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 작가 무생물이라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면 정이 든다. 특히 자동차는 내 몸과 함께 움직여서 그런지 더 애정을 느끼기 쉽다. 8월 9일 서울에 내린 폭우로 사망자와 실종자가 십수 명에 이르렀던 날, 지인은 차로 외출했다가 귀가 길에 비가 터널에 가득 차서 바퀴가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본인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차를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면서 차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과 전혀 닮지 않은 자동차도 오랜 시간 같이 보내면 생물처럼 느껴지고 아끼게 된다.그런데 만약 그 존재가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말도 한다면 어떨까? 지난 6월, ‘파친코’의 감독 코고나다가 만든 영화 ‘애프터 양’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주지만, 특히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시대 배경은, 사람과 똑같이 생겨서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상용화된 미래 사회이다.제이크와 키라 부부는 중국인 딸을 입양하고 중국 문화를 교육해 줄 테크노 사피엔스인 양을 구매한다. 제이크는 찻집을 운영하고 부인은 직장에 다니느라 바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과 함께 4인 가족 댄스경연대회에도 출전하며 양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보면 제이크 가족이 양을 대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이 고장 난 후 양의 기억을 재생해보니 양은 제이크의 가족이 될 생각이 없었다. 양은 제이크 부부가 딸 미카와 가족사진을 찍을 때 오라고 하자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응한다.더군다나 양은 제이크가 혐오하는 복제 인간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느냐는 제이크의 질문에 복제인간 에이다는 너무 인간중심적이라고 비웃는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영화나 소설에서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로봇을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양과 에이다의 이런 태도는 당황스럽다. 양의 기억에 에이다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냥 멜로디가 되고 싶어, 그냥 하늘이 되고 싶어, 그냥 바람이 되고 싶어, 그냥 바다가 되고 싶어.’라는 노래가 흐르는 것은 의미가 깊다.우리는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그 대상이 나의 필요와 이익에 충실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양이 고장 난 것도 4인 가족 댄스대회 때이다. 제이크 부부는 양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양의 마음도 그들과 같으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양을 가족이라 생각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착각이었을 뿐이다.스트어트 러셀의 책,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에는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자고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앞설 가능성을 염려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게다가 인간이 기계를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안드로이드를 인간중심적으로 대하지 않고 세계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이 더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2022-08-21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미국 텍사스주의 7월 10일 낮 최고 기온은 45℃로, 1950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하고, 스페인에서는 45℃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일주일 만에 36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인도 역시 한낮 기온이 섭씨 50℃까지 올라가 하늘을 날던 새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 위기로 인류가 집단 자살에 직면해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고 한다.이상 고온으로 세계 곳곳이 위험에 빠져있다는 며칠 전 뉴스다. 그러나 채널만 돌리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넘쳐나니, 기자의 이런 보도는 흔적도 없이 흘러간다. 과학자와 시민 단체들이 기후 위기를 경고해도, 정치인들은 기후 변화 완화 정책에 관심이 없고, 일부에서는 추울 만큼 에어컨을 틀며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영화 ‘돈 룩 업’은 이런 상황을 풍자한다.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는 에베레스트 산 만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담당 교수 랜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지구 멸망을 예고하지만, 대통령은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 연임을 위해 이들을 잠시 이용할 뿐이다. 케이트와 랜들은 방송에도 출연하여 호소하는데, 언론은 이들을 빌미로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하고, 시민들은 케이트의 분노에 찬 표정을 우스운 밈으로 소비할 뿐이다. 그래도 이들은 혜성 충돌을 알리느라 동분서주한다.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케이트와 랜들 일행이 혜성이 지구에 떨어져 집이 흔들리는 순간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어떤 불안이나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이렇게 평온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할 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기후 문제의 심각성은 혜성 충돌보다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더 어렵다. 혜성 충돌은 6개월이라는 짧은 시한이었고 혜성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추적되지만, 기후 위기는 몇십 년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지구 기온 변화의 주기라는 주장에도 맞서야 한다. 이렇게 문제를 인식한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간격은 넘어서기 어렵다.며칠 전, SNS 친구의 담벼락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는 글귀를 보았다. 그 분은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소아과 전문의이다. 최근 드라마의 열풍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그 간격은 많이 좁혀진 것 같지만, 이런 변화가 오기까지 식견 있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기후 위기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모든 분야에는 변화를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해봐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평온만 추구해서는 불안만 커지고 지혜도 생기지 않는다. 용기 있는 행동만이 평온과 지혜를 가져온다.
