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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일홍 가을걷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대단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가을걷이라 할 것은 없다. 풀이 자라도록 버려두기엔 넓은 터가 아까웠다. 온갖 풀들은 일주일만 눈길을 안 주면 기세등등 자란다. 풀을 이기기엔 꽃만 한 게 없다. 또 잘만 자라주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봄날 며칠을 고생하며 풀과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일홍꽃씨를 잔뜩 흩뿌렸었다. 6월 초부터 꽃 피우기 시작한 백일홍은 10월 말까지 일록달록 피어있었다. 100일 붉게 피는 꽃이라 백일홍일 텐데 거의 다섯 달을 핀 셈이다.백일홍 덕분에 지난 여름이 참 즐거웠다. 매주 바뀌는 꽃밭 풍경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퍼나르며 마구 자랑을 해댔다. 찍은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었다. 첫날 핀 한 송이 꽃, 일주일 지난 후 제법 어우러진 꽃밭, 동네 모든 나비가 우리집에 온 듯 나비에게 아낌없이 꿀물을 내어주는 꽃, 비오는 날 빗소리에 취해 흐드러진 꽃 등등의 사진을 본 친척과 지인들이 찬탄하며 답장을 주었다.‘꽃멍하러 오세요.’ 꽃밭으로의 초대 러시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손녀들이 왔다. 대구의 손주들과 합해, 꽃밭에서 나비를 좇으며 놀았다. 조용하던 육신사 골목이 청량한 애들 소리에 모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꽃이 좋다는 후배는 꽃멍만 했다. 한여름 태풍을 뚫고 오신 지인들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회포를 풀었다. 백일홍꽃밭을 배경으로 그네에 앉아 온갖 포즈의 사진을 따로 또 같이 찍었다. SNS의 프로필 사진을 바꾼 분도 있었다. 90이 넘으신 외삼촌 내외도 모처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백일홍 덕분이었다. 백일홍이 저렇게 흐드러진 것은 80평생 처음 본다며 감탄하시는 청도의 어르신을 모시고 왔으며 꽃구경하러 집에 들어오세요. 팻말도 붙여놓았다.지난 10월, 퇴직 후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학회에 모처럼 참가했다. 학회 후 간담회에서 이런저런 얘기 중에 하빈 묘골이 친정이라는 교수님이 말했다. “지난 여름 모처럼 친정엘 갔는데 꽃밭을 예쁘게 가꾼 집이 있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주인이 안 계시는 걸 알면서도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백일홍 구경을 실컷 했답니다.” 내가 주인장이며 내가 가꾼 꽃밭이라는 대답에 기이한 인연도 있다며 크게 웃은 일도 있었다.올해의 꽃은 단연 백일홍. 앞으론 이 꽃 저 꽃 고민 말자. 이제 우리 집을 백일홍 꽃집으로 하자. 남편과 합의했다. 그러려면 꽃씨를 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주말마다 꽃씨를 채취했다. 시들어 마른 꽃씨를 가위로 따 모았다. 그때까지도 색을 버리지 않은 꽃은 그대로 두었다. 갑자기 추위가 닥치자 조바심이 났다. 과연 꽃들은 다 졌고 누렇게 변해있었다. 남편은 대궁이를 뽑아 눕히고 난 쭈그리고 앉아 꽃씨를 땄다. 그렇게 하루종일 백일홍 가을걷이를 했다. 산처럼 쌓인 대궁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마당 한켠에 모아 발효액을 넣어 비닐을 덮어 둘 참이다. 내년에 퇴비로 쓸 수 있을까 해서다. 어쩌면 그 두엄더미에서도 백일홍이 피지 않을까 고운 상상을 해본다.

