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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언니가 되고 싶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어머니 이제 다 고쳤습니다.” 컴퓨터를 고치러온 AS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들들은 엄마 혹은 어무이라 하고 며느리들은 어머님이라 부르니 나는 어머니라 불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꽤나 지긋해 보이는 생판 남이 나에게 어머니라니. 얼마전까지는 남자에겐 ‘사장님’, 여자에겐 무조건 ‘사모님’이던 고객응대 매뉴얼이 바뀌었나? 그조차도 거북했었는데 ‘어머니’는 정말 너무하다.우리나라에선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라는 통념이 있었다.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를 지어 호칭하고 지칭했다. 현대의 조직 내 호칭으로 성에 직함을 붙여 쓰는 것도 그 예이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엔 이성간의 호칭은 성과 이름을 함께 붙인 OOO씨였다. 누군가가 성을 떼고 OO씨라고 칭하면 그들 간의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고 짐작했고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어김없이 훗날 결혼하는 사이가 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후배대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들 간의 호칭의 변화상을 목격했다. 80년대엔 남녀 동기간에 서로 형이라고 부르는 걸 봤다. 당시 대학가에 번졌던 소위 페니미즘이 성별 구분없는 중성적 호칭을 선택한 거라 짐작했지만 마뜩찮아했던 기억이 있다.사회적 관계에서 친족 호칭을 대놓고 사용한 것은 아마도 9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대표적인 게 ‘오빠’다. 손아래 여동생이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이 아름다운 호칭이 어느 순간 남남인 남녀 간에 통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호칭이 되어버렸다. ‘오빠’라 부르던 남자와 결혼한 후에도 ‘오빠’라 칭하다 아이들이 생겨도 남편을 ‘오빠’라 부르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찌 되나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사회적 관계에 친족호칭을 쓰는 게 온당찮다며 신문 칼럼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적도 있었다. 아랑곳없이 ‘오빠’의 기세는 매우 강력하여 이젠 당당한 사회적 범칭이 되었다. 심지어 나이와 상관없는 ‘오빠부대’도 있잖은가. 어떤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이런 호칭법이 사회적 관계를 가족 관계로 치환하는 아름다운 관습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글쎄다.‘언니’는 ‘오빠’와는 좀 다르다. 같은 항렬의 손위 여형제는 물론, 남남끼리의 손위 여자를 이르는 정다운 말로 친족 호칭이자 사회적 호칭이기도 하다. 예전엔 남자형제들 간에도 형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난 오빠와 남동생만 있어 날 언니라 불러 줄 여형제가 없다. 물론 이종과 고종사촌이 있긴 하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질 못한다. 어쩌다 그들이 불러주는 ‘언니’는 언제나 정답다. 누가 날 ‘언니’라 더 자주 불러주면 얼마나 흐뭇하고 좋을까. 최근 내방가사 일로 자주 만나 친해진 세 여자가 있었다. 서로를 회장님, 연구원님, 교수님이라 깍듯하게 불렀다. 호칭만 달라지면 더욱 다정한 사이가 될 듯싶었다. 아니, 언니가 되고 싶었다. 언니라 불리고 싶었다. 내가 제일 연장자라며 호칭정리를 제안했다. 나를 언니라고 불러줘요. 다음 모임이 기대된다.“언니, 오랜만이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줄까?

2023-12-20

제자 찬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할매카페는 성업중이었다. 이화회, 매월 두 번째 화요일의 만남은 결성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맛있는 음식과 풍성한 공감의 대화로 화기애애했다. 한 달에 한번 그리운 이 만나 듯 기쁘게 만나지만 단 4시간 정도의 짧은 만남은 항상 아쉬웠다. 하루 말미를 얻어 가까운 경주로 가서 문화산책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시간을 늘인 만남과 대화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한 번 더 도발을 해봐요? 의기투합했다. 여전히 손주들을 돕는 임무가 끝나지 않은 상황인지라 이리저리 잴 것이 많았지만 도모하기로 했다. “이번엔 해외로 뛰죠.” 9월 모임에서 뜻을 모았다. 12월로 멀찌감치 날짜를 잡고 스케줄 조정을 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말을 끼워 날을 잡았다. 어디로 갈까? 너무 먼 곳은 시간이 허락잖고, 가까운 곳은 거의 다 경험한 터였다. 간 곳이라도 또 가면 돼죠. 어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랑이 중요하다잖아요? 모두들 동의하고 내가 제안했다. 베트남의 하롱베이 크루즈여행 어때요? “제자찬스를 써 볼까요?”응웬휴비엔은 내게 가장 의미있는 제자다. 재학 내내 센스있고 영특해서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었고 탁월한 성적으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어능력시험 6급도 독학으로 취득했다. 졸업 후 베트남에서 꽤나 탄탄한 중견기업의 영업부장직을 수행 중인, 성공한 제자다. 비엔은 내게 베트남 사랑을 가르쳐주기도 해서 난 한 예닐곱 번 베트남을 여행하거나 방문했다. 그럼 어떠랴? 이화회 멤버와의 여행은 또 특별할 것이었다. 바로 메시지를 넣었고 단번에 환영의 콜이 왔다. 그 자리에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필요경비를 모았다. 막힘없이 일사천리였다. 베트남의 일정은 바쁜 비엔에게 맡겼다. 옵션은 럭셔리하되 할머니들임을 감안해 너무 고단하지 않게, 센스만점 비엔은 야무진 일정표를 메시지로 보냈다. “사랑하는 이정옥 교수님 베트남 여행 일정”.제자 찬스는 성공적이었다.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특별대우는 여행 내내, 하노이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덕에 우린 정말 단 한 번도 경험 못한 호사를 누렸다. 최고의 레스토랑, 전망좋은 호텔, 하롱베이 크루즈의 반짝이는 야경, 섬에서 맡는 바람의 향기는 패키지 투어로는 절대 경험 못할 여행이었다. 비 오는 하노이의 격한 환영이라는 비엔의 센스있는 유머까지도 즐거웠다. 그저 우리는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 거둘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면 되었다. 여유로운 수다로 웃고 또 웃었다. 웃음소리는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다. 골치아픈 정치 얘기도 연예인의 선정적 가십도 우리의 대화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TV를 켠 적이 없었다.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우린 또 하나의 동질성을 발견했다. 그 흔한 면세점 쇼핑을 어느 누구도 않는 거였다. 손주들 줄 과자 몇 봉지 살 뿐임에도 더없이 풍성한 여행이었다. 이렇게 품격있는 우리의 여행은 모두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 덕분이었다. 비엔 정말 고마웠어.

2023-12-13

김장철이 되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맘때면 김장 담그기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집안 행사다. 11월의 주부들의 인사는 “김장은 했느냐”, “올해는 배추 몇 포기나 할 것이냐”이다. 나도 해마다 그런 인사를 받지만 대답은 한결같다. “전 김장하지 않아요.”결혼한 지 42년째다. 김장을 딱 두 번 했다. 아, 올케들이 와서 한 것까지 치면 세 번이다.젊었을 적, 한 5년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얹혀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시간강사로 학교에 다니면서 학위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어머님께서 전적으로 살림 맡아주시고, 아이들이 제법 클 때까지 돌봐주셨다. 큰살림을 척척하셨던 어머님이셨다. 친척 중에 잔치가 있으면 메밀묵을 쒀서, 혹은 유과를 만들어 보내시곤 하셨다. 김장철, 이른 아침에 눈 뜨면 배추 100포기가 마당 한켠 수돗가에 쌓여 있었다. 저녁에 거들어야지 생각하고 퇴근 후에 돌아오면 이미 버무려놓으셨다. 일손 빠르신 어머님 덕분에 나는 겨우내 김장독에서 물에 둥둥 뜬 김치를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그즈음 한해,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 그래도 명색이 며느리인 내가 김장을 해야지 싶었다. 한식요리책을 사서 김치 파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비늘김치, 호박김치, 개성보쌈김치 등 맛있고 특색있어 보이는 김치 몇 가지를 멋부리듯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 한 달쯤 후 어머님께선 늦은 김장을 다시 하셨다.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올 때였다. 김장하자던 남편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면 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바로 사들였다. 그 해 또 한 번의 김장을 한 게 내 인생 김장 역사의 전부다. 10년 전 이맘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를 모셨던 오빠는 청주에 살았다. 고향 가까운 대구에서 장례를 모시자며 형제간 합의했고 우리 집에서 모든 상을 치렀다. 장례 후 삼우재까지 지내려 삼남매와 올케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이참에 김장이나 하자며 큰 올케가 주도해서 집엔 갑자기 김장 풍경이 펼쳐졌다.내가 김장하지 않아도 우리 집엔 맛있는 김장김치가 해마다 넘쳐났다. 큰집과 작은집 형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담근 김치와 쨍한 맛의 동치미는 겨우내 식탁에 올라 우리 식구를 감동시켰다. 올케도 김장을 하면 해마다 보내주었다. 싱싱한 명태를 넣은 김치는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김장하는 날이면 김장체험하라며 부르곤 했다. 그리고는 한 통 가득 김장을 나눠주었다. 대학교 은사님의 사모님도 김장철이면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이 교수 올해도 김장 안했지. 그럴 줄 알고 좀 더 담았으니 가져가시게.” 이렇게 동서표, 올케표, 친구표에 사모님표까지 다양한 김치가 넘쳤다.최근에는 김장할 줄 모르는 내 처지를 아시는 청도의 어르신은 직접 아파트에 가져다 두시고 안동의 한 어르신은 택배로 보내주신다. 올해는 안사돈께서 귀하게 담근 배추김치에 고들빼기김치며 들깨김치까지 보내시니 황송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세상에 나같이 김치복, 아니 인복 많은 이는 다시 또 없을 거다.