2022-08-07
유영희 작가 얼마 전 성인들로 구성된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에 참여했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조사를 바꾸는 것은 다반사이고 읽고 나서도 내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독은 독서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가끔 보는 일인데, 문제는 그렇게 잘못 이해한 것을 다양한 해석이라는 명분을 내걸며 우길 때 참 난감하다.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도 이런 오독은 종종 일어난다. 다행히 모임에서는 서로 자기가 읽은 것을 나누면서 고칠 수 있지만, 취업을 준비하거나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한순간 잘못 이해하면 큰 낭패를 보기 때문에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문해력은 원래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글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의미적 읽기’까지 수행하는 정도를 실질적 문해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문해란 다양한 내용에 대한 글과 출판물을 사용하여 정의, 이해, 해석, 창작, 의사소통, 계산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기초 문해력을 습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가 급속히 변하면서 알아야 할 어휘가 급속히 늘어나는 데다, 관련 지식이나 정보가 없으면 정보 문서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실질 문맹률은 점점 늘어난다. 우리나라는 3년마다 성인 문해력 수준을 조사하는데, 2020년 약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학교 학력 이하의 문해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1천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이런 고민에 응답하듯, 7월 7일부터 10월 6일까지 EBS에서 ‘당신의 문해력+’를 방영하고 있다. 작년에 방송된 ‘당신의 문해력’이 6부작이었는데 올해는 그 두 배가 넘는 13부작이라고 하니 문해력 문제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방송을 보니,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의 질문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답을 하거나 거래처에서 온 업무 메일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출연해 경각심을 높여주었다.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사전을 찾고 문맥에 맞게 써보는 것이 좋다. 문장 간 연결 능력을 키우는 데는 추론적 질문하기가 효과적이다. 추론적 질문은 내가 강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평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올해 EBS 문해력 테스트에서 주식 매매 수수료나 휴대폰 약정 할인 문제를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2020년 EBS 문해력 조사에서 실질 문맹률이 75%라고 나왔다는데, 이번 테스트에도 당황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문해 능력 평가는, 문자 중심의 산문 문해, 서식과 도표를 포함한 문서 문해, 계산이 필요한 숫자 문해로 구성되어 있다. 인문학 중심으로 책을 읽다 보면, 사회 변화에 둔하고 숫자 문해에도 취약해지기 쉽다.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려는 태도도 문해력을 키우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2022-07-31
유영희 작가 요즘 핫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감탄과 열광이 주를 이룬다. 나 역시 3회부터 본방사수 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 12월 이 드라마를 홍보할 때 제작사가 우영우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자폐증’을 앓는 변호사라고 홍보했다고 한다.이에 대해 자폐 당사자 모임 ‘에스타스’는 이런 표현은 자폐 차별적 표현이라고 반발하면서 자폐는 질병이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원인으로 인한 영구 손상이기 때문에 장애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 역시 자폐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그러나 자폐 당사자 모임의 염려가 아직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우영우 같은 고기능 자폐인이 자폐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인에게 잘못 인식되어 저기능 자폐인이 소외될까 하는 것이다. 이 역시 드라마에서 저기능 자폐인을 등장시켜서 어느 정도 해결은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폐 당사자나 그 가족은 이 드라마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우영우의 아이큐가 164로 설정되어 있으니 일반인 입장에서도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그 염려에 공감이 간다.이 드라마를 처음 보고 자폐인이 정말 변호사가 되기도 할까 조사해보니 미국에 자폐인 변호사가 두 명 있었다. 에릭 웨버는 2015년에 변호사가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육상 선수로도 활동했다. 2018년 24살의 헤일리 모스도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근무하다가 현재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 기사를 보니 모스도 우영우 드라마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변호사는 아니지만, 동물학 교수 템플 그랜딘 역시 자폐인인데, 동물의 세계를 잘 이해하여 동물복지를 배려한 소 도축장 시설을 설계했다,이들 모두 보통 사람보다 더 능력이 좋다고 해서 그 능력이 저절로 이만큼 발휘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이해해주는 부모나 선생님이 없었다면 그들은 정신병원에 가거나 시설에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존재를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현재 우리나라에는 2021년 현재 자폐 등록자는 3만3천 명, 미등록자는 2만 명으로 5만여 명의 자폐인이 있다고 한다. 이들을 다양성의 관점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좀 더 자리 잡는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자폐인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실제로 다문화주의 국가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는 자폐인들이 꽤 있다고 한다. 우영우 같은 비현실적인 허구 인물이라도 정확한 정보와 함께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런 인물이 더 많이 나오면 일반인들에게 다양성의 외연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배우가 고기능 자폐인 역을 하더라도 더 자주 노출된다면 그들에 대한 시선도 바뀔 것이다. 얼마 전 다운 증후군 정은혜 씨가 직접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자폐 당사자가 드라마에 직접 출연할 날도 곧 오리라 믿는다.
2022-07-24
유영희작가 지난 7월 12일, 제임스 웹이 찍어 보낸 우주 사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제임스 웹은 작년 12월에 미국의 나사에서 쏘아 올린 우주 망원경 이름인데, 허블 망원경보다 100배 더 성능이 좋다고 한다. 이제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우주의 신비만큼 인간의 뇌 역시 아직은 신비의 영역이다. 2년 전 뇌 MRI를 찍었는데 소혈관에 고신호가 발견되었다. 나이 들며 나타나는 정상적인 변화라고는 하지만, 7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파킨슨 병을 오래 앓으셨고, 어머니의 오빠 두 분과 언니 동생 등 7남매 모두 뇌 질환으로 돌아가셨기에 뇌 질환에 대한 공포가 유별난 편이라 뇌에 관심이 많다.이런 사연이 없더라도 뇌 질환에 대한 두려움은 120세를 바라보는 현대인에게 모두 있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을 해소해줄 뇌 연구 속도는 기대를 넘어선다. 신경과학이라는 용어가 1969년 처음 만들어졌으니 본격적인 뇌 연구 역사는 50년 조금 넘었는데 2019년 미국에서 뇌 오가노이드 제작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네덜란드에서 성체줄기세포로 장관 오가노이드를 만든 후 10년 만의 성과이다. 작년 8월 한국에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여 기존보다 2배 이상 크게 배양했고, 그 한 달 후 독일 연구팀이 뇌 오가노이드에서 눈을 유도하여 발생시켰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오가노이드는 장기유사체라고 하는데, 세포 분열 이전의 유도만능줄기세포를 특정 기관의 세포로 유인해서 그 기관의 기능과 작용을 재현하는 것이다. 장기유사체 개발로 많은 불치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뇌 장기유사체는 배양지지체에서 배양되기 때문에 아직은 성장에 한계가 있지만, 이렇게 배양된 뇌를 쥐의 뇌에 이식하면 쥐의 뇌와 결합하여 뇌의 성장이 빨라진다고 한다.그러나 혀, 신장, 폐 등의 장기유사체와는 달리 뇌 장기유사체 개발에는 마냥 환호하기 어렵다. 뇌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뇌의 신비가 밝혀지기를 바라면서도 현대 신경과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뇌 연구의 한계를 정하기도 어렵다.생명윤리를 연구하는 법학자 최경석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거나 학습 능력이 있다면 주체성이 있는 인간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그런 능력을 가지기 전까지만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연구라면 뇌를 연구할 의미가 없어진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뇌 과학 연구가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분자생물학자 선웅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어렵다.며칠 전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이제 인문학은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프랑켄슈타인의 잘못은 괴물을 만들었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 괴물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이라던 어느 인문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인문학이 뇌 과학자가 만든 뇌 장기유사체에 이름을 붙여주는 임무 이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인문학의 새로운 숙제가 무겁게 다가온다.
