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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음 세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유영희 작가 문학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 차이일 수도 있지만 세대 차이이기도 하다. 사회적 이슈를 다룬 문제일수록 세대 차이가 더 느껴진다. 현직 국어교사들이 편집한 청소년 참고서에 실린,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읽는 관점에도 세대 차이가 나타난다.월가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필경사 바틀비는 변호사가 하라는 일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면서 거부한다. 선생님들의 작품 해석은, 바틀비를 채용한 변호사를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고용주로 보고, 바틀비의 거부를 체제에 대한 ‘수동적 저항’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비판하는 인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서 청소년들은 변호사는 충분히 바틀비에 공감하려고 충분히 노력했고 바틀비의 거부가 무리하다는 점을 들며 선생님들의 해석에 이의를 저항한다.‘필경사 바틀비’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번역도 많지만 논문도 엄청나다. 그중에는 끝까지 바틀비를 책임지지 않았다고 변호사를 비난하는 관점, 바틀비를 통해 변호사가 변해가는 모습에 주목하는 입장, 바틀비의 행동이 이해 불가라는 논문도 있다. 세계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논문이 몇백 편이고 해석하는 관점도 수십 가지이며, 심지어 현대의 내로라 하는 사상가들이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철학의 관점을 정립했다고 한다. 이런 작품을 도식적으로 해석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나 전광용의 ‘꺼삐딴 리’의 작품 해석도 예외는 아니다. 학교에서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 대해 세입자 권 씨는 순수한 사람이고 비정한 산업사회의 피해자인데 비해, 집주인 오 씨는 이해타산적이라고 해석한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은 일제 강점기 때도, 소련 점령 때도, 월남 후 남한에서도 사회 공동체는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다.그러나 교과서를 읽는 청소년들의 독법은 다르다. ‘아홉 켤레’의 집주인 오 씨가 세입자를 어디까지 도와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꺼삐딴 리’ 이인국에 대해서도 이인국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독법을 틀렸다고만 할 수 있을까?구두 아홉 켤레를 가지고 있는 세입자 권 씨는 정말 순수한지, 집주인 오 씨는 어떤 사람인지, 이인국의 잘못은 뭔지,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바틀비의 거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청소년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같이 토론해야 할 때가 왔다.이런 질문으로 토론하다 보면, 삶과 공부가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대 간 소통도 가능해질 것이다. 정답을 낼 수 없는 작품을 도식적으로 해석해주고 문제 내고 채점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세대 갈등은 피하기 어렵다.

2022-03-20

세상의 논쟁을 대하는 법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이제 3월 9일이면 20대 대통령이 선출된다. 이 날이 오기까지 정치인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자니 분노와 실망을 넘어 무력감을 느끼는 국민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사실에 대해서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심신 건강 전문가들이 이구동성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뉴스를 멀리해야 한다고까지 할까? 이럴 때는 중국 고대의 현자, 장자를 떠올리며 세상의 시비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장자는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에서 태어난 사상가이다.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이루어진 책 이름이기도 하다, ‘장자’ 내편 중 제2편 제물론은 ‘세상의 논쟁을 잠재우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장자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내가 당신과 논쟁을 했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이 옳고 내가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내게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이 틀린 걸까요? 그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렸을까요? 아니면 양쪽 다 옳을까요? 양쪽 다 틀린 걸까요? 이 판단은 나도 당신도 알 수가 없소. 그렇다고 제3 자가 와도 판정할 수가 없소. 제3 자가 당신의 입장과 같은 사람이라면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없고, 제3 자가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나와 같으므로 공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가 없소…. 그러니 누구에게 공정한 판단을 기대한단 말이오? 이렇듯 불안정한 세상의 의견을 옳다고 의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오.”사람들은 자기 의견과 같은 사람을 끌어들여 자기 의견이 옳다고 증명한다. SNS에서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차단하고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그룹에서만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미 그 사람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니 그 사람이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장자의 이런 회의주의가 그럴듯해 보이고 속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장자가 끝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같은 상황을 보고 어떤 사람은 옳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니, 이 대립된 의견의 균형을 잡아 두 의견을 조화시켜 무한한 경지로 뻗어 나가 무한한 세계에 머물게 해야 하오.”대립된 의견을 조화시키는 기준을 하늘의 길, 천예라고 한다. 장자는 이 천예를 통해 대립을 초월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자고 한다. 그 자신도 자유를 추구하며 제자들과 자연 속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이 천예를 누가 알 것인가, 숲속에서 사는 것이 정말 천예를 따라 사는 삶인가? 이런 의문을 따라가다 보면, 장자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뉴스를 끊고 세상을 등지고 살 것이 아니라면, 장자의 이야기는 나만 옳다는 자만을 돌아보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선택 과정에서 대립은 불가피하지만, 조화와 균형의 여지를 남겨두는 열린 마음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2-03-06