2023-12-06

단풍 유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빼곡하다. 봄이면 거목에서 피는 벚꽃이며 목련꽃이 장관이다.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며 노랗게 치렁치렁 늘어져 담을 넘은 개나리도 눈길을 잡는다. 나는 이런 우리 아파트를 울긋불긋 꽃대궐이라 이름하고 꽃피는 봄을 만끽한다. 아파트 앞의 수성못 또한 벚꽃이 만개하면 꽃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꼬물거리며 싹 나고 불그스레 봉오리 맺는 것을 확인하곤 언제나 활짝 필까 맘졸이며 기다리는 일 또한 즐겁다. 팝콘 터지듯 한두 송이씩 피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눈 온 듯 옅은 분홍의 꽃이 구름같이 일렁이면 그 며칠이 환하다. 특히 밤의 벚꽃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희다 못해 눈부시고 향기까지 뿜어주니 게으른 발걸음이 이때만은 한 일주일 부지런해진다. 그러다 금세 하늘거리며 눈 내리듯 지는 꽃. 분홍 융단같은 꽃으로 내려앉은 봄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괘념하지 않는다. 여름내 짙푸른 녹음을 만끽하다 가을이 되면 봄꽃보다 더 붉은 단풍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 단풍은 유난히 고와 해마다 찍어 저장한 사진도 많다. 높다란 은행나무의 찬란한 노란 잎을 쳐다보다 냄새 고약한 열매를 밟기도 하지만 노란 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수성못의 벚꽃길 단풍은 온갖 축제에 모인 사람들과 어울려 더욱 붉어지곤 한다.그런데 웬일인가. 올해는 도무지 단풍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붉지 않고 푸르죽죽한 잎으로 말라 버린 채 낙엽 지고 있다. 은행잎은 이 추위에도 아직도 푸른 잎이 성성하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 낙엽이 아니다. 늦은 가을임에도 대체 단풍은 어딜 갔나 싶다. 멀리 산들도 여느 때와는 달리 울긋불긋 단풍옷이 아니라 누르거나 회색의 거무스레한 색이어서 영 볼썽이 아니다. 비가 와서일까, 가뭄이 들었나 걱정 아닌 걱정은 나 혼자만이 한 게 아니었던지 기사가 났다. 그제서야 이유를 알았다. 푸른 잎은 가을 되어 뚝 떨어지는 기온에 놀라 단풍이 들 것인데, 늦가을까지도 계속된 더위로 색을 바꿀 기회를 놓친 탓이란다. 결국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때문인 거였다. 그렇다면 내년도 또 후년도 쭈욱 고운 단풍 즐기기는 어려워진 걸까. 너무나 무서운 자연의 징벌이 어찌 단풍뿐이랴. 봄에는 산불로, 여름엔 태풍과 홍수와 산사태로 인간을 징치하는 자연이다. 두려워하고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그렇다면 난 무얼 해야 하나. 일회용품을 덜 써야 할까. 편한 물티슈 대신 걸레와 행주를 써야 하나. 가방에 손수건과 장바구니는 챙겨다니고 있다. 휴지 한 장, 비닐봉투 한 장이라도 덜 쓰고 싶어서다. 플라스틱컵이나 종이컵이라도 덜 쓰게 텀블러도 넣어다닐까 싶다. 두 식구인데도 어쩜 그렇게 쓰레기가 많은지 분리하다 보면 택배상자가 그 중 많다. 종이 상자 하나라도 줄이려면 홈쇼핑을 하지 말고 수고롭더라도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봐야 하나.단풍을 즐기지 못한 채 가을은 가고 겨울이 닥쳤다. 올겨울은 겨울다우려나 모르겠다.

2023-11-29

백일홍 가을걷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대단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가을걷이라 할 것은 없다. 풀이 자라도록 버려두기엔 넓은 터가 아까웠다. 온갖 풀들은 일주일만 눈길을 안 주면 기세등등 자란다. 풀을 이기기엔 꽃만 한 게 없다. 또 잘만 자라주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봄날 며칠을 고생하며 풀과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일홍꽃씨를 잔뜩 흩뿌렸었다. 6월 초부터 꽃 피우기 시작한 백일홍은 10월 말까지 일록달록 피어있었다. 100일 붉게 피는 꽃이라 백일홍일 텐데 거의 다섯 달을 핀 셈이다.백일홍 덕분에 지난 여름이 참 즐거웠다. 매주 바뀌는 꽃밭 풍경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퍼나르며 마구 자랑을 해댔다. 찍은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었다. 첫날 핀 한 송이 꽃, 일주일 지난 후 제법 어우러진 꽃밭, 동네 모든 나비가 우리집에 온 듯 나비에게 아낌없이 꿀물을 내어주는 꽃, 비오는 날 빗소리에 취해 흐드러진 꽃 등등의 사진을 본 친척과 지인들이 찬탄하며 답장을 주었다.‘꽃멍하러 오세요.’ 꽃밭으로의 초대 러시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손녀들이 왔다. 대구의 손주들과 합해, 꽃밭에서 나비를 좇으며 놀았다. 조용하던 육신사 골목이 청량한 애들 소리에 모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꽃이 좋다는 후배는 꽃멍만 했다. 한여름 태풍을 뚫고 오신 지인들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회포를 풀었다. 백일홍꽃밭을 배경으로 그네에 앉아 온갖 포즈의 사진을 따로 또 같이 찍었다. SNS의 프로필 사진을 바꾼 분도 있었다. 90이 넘으신 외삼촌 내외도 모처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백일홍 덕분이었다. 백일홍이 저렇게 흐드러진 것은 80평생 처음 본다며 감탄하시는 청도의 어르신을 모시고 왔으며 꽃구경하러 집에 들어오세요. 팻말도 붙여놓았다.지난 10월, 퇴직 후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학회에 모처럼 참가했다. 학회 후 간담회에서 이런저런 얘기 중에 하빈 묘골이 친정이라는 교수님이 말했다. “지난 여름 모처럼 친정엘 갔는데 꽃밭을 예쁘게 가꾼 집이 있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주인이 안 계시는 걸 알면서도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백일홍 구경을 실컷 했답니다.” 내가 주인장이며 내가 가꾼 꽃밭이라는 대답에 기이한 인연도 있다며 크게 웃은 일도 있었다.올해의 꽃은 단연 백일홍. 앞으론 이 꽃 저 꽃 고민 말자. 이제 우리 집을 백일홍 꽃집으로 하자. 남편과 합의했다. 그러려면 꽃씨를 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주말마다 꽃씨를 채취했다. 시들어 마른 꽃씨를 가위로 따 모았다. 그때까지도 색을 버리지 않은 꽃은 그대로 두었다. 갑자기 추위가 닥치자 조바심이 났다. 과연 꽃들은 다 졌고 누렇게 변해있었다. 남편은 대궁이를 뽑아 눕히고 난 쭈그리고 앉아 꽃씨를 땄다. 그렇게 하루종일 백일홍 가을걷이를 했다. 산처럼 쌓인 대궁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마당 한켠에 모아 발효액을 넣어 비닐을 덮어 둘 참이다. 내년에 퇴비로 쓸 수 있을까 해서다. 어쩌면 그 두엄더미에서도 백일홍이 피지 않을까 고운 상상을 해본다.