2022-07-17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어. 겨울이 되면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해요. 나는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지난 5월 말에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2화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한 말이다. 염미정은 대출까지해서 전 남친한테 돈을 빌려줬다가 떼인 후 대출금 상환 독촉을 받고 있고,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나 염미정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낯선 남자 구씨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술만 마신다. 이어서 염미정은 구씨가 겨우내 자신을 추앙하면 봄에는 자신도 그도 달라져 있을 거라고 한다.이 방송이 끝난 후 SNS에는 ‘추앙하라’가 흘러넘쳤다. 한편으로는 구씨의 상태 때문에 염미정이 그런 말을 더 쉽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염미정은 추앙 말고는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의 남자친구들에게 심하게 이용만 당했기 때문이다. ‘추앙하라’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일상에서는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신선한 느낌도 들었을 테고, 그만큼 사랑에 지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리라.그러나 염미정을 향한 구씨의 추앙이 아무리 멋지게 표현되어도, 채워지고 싶다는 염미정의 갈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추앙이라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라는 ‘추앙하다’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추앙하는 쪽과 추앙받는 쪽의 균형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노파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추앙이 본의와는 다르게 오용되거나 남용될까봐 걱정이 앞선다. 사실 염미정이 말하는 추앙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 추앙이라고 하면 나는 팬클럽 문화가 떠오른다. 어느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다가 추앙하지 못해서 팬클럽 회장에게 권고 탈퇴를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미래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언어생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주인공 조너스가 지각한 이유를 말하면서,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아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선생님은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았다’는 단어는 너무 강하다면서 ‘정신이 팔린’으로 교정해준다. 이 마을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논란거리이기는 하나, 조너스 어머니의 이런 입장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요해 보인다.어느날 조너스가 부모에게 ‘절 사랑하세요?’ 묻자, 부모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일반화된 단어라 무의미하다면서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세요?’와 같이 정확한 표현을 써야 마을이 원활하게 돌아간다고 알려준다. 염미정의 소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2022-07-10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사람은 하루에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500번 한다고 한다. 아무리 세어봐도 500번까지 될 것 같지 않지만,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조던 피터슨의 연구 결과라고 하니 영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어느 결정이 좋은 선택인지 알기는 참 어렵다.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도 많다. 선택하고 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어쩌다가 김성수의 ‘글쓰기명상’에 나오는 ‘내가 선택했던 좋은 결정 백 가지’를 써보았다. 그동안 좋은 결정을 얼마나 했을지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십 분 제한을 두고 써보니 그래도 스물한 가지를 쓸 수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 아침 청소한 것과 같은 작은 결정부터, 어미 잃은 생후 한 달도 안 된 고양이를 키우기로 한 20년 전의 약간 큰 결정, 출산처럼 인생의 큰 방향을 좌우하는 큰 결정까지 삶의 여러 순간에 했던 결정들이 노트에 쓰여 있었다.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런 스물한 가지 결정들이 나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 아침 청소는 손님이 오기 때문에 한 것이고, 고양이를 거둔 것은 그 고양이가 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전에 집안까지 들어온 길고양이가 싫어서 동물보호소에 갖다 준 일로 항상 마음 한구석이 켕겨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혼 역시 대단한 의지로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시작은 어쩌다가 하게 되기도 한다. 며칠 전 18세의 나이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등을 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7살 때 친구들이 피아노, 태권도, 수영을 하나씩 해서 나도 하나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엄마 손에 이끌려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에 갔다고 한다. 그러고도 처음 1, 2년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예술의 전당 영재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대단한 결정으로 시작한 것은 아닌 셈이다.좋은 일만 그럴까? ‘어쩌다 정신과 의사’의 저자 김지용은, 마음에 병이 있어서 찾아온 분들을 보면 그분들 탓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어쩌다 결정되고 어쩌다 흘러왔을 뿐이고, 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쩌다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면서,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말한다. 소아청소년과 의사이면서 자폐증 관련 의학서적을 출간한 출판인 강병철 역시 자폐증에 걸린 사람도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음이 힘들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20, 30대 젊은이들 역시 자기가 선택했다기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어떤 결과가 나오는 데는 무수한 원인이 작용하고, 우리는 그 원인을 다 알 수 없다. 결과가 좋다고 자기가 잘 결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아프고 힘들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라는 발견은 자책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돌보는 힘을 준다. ‘어쩌다 보니’는 우리를 구원한다.
