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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지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사회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심각하다. 포퓰리즘과 진영논리, 편 가르기와 팬덤정치가 공동체의 지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지성의 최후 보루인 언론과 지식인들까지 권력과 야합하여 반지성적 행태를 보이는가 하면,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던 대통령 자신도 언행불일치로 반지성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반지성주의 담론은 자기중심적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반지성주의’란 지성의 유무(有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이 ‘이성적·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자들은 대체로 자기확신·적대감·성찰불능 등의 인지적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쓴 호프스태터(R. Hofstadter)는 “반지성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선 세력들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가장 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고 민주당을 겨냥한 반면,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반지성주의가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양측의 공통된 잘못은 ‘가치중립적 개념인 반지성주의’를 ‘내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서 편향된 진영논리로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반지성주의를 비판한 세력이 바로 그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슬픈 코미디’가 아닌가?이처럼 우리는 반지성주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탈진실시대의 포퓰리즘 정치는 인간의 지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간은 정보홍수로 인해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쉽게 이성을 포기하고 감정의 길을 택한다. 게다가 반지성주의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이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이해관계와 연결될 경우에는 더욱 단절하기가 어렵다.그렇다면 우리는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신’과 ‘제도’의 양면적 혁신이 절실하다. 정신적 측면에서는 편향성 극복을 위한 지성주의 가치관의 내면화가 요구된다. 지성의 원천은 ‘사실’과 ‘합리성’이다. ‘인지적 편향성’은 소통의 과정에서 반지성주의를 유발 또는 촉진시킨다. 지성주의는 ‘감정이나 의지보다 이성과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타협에 필요한 민주적 가치관, 즉 “동의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agree to disagree)”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 때 그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지식인은 ‘비판적 지성주의’를 견지해야 함은 물론이다.이와 함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혁신도 수반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 정치는 승자독식이라는 대통령제의 영향이 크다. 정치는 진영 간 싸움인 동시에 진영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승자의 독식으로 패자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면 협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화와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제도를 구축해야 반지성적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다. 물론 제도개혁 이전이라도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의지만 있다면 야당과의 대화와 협치를 통해 반지성적 정치풍토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23-04-10

봄이 정치인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의 암흑기에 시인 고영민은 ‘봄의 정치’라는 시에서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봄의 희망으로 국민의 분노를 위로했다. 독재에 대한 저항과 희생은 민주화시대를 열었지만, 권력정치의 퇴행은 또 다시 주권자의 봄을 빼앗아가고 있다.봄은 왔건만 우리네 삶은 여전히 춥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소명을 망각한 권력은 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권력이 봄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오관(五官)으로 봄을 접촉하지만 감각기관의 뿌리에 있는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이 봄으로부터 배워야 할 그 첫째는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봄은 폭염의 여름, 혹한의 겨울과는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계절이다. 봄은 권력에게 ‘온화하고 따뜻한 정치’를 하라고 말한다. 팬덤(fandom)에 의존하는 강성정치는 상대의 적대심만 불러올 뿐이다. 합리성을 상실한 극단의 정치로서는 온건한 합리정치를 결코 이길 수 없다.정치인들의 강성 발언은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한다. 타협을 거부하는 독선은 반민주적 태도다. 정치인의 사고가 합리적이고 유연할 때 비로소 정쟁은 사라지고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유연한 정치는 자신을 낮출 때 가능하다. 겸손은 자기성찰을 통한 능력 한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둘째, ‘인고(忍苦)’의 가르침이다. 봄꽃들의 곱고 여린 모습의 뒤에는 모진 겨울을 견뎌낸 인고의 시간이 숨어있다. 봄소식을 알리는 매화는 혹한의 고통을 겪어야 맑은 향을 낼 수 있다. 새 봄을 열기 위해 애쓴 꽃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정치는 독재정치와 달리 정치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결과물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결과(result)보다 과정(process)’을 중시한다.정치적 쟁점을 둘러싼 대화와 타협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숙성된 장이 맛있듯이 우리의 정치도 숙성되어야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마지막으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가르침이다. 활짝 핀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처럼,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적 권력도 한 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정치의 세계에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봄에도 멀지 않아 가을이 찾아오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끝난다. 정도(正道)정치는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때 가능하다. 게다가 권력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이니 목에 힘주지 말고 늘 겸손해야 마땅하다.봄은 사계(四季)를 시작하는 계절이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도 봄이다. 이제 여야 정치인들은 ‘전쟁 같은 정치’를 멈추고, 봄의 가르침에 따라 유연한 정치, 겸손한 정치, 그리고 대화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2023-03-27

초저출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세계 최악의 출산율 0.78명, 이것은 청년들의 ‘고통’과 ‘가치관’을 반증한다. 취업·결혼·출산·육아는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정부는 출산율 제고에 16년간(2005∼2021) 280조를 투입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돌팔이 의사가 중환자의 병을 진단·치료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청년세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은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하다. 취업난과 무주택 상황에서 결혼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결혼을 해도 출산과 양육에는 엄청난 돈·시간·희생이 요구된다.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일·가정 양립은 어렵고, 이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돈 몇 푼 주고 아이 낳으라’고 하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청년세대의 가치관도 변했다. MZ세대는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결혼과 출산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의 가족주의·가부장주의와는 달리 개인주의·양성평등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자녀가 노후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내생(來生)보다 현생(現生)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이제 우리사회가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청년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의 고통과 가치관을 반영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중·장기정책으로 삶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이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확신이 설 때 비로소 그들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이를 위해 정부는 ‘매우 어렵고 힘든 개혁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들의 취업·주거·육아·교육 등 생애 전반에 대한 정부의 법적·제도적 책임이 크게 강화되어야 한다. 국가소멸위기의 극복은 ‘허울뿐인 위원회’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명무실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정부의 공식 부처로 승격하는 동시에 행·재정적 권한을 부여하고 범정부적 협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국가균형발전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지만 인구집중에 따른 과잉경쟁과 주거불안으로 고통은 가중된다. 전국 최저의 출산율 0.59명은 서울 청년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준다. 하지만 수도권 집중화는 수도권 유권자들의 발언권을 강화시킴으로써 점점 더 집중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적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허울뿐인 위원회’로서는 국가균형발전도 어렵고 저출산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다.양성평등문화의 정착도 시급하다. 출산과 육아는 육체적·정신적 부담이며, 현대여성들은 ‘독박 육아, 독박 가사’를 단호히 거부한다. 양성평등의식이 절실함은 물론,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일·가정 양립을 성공시킨 영국·프랑스·스웨덴의 사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성세대의 낡은 의식이나 정치권의 권력 논리를 버리고 청년세대,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2023-03-13