2023-11-22

엄마의 재봉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엄마는 예쁜 옷을 잘도 만드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무명천을 떠서 종이로 본을 만들어 소매 풍성한 원피스를 입혀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의 옷도 척척 만들어 입혔다. 마치 사립학교 교복을 닮은 흰색 깃을 단 그 옷을 단정히 입은 동생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엄마의 손재봉틀은 혼수로 장만해온 거라고 들었다. 방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천을 박음질하는 엄마의 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신기였다. 반짇고리에 있는 색색의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던 엄마의 바느질은 그저 우아한 취미였고, 우리들의 옷을 손수 지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때까지는….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엄마의 재봉틀은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웃 누군가의 옷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크고 멋진 기와집에서 옮긴 작은 방 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단 하루 치의 먹을 것이라도 나올 곳은 엄마의 재봉틀뿐이었다. 엄마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일감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밤샘일은 늘었다. 그래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삼 남매 학교 치레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마는 큰맘 먹고 손틀을 발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터를 방안에서 난전으로 바꿨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갔다.매서운 바닷바람, 거친 바닷사람, 그리고 따가운 햇빛에 훤히 노출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재봉틀 덕에 우리는 산골짜기 초가집에서 시내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학교와 좀더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삯바느질에서 옷 수선으로 바뀌어도 솜씨가 뛰어났던지 주변의 같은 업종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시샘과 부러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만큼 더욱 고달팠다. 밤이면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끙끙 앓았다.그때까지 거친 세파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두 분이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포기하셨던 듯 무력해지셨으나 엄마는 강하게 맞섰다. 부잣집 마님의 취미였던 솜씨좋은 바느질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엄마는 악착같고 독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뒤에서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좀 거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일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엄마의 일을 보조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의 일을 배워 엄마의 재봉틀 옆에 아버지의 재봉틀을 하나 더 두고 같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중학교부터 큰 도시로 유학할 수 있었다. 주말엔 셋이 번갈아 내려가 두 분의 일을 거들곤 했다.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두 분의 교육열에 보답하듯 우리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보답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교육열만큼이나 뜨겁게 일했던 엄마의 낡은 재봉틀은 오빠가 잘 간직하고 있다. 며칠 후 엄마의 기일에 가면 엄마 보듯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겠다.

2023-11-15

‘황순이 가사집’을 읽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여름 황순이 선생께서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다. 자작 가사집을 출간할 예정이라며 서평을 부탁했다. 오랜만의 소식도 반갑고 가사집을 낸다니 고마웠다. 예전 내방가사 공부할 때, 뚝딱 써낼 정도로 필력이 보통아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꾸준히 가사를 쓰셨구나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서평 쓸 위인은 못된다며 사양하며 짧은 발문을 써드렸다. 간단한 내방가사 소개의 글도 부탁하시길래 보내드렸다. 그 후 책 발간을 위해 꼼꼼하게 점검하는지 전화도 주셨고 출판기념회에 초청하셨다. 그리고 모바일 초청장이 왔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칠순기념을 위한 가사집 발간이라니. 20년 가까이 이런저런 일로 자주 만났다. 난 왜 내가 당연히 연장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황 선생께서 적어도 나보다 10년 정도는 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3살이나 더 나이가 많음을 알게 된 순간 황 선생과의 만남, 식사, 대화나 통화의 내용들을 기억에서 떠올리려 애썼다. 찻자리 부탁도 꽤 했었는데, 혹여라도 실수한 건 없으려나, 무례했던 적은 없었나. 당혹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러나 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내가 그런 착각을 한 건 무리가 아니며 내 탓이 아니다. 황 선생은 일단 나이들어 보이지 않았다. 워낙 예의바르고 항상 공손했으며, 말투도 극존칭을 주로 쓰셨다. 이 모든 것 때문이다. 나보단 나이가 훨씬 어리겠지 착각을 할 만한 빌미를 내게 주셨다. 결례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용서를….황 선생의 귀한 칠순잔치에 초대받아 황송한 스승 대접에 몸둘 바를 못 챙길 정도였다.나의 최선은 가사집을 꼼꼼히 읽는 거였다. 내방가사 9편을 엮은 자그마한 책, ‘백선에 꽃잎 날리며’는 ‘칠순이 된 순이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당신이 쓴 자기서사이자 생애사다. 프롤로그에서 ‘젊었을 때 부지런히 썼던 편지나 일기 쓰기가 나이 들어 책 쓸 만큼의 저력이 되지 못했’다고 겸양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4.4조의 음수율과 4음보의 음보율을 맞춰야 하는 가사는 수필보다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숙제를 다하신 셈이다. 내방가사는 조선 여성들이 일상 속의 특별함을 기록한 문학이다. 화전가, 유람가, 경축가, 탄식류의 가사가 그렇다. 대소가 여성들이 돌려 읽으며 소통하고 연대했던 공동체의 향유문화다. 황 선생의 가사들은 전통의 가사 유형에 딱 맞춘 수준이었다. 황 선생은 내방가사를 내면화하고 있었던 거였다.작품들은 따뜻하고 애틋하고 향기로웠으며 긍지에 가득찼다. 황 선생의 그런 생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한국의 전통다도를 학문으로 익혀 배운 차인이기에 차 관련한 기행가가 있고, 차인에 대한 추모가도 있다. 친구들과의 여행도 예사롭지 않아 역사와 문학을 테마로 한 기행가가 창작되었다. 유쾌한 친구들과의 소풍은 신명나는 화전가를, 어릴 적 친구를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쓴 가사의 애통함은 탄식가를 닮았다. 우리 옛 여성의 신명과 탄식과 자긍이, 그리고 전통과 역사에 대한 애정과 진지함이 가사에 그대로 투영됨을 읽었다.