2022-07-03
유영희 작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대 영양소이다. 그중 단백질과 지방은 콩이나 옥수수, 올리브, 브로콜리 같은 식물성 식품에도 있지만, 특히 고기에 많다. 육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전 인류가 고기의 맛을 버리기도 쉽지 않고, 비타민 B1은 고기에만 있는 영양소라서 채식으로 보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가 채식을 2년간 하다가 중도 포기한 것도 영양 불균형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축산 고기에 거부감이 있어도, 고기를 안 먹기는 참 힘들다. 그러다 보니 축산 고기 말고 다른 방식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는 없을까 궁리하게 된다.그러다 2020년 12월 어느 신문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싱가포르에서 세포증식 닭고기를 시중에 판매해도 된다는 승인이 났다는 것이다. 세포증식 고기는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해서 만든 고기를 말한다. 그래서 세포증식 고기는 실험실 고기라고도 하고 배양육이라고도 한다. 이후 기사를 보니, 21년 4월에는 배달 앱으로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세포증식 고기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교수 빌렘 반 엘런이다. 그는 1999년에 배양육에 관한 이론적 연구로 국제 특허를 획득하고 2002년에는 금붕어에서 유래한 근육 조직을 실험실의 페트리 접시에서 배양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7년에 빌 게이츠가 미국의 인공고기 스타트업인 ‘멤피스 미트’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소식도 들린다.빌렘 반 엘런이 세포증식 고기를 개발한 이유는 동물 학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기 소비량이 1980년 1인당 1년에 11.3kg이던 것이 2017년에는 55.89kg으로 늘었고, 2020년 유럽 사람들은 81kg, 북미 사람들은 123kg을 먹었다. 이렇게 우리가 고기를 많이 먹게 된 것은 공장식 대량 축산 시스템 덕분이다. 돼지들이 우리에 빽빽하게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사진을 보면 고개를 돌리게 된다. 도축 과정도 모른 척하고 싶다.그런 데다 2006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가축의 긴 그림자’라는 보고서에서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8%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기 소비율이 빠르게 높아지면 축산업이 환경을 오염시킬 것은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포증식 고기는 동물 윤리도 지킬 수 있고 온실가스 배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항생제 오남용이나 바이러스 감염 우려도 없다.그러나 세포증식 고기를 선택하는 데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세포를 증식하려면 동물의 혈청이 필요해서 동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값도 비싸며, 맛도 축산 고기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축산 고기는 맛도 좋고 값은 싼데, 동물 윤리 문제가 심각하고, 세포증식 고기는 동물 윤리는 해결되는데, 맛도 없고 비싸니,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어떤 고기를 먹을까’ 대신 ‘얼마나 먹으면 될까’로 질문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22-06-26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20부작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생각거리를 주고 끝났다. 정주행은 하지 못했지만, 짧은 영상을 보다가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18화에서 동네 형들이 동석에게 너를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암에 걸린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어야 한다고 압박하자 동석이 소리지르는 모습이다. 동석 엄마는 남편도 죽고 딸도 바다에서 죽자 해녀를 할 수 없어 동석 친구의 아버지에게 첩으로 들어갔기에 동석은 엄마에게 원망이 깊은 상태다.“형들은 형님 어멍이 형님 보는 앞에서 형님 친구 아방 방에 들어가서 불 딱 끄고 부스럭부스럭 이불 소리 내면서 자는 거 본 거 있어? 날 이해해? 뭘 이해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이해한다는 말이야.” 나중에 동석은 선아에게 전화를 걸어 어멍이 종철 아방 첩으로 들어가면서 자기를 작은 어멍이라 부르라 했을 때 못한다고 하자 싸대기를 개 패듯이 팼다고 말한다.이런 동석의 말을 듣자니,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끼의 단편 소설 ‘타일랜드’가 생각난다. ‘타일랜드’의 주인공 사쓰키는 갑상선 전문의인데, 30년 전에 강제로 낙태한 일로 마음속에 돌이 박혀 있다. 사쓰키는 방콕에 갔다가 운전을 맡은 니밋의 소개로 점쟁이 노파를 만나게 된다. 점쟁이의 조언에 마음이 열린 사쓰키가 니밋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려고 하자 니밋은 말을 한다고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일은 없다며 듣기를 거부한다.같이 보고 겪은 일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것이 달라 소통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동네 형들이 동석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 직접 보았다고 하더라도 어린 동석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니밋의 말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해의 한계를 처절하게 체득한 사람일 뿐이다.부모라도 자식의 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오은영의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 상담을 청한 부모들이 나온다. 부모라도 자식의 사정을 시시콜콜 다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자식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말이 폭력일 때도 많다.며칠 전, 친구가 희소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눈물이 났지만, 그저 내 맘대로 내 사정으로 흐르는 눈물일 뿐, 그가 느낄 황당함, 분노, 좌절감, 무력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그러나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 좌절할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때 뜻밖에 소통이 일어난다. 선아는 동석이 묵혀두었던 말을 다 하라고 응원하며 들어주었고, 니밋은 몇 번의 대화로 사쓰키의 고통을 눈치채고 점쟁이 노파에게 데려가 주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아픈지 말할 수 있게 나 자신이 의연해지는 방법도 있겠다. 그것은 분명 위로는 아니지만 위로일지도 모른다.
