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2·3 계엄 1주년이 지났다. 12·3 계엄 선포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혐오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포고령 1호의 1번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혐오하기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제인 엘리엇은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다음 날 자신이 담임을 맡았던 3학년 학생 20여 명을 대상으로 이틀간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을 시도했다. 교사 엘리엇은 평소 서로 잘 지내던 아이들을 푸른 눈, 갈색 눈 두 집단으로 나눠서 첫날은 푸른 눈이 열등하다고 차별하고, 둘째 날은 갈색 눈이 열등하다고 차별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했으나 우월하다고 지목된 집단의 아이들은 하루 만에 바로 열등하다고 지목된 집단의 아이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며 공격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혐오는 단순히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혐오 다음에는 반드시 폭력이라는 행동이 뒤따른다. 작년에는 당시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에서 기자간담회 도중 칼로 피습 당했고, 같은 해 7월에는 트럼프도 피습 당했다. 윌리엄 피터스의 ‘푸른 눈, 갈색 눈’을 번역한 김희경은 책 말미에 해설과 후기를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섬뜩했던 것은 엘리엇이 이 실험 결과를 책으로 낸 후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뒷이야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이 몇십 년이 지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 행동을 유발하는 혐오가 여전한 것을 보면, 어쩌면 혐오하기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실제로 영국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 (1778-1830)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산문에서 ‘인간은 순수한 선에 금방 싫증을 내고 변화와 활기를 원한다’면서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다. 삐걱거리는 이해관계, 제멋대로인 열정으로 계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삶은 고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해즐릿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후 냉소적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료들을 보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사이코패스도 좋은 교육을 받으면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인간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올해 92세를 맞이한 교사 엘리엇이 여전히 강의 활동을 하는 이유다. 한편, 혐오하기의 즐거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남의 신발을 신어보라는 ‘푸른 눈, 갈색 눈’ 교육만으로는 혐오를 다 해결하기 어렵다. 행복한 사람은 혐오에 휘둘릴 가능성이 적다. 혐오를 즐기지 않기 위해서는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믿는 행복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