공정과 상식, 그 표리부동에 대하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은 비정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된다. 권력은 위선적이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 권력이 약속한 평등·정의·공정 등은 집권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 이중성, 즉 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윤석열 정부의 핵심가치는 ‘공정’과 ‘상식’이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이고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공정과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국민은 “공정과 상식은 어디에 있느냐?”고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도대체 정치를 어떻게 하였기에 집권초반에 벌써 ‘불공정하고 몰상식한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가?공정의 전제는 ‘균형’이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가 들고 있는 ‘저울’은 공정성의 상징이다. 판사가 선악을 판단할 때 ‘주관과 편견에 치우치지 말고 공평하게 판단하라’는 것이다. 불공정은 편향에서 비롯되며, 편견과 독선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나온다. 공정과 상식의 아이콘(icon)인 윤석열 대통령이 선택적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스스로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구체적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고위공직자들을 사적 인연에 의해 ‘아·가·패’(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패밀리)인사를 했으니 공정할 수가 없다. 또한 검찰·경찰·감사원 등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이 흔들리는 것은 공권력 행사가 ‘내 편, 네 편’ 나누어서 차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홍준표 대구시장이 “요즘 판·검사는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샐러리맨”이라고 비판했겠는가.‘선택적 언론관’ 역시 불공정의 증표다. 윤 대통령의 외교무대 비속어 발언을 최초로 보도한 MBC 기자들은 전용기 탑승이 배제된 반면, 채널A와 CBS 기자는 기내에서 개별 면담까지 했다. 비판언론에는 법적 대응으로 재갈을 물리고, 친여언론은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 공정인가? ‘선한 우리’와 ‘악한 그들’로 갈라치기해서 내편만 챙기니 공정할 수가 없다. 언론의 사명은 감시와 견제인데,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은 몰상식한 권력의 남용이다.불공정의 압권은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여당대표 선거 개입이다. 윤심1위 김기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규정을 변경해서 민심1위 유승민의 출마를 막았고, 당심1위 나경원의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파면함으로써 윤심을 드러냈으며, 윤·안 연대를 말한 안철수에게는 “무례의 극치”이자 “국정운영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당무개입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대통령이 당대표를 임명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선거하느냐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평등·공정·정의를 약속했던 문대통령의 표리부동한 행태는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공정과 상식을 약속한 윤 대통령 역시 명심해야 할 점이다. 대통령이 초심을 잃으면 민심을 잃고, 민심을 잃으면 권력을 잃는다.

2023-02-27

성찰하는 권력에 박수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전쟁 같은 정치’가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 집행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하나같이 자기성찰은 없고 정적(政敵) 공격에만 혈안이다. 민생은 외면하고 ‘네 탓 공방’으로 날을 새고 있으니 ‘정치의 존재이유’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 확증편향, 선택적 정의, 내로남불 행태는 전혀 변화가 없다. 여야가 바뀌었을 뿐, 권력은 자기성찰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권력은 ‘편견과 독선의 괴물’로 전락함으로써 정치는 국민에게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 되고 있다.이처럼 권력은 왜 성찰에 인색할까? 그 원인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찰을 위한 전제는 ‘경청(傾聽)’이다. 타인의 고언(苦言)을 겸허히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커질수록 자기중심성이 강해짐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권력의 크기와 성찰의 가능성이 반비례’하는 까닭이다.한국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성찰을 거부하면 ‘소신’이고, 상대가 성찰을 거부하면 ‘아집’이라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하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탓하면서 적폐청산에 올인(all-in)했고,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을 탓하면서 새로운 적폐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내 탓이오’라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권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게다가 여야의 강성 지지자들, 즉 정치팬덤들의 극단적 행태도 권력의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 좌우의 팬덤들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 비판까지도 이적(利敵)행위로 몰아서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다. ‘충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내부비판을 막고 있으니 권력의 자체교정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권력의 성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찰 없는 권력은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은 ‘엿과 채찍’으로서 정치인들의 성찰을 유도해야 한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의 표리부동(表裏不同)’에 속지 말고, 위선적 권력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성찰하는 권력은 격려해야 한다.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에 직언하는 충신들, 그리고 정치팬덤들의 비열한 공격을 받고 있는 내부비판자들에게는 성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반면에 성찰을 거부하는 오만한 권력은 미래가 없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권력의 속성상 자기성찰은 쉽지 않기 때문에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국민이 채찍을 들 수밖에 없다. 최선의 방법은 대선·총선·지선 등의 선거를 통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보다 자기성찰에 충실한 정당과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