2022-06-19
유영희 작가 올해 2월부터 먹고 움직인 것을 매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체중도 조금씩 빠지는 중이다. 이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의지가 대단하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던 중 ‘대화의 희열’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이 나온 영상을 보게 되었다.발레리나 강수진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아시아인 중 최초로 입단하였고, 2016년에는 원할 때까지 수석 무용수 자격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종신 단원 자격을 아시아 최초로 얻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디마디가 모두 툭툭 튀어나온 그의 발가락은 그런 성취를 위해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노력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발가락 부상으로 1년간 쉬었다고도 하니 영상을 보기 전에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그런데 이 방송에서 강수진은 그렇게 노력한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이면서 자신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관객에 대한 예의는 금방 이해가 되지만, 자신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 깊어서 곱씹게 되었다.우리는 예의를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 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마땅히’라는 말 때문인지 그렇게 해석하면 강박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예의의 의미를 찾아보니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라는 뜻도 있다. 이 뜻으로 강수진의 말을 해석해보면 ‘나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행동’이 되어 이해가 잘 된다. 관객에 대한 예의라는 말도 더 설명이 잘 된다. 이렇게 강수진이 자신에 대한 예의로 그렇게 노력했다고 이해하니,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육체를 돌보았다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육체를 돌보는 방법에 극기의 노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한 학인은 내 몸과 대화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썼다. “발등에 금이 갔는데도 쉬지 않고 일했지.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있느라 말도 못 하게 힘들었는데 열심히 끌고 다녔어.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니까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줄 알았나 봐. 그때 너무 무모했던 것 같아. 소중한 걸 몰랐어. 이제는 소중히 여기며 살게.” 얼핏 보면 강수진은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었고, 학인은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정반대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2권에서 그리스의 양생법을 설명하면서 그리스인들의 도덕적 성찰에서 주요한 관심은 육체를 돌보기 위해 쾌락의 감소를 고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목표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적절하고 필요 충분한 배려를 하는 주체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푸코의 설명을 들으니, 예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거나 아픈 몸을 배려하려는 마음이나 모두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세워가고 있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먹고 움직인 것을 기록하는 것이 예의인지 배려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그 역시 나 자신을 삶의 주체로 세워가는 과정이리라 짐작해본다.
2022-06-12
유영희 작가 선거철이 되면 공직 후보자들의 재산이 공개된다. 수십억, 수백 억대의 재산을 가진 후보자들을 보면 감정이 복잡해진다. 내각에 추천된 인물들 역시 흠결이 넘쳐나다 보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좋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을 보고 있자니 꺼삐딴 리가 떠오른다.전광용의 1962년 작품 ‘꺼삐딴 리’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 학교에서는 이 작품을 이인국을 교활한 처세술을 가진 기회주의자라고 가르친다. 왠지 이인국의 삶은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의 처세술과 겹쳐 보인다.이인국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능력자다. 창씨개명 등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돈 있는 사람만 치료해주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독립군으로 보이는 남자의 입원을 거절한다. 해방이 돼 친일파로 체포되었을 때는 소련 장교의 얼굴 혹을 제거해주어 최고라는 의미의 ‘꺼삐딴 리’라는 별명도 얻게 되고, 아들을 소련으로 유학 보낼 만큼 신임도 얻는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가방 하나 들고 월남해서 수술도 잘하고 병원 운영도 잘해서 곧 큰 병원을 내고 잘산다. 어떤 세상이 와도 이인국은 안전한 삶을 누린다.이 작품이, 어떤 세상이 와도 이인국이 잘사는 삶을 풍자하면서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지, 그 당시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생존만을 추구했다는 시대상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어느 쪽이든 학교에서는 이인국의 삶을 부정적으로 가르친다. 하지만 교육 당국의 기대와는 다르게 요즘 학생들은 이인국을 비판하기는커녕 부러워한다.따지고 보면, 이인국의 악덕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창씨개명에 적극 협조했지만 그것은 당시 거의 모든 조선 사람이 따랐던 일이다. 독립군의 입원은 거절했지만 응급치료는 해주었고, 해방 후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을 때도 감옥 안에서 이질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렇다고 감방에 버려져 있는 러시아 어 교본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소련군과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된 것을 ‘교활한’ 처세술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미국 다녀온 젊은 의사들에게 밀리자 자기도 미국에서 경력을 만들어 오려고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은, 거짓 이력으로 행세하는 유명인들에 비하면 차라리 정직해 보이기까지 한다.이렇게 이인국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변한 데는 지금 상황이 한몫했을 것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를 넘어서 집과 경력까지 포기해야 하는 세대에게, 어떤 세상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간 이인국의 생존력은 젊은이들에게 롤모델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이시영 이회영 가족처럼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도 있으니, 이인국의 삶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의 편법과 불법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학생들이 이인국을 부러워한다고 나무라기도 어렵다. 교육자들이 교과서에서만 이인국을 비판하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이인국만큼이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다.
