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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공화(共和)정신’ 없는 공화국의 위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우리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자유와 경쟁의 정신, 그리고 공화주의의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함께 존중해야한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화주의’ 가치를 경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공화정신이 없는 민주공화국은 허울뿐이다. 정치는 전쟁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대립이 극심하다. 다수의 횡포가 벌어지는 민주주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공성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와 함께해야 한다.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즉 ‘관용과 절제의 정신’이 다수결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라. 공화정신의 실종으로 나라는 온통 싸움판이다.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은 야당을 외면하고,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다수의 폭정’을 서슴지 않는다. ‘나’와 ‘내편’은 있으나 ‘우리’가 없는 증오·배제·독선의 정치는 민주공화정에 대한 배신이다.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한 법치·공공성·시민적 덕성과 같은 공화정신은 없고 이념·진영·지역·세대·성별 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암담하다. 이러한 공동체 위기가 다시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야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공화정신이다. ‘더불어’는 없고 ‘친명’만 있는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국민’은 안중에 없고 ‘용산’ 눈치만 보는 국민의힘은 모두 환골탈태해야 한다. 공동선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권력이 개인적·정파적 이익을 위해 남용되고 있다. 공공성을 잃은 권력의 독선은 공화국의 적이다. 따라서 여야는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소통·공존·통합의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한편 주권자인 시민의 책임도 무겁다. 공화국의 시민은 권력의 ‘수동적 통치대상으로서 친애하는 국민’ 아니라 정치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이다. 진영정치에 예속된 신민(臣民)은 자유의지를 가진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시민이 진영정치의 볼모가 되면 민주공화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시민의 덕성’과 ‘신뢰의 윤리’가 없으면 공화국은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시민의 자유의지와 덕성, 책임감과 균형감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천박한 ‘중우정치(mobocracy)’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를 넘어 공존·공생·공영을 위한 ‘공화의 길’을 가야 한다. ‘너와 내가 함께하여 우리가 되는 공화정신’이 있어야 죽어가는 나라를 살릴 수 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을 배격하고 합리적 중도주의자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노력에 성원을 보내야 한다. ‘민주’와 ‘공화’가 동행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2025-02-17

신념, 독선 그리고 민주주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흔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고 한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잘 갖추어졌으나 다수 국민의 ‘이기적·극단적 정치의식’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 붕괴와 히틀러(A. Hitler)의 국가사회주의 출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정치인과 국민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민주주의 보루인 언론과 사법부는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불행하게도 진영정치와 여야의 극한 대결, 증오와 적대의 광장정치, 언론의 진영화, 사법의 정치화, 시위대의 법원 난동 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독선에 빠진 신념의 양극화’이다. 보수와 진보는 정치사회문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럼에도 진영정치에 매몰된 극단주의자들은 사이비종교의 광신도처럼 행동한다. ‘정치의 종교화’는 ‘정치적 신앙인’을 낳고 맹신(盲信)을 부추긴다. 고야(F. Goya)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고 했듯이, ‘광신’이 ‘이성’을 지배하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신념’과 ‘독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념의 절대화’가 독선이다. 나에게는 신념이지만 남에게는 독선이 될 수 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독선은 배타적 흑백론이다. 나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의 신념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독선이다. ‘생각의 차이’를 통일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는 서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라고 하면서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감정의 양극화’, 즉 독선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고 했다.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핵심규범인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위해서는 신념이 극단화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늘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정신적 유연성’과 ‘균형감’이 중요한 까닭이다. ‘극단’과 ‘광기’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반지성주의를 선동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독선의 광풍’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독선에 빠진 ‘광신과 광신의 충돌’이다. 문재인 정권도, 그리고 윤석열 정권도 ‘독선에 빠진 신념정치’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두 정권은 똑같이 독선과 아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는 ‘나의 신념’을 강변하기 전에 먼저 ‘나의 독선’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흑백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색의 농도’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흑백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회색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주공화국’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공화(共和)의 정신’이다.

2025-02-03

‘국민의힘’이 가야 할 혁신의 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국민의힘이 또다시 벼랑 끝에 섰다. 2016년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그리고 2024년 윤석열은 ‘비상계엄’으로 보수의 위기를 자초했다. 비상이 걸린 국민의힘은 탄핵 찬반, 친윤과 친한, 극우보수와 합리보수 등으로 사분오열(四分五裂)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보수의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보수는 왜 길을 잃고 헤매는가? 보수의 회생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에 달려 있다. 보수의 핵심가치는 법치·책임·관용·품격·실용 등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현재의 국민의힘은 진정한 보수라고 평가받기 어렵다. 정부여당을 조롱하는 표현들, 즉 수구세력, 꼴통보수, 시대착오, 표리부동, 내로남불, 무책임, 불통과 독선 등은 ‘보수의 위선’을 말해주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가짜보수’가 ‘진짜보수’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선의 치료법은 ‘보수의 혁신’이다. 혁신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의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다. 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산업화시대의 사고로 AI시대를 살아가려는 것은 시대착오다. ‘수구보수’와 ‘극우보수’의 경직성·극단성은 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다. 불통은 독선을 낳고, 독선은 민심과 충돌하여 총선에서 참패했다. 보수의 대부인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유연한 대처와 변화가 보수의 생명력”이라고 했다. 시대변화에 둔감하고 혁신을 거부하는 보수는 존재가치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혁신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에 있다. ‘공천이 곧 당선’인 ‘양남(영남+강남)’지역 의원들은 혁신을 주도할 수 없다. 이들은 대통령 탄핵 여부와 관계없이 금배지가 보장되는 지역구이다. 보수의 부활보다 공천과 금배지에 혈안이 된 ‘권력 불나방들’이 어떻게 혁신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혁신은 보수의 핵심가치를 중시하고 민심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수도권 개혁파가 주도해야하며, 특히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강력한 혁신의지를 가지고 변화와 쇄신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해야 한다. 나아가 보수의 혁신을 위한 세대교체와 지도자육성도 시급하다. 지금 보수에게는 이승만·박정희를 넘어서 21세기 서사(敍事)가 필요하다. 오늘의 위기는 대선을 위해 급조된 외부용병을 영입했으나 결국 ‘정치초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유능한 보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정치할 수 있는 인재가 절실하다. 이처럼 보수위기의 원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에 남 탓하지 말고 스스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수구·극우·가짜보수’가 죽어야 ‘혁신·합리·진짜보수’가 산다. 미치광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똑같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혁신을 통해 ‘진정한 보수’로 거듭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난 민심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2025-01-13