2023-11-08

아키는 여전히 슬프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베리의 마지막 날. 병원 예약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삐 준비했다. 이동용 켄넬을 깨끗이 씻어 희고 폭신한 새 수건을 깔았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베리의 몸을 정갈하게 닦았다, 연노랑의 옷을 입혔다. 한손으로도 가뿐히 들 만큼 가벼운 베리. 평소 좋아하던 장난감과 함께 켄넬에 들였다. 아키를 베리 앞에 데려가 마지막 인사를 하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켄넬을 들고 내려갔다.남편을 기다리며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괴로움의 숨소리만 가쁘게 들릴 뿐 베리는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웬 늑대울음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얼른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을 여니 세상에나…. 아키는 아까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하울링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꼼짝않은 채, 얼마전까지 베리가 있었던 안방을 향해 고개를 돌려 더욱더 크게 늑대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도 울음이 왈칵 터졌다. 아키를 껴안았다. 너도 베리와의 이별이 슬프구나. 아키의 목줄을 찾아 일단 데리고 내려갔다.베리의 켄넬 옆에 두자 울음을 그쳤다. 작년 4월, 베리가 입원했을 때 식음을 전폐한 아키의 증상을 얘기했더니 문병을 허용해 준 수의사에게 전화했다. 이번에도 아키의 동행을 허락받았다.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놀라고 애달파했다. 아키는 남편에게 안겨서, 내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베리를 다 지켜보았다. 아키는 베리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다.빗속을 뚫고 도착한 장례식장에는 베리의 빈소가 마련돼 있었다. 미리 보낸 베리의 사진이 TV모니터로 보였다. 강아지 간식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제기, 그리고 조화이긴 하지만 예쁜 꽃들도 장식되어 있었다. 또 한 켠 벽엔 베리의 사진으로 만든 가랜드도 걸려 있었다.화장이 진행되는 두세 시간을 우리 부부는 베리의 사진이 반복적으로 바뀌는 TV모니터만 지켜보며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키는 달랐다. 우리 둘 사이에 앉아있다가 사람 기척이 나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아키를 본 사람들이 몇 마디 말을 걸고 애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다시 조문실로 들어와 우리 곁에 앉는다. 그러다 문소리가 들리면 또 튀어나갔다가 그들과 잠시 지내고 들어오곤 했다. 넋을 잃고 앉아있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키의 행동이 마치 조문객을 맞는 상주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말없는 남편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더니 남편도 슬쩍 웃음을 보였다.작은 보자기에 싸인 베리의 한 줌 뼈를 들고 집으로 온 그날 이후, 이웃 분이 날 붙들고 긴한 얘기를 하겠단다. 여태껏 강아지가 둘이나 있어도 우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요즘은 매일 하울링 소리가 들려 이상하네요. 베리의 마지막 날, 목청 높여 하울링하던 아키였다. 내가 집 비운 사이 슬픔을 못견디어 울었나 보았다. 베리와의 슬픈 이별, 그로 인한 분리불안증 때문일까. 평소 베리와 아키는 깊이 의지하던 사이였고, 어쩌면 우리들보다 훨씬 더 애착관계였을 터. 아직도 슬픔을 삭이지 못한 아키를 혼자 두어선 안되겠다 싶어 웬만하면 어디든 데리고 다닌다.