2022-05-29
유영희 작가 6월 1일 8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투표 당선자가 18일 기준으로 전국에서 502명이라고 한다. 서울의 경우 구의원 373명 중 107명이 무투표 당선이다. 투표가 이루어지는 지역도 경쟁률이 전국은 1.8 대 1, 서울은 1.4 대 1이라 하니, 시민들의 무력감이 심하다.지방의회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되었으나, 박정희 정권 때 없어졌다가 1991년 재도입되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시작했지만 2006년 보수를 책정한 데다 정당 공천도 받게 되니, 이제는 지방 선거가 중앙 선거의 축소판이 되어 버렸다.이렇게 선출된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에 대한 신뢰도도 높지 않다. 7회 지방선거 당선자 중에도 2019년 대구 시장 선거를 둘러싸고 당선 무효 된 의원이 5명이 나왔고, 작년에는 영천시 의원이 음주운전으로 당선 무효 되었다. 이번 8회 무투표 당선자 중에도 30%가 전과가 있거나 지난 8년간 내부에서 징계받았던 후보자도 있다.그런데도 의원들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만만치 않다. 자치단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월정 보수는 1년에 5천만 원에서 7천만 원을 웃돈다. 거기에 회의 수당과 의정 활동비도 별도로 나온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존재감은 없으니, 세금 도둑이니 돈 먹는 하마니 하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그렇다고 시대를 역행하여 지방자치를 폐지할 수는 없다. 지방 자치는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첨제는 어떨까? 우리는 교육 수준도 높고 민주화 경험도 있어서 추첨제를 할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4,5년 전 어느 생협의 임원 선출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참석한 사람들 모두 연장자를 뽑아야 한다는 관습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눈치가 보였지만 추첨 방식을 제안해보았는데, 열렬한 호응을 받으면서 실현되었다. 생협 활동 역사상 최초여서 더 뜻깊었다.이런 작은 위원회의 경험을 지방선거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활동가이며 정치학자인 이지문의 저서 ‘추첨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는 이런 꿈이 구체적으로 제안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대 아테네에서 공직자를 추첨으로 선출했던 기록부터 외국의 추첨 민주주의의 역사가 나와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의원 1명에 시민의원단 49명을 뽑아 의원이 의원단과 소통하면서 정책을 제안하자고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셈이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어렵겠지만, 지방선거, 그중에도 기초의원 정도는 지금 당장 시도해볼 만하다. 월정 보수는 없애고 회기에 회의 참석비와 의정 활동에 필요한 경비만 지급한다면 뜻있는 지역주민이 참여할 것이다.추첨을 하면 세금도 절감될 뿐 아니라 뜻있는 시민이 정치 참여가 활성화될 것이고, 지역 자치를 위해 제대로 일할 의원이 선출될 것이다. 허황하다 손사래 치지 말고, 일상의 작은 모임부터 시도해보자. 그렇게 살맛 나는 참여민주주의를 만들어 보자.
2022-05-22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올해 세월호 참사 8주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SNS에 “아직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다”며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은 문재인 정부의 상징적 과제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는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일이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2014년 4월 16일 오전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타이타닉처럼 대서양 한복판에서 침몰한 것도 아니라 당연히 모두 구조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어처구니없게 304명이나 희생되다니 슬픔을 넘어 분노가 일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슬픔은 차마 볼 수 없어 뉴스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이번 뉴스를 보면서 지난 5년간 진상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더듬어보았다. 참사 후 1년이 지나 설립된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성과도 없이 활동 기한이 지나 강제 종료되었다. 그래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자 바로 세월호가 인양되어 선체조사위원회의 진실 규명에 기대를 걸었는데, 18개월 후 나온 보고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조타 미숙이나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때문일 것이라는 내인설과 외력에 의한 급선회 때문일 것이라는 열린안, 두 가지 의견만 내놓은 채 선조위 활동이 종결되었기 때문이다.그 후 진상 규명을 넘겨받은 사회적참사특별위원회에서 조사를 계속 하고 있으나 2년이 넘도록 어떤 성과가 있는지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 사이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에서 기소한 해경지휘부가 무죄 선고를 받게 되어 무기징역을 받은 선장 외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참사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2021년에 나온 박상은의 ‘왜 세월호 참사 조사는 종결되지 못하는가?’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유일한 논문이다. 게다가 2018년 이후 세월호 연구가 끊어졌다가 나온 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내인설이 위원회 내부 다수의 주장이었는데도 외력설을 주장하는 열린안을 같이 보고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조사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이 논문에 의하면, 내인설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에게 외력설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위원회 내부에 해양적폐세력과 진상규명세력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소통이 단절되어 결론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조위의 조사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것은 밝혀지지 못한 진실이 있어서가 아니라 합의되지 못한 해석이 있기 때문인 셈이다.이제 한 달 후 6월 10일에 사참위도 종결된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사참위에 전화를 걸어 2년 6개월이 넘도록 왜 아무 소식이 없는지 물어보니, 현재 5월 말 발표를 앞두고 위원들이 보고서를 검토하는 중이라고 한다.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8년이 걸린 만큼 이번에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바란다.