2023-02-13

당심·윤심·민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당권에 도전한 후보들이 벌이는 ‘윤심 경쟁’은 꼴불견이다.공정해야 할 선거가 당 지도부의 경선규칙 변경, 윤핵관의 편 가르기, 대통령실의 개입 등으로 매우 혼탁해졌다. ‘당심’과 ‘윤심’이 과연 ‘민심’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민주정치는 정당정치이기 때문에 정당민주주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당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율성·객관성·공정성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스스로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민심1위 후보’의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 경선규칙을 변경하는가 하면, ‘당심1위 후보’를 조직적으로 비판·모욕·겁박함으로써 결국 출마를 포기시켰다. 이러한 반민주적 행태는 ‘윤심1위 후보’의 당선을 위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윤핵관과 대통령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지도자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윤 대통령이 자신에게 충성할 당대표를 원한다면 자기모순이다.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은 친윤·비윤·반윤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해서 정당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권위주의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당심이 윤심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당의 사당화’일 뿐이다.국민의힘 청년당원 김우영은 “윤심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투표나 하라)식의 전당대회는 국민에게 실망을 줄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민심’이 돌아선다면 ‘윤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집권당 대표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 양자 관계는 정치상황에 따라 상호보완적일수도 있고 경쟁적일수도 있지만, 당대표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수직적 관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당이 대통령실의 출장소로 전락하면 정당정치는 본래적 기능을 할 수 없다. 여당대표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동시에, 민심을 대통령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가교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표의 독립성과 정치적 균형감이 중요한 까닭이다.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분열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된다. 윤심을 얻으려는 후보들이 ‘윤심 팔이’를 하더라도 대통령은 “어떤 후보에게도 윤심은 없다”고 분명히 밝혀야 한다.집권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는 ‘윤심 바라기’가 아니라 당과 국가의 미래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이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대표경선과정이 민주적이라고 강변한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윤심이 공정과 상식을 잃으면 민심은 외면하고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윤심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으로 선출된 대표가 지휘하게 될 내년 총선은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총선의 승패는 ‘윤심이 아니라 민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권에 도전한 후보들은 물론, 대통령과 당원들도 ‘민심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기 바란다.

2023-01-30

‘어느 편이냐’ 묻는 당신에게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진보정권에서는 진보를 비판하고, 보수정권에서는 보수를 비판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언론이나 지식인은 정권·이념·권력의 편이 아니라, 정의·진실·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자유·정의·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념적 프레임’에 갇히는 ‘편 가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프레임은 정치이념이 반영된 ‘선택과 배제’의 결과물이다.정치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자유인의 사고는 유연성을 잃고 정신적 노예로 전락한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진영논리에 빠졌다는 것은 주체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자유와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영과 진영 사의의 경계’에 서야 한다. ‘경계인’의 삶이야말로 자유인의 지성적인 삶이다.‘정의’라는 담론 역시 진영논리로 정치화되면 ‘선택적 정의’가 ‘보편적 정의’를 대신하게 된다. 편향적인 ‘보수의 정의’나 ‘진보의 정의’가 ‘보편적 정의’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이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정·정의·상식’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이유는 대통령들의 정치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공정은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는 공존을 지향할 때 비로소 보편적 정의가 될 수 있다.‘확증편향이 지배하는 흑백사회’에서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사람을 흔히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한다. 보수를 비판하면 진보이고, 진보를 비판하면 보수라는 단세포적 발상은 반민주적 흑백론이다.파스칼(B. Pascal)이 갈파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천사(백색)도 악마(흑색)도 아닌 중간적 존재(회색)”이다. 완벽한 백색 또는 흑색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수많은 회색들의 농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중도층이 보수와 진보의 극단화를 막아주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빈부갈등을 완화시켜주니 ‘회색지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확증편향이라는 병’은 망국병이다. 조선시대의 동인과 서인, 해방정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극단적 대립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독선과 오만에 빠진 ‘편 가르기의 끝은 공멸’이다. 정치이념이 종교화되면 권력투쟁은 종교전쟁처럼 극단화되기 때문이다. 독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신념’이며, ‘외골수의 신념’은 이성적 토론을 어렵게 함으로써 마침내 민주주의는 사망하게 된다.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말자. 그 대신 우리의 인식과 행태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도록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자.철학자 호르크하이머(M. Hork heimer)는 “인간의 이성이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포기할 때 비극이 초래된다”고 했다. ‘확증편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성찰’과 ‘통합적 인식의 시선’이 절실한 이유다.

2023-01-09

권력의 위기, 신뢰의 위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에서도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정치의 실종은 권력의 위기이고, 권력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를 의미한다. 집행권력을 가진 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권력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야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은 ‘권력의 획득·유지·확대’를 위해 수많은 거짓말들을 한다.이 가운데에는 ‘용서받은 거짓말’도 있고, ‘용서받지 못한 거짓말’도 있다. 미국의 트럼프(D. Trump) 전 대통령은 4년 동안 ‘3만573번의 거짓말’(워싱턴포스트)을 하면서도 임기는 채웠으나, 닉슨(R. Nixon)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Watergate)사건을 은폐, 조작한 거짓말이 탄로나 재임 중에 하야했다.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가? 지난 대선 결과가 보여준 윤석열과 이재명의 ‘간발의 득표 차이’는 두 후보가 국민으로부터 평가받은 ‘간발의 신뢰 차이’를 말해준다. 대장동사건으로 최측근들이 연이어 구속되었는데도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사과 한마디 않는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나, 외교무대에서 불거진 비속어 논란을 덮으려고 말 바꾸기와 우기기로 일관하다가 그 책임을 언론으로 돌린 윤석열 대통령이나 ‘신뢰의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이다.공자가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無信不立)”고 한 것처럼,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국민의 신뢰다. 신뢰란 무엇인가? 믿음을 뜻하는 신(信)은 ‘사람(人)+말(言)’로 구성되어 있다.사람이 말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즉 ‘언행일치’가 신뢰다. 스스로 ‘무신불립’을 역설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것이나, 공정·정의·평등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권이 심판받은 것은 모두 국민을 배신했기 때문이었다.윤석열 대통령의 성공 역시 국민의 지지여하에 달려 있고, 국민의 지지율은 신뢰도와 궤를 같이한다. 낮은 지지율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윤 대통령은 당선 인사에서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간절한 호소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대통령이 보여준 정치행태는 공정과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대립으로 통합의 정치는 말뿐이었다.대통령의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민심은 떠나고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 정치의 성공은 신뢰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국정의 동력도 역시 국민의 신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내 탓을 남 탓으로 돌려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권력, 민심을 외면하는 권력 지상주의 정치로서는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거짓말’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로 미화되는 탈진실시대의 지도자는 ‘권력과 신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정치적 공인의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이 된 권력은 국민의 신뢰를 잃음으로써 마침내 권력도 잃게 된다.