2023-11-22

엄마의 재봉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엄마는 예쁜 옷을 잘도 만드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무명천을 떠서 종이로 본을 만들어 소매 풍성한 원피스를 입혀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의 옷도 척척 만들어 입혔다. 마치 사립학교 교복을 닮은 흰색 깃을 단 그 옷을 단정히 입은 동생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엄마의 손재봉틀은 혼수로 장만해온 거라고 들었다. 방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천을 박음질하는 엄마의 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신기였다. 반짇고리에 있는 색색의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던 엄마의 바느질은 그저 우아한 취미였고, 우리들의 옷을 손수 지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때까지는….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엄마의 재봉틀은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웃 누군가의 옷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크고 멋진 기와집에서 옮긴 작은 방 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단 하루 치의 먹을 것이라도 나올 곳은 엄마의 재봉틀뿐이었다. 엄마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일감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밤샘일은 늘었다. 그래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삼 남매 학교 치레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마는 큰맘 먹고 손틀을 발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터를 방안에서 난전으로 바꿨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갔다.매서운 바닷바람, 거친 바닷사람, 그리고 따가운 햇빛에 훤히 노출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재봉틀 덕에 우리는 산골짜기 초가집에서 시내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학교와 좀더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삯바느질에서 옷 수선으로 바뀌어도 솜씨가 뛰어났던지 주변의 같은 업종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시샘과 부러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만큼 더욱 고달팠다. 밤이면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끙끙 앓았다.그때까지 거친 세파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두 분이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포기하셨던 듯 무력해지셨으나 엄마는 강하게 맞섰다. 부잣집 마님의 취미였던 솜씨좋은 바느질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엄마는 악착같고 독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뒤에서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좀 거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일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엄마의 일을 보조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의 일을 배워 엄마의 재봉틀 옆에 아버지의 재봉틀을 하나 더 두고 같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중학교부터 큰 도시로 유학할 수 있었다. 주말엔 셋이 번갈아 내려가 두 분의 일을 거들곤 했다.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두 분의 교육열에 보답하듯 우리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보답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교육열만큼이나 뜨겁게 일했던 엄마의 낡은 재봉틀은 오빠가 잘 간직하고 있다. 며칠 후 엄마의 기일에 가면 엄마 보듯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겠다.

2023-11-15

‘황순이 가사집’을 읽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여름 황순이 선생께서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다. 자작 가사집을 출간할 예정이라며 서평을 부탁했다. 오랜만의 소식도 반갑고 가사집을 낸다니 고마웠다. 예전 내방가사 공부할 때, 뚝딱 써낼 정도로 필력이 보통아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꾸준히 가사를 쓰셨구나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서평 쓸 위인은 못된다며 사양하며 짧은 발문을 써드렸다. 간단한 내방가사 소개의 글도 부탁하시길래 보내드렸다. 그 후 책 발간을 위해 꼼꼼하게 점검하는지 전화도 주셨고 출판기념회에 초청하셨다. 그리고 모바일 초청장이 왔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칠순기념을 위한 가사집 발간이라니. 20년 가까이 이런저런 일로 자주 만났다. 난 왜 내가 당연히 연장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황 선생께서 적어도 나보다 10년 정도는 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3살이나 더 나이가 많음을 알게 된 순간 황 선생과의 만남, 식사, 대화나 통화의 내용들을 기억에서 떠올리려 애썼다. 찻자리 부탁도 꽤 했었는데, 혹여라도 실수한 건 없으려나, 무례했던 적은 없었나. 당혹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러나 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내가 그런 착각을 한 건 무리가 아니며 내 탓이 아니다. 황 선생은 일단 나이들어 보이지 않았다. 워낙 예의바르고 항상 공손했으며, 말투도 극존칭을 주로 쓰셨다. 이 모든 것 때문이다. 나보단 나이가 훨씬 어리겠지 착각을 할 만한 빌미를 내게 주셨다. 결례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용서를….황 선생의 귀한 칠순잔치에 초대받아 황송한 스승 대접에 몸둘 바를 못 챙길 정도였다.나의 최선은 가사집을 꼼꼼히 읽는 거였다. 내방가사 9편을 엮은 자그마한 책, ‘백선에 꽃잎 날리며’는 ‘칠순이 된 순이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당신이 쓴 자기서사이자 생애사다. 프롤로그에서 ‘젊었을 때 부지런히 썼던 편지나 일기 쓰기가 나이 들어 책 쓸 만큼의 저력이 되지 못했’다고 겸양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4.4조의 음수율과 4음보의 음보율을 맞춰야 하는 가사는 수필보다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숙제를 다하신 셈이다. 내방가사는 조선 여성들이 일상 속의 특별함을 기록한 문학이다. 화전가, 유람가, 경축가, 탄식류의 가사가 그렇다. 대소가 여성들이 돌려 읽으며 소통하고 연대했던 공동체의 향유문화다. 황 선생의 가사들은 전통의 가사 유형에 딱 맞춘 수준이었다. 황 선생은 내방가사를 내면화하고 있었던 거였다.작품들은 따뜻하고 애틋하고 향기로웠으며 긍지에 가득찼다. 황 선생의 그런 생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한국의 전통다도를 학문으로 익혀 배운 차인이기에 차 관련한 기행가가 있고, 차인에 대한 추모가도 있다. 친구들과의 여행도 예사롭지 않아 역사와 문학을 테마로 한 기행가가 창작되었다. 유쾌한 친구들과의 소풍은 신명나는 화전가를, 어릴 적 친구를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쓴 가사의 애통함은 탄식가를 닮았다. 우리 옛 여성의 신명과 탄식과 자긍이, 그리고 전통과 역사에 대한 애정과 진지함이 가사에 그대로 투영됨을 읽었다.

2023-11-08

아키는 여전히 슬프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베리의 마지막 날. 병원 예약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삐 준비했다. 이동용 켄넬을 깨끗이 씻어 희고 폭신한 새 수건을 깔았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베리의 몸을 정갈하게 닦았다, 연노랑의 옷을 입혔다. 한손으로도 가뿐히 들 만큼 가벼운 베리. 평소 좋아하던 장난감과 함께 켄넬에 들였다. 아키를 베리 앞에 데려가 마지막 인사를 하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켄넬을 들고 내려갔다.남편을 기다리며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괴로움의 숨소리만 가쁘게 들릴 뿐 베리는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웬 늑대울음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얼른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을 여니 세상에나…. 아키는 아까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하울링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꼼짝않은 채, 얼마전까지 베리가 있었던 안방을 향해 고개를 돌려 더욱더 크게 늑대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도 울음이 왈칵 터졌다. 아키를 껴안았다. 너도 베리와의 이별이 슬프구나. 아키의 목줄을 찾아 일단 데리고 내려갔다.베리의 켄넬 옆에 두자 울음을 그쳤다. 작년 4월, 베리가 입원했을 때 식음을 전폐한 아키의 증상을 얘기했더니 문병을 허용해 준 수의사에게 전화했다. 이번에도 아키의 동행을 허락받았다.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놀라고 애달파했다. 아키는 남편에게 안겨서, 내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베리를 다 지켜보았다. 아키는 베리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다.빗속을 뚫고 도착한 장례식장에는 베리의 빈소가 마련돼 있었다. 미리 보낸 베리의 사진이 TV모니터로 보였다. 강아지 간식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제기, 그리고 조화이긴 하지만 예쁜 꽃들도 장식되어 있었다. 또 한 켠 벽엔 베리의 사진으로 만든 가랜드도 걸려 있었다.화장이 진행되는 두세 시간을 우리 부부는 베리의 사진이 반복적으로 바뀌는 TV모니터만 지켜보며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키는 달랐다. 우리 둘 사이에 앉아있다가 사람 기척이 나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아키를 본 사람들이 몇 마디 말을 걸고 애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다시 조문실로 들어와 우리 곁에 앉는다. 그러다 문소리가 들리면 또 튀어나갔다가 그들과 잠시 지내고 들어오곤 했다. 넋을 잃고 앉아있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키의 행동이 마치 조문객을 맞는 상주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말없는 남편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더니 남편도 슬쩍 웃음을 보였다.작은 보자기에 싸인 베리의 한 줌 뼈를 들고 집으로 온 그날 이후, 이웃 분이 날 붙들고 긴한 얘기를 하겠단다. 여태껏 강아지가 둘이나 있어도 우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요즘은 매일 하울링 소리가 들려 이상하네요. 베리의 마지막 날, 목청 높여 하울링하던 아키였다. 내가 집 비운 사이 슬픔을 못견디어 울었나 보았다. 베리와의 슬픈 이별, 그로 인한 분리불안증 때문일까. 평소 베리와 아키는 깊이 의지하던 사이였고, 어쩌면 우리들보다 훨씬 더 애착관계였을 터. 아직도 슬픔을 삭이지 못한 아키를 혼자 두어선 안되겠다 싶어 웬만하면 어디든 데리고 다닌다.