2023-11-01

베리를 묻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11년을 넘게 같이 살았던 강아지 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49일 되는 날, 묻었다. 모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고 웅장한 소나무 아래에 묻었다. 원래 남편은 베리 나무라며 울릉도에서 사 온 마가목 아래에 묻으려 했다. 정작 베리를 묻으려 보니 묘목같이 어린 마가목은 작아 볼품이 없어 보였다. 난 보리수 아래 볕 드는 곳을 골랐다. 남편의 선택은 소나무였다. 6그루 소나무 중에 가장 보기 좋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남들도 보면 경탄해하는 수형 멋진 나무였다. 나도 마음에 들었다. 소나무 남쪽 아래 깊이 땅을 파고 조그만 오동나무관을 넣고 흙을 덮고 묘비명을 써서 꽂았다. “사랑하는 베리 영원한 세상에 잠든 곳.”잦은 병치레로 입원과 수술을 여러 번 경험한 베리였다. 작년 초겨울 암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이가 많아 수술은 힘들었다. 괴롭고 힘든 항암 치료는 견딜지 의문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명을 다할 때까지 잘 먹이며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14살이면 사람 나이로 90 노인. 노인 모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했다. 겨울을 못 넘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쇠약해지긴 했으나 원체 좋은 식성의 베리는 잘 먹어선지 호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여름 들어 급격히 기운이 떨어지더니 움직임은 굼뜨고 깔끔하던 배변습관도 망가졌다. 살은 빠져 앙상해졌고 처연한 눈망울만 커졌다. 윤기나던 새까만 털도 푸석해지고, 뒷덜미엔 흰 털이 수북히 자랐다. 입가의 수염도 하얘졌다.8월 중순 출장으로 부득이 이틀을 비울 일이 생겼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남편이 전적으로 돌보기엔 무리라 이만저만 걱정도 함께 안고 갔다. 남편은 수시로 사진을 찍어 베리의 동태를 알려주며 날 안심시켰다. 용케도 베리는 견뎌주었다. 돌아온 후엔 안방에서 같이 지내며 며칠 밤을 새웠다. 보통 괴로워하는 게 아니었다. 고통을 견디는 게 힘들어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이리저리 바꿔줄 뿐, 고통까지 나눌 순 없어 안타까웠다. 물기 가득한 큰 눈을 보면 눈물만 났다. 물도 혼자 먹지 못하자, 손주 약 먹이는 약통에 물을 넣어 입가에 흘려주면 겨우 삼켰다. 괴로움의 신음을 며칠 들으니 산 자의 고통이 차라리 죽음만 못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새벽 3시. 베리 돌보느라 서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가며 쪽잠을 청해 기진맥진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웠다. 병원에 연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는 수의사 교수에게 문자를 넣어 베리의 상태를 알렸다. 다음날 오전에 진료 준비할테니 데리고 오라는 문자를 바로 받았다.일 있던 남편은 내게 베리를 맡겼다. 정작 시간이 되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주차장에 주저앉아 남편을 급히 호출했다. 함께 병원에 갔고, 그리고 베리는 내 품에 안겨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병원에서 소개한 장례식장에서 베리는 한 줌 재로 내게로 와서 집에서 49일을 함께했다. 손주들이 와서 꽃을 놓고 베리 사진을 보며 울먹였다. 손녀는 아직도 가끔 하늘을 보며 베리야 잘있어? 묻는데, 모두의 집에 묻힌 베리의 묘를 보며 뭐라고 할까?