2022-12-26

적대적 공생의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한국정치는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이라는 점에서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다.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될수록 양당 내부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함으로써 대결은 더욱 치열해진다. 겉으로는 서로의 증오가 폭발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이익을 지켜주는 ‘은폐된 공생관계’에 있다.‘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적대적 공생은 특수한 한국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정치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정당체제는 보수와 진보의 전통을 잇는 양대 정당의 독과점 정치구조이다. 한 때 유력한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제3당이 부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양당 중심의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지는 못했다. 양당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이 유권자들의 정치혐오를 증대시키고 있다.양당의 적대적 공생은 이분법적 정치문화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다. 한국정치는 냉전과 6·25, 남·북한 간의 끝없는 대치 속에서 선악을 나누는 ‘정치적 흑백론’이 지배하게 되었다.‘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의식이 우리의 정치를 갈등과 대결로 내몰았다. 그 결과 각 진영에서는 극단적 성향의 정치팬덤(fandom)들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시에 두 진영 간 적대적 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적대적 공생관계는 여야 정당에게 정치적 이익을 제공해 준다. 야당은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무능과 실정을 공격할 수 있고, 여당은 그 책임을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 탓으로 돌릴 수 있다.야당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사법 리스크로 흔들리고 있는 이재명 대표를 지키려하고, 여당은 야당 대표를 대장동사건의 몸통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윤석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부인 및 처가 리스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두 정당은 ‘전쟁’을 통해서 서로의 ‘생존’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적대적 공생의 최대 수혜자는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이고,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다. 적대적 공생의 정치는 증오를 먹고 살기 때문에 양당은 모든 역량과 자원을 소모적 정쟁에 투입한다. 이 때 수세에 몰린 야당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권력투쟁의 전선을 확대해나가는 반면, 권력을 장악한 정부여당은 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고 야당 인사들에 대한 비리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정치가 실종됨으로써 국민의 고통만 커지게 된다.이제 우리 정치도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적대적 공생’의 악순환을 끊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우호적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독과점 정치구조의 혁신을 모색해야하며, 단기적으로는 정치인과 국민의 정치의식개혁이 시급하다.양당의 주도세력이 교조주의자에서 합리주의자로 대체될 때 비로소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특히 정치팬덤들은 자신들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상대 진영 팬덤들의 입지가 더욱 강고해진다는 역설을 깨달아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의 이성 결핍은 민주정치의 반동화를 초래한다.

2022-12-12

권력과 책임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헌법에는 국가의 최고의무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하지만 이태원에서 10·29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국민은 “압사당할 것 같다”, “살려 달라”고 절규했는데, 국가는 응답이 없었다. 무책임한 국가를 믿었던 순진한 청춘들의 비극이었다.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고위공직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개탄스럽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행안부장관), “국정상황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대통령 비서실장), “핼러윈은 축제가 아니라 현상”(용산구청장)이라는 등 모두가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또한 참사가 일어났던 그 시간, 경찰청장과 용산경찰서장은 비상연락이 되지 않았고, 용산구청장은 참사 전후의 대책회의에 모두 불참했다. 게다가 책임을 추궁 받는 국감장에서 홍보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은 “웃기고 있네”라고 필담을 하다가 들켜서 같은 당 주호영 위원장에 의해 퇴장 당했다. 이처럼 공직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 총체적이니 문제가 심각하다.철학자 베른하르트 그림(Bernhard A. Grimm)은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민주정치는 책임정치다.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권은 교체된다. 책임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고위직일수록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책임은 법적 책임은 물론, 정치적 책임까지 포함된다. 고위공직자는 형사책임이 없다고 해서 정치적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10·29 참사와 관련하여 “장관과 경찰청장에 대한 경질요구는 후진적”이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식이야말로 후진적이다. 비서실장의 책임의식이 이러하니 공직사회의 책임윤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충돌할 때 책임윤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정치는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고, 선의(善意)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신념윤리가 강할수록 정치는 이념화되고 실용성은 떨어진다. 책임윤리는 없고 권력의지만 강한 정치인은 국민에게 재앙이다. 고위공직자는 법적 책임을 묻기 이전에 스스로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윤리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대통령이 법적 책임만 따진다면 분노한 민심을 더욱 격앙시킬 뿐이다. 법적 책임은 향후 법원이 판단할 것이니 대통령은 먼저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야당의 무책임한 정치공세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10·29 참사의 책임을 야당에 돌릴 수는 없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측근의 보호가 아니라 국민의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다.책임윤리가 실종된 고위공직자들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들에게 권력에 따른 올바른 책임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의 책임이다.