성찰의 정치로 희망의 새해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 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날이다. 성찰과 반성은 발전의 원천이다. 맹자(孟子)는 정치의 기본을 ‘자반(自反)’, 즉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라 했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성찰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하면서 ‘성찰이 곧 희망’이라고 했다. ‘절망의 정치’를 ‘희망의 정치’로 바꾸려면 반드시 ‘비판적 자기성찰’이 있어야하는 까닭이다. 정치인들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인의 소명을 망각하고 권력에 혈안이 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마약’에 중독되면 초심을 잃고 괴물이 된다. 작은 권력보다는 큰 권력, 초선의원보다는 다선의원이 ‘권력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정치인들의 자가당착·표리부동·내로남불 행태는 권력욕 때문에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먼저 여당의 정치행태를 보자. “비상계엄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지적한 권성동 원내대표가 탄핵에는 ‘부결이 당론’이라고 했다. 자가당착이다. ‘친윤 좌장’이라는 사적 관계가 공적 판단을 그르친 것이다. 게다가 친윤 의원들이 공격하는 ‘배신자’는 누구인가? 민의에 역행하여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그것을 막은 국회의원들인가? 국민 70%가 요구하는 탄핵에 반대한 의원이 배신자인가, 아니면 찬성한 의원이 배신자인가?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말인가? 동료를 배신자로 낙인찍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진짜 배신자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권력만 쫓는 불나방’은 결국 불에 타서 죽지만, 민의를 받드는 정치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야당의 정치행태는 또한 어떤가? 계엄과 탄핵의 책임은 물론 대통령에게 있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야당의 입법권력 폭주였다. 이재명 사건의 담당 판·검사들을 겁박·탄핵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총리 탄핵까지 서슴지 않으니 민주당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법원과 헌재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교활한 ‘법꾸라지(법+미꾸라지)’행태는 또 어떤가? 이재명에 대한 재판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지연시키면서 윤석열 탄핵심판은 온갖 정치적 압력으로 판결을 독촉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정치행태는 전형적 내로남불이자 자기모순이 아닌가? 지금 민주당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공정과 정의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이처럼 독선과 아집의 ‘극단적 양극화 정치’는 민주주의를 죽이는 망국의 길이다. 성찰을 모르는 정치인들이 대권을 잡는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만 바뀔 뿐, 정치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멸의 정치’에서는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권모술수가 지배하지만, 성찰을 통한 ‘상생의 정치’에서는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성찰 없는 권력은 괴물’이기 때문에 정치인은 권력을 탐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권력만 쫓아다니는 ‘불나방 정치’는 저물어가는 저 석양에 묻어버리고, 새해에는 ‘성찰의 정치’로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2024-12-30

트럼프의 귀환과 한미동맹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미국 우선주의’와 ‘힘에 의한 평화’를 역설한 트럼프가 돌아왔다. 그의 귀환이 한미동맹에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미국의 외교전략이 ‘바이든의 진보적 이상주의’에서 ‘트럼프의 보수적 현실주의’로, ‘이념을 중시한 가치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하는 거래외교’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뉴노멀(new normal)이 될 ‘트럼피즘(Trumpism)’에 대비해야하는 까닭이다. 한미동맹에도 ‘트럼프 리스크’가 우려된다. 이미 합의한 방위비분담금협정의 재협상 요구, 주한미군의 철수, 감축 또는 역할조정, 북미협상과정에서 ‘한국 패싱’ 우려, 미국의 핵 확장억제력 약화 등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동맹도 하나의 이익공동체로 인식하는 ‘거래주의자 트럼프’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으로 간주, 엄청난 안보 비용을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및 중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을 경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념·가치외교’에서 ‘국익·실용외교’로 전환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지명한 국무장관 루비오, 국방장관 헤그세스, 안보보좌관 왈츠 등은 모두 ‘힘을 강조하는 미국 우선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며, ‘동맹의 가치’보다는 ‘동맹의 비용’에 주목하여 미국의 부담을 최소화하려한다. 그들에게는 미중경쟁·북미협상·한미동맹 등이 모두 거래의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존의 가치외교를 전면 재검토하여 실용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념과 가치를 중시했던 이분법적 세계관과 흑백논리를 버리고, 국익과 거래가 작동하는 새로운 외교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시급하다. 바이든과 맞춘 코드를 앞으로는 트럼프와 맞춰야 하는데, 그의 거래외교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의 가치외교를 수정해야 한다. 한미동맹에 이견이 없어야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는다.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 공간은 ‘경직된 흑백외교’가 아니라 ‘유연한 회색외교’에서 확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국방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해야 한다. 갑을(甲乙)관계에 있는 한미동맹에서 ‘갑(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른 ‘을(한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우리의 방위력이 제고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미동맹 유지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에서 다시 방위비협상을 하게 된다면 자체방위력 강화는 물론, 적어도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협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의 성공은 분열된 국론의 통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야 정치인들은 거세게 불어오는 ‘트럼피즘’을 외면한 채, 한미동맹까지도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아서 정쟁을 벌이고 있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침략을 부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24-12-02