2023-11-01

베리를 묻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11년을 넘게 같이 살았던 강아지 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49일 되는 날, 묻었다. 모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고 웅장한 소나무 아래에 묻었다. 원래 남편은 베리 나무라며 울릉도에서 사 온 마가목 아래에 묻으려 했다. 정작 베리를 묻으려 보니 묘목같이 어린 마가목은 작아 볼품이 없어 보였다. 난 보리수 아래 볕 드는 곳을 골랐다. 남편의 선택은 소나무였다. 6그루 소나무 중에 가장 보기 좋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남들도 보면 경탄해하는 수형 멋진 나무였다. 나도 마음에 들었다. 소나무 남쪽 아래 깊이 땅을 파고 조그만 오동나무관을 넣고 흙을 덮고 묘비명을 써서 꽂았다. “사랑하는 베리 영원한 세상에 잠든 곳.”잦은 병치레로 입원과 수술을 여러 번 경험한 베리였다. 작년 초겨울 암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이가 많아 수술은 힘들었다. 괴롭고 힘든 항암 치료는 견딜지 의문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명을 다할 때까지 잘 먹이며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14살이면 사람 나이로 90 노인. 노인 모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했다. 겨울을 못 넘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쇠약해지긴 했으나 원체 좋은 식성의 베리는 잘 먹어선지 호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여름 들어 급격히 기운이 떨어지더니 움직임은 굼뜨고 깔끔하던 배변습관도 망가졌다. 살은 빠져 앙상해졌고 처연한 눈망울만 커졌다. 윤기나던 새까만 털도 푸석해지고, 뒷덜미엔 흰 털이 수북히 자랐다. 입가의 수염도 하얘졌다.8월 중순 출장으로 부득이 이틀을 비울 일이 생겼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남편이 전적으로 돌보기엔 무리라 이만저만 걱정도 함께 안고 갔다. 남편은 수시로 사진을 찍어 베리의 동태를 알려주며 날 안심시켰다. 용케도 베리는 견뎌주었다. 돌아온 후엔 안방에서 같이 지내며 며칠 밤을 새웠다. 보통 괴로워하는 게 아니었다. 고통을 견디는 게 힘들어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이리저리 바꿔줄 뿐, 고통까지 나눌 순 없어 안타까웠다. 물기 가득한 큰 눈을 보면 눈물만 났다. 물도 혼자 먹지 못하자, 손주 약 먹이는 약통에 물을 넣어 입가에 흘려주면 겨우 삼켰다. 괴로움의 신음을 며칠 들으니 산 자의 고통이 차라리 죽음만 못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새벽 3시. 베리 돌보느라 서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가며 쪽잠을 청해 기진맥진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웠다. 병원에 연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는 수의사 교수에게 문자를 넣어 베리의 상태를 알렸다. 다음날 오전에 진료 준비할테니 데리고 오라는 문자를 바로 받았다.일 있던 남편은 내게 베리를 맡겼다. 정작 시간이 되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주차장에 주저앉아 남편을 급히 호출했다. 함께 병원에 갔고, 그리고 베리는 내 품에 안겨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병원에서 소개한 장례식장에서 베리는 한 줌 재로 내게로 와서 집에서 49일을 함께했다. 손주들이 와서 꽃을 놓고 베리 사진을 보며 울먹였다. 손녀는 아직도 가끔 하늘을 보며 베리야 잘있어? 묻는데, 모두의 집에 묻힌 베리의 묘를 보며 뭐라고 할까?

2023-10-25

선덕여왕릉제의례를 아시나요?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경주에 낭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삼국사기에 413년 실성이사금 13년에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나 멀리서 보면 누각과 같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다. 신라인들은 이 산을 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며 신유림(神遊林)이라고 부르고 복된 땅의 신성숲으로 숭배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생전에 “내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시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도리천은 불교의 이상세계로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했는데, 여왕 사후 32년 후에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으니 여왕의 예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현재 선덕여왕릉은 당신이 점지하신 바로 그곳, 낭산 남쪽 중턱의 신성한 숲속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신라에 세 분의 여왕이 있을 뿐, 고려는 물론 조선에서도 여왕은 없으니 역사적으로 매우 귀하신 분이다. 재위 16년 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지혜로 국난을 극복하고, 선정을 펼쳤다. 항상 백성 가까이 다가가 민생을 살피고 복지에 힘썼다. 고려 수이전에 심화요탑(心火遶塔)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덕여왕을 사모해 마지않은 미천한 백성 지귀가 아름다운 여왕을 가까이서 보려는 소원을 품다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여운 그의 소원을 들어주려, 한 병사가 왕의 행차 정보를 주었다. 여왕의 행차를 기다리다 보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지귀의 사연을 듣고는, 잠든 그를 깨우지 말라며 당신의 팔찌를 풀어 지귀의 가슴에 살포시 얹어 주는 따스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자기의 어리석음에 한을 품어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서라벌 곳곳에 불을 지르자 시를 지어 엄하게 꾸짖어 징죄하는 강단있는 여왕이었다.고구려와 백제로부터의 끊임없는 침입에도 여성인 탓에 직접 전장을 누빌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전장에서 희생된 자식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전쟁영웅을 귀하게 모시고 기리는 절, 영묘사를 지었다. 수시로 참배하며 자식 잃은 어미 된 마음과 영령을 위무했다. 앞의 지귀는 그곳에서 만난 백성이었다. 아름다운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했다. 하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첨성대도 지었다.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살리고자 하는 염원뿐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걸출한 인재를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학자들은 이러한 선덕여왕을 ‘인재등용의 리더십’의 왕이라고 평가한다.선덕여왕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경주의 여성들이 여왕의 리더십을 배우고 따르자며 모였다. 2008년부터 경북방송 대표였던 황명강 현 경북도의원의 발의로 선덕여왕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했다. 선덕여왕릉제의례 또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3년 뒤, 2011년 경주와 인근 도시의 여성리더들이 모여 여성단체 선덕여왕경모회를 창립하였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치러진 지 올해로 16회째를 맞는다. 신라의 복장을 갖춘 여성제관들이 전통의 방식으로 행사하는 제의례는 이색적이고 장관이다. 제법 알려져 해마다 참례자들도 늘어난다. 2023년 선덕여왕제의례는 오는 10월 21일 엄숙히 거행된다.

