 보다의 의미가 떠오른다.그에 비해 ‘마주침’에서는 우연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네’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 우연한 만남에는 무언가 강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충돌이라는 약간의 부정적 뉘앙스도 풍긴다. 여기서 충돌은 서로 부딪치는 것이라서 ‘당하다’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러나 ‘만남’과 ‘마주침’, 두 단어는 단칼에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처럼, 만남이라고 쓰지만 마주침의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우연한 만남이라는 의미로는 아무래도 만남보다는 마주침을 더 많이 쓰게 된다.이렇게 마주침에는 혼란이 따른다.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큰일을 당할 때는 물론이고, 공동의 이익과 관련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도 합리적인 선택 기준이 무엇인지 우왕좌왕하게 된다.얼마 전 집합주택 건축을 위한 정비업체 선정 투표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해당 분야 관련 실적이나 신뢰도를 가늠하는 재무 상태와 같은 객관적 평가 분야에는 70점을, 입찰 가격 평가에서 평균에 가장 가까운 업체에 점수를 많이 주는 상대 평가 분야에는 30점을 주고 두 점수를 합하여 총점을 매긴다고 한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업체가 우수한 업체이고 당연히 그 업체가 선정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 투표에서는 뜻밖에도 최고 점수보다 훨씬 못 미치는 점수를 받은 두 번째 업체가 선정되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업체의 입찰 가격이 현저하게 낮아서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용이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점이 아닌 업체가 선호도는 더 높은 이상한 결과가 나온 셈이다. 차점자 업체가 선호도가 더 높은 점수 체계를 합리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런 채점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점수표의 타당성을 높여가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뿐이다.대통령 선거가 두 달 남았다. 저마다 마음에 두는 후보는 있겠지만, 그 선택이 합리적인가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정비업체 투표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대통령직에 필요한 객관적 자격 요건을 정하여 점수를 매기고, 후보자끼리 비교할 수 있는 상대 평가 항목도 만들어 채점을 해보고 싶어졌다. 채점 항목도 많고 배점 방식도 복잡해서 쉽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 눈에 띄는 모습으로 결정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좋은 점수가 나온 후보를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을지라도 그런 시도는 의미 있을 것이다.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