‘무신불립(無信不立)’을 명심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지도자의 생명은 ‘신뢰’다. 권력의 정당성이 주권자의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도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국정을 수행하기 어렵다. 공자의 가르침, ‘무신불립’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지도자가 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여론은 긍정평가 17%, 부정평가 74%(한국갤럽, 11월 8일)로서 취임 후 최저치다. 보수의 텃밭인 TK지역에서도 부정평가(63%)가 긍정평가(23%)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분노한 민심을 외면하고 “돌을 던지면 맞고 가겠다.”고 ‘마이 웨이(my way)’를 고집한 결과다. 게다가 ‘명태균 사건’에 대해서 “취임 전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대통령실의 해명은 국민 부아만 돋우었다. 대통령의 아이콘(icon), ‘공정과 상식’이 ‘불공정과 몰상식’으로 조롱받고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레임덕 위기에 몰린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머리 숙여 사과하고 쇄신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이 회견에 대한 평가는 여당에서도 ‘친한’과 ‘친윤’이 달랐고, 야당은 위기돌파를 위한 꼼수라고 혹평했으며, 국민들 역시 대체로 냉담한 반응이다. 리얼미터(11월 11일)의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의 회견에 ‘공감하지 못한다.’(69.8%)는 여론이 ‘공감한다.’(27.3%)의 두 배를 넘는다. TK지역에서도 비공감 의견(52.2%)이 공감 의견(45.6%)보다 높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솔한 반성과 실천행동’이다. 권력은 민심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말한 대통령이 민심과 싸우면 국민은 위임한 권력을 다시 회수하려 할 것이다. 신뢰상실의 원인이 언행불일치에 있음을 왜 모르는가. 대통령이 여론을 설득할 수 없다면 여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실의 전면적 인적 쇄신이 시급하다. 민심이 돌아선 것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참모들의 잘못이 크다. 참모는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여 대통령에게 사실대로 고언(苦言)할 수 있는 이른바 ‘악마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에 아부하는 예스맨(yes man)이 아니라 민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충신들이 있어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나아가 국민의 절대다수가 요구하는 ‘김건희 특검’도 정면 돌파해야 한다. 수많은 의혹들은 단순한 사과나 해명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다. 아무리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라 하더라도 정권의 사활이 걸려있는데 민심과 싸울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 여당은 ‘공정한 특검’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객관적·중립적 특검이라면 야당도 거부하기 힘들 것이며 국민의 신뢰도 회복할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팻말은 장식용이 아니다. 떠난 민심을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도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권력을 위임한 국민은 대통령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2024-11-18

‘이분법 정치’를 넘어서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이분법 정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야 할 정치인들이 “우리는 천사, 저들은 악마”라는 편 가르기와 흑백논리로 갈등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여야가 상대를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인식하는 한 ‘정치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정치원로 유인태 전 의원이 “우리정치는 진영논리가 극심해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4년 뒤에는 다 몹쓸 사람이 된다.”고 했겠는가.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왜 이분법 정치에 빠져있는가? 그것은 잘못된 정치의식과 권력욕 때문이다. 이분법은 권력을 획득·유지·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현상을 극화한 ‘정치마케팅 전략’일 뿐, 객관적 사실(fact)과는 거리가 멀다. 이분법은 정치현상 이해의 편리함과 명확성을 제공하지만, 흑백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을 외면하는 ‘아메바(amoeba)적 사고방식’이다. 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가 “악(惡)의 동의어는 무사유(無思惟)이며, 그것은 곧 정신의 죽음”이라고 지적했듯이, 정치적 신념이 ‘다른 것’을 악과 연계하여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무지와 오만’이 이분법 정치의 주범이다. 정치란 흑백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다양한 회색의 스팩트럼(spectrum) 가운데 하나를 대화와 타협으로 결정해나가는 과정임에도 정치인들의 사유능력 부족과 잘못된 권력욕이 정치를 실종시킨 것이다. 이분법 정치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전부 또는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라 ‘좀 더 많거나 적은 것(more or less)’을 두고 타협하는 열린사회의 정치사상이다. 반면에 절대주의는 인간의 한계와 상대성을 부정하는 닫힌사회의 흑백론이다. 독재정치에서는 관점의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으며, 오직 독재자의 판단만이 선이요 정의라고 강요될 뿐이다. 그럼에도 여야 정치인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역설하면서도 이분법 정치를 고집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에 필요한 사고의 유연성’은 없고 상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반면, 자신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성찰에는 인색하다. ‘양비론(兩非論)’을 혐오하고, 중도층을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하는 이분법 정치는 사회갈등을 더욱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원화·복잡화·세계화된 오늘날에는 시대착오다. 민주주의는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조정과 타협으로 균형점을 찾아가는 회색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분법 정치를 넘어서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법’은 선악을 구분하는 ‘흑백논리’이지만, ‘정치’는 이해갈등을 조정·타협하는 ‘회색논리’이다. 때문에 법조인 출신 대통령과 여야의 당 대표들은 ‘법’과 ‘정치’를 혼동하여 선악의 이분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치지도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 타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경직된 이념의 정치’는 ‘유연한 실용의 정치’로 전환될 수 있다.