2023-10-18

소설 ‘달꽃’과 ‘덴동어미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사이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250쪽 내외 분량의 짧은 소설이라 단숨에 읽을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둘 다 여성 소설가의 작품에 여성이 주인공인데다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달꽃’은 지난 8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작가 이화리는 경주에서 나고 자라 경주를 문학의 뿌리로 삼은 작가다. 20년 전 잠깐의 인연이 있어 아주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다.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진 않지만 글이 야물고 내공이 깊다. 신간이 반가웠다. ‘촌년’ 작가라고 밝힌 그녀는 ‘촌이야기’를 ‘촌말’로 쓰겠다고 작가의 말을 대신했다. 작심하고 경주를 배경으로 경주 사투리를 사용하겠다는 거다. 130년 전쯤 전 경주 안강, 현곡 등을 배경으로 경주의 이야기를 경주의 말로 쓴 ‘달꽃’은 여성만의 신체적 생리적 능력을 이야기한다. 터부시되어온 여성의 달거리를 인간의 존엄과 우주적 신성으로 드러냈다. 또한 여성에게만 강요했던 순결 이데올로기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꾸짖고 달래고 어루만진다. 방언학자 이상규는 발문에서 “통상 터부시되어온 달거리와 경상도 방언의 고유성을 오묘하게 복원시킨 소설”이라며 여성들에겐 위안과 감사를 경주인들에겐 토착적 언어의 선물이 될 것이라며 치하했다.일부러 찾아 읽은 ‘덴동어미전’은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된 ‘소백산대관록’이라는 필사본 속에 있는 내방가사 ‘화전가’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화전가는 경북의 여성들이 짓고, 필사하고 낭송하는 문학인 내방가사 중 흔한 유형의 가사다. 그 중 ‘경북대본 화전가’는 구성이 독특하고 내용과 묘사가 특히 뛰어나서 문단에서 크게 평가하는 작품이다. ‘소백산대관록’이 1938년 필사되었는데, 작중 1886년(고종 23년) 괴질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도 130여 년전쯤으로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영주 순흥을 배경으로 ‘덴동어미’라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담의 장편가사이다. 이방집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가 네 번의 결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살아온 굴곡진 이야기를 화전놀이라는 여성들만의 유희 장소에서 수다로 풀어낸 대서사시이다. 이 가사의 배경이 영주 순흥이고 덴동어미가 이곳 출신인데다 화전놀이에 참여한 여성들이 영주 인근에서 결혼하여 온 여성들이라 이 지역의 사투리가 주로 쓰였다. 덴동어미가 30여 년을 예천, 상주, 경주, 울산, 영해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 지역의 방언들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주로 경북 북부지역의 사투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 구사가 예사롭지 않은 박정애 작가 역시 경북 청도 출신이었다.경북 출신의 여성 소설가가 경북의 사투리로 쓴 130여 년 전의 여성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많이 닮았다. 주인공 여성들의 인생유전이 남달랐음에도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스스로 당당하고 서로 격려하는 장면 또한 닮은꼴이다. 사투리는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맛이 사는 글말이다. 나직히 소리내어 읽으니 나는 아예 소설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곳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2023-10-11

병원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딱히 심각하게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프진 않다고 할 수도 없다. 큰 병을 진단 받은 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복용해야 할 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웠다 일어나면서 아이고 소리를 낸다든지, 허리 다리 머리, 릿자로 끝나는 몸 어딘가는 다 조금씩 성치 않다. 날씨로 치자면 쾌청하지 않은 구름 좀 낀 흐림. 가장 좋은 처방은 열심히 운동하는 거라는데, 그게 잘 안된다. 집 가까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다. 아파트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책로가 잘 닦여있다고 하는데, 글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편이 운동하라고 사준 자전거며 운동기구도 3일 만에 구석자리 차지다. 그러니 그저 아프면 병원엘 간다. 게으름을 탓해야 하겠지만 아직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아서인가. 어쨌든 늙었으니 성치 않은 구석이 하나둘씩 생기긴 한다.얼마 전 어지러움증이 있어서 병원엘 갔더니 이석증이란다. 아침 6시 30쯤 갔더니 예약 마감. 다음 날 아침 5시에 가서야 겨우 접수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소문난 병원이라선지 매주 정기진료시간을 예약해도 보통 2시간은 기다려야 진료를 본다. 심하진 않지만 장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매주 가고 있다. 스무 개도 넘는 치료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부산, 김천, 봉화에서 전날 밤에 와 대기실에서 쪼그려 밤새워 기다린 분도 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대구 아들딸네 집에 묵고 왔다는 노인들이 허다하니 운전해서 10여 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나는 명함도 못 내민다. 집 가까이 믿을 만한 병원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2년마다 하는 정기검진이 나이가 들면서 항목이 더 추가된다. 골밀도 검사를 하니 뼈 나이가 실제 나이보단 젊지만 예방 차원에서 열심히 운동하라는 처방이 내린다. 열심히 햇볕 쬐며 운동하면 될 터이다. 게을러터진 나는 운동 대신 비타민D 주사를 3개월마다 맞으러 병원엘 간다. 치과 진료도 일 년에 두 번, 나의 달력엔 이렇게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아야 할 병명과 예방주사 주기가 눈에 띈다. 다음 달엔 고령자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보다.생로병사. 인간이라면 반드시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인생사고(人生四苦). 나서 세월과 함께 늙음은 자연스럽다. 그저 추하지않게 늙으려 노력할 따름이다. 죽음 또한 거스를 방법이 없다. 네 가지 고통 중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70 가까운 나이 되어 병원 순례를 하게 되니 제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병고(病苦)가 아닌가 싶다. 병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면 무병장수할까마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병원 가는 일이다. 의술 좋아졌겠다 병들면 고치면 되고, 보험 들어있으니 돈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은 유병장수시대라고들 한다. 병 있어도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인데 난 싫다.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무병하다면 차라리 단명하고 싶다. 병치레는 싫다. 그럼 무조건 걸으며 운동해야 할 텐데 어쩔래? 자문한다.

2023-10-04

손녀가 가르쳐준 취미생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서울의 큰손녀는 대구할매 집에 와 며칠씩 지내길 즐긴다. 휴가 때 온가족이 내려왔다가도 엄마 아빠를 졸라 굳이 혼자 남아 며칠을 더 묵는다. 이런 손녀가 기껍고 기특한 할배 할매는 단 며칠이라도 알차고 보람차게 보내도록 갖은 프로그램 궁리를 하며 계획을 짜느라 법석을 떤다. 경주 가서 문화재순례 스탬프를 찍자. 미술관과 박물관 체험프로그램도 신청하자. 제 생일을 미리 당겨 사촌동생들과 생일파티도 열어줘야겠다.그러나 정작 손녀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소위 집순이라며 제 엄마가 귀띔한다. 그렇다면 문방사우를 꺼내 한자로 이름쓰기를 가르쳐 볼까? 같이 놀 장난감 빨대블럭과 젠가도 사 두었다. 그런데 손녀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 제 놀이감을 챙겨가지고 오는 야무지고 빈틈없는 아이.2년 전 여름방학 때였다. 500 피스 퍼즐상자를 가방에서 꺼냈다. 아빠 어렸을 때 할머니랑 퍼즐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저랑 같이해요. 혼자 해보니 맞추기가 꽤 어려워요. 좋지 좋아 같이하자 나 이런 거 무지 좋아해. 조손이 엎드려 퍼즐 조각을 맞춘다. 실로 제 아빠 어렸을 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놀았다. 유달리 게임에 진심인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때를 떠올리며 손녀와 같이 퍼즐 조각을 맞춘다. 비교적 쉬운 조각은 손녀에게 넌지시 던져준다. 맞추며 기뻐하며 손뼉치는 손녀가 흐뭇하다. 함께 끼워맞추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마지막 퍼즐 조각은 손녀가 맞춰 끼워 완성하게 했다. 뿌듯해하며 사진 찍어 제 엄마와 아빠에게 보낸다. 어렵게 맞추었으니 액자에 넣어줄까 했더니 쿨하게 부순다. 서울 가져가서 다시 또 맞출 거라며 가방에 넣는다. 맞춘 후 며칠을 전시해두고 보는 나와는 다른 성격에 속으로만 놀란다. 손녀 떠난 후 나는 서점에 가는 남편에게 1천 피스 퍼즐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사고 맞추고를 반복하며 한동안 퍼즐에 푹 빠졌다. 퍼즐 상자를 세어보니 20개도 넘는다. 직소퍼즐로는 고흐의 명작시리즈도 많으나 제일 예쁘기는 미국의 유명한 달력작가 제인 우스터 스콧의 퍼즐이다.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그녀의 모든 퍼즐을 사모았다. 초등학교 친구들에게도 사보냈다. 허리 아파하는 나를 남편이 책망하자 마침표를 찍었다.올여름 방학에는 또 다른 취미거리를 가져왔다. 이름도 생소한 양모니들펠트. 할머니랑 같이 할 거라며 여러 개를 샀단다. 처음 보는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설명해 준다. 실뭉치를 돌돌 말아 바늘로 콕콕 찌르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요. 주로 강아지나 곰인형 같은 거 만들 수 있어요. 그림설명서가 있어도 실습으로 보여주며 꼼꼼히도 설명한다. 따라하다가 바늘에 찔려 피도 봤다. 작품(?) 얘기를 조곤조곤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집에 있는 두 마리 강아지, 베리와 아키를 모델로 만들자며 사진 찍어 비슷하게 만들었더니 할머니 솜씨가 좋네요하며 칭찬도 아끼지 않는 속깊은 손녀 덕에 취미가 또 하나 늘었다. 같이 양모펠트공방을 찾아 구경하며 수강신청을 고민해봤다. 이번 추석에 손녀는 어떤 새로운 취미거리를 가져올까. 몹시 기다려진다.