2023-10-25

선덕여왕릉제의례를 아시나요?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경주에 낭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삼국사기에 413년 실성이사금 13년에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나 멀리서 보면 누각과 같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다. 신라인들은 이 산을 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며 신유림(神遊林)이라고 부르고 복된 땅의 신성숲으로 숭배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생전에 “내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시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도리천은 불교의 이상세계로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했는데, 여왕 사후 32년 후에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으니 여왕의 예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현재 선덕여왕릉은 당신이 점지하신 바로 그곳, 낭산 남쪽 중턱의 신성한 숲속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신라에 세 분의 여왕이 있을 뿐, 고려는 물론 조선에서도 여왕은 없으니 역사적으로 매우 귀하신 분이다. 재위 16년 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지혜로 국난을 극복하고, 선정을 펼쳤다. 항상 백성 가까이 다가가 민생을 살피고 복지에 힘썼다. 고려 수이전에 심화요탑(心火遶塔)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덕여왕을 사모해 마지않은 미천한 백성 지귀가 아름다운 여왕을 가까이서 보려는 소원을 품다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여운 그의 소원을 들어주려, 한 병사가 왕의 행차 정보를 주었다. 여왕의 행차를 기다리다 보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지귀의 사연을 듣고는, 잠든 그를 깨우지 말라며 당신의 팔찌를 풀어 지귀의 가슴에 살포시 얹어 주는 따스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자기의 어리석음에 한을 품어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서라벌 곳곳에 불을 지르자 시를 지어 엄하게 꾸짖어 징죄하는 강단있는 여왕이었다.고구려와 백제로부터의 끊임없는 침입에도 여성인 탓에 직접 전장을 누빌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전장에서 희생된 자식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전쟁영웅을 귀하게 모시고 기리는 절, 영묘사를 지었다. 수시로 참배하며 자식 잃은 어미 된 마음과 영령을 위무했다. 앞의 지귀는 그곳에서 만난 백성이었다. 아름다운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했다. 하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첨성대도 지었다.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살리고자 하는 염원뿐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걸출한 인재를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학자들은 이러한 선덕여왕을 ‘인재등용의 리더십’의 왕이라고 평가한다.선덕여왕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경주의 여성들이 여왕의 리더십을 배우고 따르자며 모였다. 2008년부터 경북방송 대표였던 황명강 현 경북도의원의 발의로 선덕여왕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했다. 선덕여왕릉제의례 또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3년 뒤, 2011년 경주와 인근 도시의 여성리더들이 모여 여성단체 선덕여왕경모회를 창립하였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치러진 지 올해로 16회째를 맞는다. 신라의 복장을 갖춘 여성제관들이 전통의 방식으로 행사하는 제의례는 이색적이고 장관이다. 제법 알려져 해마다 참례자들도 늘어난다. 2023년 선덕여왕제의례는 오는 10월 21일 엄숙히 거행된다.

2023-10-18

소설 ‘달꽃’과 ‘덴동어미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사이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250쪽 내외 분량의 짧은 소설이라 단숨에 읽을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둘 다 여성 소설가의 작품에 여성이 주인공인데다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달꽃’은 지난 8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작가 이화리는 경주에서 나고 자라 경주를 문학의 뿌리로 삼은 작가다. 20년 전 잠깐의 인연이 있어 아주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다.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진 않지만 글이 야물고 내공이 깊다. 신간이 반가웠다. ‘촌년’ 작가라고 밝힌 그녀는 ‘촌이야기’를 ‘촌말’로 쓰겠다고 작가의 말을 대신했다. 작심하고 경주를 배경으로 경주 사투리를 사용하겠다는 거다. 130년 전쯤 전 경주 안강, 현곡 등을 배경으로 경주의 이야기를 경주의 말로 쓴 ‘달꽃’은 여성만의 신체적 생리적 능력을 이야기한다. 터부시되어온 여성의 달거리를 인간의 존엄과 우주적 신성으로 드러냈다. 또한 여성에게만 강요했던 순결 이데올로기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꾸짖고 달래고 어루만진다. 방언학자 이상규는 발문에서 “통상 터부시되어온 달거리와 경상도 방언의 고유성을 오묘하게 복원시킨 소설”이라며 여성들에겐 위안과 감사를 경주인들에겐 토착적 언어의 선물이 될 것이라며 치하했다.일부러 찾아 읽은 ‘덴동어미전’은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된 ‘소백산대관록’이라는 필사본 속에 있는 내방가사 ‘화전가’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화전가는 경북의 여성들이 짓고, 필사하고 낭송하는 문학인 내방가사 중 흔한 유형의 가사다. 그 중 ‘경북대본 화전가’는 구성이 독특하고 내용과 묘사가 특히 뛰어나서 문단에서 크게 평가하는 작품이다. ‘소백산대관록’이 1938년 필사되었는데, 작중 1886년(고종 23년) 괴질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도 130여 년전쯤으로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영주 순흥을 배경으로 ‘덴동어미’라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담의 장편가사이다. 이방집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가 네 번의 결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살아온 굴곡진 이야기를 화전놀이라는 여성들만의 유희 장소에서 수다로 풀어낸 대서사시이다. 이 가사의 배경이 영주 순흥이고 덴동어미가 이곳 출신인데다 화전놀이에 참여한 여성들이 영주 인근에서 결혼하여 온 여성들이라 이 지역의 사투리가 주로 쓰였다. 덴동어미가 30여 년을 예천, 상주, 경주, 울산, 영해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 지역의 방언들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주로 경북 북부지역의 사투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 구사가 예사롭지 않은 박정애 작가 역시 경북 청도 출신이었다.경북 출신의 여성 소설가가 경북의 사투리로 쓴 130여 년 전의 여성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많이 닮았다. 주인공 여성들의 인생유전이 남달랐음에도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스스로 당당하고 서로 격려하는 장면 또한 닮은꼴이다. 사투리는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맛이 사는 글말이다. 나직히 소리내어 읽으니 나는 아예 소설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곳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2023-10-11