2024-11-04

누구를 위한 ‘방탄 정치’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여야의 ‘방탄 정치’가 격돌하고 있다. 여당은 야당의 ‘이재명 방탄’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의 ‘윤석열·김건희 방탄’을 공격한다. 양자의 공통점은 상대의 잘못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데 있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 본다.”는 점에서 똑같은 ‘바보들의 행진’이다. 방탄 정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입법권력을, 그리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집행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대를 비판,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덮으려고 한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방탄이 아니라, 권력자의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한 방탄이라는 점에서 후진적 정치의 전형이다. 이재명 방탄을 위한 민주당의 정치행태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협한다. 수사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와 재판담당 판사에 대한 탄핵겁박은 보통이고,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청문회까지 열었다. 검찰수사 조작방지법·표적수사금지법·법 왜곡죄법 등을 입법하겠다면서 판·검사들을 협박한다. 특히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특검법 및 채 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관계없이 계속 밀어붙여서 탄핵분위기를 고조시키고자 한다. 민생을 챙겨야 할 국정감사까지도 이재명 방탄과 대통령 부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정부·여당의 방탄 정치는 검찰의 수사·기소권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 그 핵심수단이다. 야당의 ‘쌍특검법’에 대한 여당의 방탄 정치는 국민여론과 배치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 및 공천개입 의혹 등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에 대한 국민여론(전국지표조사, 9월 25일)은 찬성 65%, 반대 24%이며, 특히 보수의 텃밭인 TK에서도 찬성 58%, 반대 36%이다. 또한 채 상병 특검도 찬성 69%, 반대 21%(엠브레인퍼블릭, 7월 8일)로서 찬성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부인의 방탄을 위해 검찰수사팀을 교체하고 김건희 특검법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자신이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도 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게다가 검찰은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와 주가조작 의혹에 무혐의처분 함으로써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고, 청탁금지법은 있으나마나하는 법이 되었다. 공정과 상식을 역설한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의 방탄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해충돌’이 아닌가. YS와 DJ는 정치9단이었음에도 대통령 재임 중 권력으로 자녀들을 방탄하지 않고 모두 구속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정치지도자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이미 지은 죄가 방탄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가 없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것이요,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쪽팔리게 방탄하지 말고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라.

2024-10-21

보수정치, 길을 잃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의 보수정치가 길을 잃고 좌충우돌이다. 야당과의 끝없는 정쟁, 의사들과의 ‘강 대 강’ 대치, 심지어 국정을 책임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의 갈등까지 어느 하나 조용한 곳이 없다. 대통령의 임기가 벌써 중반인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보수정치는 왜 길을 잃었는가?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의 리더십 때문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이며 거칠고 서투른 정치가 보수의 위기를 자초했다. 최근 여론조사(전국지표조사, 9월 4주차)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서 긍정평가 25%, 부정평가 69%라는 매우 저조한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인식하는 대통령의 오만·독선·불통은 심각한 수준이다. 민심 이반을 두고 현재권력(대통령)과 미래권력(당 대표)이 벌이고 있는 당·정 갈등은 공멸로 가는 보수정치의 현주소이다.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보수정치는 변화를 외면했으니 자업자득이다. 변화와 혁신의 전제는 성찰과 반성인데, 보수는 늘 말로만 약속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았다. 특히 보수는 자신의 허물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로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만 했다. 남 탓만 하고 자기성찰에 인색한 보수가 어떻게 정도정치를 펼 수 있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공한 보수정치는 언제나 변화에 민감했고, 비판과 고언을 경청했으며, 말보다 실행력이 강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보수는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하지도 못했다. 보수의 가치라고 할 수 전통·도덕·책임·품격·실용 등은 보수정치를 이끌어주는 나침판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작금의 보수정치는 ‘전통이 수구’로, ‘도덕이 힘’으로, ‘책임이 무책임’으로, ‘실용이 이념’으로 전락함으로써 길을 잃었다. 윤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 ‘자유’ 등 이념에 얽매여 실용정치를 펴지 않은 것은 보수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강성팬덤과 꼴통보수에 의존하는 정치는 시대착오이며 중도로 외연확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총선 3연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실용’을 중시해야 할 정치지도자의 현실인식과 정치력도 문제다. 윤 대통령은 108 대 192라는 ‘극단적 여소야대 현실’을 무시하고 야당과 지속적으로 대립함으로써 국정의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개혁과제인 4+1개혁(의료·연금·노동·교육+저출생)은 국회를 장악한 야당의 협력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정치초보인 윤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의 정치는 실용을 중시하는 보수정치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이상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보수정치는 정상화 될 수 있다. 보수 재건의 길은 남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을 고치는데 있다. 오만과 독선을 반성하고 원로와 전문가들의 고언(苦言)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수구보수는 뒤로 물러서고 개혁보수가 변화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보수정치는 부활의 길이 열린다.

2024-10-07

국회의원 특권,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세계 최고의 특권과 특혜를 누리고 있지만, 그들의 정치수준은 낙제점이다. ‘고비용·저효율의 정치’를 ‘저비용·고효율의 정치’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 극심한 정쟁을 하면서도 자기들 이익을 위해 야합하는 표리부동한 정치행태를 보라. 특권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국민의 공복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은 특권 폐지의 당위성을 말해준다. 국회의원 특권의 무엇이, 왜 문제인가? 그것은 첫째, 특권·특혜가 너무 많아서 권력이 봉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불체포특권·면책특권에다가 연봉 1억6000만원, 명절휴가비 850만원, 입법·특별활동비, 유류비·차량유지비, KTX 특실과 비행기 비즈니스석 제공, 연 2회 해외시찰, 9명의 보좌진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180여 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한국보다 부유한 프랑스·독일·스웨덴·일본 등 정치선진국들보다도 특혜가 더 많으니 어이가 없다. 정치선진국과 후진국 차이는 정치를 ‘봉사와 희생의 직업’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직업’으로 인식하느냐에 있다. 전자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보좌관 없이 스스로 업무를 수행하지만, 후자는 보좌관이나 비서에게 시켜놓고 전용승용차로 경조사 다니면서 폼을 잡는다. 정치선진국은 의원 보수를 외부 독립기관에서 결정(영국·스웨덴·캐나다)하거나, 경제지수와 공무원 보수액에 연동해서 결정(미국·독일·프랑스)하는데 반해, 한국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보수를 결정하고 있으니 코미디가 아닌가. 둘째, 특권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한국정치가 정상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권 자체가 반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특권·특혜가 많을수록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민의 공복이 되기 어렵다. 특권을 잡기 위해 정상배(政商輩)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고, 권력에 줄서는 정실주의 정치가 만연한다. 특권을 폐지해야 ‘잿밥에만 관심 있는 정치꾼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정치인들이 정도정치를 펼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특권카르텔을 해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한국정치발전의 길이다. 셋째, 국회의원들이 특권 폐지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 없듯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그들에게 특권 폐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가 2023년 국회의원들에게 등기우편으로 특권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총 300명 중 6명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응답을 거부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선거 때만 특권 폐지를 약속하는 그들에게 맡겨두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니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국민이 특권폐지운동을 주도하는 수밖에 없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권자인 국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특권에 취한 그들은 절대로 깨어나지 않는다. 주인(국민)이 언제까지 머슴(국회의원)에게 농락당하고 살 것인가. 주인이 현명해야 머슴을 잘 부릴 수 있다.