2022-11-28

만추의 새별오름, 그 정치철학적 함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오름의 왕국, 제주도에는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필자도 수없이 올랐던 ‘새별오름’에 매혹되어 올해도 어김없이 또다시 찾았다. 오름의 서쪽, 경사가 가파른 길로 정상에 올라서 360도 파노라마 풍경을 감상한 후, 경사가 완만한 동쪽으로 내려왔다.만추의 새별오름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크다. 멀리서 보는 새별오름은 민둥산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억새꽃들이 춤추고 있다. 오름의 정면에서는 억새들만 보이지만, 오름의 후면에서는 작은 나무들과 넝쿨이 빽빽이 엉켜있는 숲을 볼 수 있다. 오름의 아래에서는 능선만 보이지만, 정상에 서면 동쪽의 한라산, 남쪽의 산방산, 그리고 서쪽 바다의 비양도까지 볼 수 있다.흔히 우리는 억새꽃을 은빛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언제나 맞는 말이 아니다. 억새의 색깔은 빛과 바람의 방향, 꽃이 핀 시기에 따라서 다르다. 빛의 순방향과 역방향에서 보는 억새의 색깔과 농도는 전혀 다르며, 저녁노을이 질 때는 황금색을 연출한다.가을에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억새가 겨울을 앞두고 다시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경이롭다.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서 내가 보았던 억새의 색깔이 전부는 아니다.이처럼 우리는 종합적 팩트(fact)를 간과하고 단편적 인식의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자연현상에 대한 거시적 또는 미시적 인식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처럼, 정치적 신념에 따른 문제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입견과 편견만 고집하기 때문이다.내가 알지 못한 사실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는데 보지 못했을 뿐’이다. ‘관점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자연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억새의 생존법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유연성’에 있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함으로써 부러지지 않는다. 유연성은 ‘채움보다 비움’에서 나온다. 억새가 비우지 않고 엽맥(葉脈)이 가득 차 있으면 강풍에 꺾이고 만다. 그럼에도 인간은 억새가 가르쳐주는 ‘비움의 철학’을 외면한다. 권력·돈·명예를 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다.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얽매이므로 유연성을 상실한다. ‘텅 빈 충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한다.‘유연성’은 상대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철학이고 ‘경직성’은 절대를 추구하는 독재주의 사고다. ‘민주정치는 인간의 정치’이고 ‘독재정치는 신의 정치’이다. 나의 판단만이 옳다고 우기는 정치인들은 신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는 수많은 신들의 싸움판이 되어버렸다.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오만이며 독선이다. 민주정치의 요체는 조화정치이며, 조화정치의 생명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유연성에 있다. 정치인들은 자연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깨달아야 한다.

2022-11-14

메멘토 모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학의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인생도 가을을 맞으면 생각이 깊어진다. 권력·재산·명예도 모두 한 때일 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우리의 삶도 끝없는 세월의 변화 속에 존재하는 찰나(刹那)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에 외면했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라틴어 격언은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고, 중세의 수도사들은 만날 때 마다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였다. 승리의 환희 속에서도 죽음을 기억하고, 수행의 성찰 속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이처럼 우리는 왜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이다.하이데거(M. Heidegger)는 “죽음이 삶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죽음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의 가장 절실한 친구이자 삶의 일부이다. 때문에 삶과 죽음은 ‘모순(contradiction)이 아니라 역설(paradox)’로 이해되어야 한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이 삶에 말하는 충고’이다.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의 본래성’을 회복함으로써 거짓된 삶으로부터 진정한 삶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메멘토 모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언제나 겸손하라고 가르친다.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 개선장군의 뒤에서 노예가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친 까닭은 무엇인가? 너도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니 승리에 우쭐대지 말라는 것이다.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그럼에도 정치권력·자본권력·언론권력 등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으니 메멘토 모리의 가르침을 잊은 것 같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그러니 모두 목에 힘을 빼고 겸손하라.메멘토 모리는 ‘삶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삶에 대한 몰입’을 증대시킨다. 죽음을 외면한 삶은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죽음을 대면하고 살아갈 때 삶의 성장과 초월이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죽음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면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숙고하게 된다. 메멘토 모리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면 누구나 추구하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됨으로써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이 인생의 겨울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기억하며 사느냐, 죽음을 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진다.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며, 잘 산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죽음 앞에서도 후회하지 않는 삶의 철학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2022-10-31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2항).고 했으니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을 잡은 여당은 물론, 권력을 잡으려는 야당도 명심해야 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이니 배(대통령)를 띄우는 것도 물(국민)이요, 그 배를 전복시키는 것도 물이다.윤석열 정부에 대한 여론은 어떤가? 새 정부가 출범한지 5개월에 불과한데 민심은 싸늘하다.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큰 것일까?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10월 2주차)에 의하면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63%)가 긍정평가(28%)의 2배를 넘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평가가 긍정 24%, 부정 66%이고, 정권의 핵심지지기반인 TK지역도 긍정 41%, 부정 52%로서 상당히 심각하다.어떻게 해야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이미 여론조사결과에 나와 있다. 부정평가의 구체적 요인은 경험·자질부족·무능(15%), 외교(13%), 전반적 잘못(10%), 민생/발언부주의/독단적(각 6%), 신뢰부족/인사(각 5%), 소통미흡(4%) 등이다.영국의 이코노미스트(Econo mist)가 “한국의 대통령은 기본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초보인 대통령의 경험·자질부족·무능을 똑같이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이성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편견을 버리고 국민의 관점에서 고언(苦言)을 경청할 때 비로소 초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대통령의 외교 설화(舌禍), 즉 비속어 ‘이××’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가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듯이, 대통령의 말은 품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고, 여당은 MBC를 고발하여 프레임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정치미숙이었다. 국내언론은 물론이고, CNN·BBC·WP 등 해외언론도 이 사태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했다.이들은 정권에 비판적인 MBC를 고발한 것은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했던 ‘자유’를 스스로 침해함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했다.‘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권성동에게 ‘체리 따봉’ 문자를 보냈다. 대통령이 “감사원은 독립기관”이라고 했는데, 감사원 사무총장은 “오늘 또 제대로 해명자료가 나갈 겁니다”라고 대통령실에 문자로 보고했다. 이처럼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으니 누가 대통령의 말을 믿겠는가?국민은 ‘이슈’ 자체보다 이슈를 다루는 대통령의 ‘태도’가 더욱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치는 ‘사실의 게임’이 아니라 ‘인식의 게임’이다.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아닌 것이다.대통령의 균형 있는 문제인식과 겸손한 정치행태가 요구되는 이유다.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과 싸우려는 대통령만큼 어리석은 권력은 없다.