2022-05-15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내각 인선 발표에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지명되면서 당분간은 존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여성가족부는 폐지하자니 아쉽고 유지하자니 큰 명분이 없는 상태가 되어 계륵이 된 모양새다. 계륵이란 닭의 갈비뼈라는 뜻으로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뜻한다. 여성가족부는 어쩌다 계륵이 되었을까?여성가족부의 전신은 여성부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부 또는 여성 업무 전담 부서가 생기게 된 것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유엔의 결의안이 채택된 데서 비롯됐다. 이 선언을 계기로 우리나라도 2001년 여성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부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여성부가 설치되고 보건복지부 업무가 점점 이관되다가 2004년 보건복지부에서 담당하던 영유아 보육사무를 이관받은 후 그 다음 해에는 아예 명칭도 여성가족부로 바꾸고 보건복지부의 가족 관련 업무까지 여성가족부로 이관시키면서 여성부의 설립 이유가 흔들리기 시작했다.2008년 잠시 여성부로 개편됐지만, 다시 여성가족부로 바뀌고 보건복지부의 청소년과 가족 관련 업무를 이관시켰다. 그 후 점차 청소년과 가족 관련 예산이 증가하면서 올해에는 여가부 예산 1조 4천억 원 중 여성 예산은 2천억 원에 불과하다. 이제는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이 무색해지고, 가족여성부 또는 청소년가족부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상태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여성 예산이 적은 것은 성차별이 해소되었기 때문은 아니다.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부터 매년 봄 유리천장 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유리천장 지수가 높을수록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는 조사가 시작된 첫해부터 올해까지 10년 내내 조사대상국 29개국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남녀 임금 격차도 31.5%로 가장 높고, 관리직 여성 비율과 기업 내 여성 이사 비율 모두 꼴찌이다.그런데도 5월 7일 뉴스를 보니, 여가부 장관 후보를 지명한 일로 여가부 폐지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인지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여성가족부를 폐기하는 안건을 발의했다. 하루전까지만 해도 인구가족부로 발의한다고 예상했는데 아예 폐지로 돌아선 것이다. 그 대신 청소년과 가족 업무는 보건복지부로 이관하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부총리 급으로 격상시킨다는 것이다.여성가족부가 이렇게 치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부처 이름이 대상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업무가 여러 부처에 중복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여성부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부처마다 국의 형태로 설치돼 있다.유리천장 지수 꼴찌에서 보듯이 한국의 여성 차별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브라질,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는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도 여성부가 있거나 여성 전담 기구가 있다. 나라마다 형태는 다를지라도 구조적 성차별 문제를 해결할 전담 부서는 필요하다.
2022-05-08
유영희 작가 며칠 전 버스 안 운전기사 뒤에 달린 모니터에서 전국 2만295가구 분양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보통 아파트 분양 기사에는 ‘500세대 분양’ 이런 식으로 세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가구라고 하니 새로웠다. 하긴, 정부가 추진하는 주택 정책은 1가구 1주택이라고 하니 가구라는 표현도 말이 된다.혹시나 해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세대와 가구 모두 ‘주거 및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의 집단’이라고 풀이되어 있고 두 단어는 동의어라고 한다. 행정용어 풀이에 보면, 세대는 동거인을 포함하여 한 집에서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서 가구와 세대는 완벽한 동의어처럼 보인다.그러나 일상에서 세대는 가족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구와는 구분해서 쓰인다. 실제로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을 때 가족은 세대원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그 세대원은 등본에 안 나오게 할 수 없다. 그런데 동거인은 가족이 아니라서 등본에 안 나오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가족 중심의 세대 개념은 가구와 동의어라기보다는 유의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래서 1세대 1주택이 아니라 1가구 1주택이라고 했을 것이다.현행법으로 보면,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한 집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도 독립적으로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할 수 없다. 집이 있는 세대주와 동거할 때는 전세 대출에 제한이 있다. 그러고 보면, 행정용어에서 세대에 동거인을 포함시킨 것은 1가구 1주택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행정적 편의라고 보인다. 한편으로는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거인도 주거와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1세대 1주택이라는 표현보다 1가구 1주택 쪽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문제는 아파트 공급 물량을 표현할 때 가구나 세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한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LH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면, ‘공급 호수 총 000세대, 특별 공급 000세대, 일반 공급 000세대’라고 되어 있다.아파트는 1세대 또는 1가구가 1호만 분양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세대라고 하든 가구라고 하든 호수와 내용이 일치한다. 아파트의 경우 한 집에 한 세대 또는 한 가구만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아파트는 두 세대, 두 가구가 거주할 수 있게 짓기도 하지만, 주인은 한 사람이므로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세대원이나 동거인도 아파트를 신청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한 세대나 한 가구에 2호를 공급할 수 있는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그때 가서 바꾸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무엇보다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비문이라는 점이 걸린다. 집‘을’ 세대나 가구‘에게’ 공급하는 것이므로 세대나 가구를 공급의 목적어로 쓰면 어색하기 때문이다. 공급 호수 122‘세대’가 아니라 공급 물량 122‘호’, 이런 표현이 알맞지 않을까? 정확한 용어를 쓰는 것은 소통의 기본이다. 관공서에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정확한 언어생활을 개선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다. 관계 기관의 검토를 바란다.