새 노년의 덕

유영희작가 60+책의해 유튜브 채널은 60+ 세대가 나와서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채널이다. 우연히 알게 되어 구독하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출연자들의 소감을 듣다 보면, 젊은 유명 북튜버 채널과는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된다. ‘황혼의 미학’은 그 채널에서 알게 된 책이다. 저자 안셀름 그륀은 노년의 두 가지 과제로 자신 받아들이기와 놓아 버리기를 말한다.많은 사람이 노년에 빠지기 쉬운 어려움 중 하나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과거와 화해하기를 맨 앞에 둔다. 언젠가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고 하자, 두 딸은 이구동성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람은 변하기 어렵고, 그때 선택은 그 나름대로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게 이유다. 그러고 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한계도 받아들여야 하고, 고독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무엇보다 노년의 생활 중 가장 혹독한 시련은 홀로 있다는 기분, 쓸모없어졌다는 생각이다. ‘인간에게 열정과 일…. 과제가 없는 상황처럼 견디기 힘든 것은 없다. 인간은 그런 상황에 처하면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고독하고, 무기력하고, 의존적이고, 무능하고 공허한 존재인지 느낀다.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영혼 밑바닥에서 지루함, 슬픔, 불만, 절망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파스칼의 말은 노년의 감정을 잘 표현해준다. 이런 상황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이니 잘 대처해야 한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그렇다고 저자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놓아 버리기에서 제시하는 재산에 집착하지 않기, 건강에 매달리지 않기, 권력 내려놓기, 자아 버리기 들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자식들에게 넘겨주어 재산에서 해방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저자의 신분이 사제라서 이렇게 말했을까? 하긴,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 극단적이다. ‘맛지마 니까야’라는 초기 불교 경전에는 재산을 자식에게 다 물려주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어느 은퇴자에게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까지 내려놓으라고 한다.며칠 전 노후 연금을 계산해보니, 그동안 알고 있던 금액에서 많이 모자랐다. 평생을 계약직과 프리랜서로 살아왔으니 변변찮을 것은 당연하지만 이 정도라니 충격이 왔다. 인문학 공부 경력은 간 곳이 없고 불안이 밀려 왔다.재산을 자신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되고, 인색한 것 역시 당연히 악덕이지만, 2020년 현재 한국의 남녀 모두 기대 수명이 80세가 넘고 90세에 육박하는 현대 사회에서 노년에게 어느 정도 재산은 필요하다. 저자는 마지막에 평정, 인내, 온유, 자유, 감사, 사랑이 노년의 덕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재산은 이런 품성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된다.초고령 사회의 새 노년에게는 놓아버리기보다 적절하기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자아를 버리고, 권력을 내려놓으라는 급진적 가르침보다 적절한 자아, 대안적 권력을 제시해야 할 때가 왔다.

2022-02-20

토끼가 한숨 잔 이유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토끼는 거북이가 느리다고 자꾸 놀렸어요. 그러자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토끼는 바로 승낙하고 시합에 나섰지만 한숨 자다가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어요.”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거북이의 꾸준함과 토끼의 어리석음이 한눈에 대비되어 보인다. 실제로 이 우화는 거북이의 우직함을 칭찬하거나 토끼의 자만을 나무라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 같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리송하다. 토끼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은 자기보다 많이 느린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할 때 기를 쓰고 달렸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정말 토끼에게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리라고 해야 하나? 한숨 잔 토끼를 게으르다고, 어리석다고 탓하는 것은 약자와 경쟁하는 기득권자를 채찍질하는 셈이다.그렇다고 거북이의 성실함을 칭찬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문제는 있다. 태생적인 약점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특이하거나 영웅적인 사례를 일반화하여 약자를 다그치는 것은 가혹하다. 한때는 잠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혼자 갔다고 거북이를 나무라는 논리가 인기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공정한 게임에서 약자에게 강자를 도우라는 요구는 연대나 배려의 의미를 오남용한 것이다.진호(가명)는 느린 학습자라고 불리우는 소년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해 두려움이 많다. 며칠 전 진호와 ‘토끼와 거북이’를 읽으며 거북이는 왜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을까, 토끼는 왜 한숨 잤을까 물어보았다. 진호는 먼저 이런 말을 한다. 왜 이기는 것만 말해요? 체력이 좋아진 걸로 말하면 안 돼요? 아하, 정말 그렇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체력이 늘었을 테니 지더라도 의미가 있네. 그러자 뒤이어 이렇게 말한다. 토끼는 일부러 낮잠을 잤어요. 거북이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요. 거북이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서 시합을 한 거예요.학식 높은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한 진호의 해석에 머리가 띵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토끼를 교만한 게으름뱅이로만 해석했을까? 왜 토끼가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렸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거북이는 잠자는 토끼를 깨워 같이 갔어야 한다는 논리에 왜 동조했을까?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른들, 공정의 프레임에 갇힌 어른들, ‘함께’를 오용하는 어른들을 진호는 멋지게 한 방 먹였다. 진호가 이런 말을 하기까지 혼자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짐작하기에 울림은 더 컸다.그런데 진호 친구들은 진호를 위해서 낮잠을 자줄 수는 없을 텐데, 거북이처럼 달릴 수 있겠어? 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네. 저는 할 거예요. 진호, 참 장하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츤데레 토끼와 우직한 거북이가 많아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2022-02-06