2024-09-23

제주해녀가 정치인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제주올레 바닷길을 걷다가 ‘물질’하는 해녀들을 만났다. 제주해녀는 ‘강인한 제주 어머니의 상징’이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처럼, 해녀들은 목숨 건 물질을 하면서도 늘 이웃과 함께했다. 옥빛 제주바다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공존과 상생,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몸에 밴 그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는 권력싸움에 찌든 정치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제주해녀문화의 핵심가치’인 ‘공존’이다. ‘사람과 사람의 공존’, 그리고 ‘사람과 자연(바다)의 공존’이 바로 ‘제주해녀정신’이다. 잠수 능력이 탁월한 상군 해녀는 하군 해녀가 작업하는 ‘할망바당(할머니바다)’에 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할망바당은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고령의 해녀들과 애기(초보)해녀들을 위한 ‘배려와 공존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해녀들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하여 ‘지속가능한 바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수산자원의 보호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금채기(禁採期)’를 두는가 하면, 환경오염과 수온상승으로 인한 백화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갯닦이’ 작업을 한다. 작은 해산물 채취금지, 종폐 살포, 바다 숲 조성 등 해양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공동체 차원의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제주해녀들의 ‘배려와 공존’이라는 ‘공동체정신’을 배워야 한다. ‘공멸의 정치’를 끝내려면 ‘공존의 정신’이 필수다. 정부와 국회를 각각 장악하고 서로 힘자랑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는 제주해녀들의 삶을 배워야 한다. 여야의 협치는 ‘입에 발린 소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처럼 배려와 공존의 민주주의 가치관이 내면화되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해녀문화의 상징인 ‘불턱 민주주의’도 정치인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불턱’(현재는 해녀탈의장)은 해녀들이 물질을 준비하고, ‘물숨’과 같은 지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다. 민회 성격의 자조모임인 ‘해녀회’는 개인을 존중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 공동체의 리더인 ‘대상군’은 ‘나이가 아니라 인격과 능력’을 기준으로 추대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헌신의 리더이다. 하지만 대상군도 체력과 판단력이 떨어지면 리더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해녀공동체의 안전과 성과를 지킨다. 이러한 자제와 절제의 미덕이 정치인에게 주는 함의가 크다. 해녀들은 ‘금지된 욕망’인 ‘물숨’이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호흡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듯이, 정치인도 ‘권력이 마약’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서 성찰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대상군 해녀가 때가 되면 리더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듯이, 정치인도 자신의 능력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

2024-09-09

정치의 존재이유를 명심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기 때문에, 그 존재이유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이해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 나가는데 있다. 정치인에게는 특별히 균형감각과 책임의식이 요구되는 까닭이다.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진영정치·부족정치·팬덤정치·방탄정치 등 특정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패거리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나눠 가진 여야가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고 야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인들이 ‘한 나라 두 국민’을 만들어놓고서도 잘못을 모르니 어이가 없다.‘정치의 실종’은 ‘진정한 정치인(statesman)’의 부재를 의미한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권력만 탐하는 정치꾼(politician)’들의 성찰과 반성이 시급하다.권력은 마약이다. 마약에 중독되면 초심을 잃고, 초심을 잃으면 정치괴물이 된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자신의 정치행태를 성찰·반성·혁신해야 한다. 자기성찰에는 인색하고 상대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꼰대들’은 결코 정도정치를 할 수 없다.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확고한 소명의식’이다.베버(M. Weber)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는 ‘열정·책임의식·균형감각’이 필수라고 했다.‘열정’은 대의(大義)에 대한 헌신이고, ‘책임의식’은 권력의 통제와 조절에 필요하며, ‘균형감각’은 열정과 책임의식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서로 다름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관용과 자제’, 그리고 ‘갈등의 통합’에 필요한 ‘대화와 타협’이 민주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정치인이 국민에 대한 ‘책임윤리’는 없고 자신의 ‘신념윤리’만 고집하면 ‘정치가 전쟁’이 된다.정치인에게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 정치꾼들은 권력이 ‘국민을 위한 정치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누려야 할 힘’이라고 착각한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자기 멋대로’가 아니라 ‘국민 뜻대로’ 행사되어야 한다. 물론 이때의 국민은 ‘내편 국민’이 아니라 ‘전체의 다수 국민’이다. 권력에 연연해서 비굴하게 패거리정치에 줄서지 않았던 정병국(5선)·김세연(3선)·표창원(초선)의 경우처럼,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물러나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진정한 정치인은 ‘가물에 콩 나듯’하고,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꾼들만 득실거리니 정치가 실종된 지 오래다.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에게 1억5000만원의 연봉에 180여 가지의 특혜를 주고 있으니 말이 되는가.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말기암 투병 중인 팔순 투사 장기표가 “정치가 도덕성과 인간성을 상실하면 나라는 망한다”고 한 충고를 명심하라. 정치를 잃어버린 정치인들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왜,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 권력 때문에 정치를 잃어버린 당신이 정말 쪽팔리지 않는가?