2022-10-17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벗어나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21세기의 문명국가,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부족전쟁’이 한창이다. 부족전쟁을 이끌고 있는 각 진영의 지도자는 물론, 그 진영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부족 구성원들 간의 대립도 심각하다. 전선(戰線)은 내정과 외교를 가리지 않는다. 정부여당은 전 정권에 대한 ‘신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그리고 야당은 현 정권의 ‘편파적 수사’를 이유로 부족의 사활을 걸고 전쟁 중이다.예일대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는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alism)’에서 “부족본능은 소속본능인 동시에 배제본능”으로서 “부족주의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 똘똘 뭉치고 더욱 폐쇄적·방어적·징벌적이 되며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패거리 부족주의, 그리고 그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서 내로남불·유체이탈·자가당착 등 온갖 꼴불견 행태를 보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부족주의에 노예가 된 한국정치의 비극이다.부족주의 정치는 ‘좀비정치’다. 좀비정치는 ‘우리는 선’, ‘저들은 악’으로 규정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물어뜯는 정치다. 분노와 증오의 부족주의 정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부족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정치행태는 폭력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들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한다. 팬덤(fandom)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편향된 인식과 과격한 행태가 결국 ‘좀비정치화’되기 때문이다.정치적 부족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추아가 지적했듯이 “부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집단의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서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부족은 ‘상대를 악마화’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익공동체’이며,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을 상실하여 민주정치가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한다. 특히 대통령이 정치적 부족주의에 매몰되면 ‘국민의 리더(leader)’가 아니라 ‘진영의 보스(boss)’로 전락함으로써 나라는 갈등과 분열로 망국의 길을 가게 된다.부족주의 좀비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대화에 필요한 ‘균형의 힘’을 키워야 한다. 모든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완벽한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권력이나 정치적 부족도 예외일 수 없다.따라서 정치적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보수는 진보의 충고’를, 그리고 ‘진보는 보수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특히 부족 내부의 문제에 대한 자기성찰, 즉 ‘보수는 보수를 비판’하고 ‘진보는 진보를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때 지식인과 언론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역할이 중요함은 물론, 국민들도 늘 깨어있어야 한다.

2022-10-03

대학, 교수 그리고 권력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대학은 ‘진리탐구의 전당’이고, 교수는 ‘가치’와 ‘당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대학과 교수들이 권력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는가? 김건희 여사의 학위논문 표절과 관련하여 해당 대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국민대는 2008년 김건희 여사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미 2007년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타인의 아이디어나 연구내용 등을 인용 없이 도용하는 행위를 표절”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대는 최근 표절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에서 “베꼈다 해도 연구내용의 핵심 부분이 아니면 괜찮다”는 매우 정치적인 판정을 함으로써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이에 국민대 교수회는 자체 재검증을 위해 전체교수투표를 추진했으나 대학본부와 교무위원들의 개입으로 찬성 38.5%, 반대 61.5%로 부결되었다. 이는 대학과 교수들이 ‘지성적 판단’을 하지 않고 ‘지능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의 침묵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권력 앞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한 대학과 교수들이 내린 정치적 판단은 ‘역시 Yuji대’라는 오명(汚名)을 남겼다.논문 표절의 피해자인 숙명여대 구연상 교수는 “출처를 숨기는 표절은 정신적 도둑질”이라고 하면서 “국민대가 도둑질을 방치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논문을 “인용부호, 각주, 참고문헌 없이 몰래 따왔기 때문에 100% 표절이 맞다”고 반박하면서 “어떻게 그런 논문이 통과되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비판했다.나아가 전국 14개 교수·학술단체는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을 구성하여 1개월여 조사 끝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박사학위논문은 구연상 교수의 논문 외에도 9명의 논문을 표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피캠퍼스, 디지털타임스, 점집 홈페이지, 사주팔자 블로그 등에서 복사 또는 짜깁기했음이 밝혀졌다. 인용 출처는 대부분 표시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표기된 것은 187쪽 가운데 8쪽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이러한 엉터리 논문을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했으니 어이가 없다. 물론 교육부의 행·재정적 지원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국민대로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와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대학의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의 정의도 무너진다. 최고의 지성인 교수들이 불의와 야합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누가 지키는가?‘학생과 동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학’이 있고, ‘교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교수가 ‘올바른 교수의 길’을 가려면 ‘권력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권력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정치교수들은 교수라고 할 수 없다. 표절 당사자인 김건희 여사의 사죄와 학위반납은 물론, 논문의 지도교수와 심사교수들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해야 한다. 대학은 대학답고 교수는 교수다워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2022-09-19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보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권력’인가 ‘국민’인가.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시작도 방향도 목표도 국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집권당에서 계속되고 있는 권력싸움은 “시작도 방향도 목표도 권력”때문이 아닌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표리부동의 전형이다.‘백언불여일행(百言不如一行)’이라고 했다.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통령의 말은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이다. 대통령은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공직자’이다. 대통령의 ‘국민만 보고 가는 정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국민은 정부여당에 묻고 있다. 대통령이 권성동에게 보낸 ‘체리따봉’ 문자가 국민을 위한 것인가? 법원이 지적했듯이 이준석을 쫓아내기 위해서 ‘억지로 비상상황을 만든 것’도 국민을 위한 것인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꼼수로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인가? 당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내분의 빌미를 제공한 대통령은 왜 ‘강 건너 불구경’인가? 이 모든 정치행태에는 ‘국민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의 논리’가 지배되고 있다.윤석열 정부는 지지기반이 약한 연합정권이다. 2030과 6070, 윤석열과 안철수, 그리고 윤석열과 이준석의 연합으로 간신히 0.73% 승리했다. 하지만 권력투쟁으로 연합정권은 붕괴위기다. 정권의 표리부동을 경멸하는 중도는 이미 떠났고 2030은 분열되고 있다. 20년 장기집권을 장담했던 문재인정권이 민심을 잃고 5년 만에 무너진 사실을 벌써 잊은 것 같다.무엇보다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권력싸움을 멈추라. 정치력이 없어서 ‘정치의 사법화’를 초래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법원이 가처분 인용의 근거로 지적한 ‘정당민주주의 침해’, ‘가짜 비상상황 조작’ 등은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이 거짓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권력밖에 모르는 ‘꼰대’와 ‘싸가지’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국민은 ‘대결이 아니라 대화’의 정치를 바란다. 당내 갈등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여야협치와 국민통합을 말하고 있으니 ‘소가 웃을 일’이다.권력의 그 음흉한 속내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국민은 이미 ‘권력의 잔머리’를 꿰뚫고 있다. 오죽하면 당내에서조차 “새 비대위는 불가능하고 옳지도 않다”(안철수), “억지와 집착에 빠졌다”(홍준표)는 비판이 나오고, 서병수 의원이 당헌·당규개정에 반대하며 전국위원회 의장직을 사퇴했겠는가? 정기국회는 시작되었는데 민생을 책임진 집권당은 권력싸움으로 날을 새고 있다. 윤 대통령의 당선 지지율 48.5%가 9월 2일 현재 27%(한국갤럽)로 추락했다. ‘국민’이 아니라 ‘권력’을 선택한 ‘배신의 정치’ 때문이다.‘문명의 정치는 국민’을 보지만 ‘야만의 정치는 권력’을 본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의 야만성’은 여전하다. 권력남용과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야만의 한국정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22-09-05