나노 사회와 휴머니즘

유영희 작가 1월 4일 오전 6시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용차 기사가 경사로에서 택배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다 택배차와 주차된 차량 사이에 끼어서 사망한 것이다. 용차 기사는 택배 기사가 쉴 때 투입되는 재위탁 기사이다. 아내는 임신중이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더 크게 안타까운 것은 택배 기사들은 소속 택배 회사와 노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용차 기사는 아르바이트 같은 개념이어서 사후 보호 조치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노동 형태를 긱 노동이라고 한다.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인 1회성 계약을 맺고 일하는 플랫폼 노동이다. 현대 사회의 노동이 파편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나노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나노 사회란, 이렇게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은 모래알처럼 부스러져 고립된 섬이 되어가는 사회를 말한다. 나노 사회 현상은 산업화 이후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더 심각해지고 있다.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산하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다음 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트렌드 코리아’를 2008년부터 매년 발간하고 있는데, 며칠 전 나온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도 내년 10대 키워드로 나노 사회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노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감 능력을 키우고 우연한 경험의 폭을 넓히며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춰나가자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휴머니즘의 회복이라고 말한다.휴머니즘은 인간다움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세련된 로마인만 인간이었고, 인도인과 흑인, 아메리카 인디언은 1537년에야 인간으로 인정받았던 것을 보면, 누구까지 인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역사의 발전으로 인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풍속, 습관, 사상이 자기와 같은 사람만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만 ‘존중할 만한’ 인간이라고 은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해야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하지만, 그런 휴머니즘을 장착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무엇보다 나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 패턴이 다양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만나지 못하니 공감할 기회도 없다. 낯선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길을 묻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도 노선을 완벽하게 짜서 떠나니,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우연한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파트에서는 몇 년을 살아도 옆집조차 모른다. 이웃과의 공동체도 만들기 힘든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불행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시인에게나 가능해 보인다.용차 기사의 죽음 앞에서, 아쉽게도 인문학적 처방은 힘이 될 것 같지 않다. 공감은 스쳐 지나가는 감상에 그치고, 휴머니즘은 공허한 구호에 머물 가능성이 많다. 모래알처럼 존재하면서 파편화된 노동자로 살아가는 나노 사회의 문제는 공감이나 휴머니즘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2022-01-16

만남과 마주침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또 어떤 일이 있을지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기대된다. 삶이란 수많은 만남의 연속이지만, 그 만남에는 약속한 만남도 있고 뜻밖의 만남도 있다. ‘만나다’에는 ‘두 강줄기가 만나다’처럼 물리적인 맞닿음의 의미도 있고, ‘불운을 만나다’처럼 ‘당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앞뒤 맥락 없이 ‘만나다’만 있을 때는 사람이 일부러 가거나 와서 마주 보다의 의미가 떠오른다.그에 비해 ‘마주침’에서는 우연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네’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 우연한 만남에는 무언가 강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충돌이라는 약간의 부정적 뉘앙스도 풍긴다. 여기서 충돌은 서로 부딪치는 것이라서 ‘당하다’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러나 ‘만남’과 ‘마주침’, 두 단어는 단칼에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처럼, 만남이라고 쓰지만 마주침의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우연한 만남이라는 의미로는 아무래도 만남보다는 마주침을 더 많이 쓰게 된다.이렇게 마주침에는 혼란이 따른다.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큰일을 당할 때는 물론이고, 공동의 이익과 관련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도 합리적인 선택 기준이 무엇인지 우왕좌왕하게 된다.얼마 전 집합주택 건축을 위한 정비업체 선정 투표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해당 분야 관련 실적이나 신뢰도를 가늠하는 재무 상태와 같은 객관적 평가 분야에는 70점을, 입찰 가격 평가에서 평균에 가장 가까운 업체에 점수를 많이 주는 상대 평가 분야에는 30점을 주고 두 점수를 합하여 총점을 매긴다고 한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업체가 우수한 업체이고 당연히 그 업체가 선정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 투표에서는 뜻밖에도 최고 점수보다 훨씬 못 미치는 점수를 받은 두 번째 업체가 선정되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업체의 입찰 가격이 현저하게 낮아서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용이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점이 아닌 업체가 선호도는 더 높은 이상한 결과가 나온 셈이다. 차점자 업체가 선호도가 더 높은 점수 체계를 합리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런 채점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점수표의 타당성을 높여가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뿐이다.대통령 선거가 두 달 남았다. 저마다 마음에 두는 후보는 있겠지만, 그 선택이 합리적인가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정비업체 투표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대통령직에 필요한 객관적 자격 요건을 정하여 점수를 매기고, 후보자끼리 비교할 수 있는 상대 평가 항목도 만들어 채점을 해보고 싶어졌다. 채점 항목도 많고 배점 방식도 복잡해서 쉽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 눈에 띄는 모습으로 결정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좋은 점수가 나온 후보를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을지라도 그런 시도는 의미 있을 것이다.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