2024-08-26

이슬처럼 영롱한 ‘뒷것’의 삶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남달랐던 ‘천재 아티스트’가 그의 노래 ‘아침이슬’처럼 홀연히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늘이 보내준 보물, 큰 산과 같은 어른, 세상이 빚진 분,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 어둠을 밝혀준 성자” 등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문화예술계는 물론이고 정계와 법조계, 수많은 시민들까지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이러한 존경과 감사는 사랑과 헌신으로 일관한 청죽(靑竹)같은 삶의 결과였다. 엄혹했던 시절,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시위에서 불렸다는 이유로 ‘운동권 학생’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버리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생계를 위해 봉재공장과 탄광에서 일할 때, 그리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에도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먼저 생각한 그의 삶에는 변함이 없었다.‘영혼이 아름다운 어른’이 남긴 가르침은 너무나 크다. 무엇보다 큰 감동은 그가 우스갯소리로 했다는 ‘뒷것’ 정신이다. 그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자신을 ‘뒷것’이라 낮추고, 무대 앞의 배우들을 ‘앞것’이라 높이면서 묵묵히 뒷바라지 했다. 사재를 털어 만든 소극장 ‘학전(學田)’은 그의 말대로 가난한 예술가들을 키우는 ‘못자리’였으며, 이곳에서 설경구·황정민·장현성·김광석·박학기 등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앞것에 환호하고 서로 앞것이 되려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그의 ‘뒷것 정신’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뒷것 정신’은 양지가 아니라 음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는 정신이다. 그의 노래 ‘상록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선물한 것이었고, ‘봉우리’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낙담한 선수들을 위해 만든 노래였다. 공연 4000회를 기록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었고, 수익성 없는 ‘아동극’을 무대에 올린 것도 돈이 아니라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이미 대학시절 달동네 판자촌에서 봉사했던 ‘신정야학’과 ‘해송유아원’의 연장선에 있었음은 물론이다.만약 그가 돈을 벌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재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권유와 정권의 유혹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맑은 뒷것 정신’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늘 사회의 명암(明暗)을 균형 있게 보아야 하며, 밝음(강자)만 찾고 어둠(약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처럼 ‘맑은 눈’과 ‘고운 마음’이 있어야 돈·권력·명예의 아귀다툼으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평생 꿈과 희망을 심고 가꾸었던 상록수였다. 고인의 영정이 33년을 함께했던 학전(현재 아르코 꿈밭극장)을 떠날 때, 제자 이인권이 색소폰으로 연주한 노래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김민기였다. 약자의 아픔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었던 ‘큰 어른’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뒷것 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2024-08-12

절제 잃은 권력의 폭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입법권력과 행정권력의 ‘이원적 정통성’이 격돌하고 있다. 둘 다 주어진 권력의 정당한 행사라고 강변하면서 절제 없이 폭주하고 있다. 권력의 힘자랑은 오만과 독선에 다름 아니다. ‘문명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의 정치’이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다.민주당의 입법권력 폭주는 역대급이다. 다수당이라는 이유로 여야 협의 없이 국회를 일방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당적이 금지된 국회의장 우원식은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함에도 노골적으로 민주당 편을 들고, 법사위원장 정청래의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태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또한 판·검사들을 겁박하기 위해 ‘법 왜곡 죄’의 신설 및 검찰청 폐지 법안까지 추진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법안들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더욱이 민주당은 극히 절제되어야 할 탄핵소추권도 수시로 휘두르고 있다. 방통위원장 탄핵에 이어 판·검사 탄핵을 겁박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청문회까지 열었다. 당 대표를 수사한 검사들에 대한 탄핵은 ‘도둑이 몽둥이를 드는 꼴’이다. 탄핵으로 판·검사의 직무를 중지시키려는 사법방해는 이재명의 대선가도에 방해물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오직 이재명 방탄과 윤석열 정부 파탄에 초점을 맞춘 민주당의 입법권력 폭주는 갈수록 태산이다.한편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절제 없는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도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거부권은 입법부의 독선을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부여된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입법부의 권력 남용이 문제이듯이 행정부의 거부권도 마땅히 절제되어야 한다. 야당의 권력 폭주를 견제하기 위한 대통령의 거부권이 여당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대통령은 국민 다수가 입법에 동의하거나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된 경우, 그리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거부권 행사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가 어렵기 때문에 ‘특검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특검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더욱 절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는 정치환경을 조성하는 것, 즉 여야의 정쟁을 끝내고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정치학자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관용’과 ‘자제’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핵심규범이라고 했다. 도덕이 담보되지 않은 권력 행사는 위험하며, 절제할 줄 모르는 권력은 독재의 길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이 부여한 권력의 행사는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법적 정당성이 있어도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면 권력은 자제되어야 마땅하다.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돌고 돌며, 절제를 잃은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정권이 교체되면 권력 폭주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권력은 성찰과 반성으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을 때 지킬 수 있는 마약이다.