2023-09-20

기념식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풀과 꽃과 텃밭의 채소만 있는 건 아니다. 나무가 더 많다. 아니 더 많이 심었다.원래 제법 큰 대추나무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감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사철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집과 터의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휑뎅그렁했다. 고택엔 역시 소나무라며 남편이 제일 먼저 사다 심은 여섯 그루의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고,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들도 몇 그루 있어 볼 때마다 기껍다.남편이 손주와 함께 석류나무를 사왔다. 그리고는 손자에게 이 나무는 건이 나무야. 그러니까 물도 주고 잘 키워. 나무팻말에 제 이름을 쓰게 했다. “석류나무, 이 건, 2022년 6월 10일” 기념식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작년 여름 사흘을 묵고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기념식수를 제안했다. 신박한 제안에 무조건 콜! 조경회사에 전화해서 여름에 심어도 잘 자랄 나무로 추천한 보리수를 심었다. 꽃삽 들고 사진도 찍고 팻말도 써서 박았다. “초등학교 친구들, 김정숙, 김현숙, 박창희, 최금순, 이정옥, 2022년 8월 10일” 한 친구는 저 닮은 홍매화 한 그루 더 심겠다며 우겨 우물가에 심었고, 거기에도 나무팻말을 박았다. 올봄 가장 이르게 붉은 매화를 피웠길래 사진으로 꽃소식을 전했다.위덕대 자율전공학부 24학번 성인학습자들의 모임이 있다. 매년 스승의 날에 나이가 더 어린 나를 스승이랍시고 꼭 청해서 식사를 함께하고 선물도 주신다. 작년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인사 삼아 모두의 집에 초대했다. 용인, 청도, 대구에서 각기 바삐 사시는 분들임에도 귀한 걸음을 주셨다. 집들이선물을 걱정하시길래 기념식수 얘기를 했다. 좋은 방법이라며 배롱나무를 꼭 사 심어 달라시며 나무 팻말을 미리 써 두셨다. “아름다운 동행, 유복혜, 박영희, 오순옥, 2022년 8월 23일” 가을에 배롱나무를 사 심고 팻말을 박았다. 올여름 분홍색 꽃을 피웠길래 사진을 올려드리며 감사함을 전했다.5월엔 선덕여왕경모회원 14명이 1박2일의 워크숍을 했다. 뜻있고 값진 나무로 기념식수를 해야 한다기에 단아하되 멋스러운 수형의 향나무를 사서 미리 심어두었다. 다같이 기념식도 하고 팻말을 망치로 박는 퍼포먼스도 했다. “선덕여왕경모회 방문 기념. 2023년 5월 22일”44년 전 딱 한 해, 소선여중 교사로 만난 인연으로 아직도 연락을 이어 온 선생님들 모임이 있다. 만발한 백일홍꽃을 단톡방에 올려 꽃구경 오시라고 초대했다. 7월 어느 날, 서울, 부산, 함양, 대구에서 5분이 태풍을 뚫고 오셨다. 흰 꽃이 탐스러운 목수국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소선회 방문 기념, 박종선, 송경숙, 유진숙, 이숙화, 임신영, 2023년 7월 15일”지난주 울릉도에 일이 있어 갔다. 베리의 죽음 후 울적함을 달랠 겸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이 울릉도의 주황색 열매가 예쁜 마가목숲을 보고 난 후 그 나무에 꽂힌 듯했다. 기어이 세 포기 사서 배에 싣고 왔다. 오늘 마가목을 심었다. 셋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정성스레 심더니 한마디 했다. “이 나무는 베리 나무야.” 남편은 베리를 위한 기념식수를 한 거였다.

2023-09-13

한글서예로 꽃핀 내방가사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제14회 대구한글서예대축제 초대장과 도록을 받았다. ‘내방가사-한글서예로 담다’를 주제로 한 서예전이었다. 내방가사가 이렇게 꽃필 수도 있구나 싶은 반가움과 고마움에 내방가사의 역사를 짚어보고 싶었다. 마침, 짧은 인사말을 부탁받았기 때문에라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내방가사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문학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세종대왕 창제의 한글 덕분이다. 1443년에 창제 1446년에 반포된 한글,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였다. 그러나 조선의 공식문자는 한자였다. 대부분의 남성 양반에 의한 지배문학 역시 한자였다. 그런 면에서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한 백성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30여년 뒤, 1580년대 난설헌 허초희라는 천재시인이 ‘규원가’라는 가사를 지었으나 문학에 관한 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200여 년 후, 1794년 경북 안동 하회에서 연안 이씨가 집안의 겹경사를 송축하는 가사 ‘쌍벽가’를, 연이어 1810년경 기행가사 ‘부여노정기’를 창작하면서 드디어 내방가사가 한국문학사에 점을 찍기 시작하였다.이후 경상도의 여성들은 내방가사를 창작하고, 필사하고, 혼자 읽고, 돌려 읽고, 혼자 외고, 둘러앉아 낭송하는 향유의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적으로는 친척 내에서, 더 넓게는 혼인관계를 통해 전파와 전승의 향유를 지속하였다.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작품 수가 6천여 편이 넘을 정도로 경북 여성들만의 특별한 문학이자 문화가 되었다. 창작과 낭송의 전통이 안채의 담장을 넘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180여년 후인 1997년, 이선자 회장이 창립한 안동내방가사전승보존회 덕분이었다. 특히 총 24회나 개최된 전국내방가사경창대회를 통해 내방가사의 아름답고 기품있는 낭송 소리는 경북을 넘어 전국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고전문학인 내방가사가 현재도 향유되고 있는 현재성의 문학임을 증명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2022년 11월 16일, 내방가사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었다.“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보존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고, 기록유산에 담긴 문화적 관습과 실용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목적에 부합되면서 여성공동체의 집단문학적 가치를 인증받은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내방가사를 잘 지켜온 대구경북 여성들 덕분이다. 허난설헌으로 기산하면 443년, 연안이씨로부터는 229년의 내방가사의 역사에 이름없는 수많은 여성 작가들을 보태어야 한다. 내방가사전승보존회 이선자 회장의 노고와 대구한글서예협회 최민경 회장의 역량에 기대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인류사에서 기록물 등 수많은 무형유산들이 전쟁, 사회적 변동, 약탈 등에 의해 영원히 사라졌거나 멸종위기에 처해 있음에 비춰볼 때, 내방가사를 소중히 지켜온 대구경북 여성들에게 우리 문학, 문화, 역사가 크게 빚지고 있다. 2023년 8월, 대구한글서예대축제에서 만난 서예작품들은 문학이 서예로 비상하는 내방가사의 새로운 역사의 장이었다.