2022-05-01
유영희 작가 지난 4월 7일 10년 쓰던 승용차를 팔았다. 아플 때는 차가 있어야 한다는 동료 강사의 설득에 넘어가 차를 안 사겠다는 평소의 지론을 꺾고 운전을 배웠다. 그 중고차는 한참 건강이 안 좋을 때 나의 발이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부모님 병원 방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 심부름에도 가끔 썼다.그러나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독립하고 나니 차 쓸 일이 없어졌고, 건강도 나아져서 차 없이도 나들이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차가 있다가 없으면 불편하다고 아이들은 걱정했지만, 유지비만 나가고 쓸 일이 없는데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돌아보면, 30여 년 전에는 ‘내가 차를 안 사는 이유’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고 이웃이 차를 산다고 하면 ‘녹색평론’을 들고 가서 차 사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두 살, 세 살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가 두 아이가 잠들어서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간 적도 있고, 나중에는 잠들지 말라고 지하철을 탈 때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결혼할 때 세탁기도 사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세탁기 안 쓰는 가족으로 KBS ‘일요스페셜’에도 출연한 적도 있다. 그 후 아이들 한창 클 때 중고 세탁기를 잠시 집에 들이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몇 년 전 없애고 지금은 다시 손빨래를 하고 있다.그러고 보니, 지난주 4월 22일은 52주년이 되는 지구의 날이었다. 올해 지구의 날 주제는 ‘지구를 위한 실천 바로 지금 나부터’이다. 우연히도 차를 없애서 그런지 다른 지구의 날보다 올해는 내게 괜히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우리나라에서는 2009년부터 지구의 날 저녁 8시부터 10분간 전등을 끄는 소등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 10분간 소등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어느 기사에는 85만 가구가 참여하면 4만1천189kw/h가 절약된다고 하고, 다른 기사에는 100만 가구가 참여하면 10만7천kw/h가 절약된다고 한다. 이산화탄소 역시 20t에서 50t까지 감축된다고 한다. 참여하는 가구와 절감되는 에너지가 왜 비례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은 실천의 에너지 절감 효과는 작지 않다. 30년생 소나무 7천900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만큼 줄어든다고도 한다.아무리 지구가 빨개진다고 해도 가까운 내 생활의 편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너무 힘들 때는 차도 샀고 세탁기도 샀다. 차는 내게 없지만 그 차는 이집트로 가서 달릴 것이니 차 없앤 것을 내세울 일도 아니다. 나 한 사람 세탁기를 안 쓴다고 빨간 지구가 식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그러나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단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에 좋다는 것을 가진 물건을 줄일 때마다 깨닫는다. 옷도 줄이고 책도 줄이니 정신이 한가하다. 헬스장 갈 때도 50분 걸려 걸어가고 있다. 지구가 식으면 더 좋겠지만, 지구가 식는다는 보장이 없어도 더 줄이고 더 단순하게 살아가고 싶다.
2022-04-24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창밖을 보니 자목련꽃이 벌써 만개하고 일부는 땅에 떨어지고 있다. 저 목련은 30년 전 이 집에 이사 올 때부터 꽤 키가 컸으니, 30년 하고도 몇 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창밖에 보이는 목련 말고도 집 주변에는 백목련도 몇 그루 있었고, 라일락도 두어 그루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수수꽃다리 같지는 않다.
2022-04-17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니 4월 11일 현재 46일째다. 지난해 11월 러시아가 11만 명의 군대를 국경에 배치할 때만 해도 위협일 뿐 실제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지만,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2022-04-10
유영희 작가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서 보면 상처투성이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상처 때문에 균형을 잃고 괴로워한다.청소년 성장 소설 ‘불균형’에 나오는 두 등장인물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왕따를 당하던 중학생 소녀는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여자를 초록아줌마로 착각하고 도움을 청한다. 초록아줌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인데, 그 아줌마의 머리와 옷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아이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상상 속 존재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젊고 노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해서 회사에 몰래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기우뚱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균형을 잡는 데 서로 도움을 준다.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도 균형을 잃은 인물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 가후쿠는 유명한 배우이자 연극연출가다. 아내 오토와의 결혼 생활도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부부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었다. 아내가 결연한 태도로 할 말이 있다고 한 어느 날 가후쿠는 두려운 마음에 일부러 늦게 귀가했다가 쓰러져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일찍 발견했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내와 추억이 많이 담긴 무대에 다시는 서지 못한다.2년 후 가후쿠는 안톤 체홉의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운전기사 미사키를 알게 된다. 미사키 역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를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그러던 중 연극 주인공 바냐 아저씨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문제가 생겨 부득이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 역을 해야 할 상황이 된다. 가후쿠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미사키의 고향 홋카이도로 가면서 두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말하게 되고 그 후 가후쿠는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여기서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대화 방식이 특이하다. 상대의 감정에 대놓고 공감하지도 않고 위로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연극 속 소냐가 수어로 연기하고 대사는 자막으로 나오게 한 것도 인위적인 감정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런 방식이 발휘하는 치유 효과는 상상을 넘는다. 그러나 이런 문학과 영화 속의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이 일상에서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우리가 노란 옷을 입었더라도 문학작품을 읽고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은 치유되며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 며칠 전 산문집 ‘여행하는 나무’를 같이 읽으며 알래스카의 자연 묘사에 뇌파가 안정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우리는 여기까지 너무 빨리 걸어왔소. 마음이 우리를 찾아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라는 한 문장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스트레스가 슬그머니 놓여나기도 했다. 이렇게 굳이 조언을 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좋은 문학작품을 천천히 읽기만 해도 삶의 균형은 슬그머니 맞춰질 수 있다.
2022-04-03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유명인이든 아니든 많은 흥밋거리가 된다. 나 역시 두 딸 모두 이름으로 겪은 일이 있다. 첫째딸 이름은 고민이 길어져서 출생 신고 기한을 넘기는 바람에 벌금까지 물고 힘차라라고 지었지만 이 이름은 얼마 가지 못했다. 5살 무렵이 되자 친구들이 놀린다고 자기 이름을 거세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큰애는 자기가 원하는 이름을 선택했고, 그때 바꾼 이름을 아주 좋아한다. 둘째딸 역시 솔보라라는 세 글자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불편하다며 개명을 요구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두 글자로 바꿔주었는데, 아주 만족하고 있다. 적절한 이름이 중요하긴 한가 보다.
2022-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