2024-07-29

북·러 밀착과 우리의 대응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최근 평양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양국은 군사동맹에 준하는 ‘포괄적 전략동반자관계 조약’을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푸틴(V. Putin)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고, 군사·기술협력을 천명함으로써 유엔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고도화되면서 이루어진 북·러 밀착은 한국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다. 북·중 혈맹에다가 러시아의 군사협력까지 확보한 김정은은 이른바 “남조선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 준비”를 가속화할 것이다. 북·중·러 3국은 모두 핵보유국인데, 우리는 핵 없이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만 쳐다보고 있다. 한미동맹의 재정비, 핵개발 잠재력 확보, 독자 핵무장 등보다 실효성 있는 안보전략이 요구되고 있는 까닭이다.철학자 스펜서(H. Spencer)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종(species)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생존하려는 자는 환경의 변화를 직시하고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힘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를 위한 현실주의적 인식이다. 현실주의는 이상주의가 주장하는 ‘대화를 통한 평화’를 신뢰하지 않으며,‘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다. 지난 정부의 이상주의적 대북정책은 비핵화에 실패함으로써 북핵을 고도화시켰을 뿐이다. ‘핵무기는 비대칭전력’이라는 점에서 ‘핵은 핵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이 절실하다.이를 위해서는 장·단기 핵전략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그 핵심은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실효성을 제고하면서 핵개발 잠재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현재의 ‘핵 확장억제전략’보다 진전된 ‘전술핵 재배치’ 또는 ‘NATO식 핵공유’와 같은 방식으로 핵우산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 의회와 학계에서도 제안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외교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성과를 거둘 수 있다.한편 장기 전략으로서는 독자 핵무장을 위한 ‘핵개발 잠재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장 핵무장을 위해 NPT를 탈퇴한다면 유엔제재로 우리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제재를 피하면서도 한미동맹이 작동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플랜 B가 필요하다. 그것은 일본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핵무장 할 수 있을 정도의 잠재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제한을 받고 있는 우라늄농축과 핵연료 재처리 권한의 확보가 관건이므로 지속적인 대미외교협상이 중요하다.이러한 외교안보전략이 성공하려면 정쟁으로 날 새는 정치권의 각성이 시급하다. 내분(內紛)은 외침(外侵)을 초래하고, 분열된 나라는 통합된 안보를 추진할 수 없다. 정치인들은 권력투쟁으로 병든 소아(小我)를 버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의(大義)에 따라야 한다.

2024-07-15

디케의 저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다. 공정한 재판의 상징인 ‘천칭 저울’이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는 것은 정의가 흔들린다는 뜻이다. 법의 저울이 공정하지 못하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고, 기울어진 저울로 내리는 판결은 정의를 빙자한 불의일 뿐이다.누가 디케의 저울을 흔드는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그 주범이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인들의 정치력 부족으로 정치적 문제를 법적 판단에 호소하는데서 비롯된다. 노회(老獪)한 정치인들이 자기편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도록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흔들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은 사법부의 판결까지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여 지지 또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최근 민주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자 보복성 입법으로 사법부를 길들이려 하는가 하면, 재판 담당판사의 실명을 공개하여 공격하는 등 사법시스템을 흔드는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사법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변질시켜 정쟁을 일삼는 행태는 헌법에 보장된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신분보장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반면 ‘사법의 정치화’는 사법부와 법관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법관은 헌법 제103조에 규정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대원칙을 엄수해야 사법 불신을 막을 수 있다.이 때 법관의 양심은 주관적 판단이 배제된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률적 양심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법관은 재판에 있어서 자의성과 편향성을 엄중히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없이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그럼에도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진보성향의 민변·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코드 인사’로 스스로 사법부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일부 판사들은 ‘재판이 곧 정치’라면서 법과 양심이 아닌 ‘개인의 정치적 표현’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사법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법관이 정치적 진영논리에 갇혀 재판에서 객관적 인식을 외면하고 주관적 이념성향을 드러낸다면 판결의 공정성은 보장될 수 없다.더욱이 정의의 가치를 흔들었던 조국 전 정의부(법무부)장관이 1·2심의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비법률적 방법에 의한 명예회복을 하겠다”면서 정치에 뛰어들고, 그의 책 ‘디케의 눈물’에서는 자기반성 없이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한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행위다.한 때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가치와 당위를 가르친 교수였던 그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측은하다.결국 디케의 저울은 누가 흔들거나 스스로 흔들리지 않아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정치인이 권력으로 법관을 겁박해서도 안 되며, 법관이 권력욕 때문에 정치인 흉내를 내서도 안 된다. 정치인과 법관이 각자 주어진 소명에 충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디케의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

2024-07-01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온 나라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과도한 확신과 확신, 편향과 편향의 충돌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확증편향의 덫에 갇힌 것을 모르거나 편향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죽하면 ‘한국사회·성격심리학회’에서 ‘2024년 한국사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현상은 확증편향’이라고 우려했겠는가.심리학자 웨이슨(P. C. Wason)은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가치관·신념·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믿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성”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지편향’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사람이 증거라고 제시하는 사실(fact)은 ‘선택적 인식’에 의한 ‘선택적 사실’일 뿐이다.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쉬우며, 편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감정적 행태를 보인다. 개인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인지편향은 매우 완고해서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거의 매일 접속하는 ‘유튜브 알고리즘(YouTube Algorithm)’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지편향이 심화됨으로써 정신적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은 커진다.철학자 니체(F. Nietzsche)는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라고 경고했다. 성찰하지 않는 확신은 객관적 사실까지도 자신의 믿음에 맞게 왜곡해서 거짓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확증편향은 과도한 자신감과 교만함을 낳고, 정책결정과정에서 다양한 대안의 검토를 방해함으로써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확증편향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덫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적 오만’의 경계이다. 오만은 ‘무지’와 ‘확신’의 결합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지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지적 겸손’과 ‘비판적 자기성찰’이 필수조건이다. 균형식이 건강에 좋듯이, 균형 잡힌 사고가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에서 비롯되는 집단사고(group think)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균형적 사고를 회복하려면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져야 한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만든 덫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확신의 덫에 갇히면 사고의 유연성을 잃는다. 지금은 일관성보다는 유연성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정 성향의 방송·신문·유튜브 등은 편식하지 않아야하고, 이념·정당·연령·종교가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우리사회의 비극은 타인의 편향은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편향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편향과 편견은 분열의 길’이며, ‘균형과 헤아림은 통합의 길’이다. 남북대치와 북한의 핵위협 속에서도 ‘망국적인 심리적 내전’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는가.