2023-09-06

녹슨 가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나이가 드니까 뭐든 편한 게 좋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까탈스러운 것이 없어지고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생각하면 매사 좀 귀찮아졌을 수도 있겠다. 사람과의 사이도 그렇다. 무던해졌다. 한창 혈기왕성할 땐 규칙어기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내 기준의 상식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린다 싶으면 가차없이 따지던 성깔도 엔간했다. 그 때문에 바른 말이랍시고 해서 고초를 겪은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이젠 느긋해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만다. 어머 내가 웬일이지? 스스로 느끼며 놀라기도 한다. 물론 절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 지금도 있어 괴로울 때도 있지만 어쩌랴 싶어할 뿐이다.옷입음새도 그렇다. 키도 작고 균형 없는 몸매에 어울리는 옷이 있으랴만 편한 옷을 좋아하는 내 취향까지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한 TPO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름 노력해왔다. 목적에 맞게 색상과 모양까지 신경써 입었다. 애쓰고 돈도 들였다.그러나 이젠 더 이상 옷에 대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신세가 되자 내 취향껏 편안함을 추구하고 즐긴다. 집에서는 더하다. 언젠가부터 목덜미에 뭔가 거치적거리는 옷이 불편했다. 되도록 목 주위가 휑하니 드러나는 옷만 찾았다. 꺼내입는 옷들이 맨날 그 옷이 그 옷이다. 티셔츠들이 많아 아무거나 꺼내 입다가도 목이 좀 죈다 싶으면 곧장 다시 벗게 된다. 이 많은 티셔츠를 입지도 않고 버려야 하나. 새로 사지 않아도 입을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궁리했다. 목덜미 부분을 가위로 오려내어 넓힐까. 박음질하지 않은 것을 멋으로 만든 옷도 있지 않은가. 정 안되면 감침질을 해서라도 입을 수 없을까 생각했다. 하고많은 시간도 있겠다. 한 번 시도해보자. 즐겨입었던 면티셔츠를 몇 개 꺼냈다. 둥근 목테두리를 전부 오려내어서 손바느질로 감치기엔 좀 힘들려나 싶었다. 만지작거린 끝에 앞섶 부분을 세모 모양으로 깊게 오려내고 그 부분만 감침질하면 수월하겠다는 궁리가 섰다.까짓 하다가 안되면 말 일. 뭐 시도해보자 싶어 반짇고리를 찾았다. 예전에 애들이 어릴 땐 늘 썼고, 또 남편의 흰 셔츠 단추를 달거나 바짓단을 공그르기하면서 자주 사용하던 반짇고리였다. 그러나 최근엔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열어보니 색색가지 실, 아이들 돌이며 백일날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흰 실꾸리 두 개, 올망졸망 여러 가지 단추통도 뚜껑이 열린 채로 있었다.크고작은 바늘이 꽂힌 동그란 바늘꽂이. 그 가운데 유난히 커다랗고 녹슨 가위가 자리잡고 있다. 여러 자질구레한 바느질공구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큰 무쇠가위는 엄마, 돌아가신 엄마의 가위였다. 요즘엔 스테인리스 가위에 손잡이 부분도 플라스틱으로 예쁘고도 사용하기 편한 가위들이 얼마나 흔한가. 그와는 달리 무겁고 불그스레 녹까지 슬어 볼품없는 엄마의 가위. 언제부터 나의 반짇고리에 들어있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엄마의 가위. 내 열 살 무렵부터 기울어진 가세 탓에 삯바느질로 가정을 지탱했던 엄마가 무겁게 무겁게 썼을 가위였다. 엄마의 온기가 밴 가위는 녹슬어도 썩 잘 들었다. 나는 이 가위만큼이라도 엄마의 말을 잘 듣는 딸이었을까.

2023-08-30

효전(孝電)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으면 그냥요~라고 말한다. 나는 아 오늘이 금요일이네 인사를 대신하며 대화를 잇는다. 화젯거리가 있으면 길게 수다를 떨 때도 있지만 딱히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서로 지극히 일상적 안부를 묻고 대답하면서 짧은 통화를 끝낸다. 오히려 말할 거리가 없어 어색할 때도 많은 이런 전화, 꽤나 오래된 루틴이다.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갈 때쯤 해준 이야기다. 효문(孝蚊)이라는 말이 있단다. 조문효도(蚤蚊孝道)를 줄여서 하는 말이란다. 예전 어떤 사람이 효도하는 방법에서 나온 얘기였던 것 같다. 그는 여름밤 잠잘 때 파리와 모기를 쫓지 않았단다. 자기가 쫓은 모기가 부모를 물까 걱정해서 그랬단다. 또 어떤 이는 여름에 부모의 곁에서 굳이 윗옷을 벗고 잤단다. 그러면 모기가 젊은 자기의 피를 빠는 대신 부모를 물지 않을 것이라 부모가 더 편히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단다. 진실 여부를 떠나 우스갯소리 같긴 하지만 이 예화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효전(孝電), 효도전화다.이제 넌 집을 떠나 우린 자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난 매우 자주 널 걱정할 것이다. 그러니 안부는 주기적으로 하자. 네가 공부하거나 친구랑 있거나 어쨌든 뭔가를 하고 있을 거라면 내가 하는 전화를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네가 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니 전화는 네가 하는 걸로 정하자. 난 너보다는 자유로우니 받는 게 더 쉽겠지. 그 전화를 나는 효전(孝電)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아주 짧은 안부 인사라도 좋다. 그렇게 시작된 아들의 안부 전화가 햇수로 벌써 23년이 되었다. 대부분의 전화는 금요일 저녁참에 왔고, 아들임을 확인하면 아 오늘이 금요일이네라고 말하면서 받았다. 군생활을 하는 2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끊임없었던 일상이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후, 결혼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효전은 계속되었다. 결혼 이후엔 이만 끊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아니어도 가족들의 SNS로 아들의 무사한 일상을 접할 다양한 방법이 많아졌기도 하다. 더 바빠진 일상 탓에 부담이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말 그대로 그냥 하는 전화일 뿐이라고 생각해선지 여전히 금요일 저녁엔 전화가 온다. 뭐 유난하고 알뜰살뜰하고 자상한 모자지간이어서도 아니다.금요일 저녁의 루틴 말고도 아들의 전화가 간혹 있다. 한글맞춤법이나 한자뜻풀이를 묻거나 손녀들의 깜찍스러운 언행을 자랑하듯 알려줄 때도 있다.-며느리를 통해서, 또는 SNS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대부분이긴 하다-그중 아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화가 하나 더 있다. 그날엔 평소보다 좀 진중한 목소리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어? 금요일도 아닌데 웬일?이라며 반갑게 받고 아들은 그냥요~ 라고 한다. 일상의 대화를 잠시 잇다 보면 아차 내가 네 생일을 잊었구나. 또 네가 먼저 전화를 하네. 내가 축하 전화를 먼저 해야 했는데, 난 아들 생일도 자꾸 잊어버리네 호들갑을 떨지만 이미 늦었다. 아들의 그냥요~라는 목소리엔 제 생일이면 떠오르는 엄마에 대한 웅숭깊은 속정이 다 녹아 있다. 참 무심한 엄마다.

2023-08-23

무리하셨어요?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침에 눈을 뜨니 어지럽고 메스껍다. 바로 일어나지 않고 잠시 앉아 있다가 끙차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도 바로 다시 주저앉는다. 한창 더울 때라 더위 먹었나? 도로 누웠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감싼 채로 한참을 엎드렸다. 난 아픈 신호가 항상 두통으로 온다. 그걸 아는 남편이었다. 바로 병원에 가자며 일으켜 세웠다. 가까운 내과에 갔다. 증상을 얘기하자 의사가 묻는다. 무리하셨어요? 그럴 일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진료를 받고 링거도 맞았다. 이틀 분의 약을 지어주면서 안정하란다. 며칠 후에도 나을 기미가 없자 이석증인 듯하여 오희종신경과엘 갔다. 지난주의 일이었다.무리하셨어요?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2005년 여름, 이때쯤이었다. 며칠째 밤을 새우며 논문을 썼다.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희붐해질 쯤에야 컴퓨터 모니터를 껐다. 기지개를 크게 켜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바로 쓰러졌던가 보았다. 새벽녘에 화장실을 나온 남편이 화들짝 크게 놀랐다. 응급실로 가서 뇌사진을 찍는 등 온갖 검사를 하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큰 병이 아니라고 했다. 전정기관의 이상이 의심되나 별 치료 방법이 없다며 집에서 안정하란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하늘이 뱅그르르 도는데도 그저 누워있을 뿐이었다. 며칠 후 남편이 용한 병원을 알았다며 데리고 갔다. 오희종신경과였다. 의사는 무리하셨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며칠밤을 샜다고 실토했다. 이석증이라는 병명을 처음 들었다. 신이하고 꼼꼼한 치료로 어지러움은 금세 말끔히 나았다. 깨끗해진 머리 덕에 신나게 운전하여 학교엘 갔다. 며칠만에 또 도졌다. 쉬라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또 한번은 2012년 겨울, 연말이었다. 입시며, 성적이며 한창 정신없을 때였다. 며칠째 열나고 오한이 들었지만 약을 지어 먹으면 낫길래 무시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 이를 딱딱 마주치는 사정없는 오한에 정신을 잃었다. 식구들이 혼비백산, 응급실로 날랐다. 치료를 받으면 나았다. 낮엔 일상생활을 했고 밤이 되면 또 열에 들떠 응급실을 들락거렸다. 외래진료를 받으라고 했으나 처리할 일이 태산이라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학교의 급한 불을 끈 뒤 퇴근길에 내 발로 느긋하게 병원을 찾았다. 당장 입원하라는 의사의 호통이 매서웠다. 며칠 새 병을 크게 키웠고 신장 수술할 수도 있다고 했다. 2주간 입원했으나 호전되지 않자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그제야 내 몸 돌보지 않은 후회를 했다.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았다. 병소(病巢)는 남아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그때 역시 의사의 첫 문진은 무리하셨어요?였다.일 욕심이 많긴 했다. 한창 일할 때는 다소 무리했음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이제, 은퇴 후 이렇게 느긋하게 놀고 있는데 무리라니 어이가 없다. 일주일에 3일 손녀 유치원 등하원 도와주기. 일주일에 한 시간 자원봉사와 두 시간 영화공부하기. 주말에 모두의 집에 가서 풀 뽑고 텃밭 가꾸기. 병든 강아지 수발들기 정도가 일상의 전부다. 최근 일주일 두 시간 서예공부 시작으로 기분좋은 흥분에 마냥 들떠 있는데 이게 어찌 무리인가. 몸이 쾌청하지 않으니 별 서운한 생각이 다 든다.