병원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딱히 심각하게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프진 않다고 할 수도 없다. 큰 병을 진단 받은 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복용해야 할 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웠다 일어나면서 아이고 소리를 낸다든지, 허리 다리 머리, 릿자로 끝나는 몸 어딘가는 다 조금씩 성치 않다. 날씨로 치자면 쾌청하지 않은 구름 좀 낀 흐림. 가장 좋은 처방은 열심히 운동하는 거라는데, 그게 잘 안된다. 집 가까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다. 아파트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책로가 잘 닦여있다고 하는데, 글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편이 운동하라고 사준 자전거며 운동기구도 3일 만에 구석자리 차지다. 그러니 그저 아프면 병원엘 간다. 게으름을 탓해야 하겠지만 아직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아서인가. 어쨌든 늙었으니 성치 않은 구석이 하나둘씩 생기긴 한다.얼마 전 어지러움증이 있어서 병원엘 갔더니 이석증이란다. 아침 6시 30쯤 갔더니 예약 마감. 다음 날 아침 5시에 가서야 겨우 접수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소문난 병원이라선지 매주 정기진료시간을 예약해도 보통 2시간은 기다려야 진료를 본다. 심하진 않지만 장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매주 가고 있다. 스무 개도 넘는 치료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부산, 김천, 봉화에서 전날 밤에 와 대기실에서 쪼그려 밤새워 기다린 분도 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대구 아들딸네 집에 묵고 왔다는 노인들이 허다하니 운전해서 10여 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나는 명함도 못 내민다. 집 가까이 믿을 만한 병원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2년마다 하는 정기검진이 나이가 들면서 항목이 더 추가된다. 골밀도 검사를 하니 뼈 나이가 실제 나이보단 젊지만 예방 차원에서 열심히 운동하라는 처방이 내린다. 열심히 햇볕 쬐며 운동하면 될 터이다. 게을러터진 나는 운동 대신 비타민D 주사를 3개월마다 맞으러 병원엘 간다. 치과 진료도 일 년에 두 번, 나의 달력엔 이렇게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아야 할 병명과 예방주사 주기가 눈에 띈다. 다음 달엔 고령자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보다.생로병사. 인간이라면 반드시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인생사고(人生四苦). 나서 세월과 함께 늙음은 자연스럽다. 그저 추하지않게 늙으려 노력할 따름이다. 죽음 또한 거스를 방법이 없다. 네 가지 고통 중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70 가까운 나이 되어 병원 순례를 하게 되니 제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병고(病苦)가 아닌가 싶다. 병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면 무병장수할까마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병원 가는 일이다. 의술 좋아졌겠다 병들면 고치면 되고, 보험 들어있으니 돈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은 유병장수시대라고들 한다. 병 있어도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인데 난 싫다.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무병하다면 차라리 단명하고 싶다. 병치레는 싫다. 그럼 무조건 걸으며 운동해야 할 텐데 어쩔래? 자문한다.