검사 윤석열 vs 대통령 윤석열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검사와 대통령은 그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검사에게는 법적 시비(是非)가 중요하지만, 대통령의 관심사는 국익과 민생이다. 검사는 법치를, 대통령은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검사가 범인을 수사하듯 대통령이 이분법적 흑백론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윤 대통령의 검사경력은 27년이지만 정치경력은 9개월에 불과한 ‘초보’다. 여권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여전히 검찰총장 스타일에서 못 벗어난 것 같다”고 한다. 지지율 급락을 묻는 기자에게 “그 원인을 알면 어느 정부나 잘 해결했겠죠”라고 했다. 아무리 정치초보라도 이렇게 민심에 둔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초보가 겁도 없이 과속까지 하니 국민이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대통령이 원인을 모른다고 하니 분명히 알려드린다. 국민이 화난 가장 큰 이유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인사다. 대통령이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옹호했던 교육부장관은 여론의 뭇매로 취임 35일 만에 물러났다. 이미 장관 및 장관(급)후보 6명이 낙마했고, ‘윤핵관’과 김건희 여사가 관여했다는 인사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갈등의 중심에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선거 3연승을 이끈 당대표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은 ‘뒤끝 작렬’이었다. 대통령이 당대표를 “이×× 저××”, “내부 총질하던 대표”라고 했으니 당의 화합이 되겠는가? 또한 당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직격하는 모습은 막장드라마였다. 이들의 권력싸움은 국정을 맡긴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최근 여론조사(KBS/한국리서치, 8월 15일)는 지지율 하락의 가장 큰 책임이 대통령(46.2%)에게 있으며, 윤핵관(19.7%), 야당(10.2%), 참모진(9.1%), 이준석(7.9%)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고, 국민이 듣고 싶은 인사쇄신, 당의 내분에 대한 답변은 모두 회피했다. 이것이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고 한 대통령의 태도인가. 공감능력이 없는 대통령의 말은 공허할 뿐이다. 국민은 벌써 대통령이 말한 ‘공정과 상식’의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대통령부터 바뀌어야 한다. 오랫동안 습관화된 검찰문화에서 벗어나야 소통할 수 있다. 강골검사의 ‘외골수 기질’은 대화와 타협의 민주정치에 장애요인이다. 정치초보의 독선과 오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하며, 언론과 야당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윤핵관을 멀리하고, 정무감각 없는 참모들의 전면개편도 시급하다.정치지도자의 미덕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검사’라는 세평은 ‘정치를 모르는 대통령’이라는 말과 같다. 대통령은 비판을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는 독재다. ‘다름’을 ‘조정’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인식하면 민주정치를 할 수 없다. 대통령 윤석열은 검사가 아니라 대통령다워야 한다.