2023-08-16

텃밭2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황급히 불을 껐다. 텃밭에 가서 대파를 찾았다. 풀숲 더미를 뒤져 간신히 하나를 찾았다. 쑤욱 뽑아 뿌리를 털고 그 자리에서 흙 묻은 겉껍질을 깠다. 가까이 있는 수돗가에서 씻어 들어오면서 대충 비틀어 잘랐다. 제법 실하게 큰 고추 몇 개도 땄다. 한 개는 된장에 썰어 넣고 몇 개는 쌈장에 찍어 먹어도 좋겠다.한 달여 전, 안사돈께서 파 모종이 있으니 심겠냐고 전화주셨다. 작년에 들깨와 마를 심어주셔서 잘 키운 적이 있었다. 나도 한참을 못 간 터라며 같이 심으러 가는 게 어떠시냐고 여쭈었다. 흔쾌히 동행하셨다. 오랜만의 집엔 무성히 자란 풀이 반겼다. 풀에 뒤덮인 텃밭이 부끄러워 막무가내 엎드려 풀을 쥐어뜯어 뽑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오이와 가지는 새끼손가락만한 열매를 겨우 맺고는 노랗게 비틀려 있었다. 큰형님이 주신 호박 모종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였다. 딸기 모종을 살 땐 손주들에게 직접 따게 해야지 꿈도 야무졌다. 그러나 토마토와는 달리 딸기는 어찌된 노릇인지 열매가 달리는 듯하다간 지고 달린 열매조차도 볼품없는 데다가 흙에 묻어 맥없이 잎만 뻗치고 자라있었다. 제법 이파리 성성하여 향기로운 맛을 줬던 고수와 청겨자조차 키가 자랄 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고, 싱싱하여 아름답기까지 했던 상추마저도 잎색은 바래고 대신 상춧대를 높이 올려 꽃을 달고 있었다. 잎채소들은 한창 자랐을 때 더 자주 더 많이 따 먹었어야 했다. 예뻐서 아끼느라 먹을 시기를 놓친 거였다. 고추도 먹을 만큼 크게 자란 것이 대견스러워 따지 않았더니 며칠 후엔 발갛게 익는 거였다. 더욱 이뻐 두고두고 감상(?)하려 했는데, 그만 갈라지고 썩어버리는 게 아닌가. 주인 잘못 만나 제 구실을 못한 채소들에게 미안함이란….안사돈도 같이 풀을 뽑으시면서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를 막을 수 없다고 하신다. 약을 치지 않으려면 비닐로 멀칭이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가져오신 파는 마침 집에 있는 검은 비닐자투리를 땅 위에 덮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심었다. 그렇게 안사돈께서 소중히 심어주신 파였다. 멀칭 덕에 다른 곳보단 잡초가 훨씬 덜했고 텃밭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물을 주며 정성을 더했더니 제법 꼿꼿하게 자라주었다. 그러나 꽤 오랜 장맛비엔 속절없었다. 기승을 부리며 자란 풀더미에 가려있는 가엾은 파에 미안함마저 들었다. 농사는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던데, 자주 오지 못한 내 탓이 크다며 자책할 밖에….한해의 배움이 크다. 내년 텃밭을 일굴 때는 올해의 실패를 지혜로 삼아야겠다. 유기농퇴비를 듬뿍 섞어 땅심을 도와준다. 골을 파서 두둑을 크게 만들어 올리고 모종과 씨앗은 두둑에 심는다.-나는 골에다가 모종을 심었었다.- 아, 밭두둑엔 미리 넓은 멀칭비닐을 덮어 두어야지. 무엇보다도 내 발자국소리를 더 자주 듣게 해 주리라. 예쁜 모종과 씨앗에게 더 이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주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그래도 된장에 송송 썰어넣은 파향과 고추향은 달디달았다. 갓 딴 고추를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무니 서걱! 소리가 싱그러웠다. 이게 바로 텃밭의 맛이로구나 싶었다.

2023-08-09

텃밭 1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작년 처음 이 집에 왔을 땐, 집을 둘러싼 넓은 빈터, 풀로 가득히 뒤덮여 있는 땅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감당하려면 계획을 세워야겠다 싶어 생각만 하고 풀만 없애는 중이었다. 상추 모종을 사서도 땅에 심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풀 속에서 이 여린 상추가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길쭉한 화분을 몇 개 사서 거기에 몇 포기씩 심었을 정도였다.여름 즈음 김장용 배추와 무 모종 한 판, 60포기씩을 사온 남편을 타박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심고 관리할 거냐면서 투덜댔다. 그래도 사온 걸 어쩌랴. 해가 잘 들 만한 터를 골라 풀을 뽑고 골을 파서 모종을 두 줄 나란히 심었다. 매일 사는 게 아니라 물 줄 일이 걱정이었다. 배추 모종 때문에 주말이 아니라도 틈날 때마다 가서 물을 주어야 했다. 비싼 배추를 먹을 판이었다. 작은 떡잎이 지고 쑥쑥 자라 제법 잎이 이들이들 커질 때 즈음엔 배춧속이 노랗게 꽉 차기를 기대하면서 끈으로 묶어주었다. 이웃 텃밭을 보고 흉내낸 거였다. 그러다 바쁜 일상에 배추를 까맣게 잊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화들짝 놀랐다. 배추가 생각났다. 저녁참에 잠시 틈을 내어 황급히 달려갔다. 큰 비닐봉지를 사 들고 가서 배추를 뽑아 담았다.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아서였는지 까맣게 벌레가 낀 배추가 많았다. 성한 걸 골라도 제법 많아 이웃에도 나눠주었다. 나물로도, 물김치로도 꽤 오래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신 이렇게 큰 농사(?)는 짓지 않으리라 결심이 섰다.올핸 수돗가 근처에 작은 텃밭을 일궜다. 물 주기가 편하다는 판단에 고른 터였다. 채소 모종을 이것저것 사 본격적으로 텃밭농사를 해 볼 참이었다. 미리 풀을 뽑고 유기농 퇴비를 사서 흙과 섞어 두었다. 모종은 오일장에서 사기로 했다. 옹기종기 나온 예쁜 모종은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구경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서너 개 정도의 작은 포트에 1~2천 원짜리 모종을 이것저것 샀다. 토마토와 고추는 기본, 파, 가지, 오이, 내가 좋아하는 고수와 청겨자도 샀다. 텃밭을 늘려가며 당귀, 명이나물, 땅콩에다가 양배추를 줄지어 심었다. 안동의 지인이 상추 모종을 잔뜩 보내주셔서 길게 한 줄 심었다. 심을 땐 시들하던 애들이 며칠 지나선 꼿꼿해지다가 제법 실해지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모두의 집에 가면 제일 먼저 들르는 최애 스팟이 되었다. 손주가 집주변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주워 모은 것이 10여 개나 되었다. 지줏대인 것 같다고 했더니 같이 세우자고 한다. 고추와 토마토 모종 옆에 손자는 망치로 박아 세우고 나는 끈으로 묶었다. 후에 제대로 된 지줏대를 사와 더 높게 세웠다.쉼없이 자라는 풀을 갈 때마다, 볼 때마다 뽑아주었다. 고추는 흰 꽃을 핀 데마다 고추를 맺고, 토마토도 조롱조롱 열매를 달아낸다.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는 손녀에게 작은 통을 하나 들려주며 토마토를 따보라고 했다. 네 대답하면서 달려가 토마토 넝쿨 아래에 쪼그리고 앉는다. 빨간 토마토를 똑 따서 하나는 통에 담고 하나는 입에 넣어 오물거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텃밭 재미란 이런 건가 싶었다.

202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