2024-06-17

‘승자독식 전쟁’을 끝내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가 ‘전쟁’이 되었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이라는 함정에 빠진 탓이다. 승자의 독식은 패자의 박탈감과 분노를 불러온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이유다.대화와 양보가 없는 승자독식 정치는 민주주의를 형해화(形骸化)한다. 집행권을 가진 여당과 입법권을 장악한 야당의 끝없는 전쟁이 그 생생한 증거다.승자독식 선거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대선에서 득표율 0.73% 차이(윤석열 48.56%, 이재명 47.83%)로 승리한 대통령이 집행권을 100% 독점하며,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 5.4% 차이가 의석수 1.8배 차이(민주당 161, 국민의힘 90)를 초래했다. 이처럼 엄청난 사표(死票)가 발생하는 선거는 민심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승자독식 제도에서는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 같은 정치’가 일상화된다. 다수결의 전제인 대화와 타협은 공허할 뿐이며, 이성과 양심은 설 자리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증오 마케팅’으로 상대를 비난, 조롱하고 혐오를 극대화시킨다.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흑백론이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을 심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린다.그렇다면 어떻게 ‘승자독식 전쟁’을 ‘승패공존 정치’로 바꿀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정신’과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정신적 측면에서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가치관이 내면화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대소’(more or less)를 두고 벌이는 협상과 타협이다.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오만과 독선이 민주주의 파괴의 주범이다.다음으로 제도적 측면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개혁과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은 물론, 대통령 4년 중임제 또는 의원내각제 개헌까지도 본격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국가들이 보여주듯이 다당제 연합정치와 같은 합의제민주주의가 정치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정책의 연속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는 꼼수 위성정당을 막고, 소선거구제의 사표를 줄이기 위해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이 문제는 이미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에도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폭탄 돌리기’만 계속하고 있다.거대양당이 여론을 의식하여 개혁시늉만 할 뿐,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얻는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선거법 개혁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니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식인·시민사회·언론 등 여론의 압력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성사시킨 것처럼, 개혁요구가 거세지면 정치권도 계속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은 거대양당의 ‘승자독식 전쟁 놀음’에 놀아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에 나서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2024-06-03

보수의 성찰, 반성, 그리고 혁신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국민의힘이 길을 잃었다. 총선 3연패에도 성찰과 반성에 인색하다. 중환자가 수술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진통제만 먹고 있다. 집권당이 되자 변화에 둔감하고 민심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다음 지선과 대선도 필패다. 보수의 사활은 민심에 부응하여 혁신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그럼에도 구원 투수로 나선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패인으로 외연확장에 따른 내부 결속력 약화를 지적하면서 “보수의 정체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중환자를 치료해야 할 의사의 진단이 거의 돌팔이 수준이다.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고, 비대위원 7명 중 6명을 친윤으로 임명했다. 비상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이처럼 안이하니 미래가 암담하다.국민의힘은 죽어야 산다. 민심을 받들어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환골탈태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혁신 보수’로 거듭나는 일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수구 보수’는 생존할 수 없다. 보수는 위기 때마다 가면을 쓰고 변신하는 흉내만 내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자초했다. 이번에도 중도 확장에 실패한 것은 ‘혁신의 가면’은 썼지만 ‘혁신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국민의힘은 민심에 민감한 ‘열린 보수’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공한 지구적 보수는 ‘실용’과 ‘통합’을 중시한 ‘열린 보수’인데 ‘닫힌 보수’를 고집했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를 배려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통합의 구현에 있다. 약자의 좌절과 분노를 헤아리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따듯한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나아가 수직적 당·정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당이 대통령의 시녀가 되면 민심과 유리된다. 물론 대통령이 당을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아야겠지만, 당도 ‘윤심’만 살피는 예스맨(yes man)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여당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대통령의 부당한 요구에는 분명히 ‘노(no)’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유능한 정당이다.이와 관련하여 국민의힘은 ‘영남당’과 ‘고령당’의 한계를 벗어나는 혁신이 시급하다. 반공과 산업화 신화에 안주해서 지지층이 노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4포당(40대를 포기한 정당)이 되었다. 영국 보수당은 디즈레일리(B. Disraeli)의 과감한 정당개혁, 처칠(W. Churchill)의 ‘젊은 보수’와 같은 혁신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보수가 더욱 젊어지고 영남을 벗어날 때 비로소 떠난 민심이 돌아올 수 있다.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고루한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는 실용성 있는 나침판이 되어야 한다. 권위는 없으면서 권위주의를 고집하는 ‘꼰대당’은 시대착오다. 보수의 생명력은 실용적 변화와 혁신에 있다. 암환자가 진통제 처방으로 회생될 수는 없다. 중병에 걸려 있는 보수가 살길은 오직 처절한 반성을 통한 과감한 혁신뿐이다.

2024-05-20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 민주주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제도’에도 있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에 갇힌 중환자들이 자신은 병이 없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분노와 적대가 만연해서 독선과 편견, 오만과 아집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규범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존중하고 자기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집행권을 가진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외관상 각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관용·타협이라는 절차규범을 어긴 것이다. 입법 권력과 집행 권력의 ‘힘의 대결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정치가 전쟁과 다른 점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있다.민주주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정치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부족적인가를 말해준다.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이익보다 당파이익을 중시한다. 철학의 빈곤과 이기심으로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의 선동과 매도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공정과 정의다. 롤즈(J. Rawls)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을 통한 ‘결과적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가 힘’이 되어야지 ‘힘이 정의’가 되는 정치로서는 정의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재명과 조국의 경우처럼 힘으로 공당을 사당화하거나 범죄혐의를 정치적으로 덮으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권력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기도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기능이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통제와 사정기관을 통한 공포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법을 적용하는 공권력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시민의 주권을, 그리고 ‘공화’는 공공선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공화정(共和政) 정신’에 달려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하려면 관용·대화·타협의 정신이 필수다. 우리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진정한 공화주의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회생될 수 있다.

202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