2022-08-22

제주 돌담이 대통령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학자 루소(J. J. Rousseau)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노자(老子)는 자연에 존재하는 소통의 통로인 도(道)를 인식하고, 그 도를 좇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최선”이라고 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자연의 가르침에서 지혜를 얻으라고 했다. 자연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기 때문이다.제주 돌담은 우리가 ‘자연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유산이다. 제주 돌담은 밭담·산담·집담·원담·올레담 등 그 장소와 기능에 따라 다양하다. 미학적인 측면에서 제주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도 자연친화적인 돌담이다. 게다가 제주 돌담은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에게도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제주 돌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이다. 제주 돌담은 바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이 숭숭 뚫려져 있다. 잘 쌓은 돌담은 바람에 흔들리기는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자연과 과학의 절묘한 만남이다.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떤가?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8월 5일 현재 24%(한국갤럽)로 추락했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국민의 인식이 너무나 동떨어진 ‘소통의 위기’이다. ‘수직적 검찰문화’에 익숙한 대통령의 경직된 사고는 ‘수평적 소통이 생명인 정치’를 어렵게 만든다. 검사에게는 ‘법치’가 중요하지만 대통령은 ‘정치’를 해야 한다. 장관 인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자들에게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느냐?”고 받아친 대통령의 오만은 불통의 증표다. 정치에 초보일수록 비판과 고언을 겸허히 수용해야 소통할 수 있다. 제주의 거센 바람이 돌담 구멍을 지나가지 못하면 돌담이 무너지듯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는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나아가 제주 돌담은 정치인에게 ‘공존과 상생’의 중요성도 가르쳐준다. 돌담을 무너지지 않게 쌓으려면 크기나 모양이 각기 다른 돌의 면과 면을 고려하여 잘 꿰맞추어야 한다. 서로 어깨를 맞댄 돌들은 ‘공존의 돌담’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상생’을 가르쳐주고 있다.그럼에도 여당과 야당은 걸핏하면 상대를 공존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처럼 ‘악마화(demonize)’한다. 집행 권력과 입법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서로 힘자랑하는 ‘야만의 정치’는 공멸의 길이다. 더욱 기막히는 것은 국정과 민생에 전념해야 할 대통령이 이준석을 향해 “내부 총질하던 당대표”라고 직격하자 소속의원들은 친윤과 비윤으로 갈라져 당권싸움으로 날을 새고 있다. 당내의 이견과 갈등을 통합하여 공존과 상생의 길로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했던가. 물(국민)은 배(대통령)를 띄울 수 있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이제라도 제주 돌담이 가르쳐주는 ‘소통과 상생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2022-08-08

민주적 통제인가, 중립성 훼손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비대화는 부패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공권력의 두 축인 검찰과 경찰도 마찬가지다.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수사 주체가 바뀌어도 민주적 통제는 여전히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역설했고, 윤석열 정부는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주장한다. 하지만 두 정부는 모두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할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에는 관심이 없다.정권교체로 여야의 공수(攻守)가 바뀌었다. 정부여당은 민주적 통제를 명분으로 경찰을 장악하려는 반면, 야당은 수사기관의 중립성을 보장함으로써 정부여당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다. 집행 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은 입법이 필요 없는 시행령으로 경찰을 통제하려고 하는 반면, 입법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은 법적 제도화를 통해서라도 경찰의 중립성을 제고시키려 한다.‘민주적 통제’와 ‘중립성 훼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력기관은 통제받지 않으면 부패되지만,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가 강화될수록 중립성은 더욱 훼손된다. 권력의 속성상 모든 권력은 통제받아야 한다는 ‘당위론’과 권력에 의한 통제는 사정기관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킬 뿐이라는 ‘경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권력정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엄존하는 딜레마이다.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권력이 비대해진 경찰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문제는 통제의 구체적 방법론이다. 현재 추진 중에 있는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은 경찰의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조직법과도 충돌한다는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행안부장관이 인사와 감찰을 무기로 통제할 경우 경찰은 무력화(無力化) 될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의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민주적 통제는 권력의 예속화에 불과하다.윤 대통령은 대선 때 “검찰의 중립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 폐지를 공약했다. 하지만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이 없는 상태에서 ‘윤석열 라인’을 중용하여 대통령-장관-검찰청으로 이어지는 직할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코드인사가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수사기관의 생명은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이다. 권력의 시녀가 된 검찰에게 공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민주적 통제의 이름으로 공권력을 예속화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정치는 ‘민주를 빙자한 독재’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모든 권력기관은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지만, 공정성이 생명인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정권이 검찰과 경찰을 허수아비로 만들면 당장은 통치하기 쉬울지는 몰라도 결국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다.민주적 통제와 정치적 중립이 충돌할 때는 시비를 가려줄 심판관이 필요하며, 그 심판은 바로 대통령과 국회에 권력을 위임한 국민이다. 심판은 공정해야하기 때문에 이념과 진영에 갇혀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와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는 국민의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고 있다.

2022-07-25

나 하나 꽃 피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는 거대하고 조직화된 정치문화에 압도되어 흔히 ‘나’의 능력과 존재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력증(無力症)에 걸려 신민화(臣民化)된 시민은 주권자의 힘과 그 역할을 평가절하 한다. 권력의 오만과 독선을 내가 막을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적 팬덤(fandom)들의 광신적 행태를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한다.과연 그럴까? 시인 조동화는 “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시인은 ‘나 하나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비록 나의 희망이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이 너의 희망과 만나서 마침내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때 풀밭은 꽃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나 하나’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나 하나’가 선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정치가·과학자들은 모두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고 외롭고 힘든 길은 걸어온 선구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毒杯)를 마셨고, 링컨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까지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잘못된 우주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변혁시켰다. 오늘의 이성사회(理性社會)는 이 같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노력의 대가로 피어난 꽃이다.‘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영감을 얻어 고향 제주에서 ‘치유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올레길이 완성되자 도보여행자들은 열광했다.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여 둘레길·해파랑길·누리길·갈맷길·바래길·생태문화길 등 600여개의 걷기여행길을 조성했고, 제주올레는 일본과 몽골에 수출까지 하였다. 한 사람의 새로운 발상과 노력이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에게도 얼마나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반면에 많은 사람들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해이’는 개인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링겔만 효과(Ringelmann effect)’를 초래한다. 공동체에 무임승차하려는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은 소홀히 하고 자유와 권리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팬데믹(pandemic)상황에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이 집단감염의 확산을 초래했음을 분명히 경험했다.이처럼 ‘나 하나’의 존재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작은 하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작은 하나’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갈파한 석가처럼 위대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풀밭을 꽃밭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한 사람의 선구적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하나가 ‘바로 나’라면 더욱 기쁘지 않겠는가?

202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