2023-10-04

손녀가 가르쳐준 취미생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서울의 큰손녀는 대구할매 집에 와 며칠씩 지내길 즐긴다. 휴가 때 온가족이 내려왔다가도 엄마 아빠를 졸라 굳이 혼자 남아 며칠을 더 묵는다. 이런 손녀가 기껍고 기특한 할배 할매는 단 며칠이라도 알차고 보람차게 보내도록 갖은 프로그램 궁리를 하며 계획을 짜느라 법석을 떤다. 경주 가서 문화재순례 스탬프를 찍자. 미술관과 박물관 체험프로그램도 신청하자. 제 생일을 미리 당겨 사촌동생들과 생일파티도 열어줘야겠다.그러나 정작 손녀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소위 집순이라며 제 엄마가 귀띔한다. 그렇다면 문방사우를 꺼내 한자로 이름쓰기를 가르쳐 볼까? 같이 놀 장난감 빨대블럭과 젠가도 사 두었다. 그런데 손녀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 제 놀이감을 챙겨가지고 오는 야무지고 빈틈없는 아이.2년 전 여름방학 때였다. 500 피스 퍼즐상자를 가방에서 꺼냈다. 아빠 어렸을 때 할머니랑 퍼즐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저랑 같이해요. 혼자 해보니 맞추기가 꽤 어려워요. 좋지 좋아 같이하자 나 이런 거 무지 좋아해. 조손이 엎드려 퍼즐 조각을 맞춘다. 실로 제 아빠 어렸을 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놀았다. 유달리 게임에 진심인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때를 떠올리며 손녀와 같이 퍼즐 조각을 맞춘다. 비교적 쉬운 조각은 손녀에게 넌지시 던져준다. 맞추며 기뻐하며 손뼉치는 손녀가 흐뭇하다. 함께 끼워맞추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마지막 퍼즐 조각은 손녀가 맞춰 끼워 완성하게 했다. 뿌듯해하며 사진 찍어 제 엄마와 아빠에게 보낸다. 어렵게 맞추었으니 액자에 넣어줄까 했더니 쿨하게 부순다. 서울 가져가서 다시 또 맞출 거라며 가방에 넣는다. 맞춘 후 며칠을 전시해두고 보는 나와는 다른 성격에 속으로만 놀란다. 손녀 떠난 후 나는 서점에 가는 남편에게 1천 피스 퍼즐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사고 맞추고를 반복하며 한동안 퍼즐에 푹 빠졌다. 퍼즐 상자를 세어보니 20개도 넘는다. 직소퍼즐로는 고흐의 명작시리즈도 많으나 제일 예쁘기는 미국의 유명한 달력작가 제인 우스터 스콧의 퍼즐이다.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그녀의 모든 퍼즐을 사모았다. 초등학교 친구들에게도 사보냈다. 허리 아파하는 나를 남편이 책망하자 마침표를 찍었다.올여름 방학에는 또 다른 취미거리를 가져왔다. 이름도 생소한 양모니들펠트. 할머니랑 같이 할 거라며 여러 개를 샀단다. 처음 보는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설명해 준다. 실뭉치를 돌돌 말아 바늘로 콕콕 찌르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요. 주로 강아지나 곰인형 같은 거 만들 수 있어요. 그림설명서가 있어도 실습으로 보여주며 꼼꼼히도 설명한다. 따라하다가 바늘에 찔려 피도 봤다. 작품(?) 얘기를 조곤조곤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집에 있는 두 마리 강아지, 베리와 아키를 모델로 만들자며 사진 찍어 비슷하게 만들었더니 할머니 솜씨가 좋네요하며 칭찬도 아끼지 않는 속깊은 손녀 덕에 취미가 또 하나 늘었다. 같이 양모펠트공방을 찾아 구경하며 수강신청을 고민해봤다. 이번 추석에 손녀는 어떤 새로운 취미거리를 가져올까. 몹시 기다려진다.

2023-09-20

기념식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풀과 꽃과 텃밭의 채소만 있는 건 아니다. 나무가 더 많다. 아니 더 많이 심었다.원래 제법 큰 대추나무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감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사철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집과 터의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휑뎅그렁했다. 고택엔 역시 소나무라며 남편이 제일 먼저 사다 심은 여섯 그루의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고,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들도 몇 그루 있어 볼 때마다 기껍다.남편이 손주와 함께 석류나무를 사왔다. 그리고는 손자에게 이 나무는 건이 나무야. 그러니까 물도 주고 잘 키워. 나무팻말에 제 이름을 쓰게 했다. “석류나무, 이 건, 2022년 6월 10일” 기념식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작년 여름 사흘을 묵고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기념식수를 제안했다. 신박한 제안에 무조건 콜! 조경회사에 전화해서 여름에 심어도 잘 자랄 나무로 추천한 보리수를 심었다. 꽃삽 들고 사진도 찍고 팻말도 써서 박았다. “초등학교 친구들, 김정숙, 김현숙, 박창희, 최금순, 이정옥, 2022년 8월 10일” 한 친구는 저 닮은 홍매화 한 그루 더 심겠다며 우겨 우물가에 심었고, 거기에도 나무팻말을 박았다. 올봄 가장 이르게 붉은 매화를 피웠길래 사진으로 꽃소식을 전했다.위덕대 자율전공학부 24학번 성인학습자들의 모임이 있다. 매년 스승의 날에 나이가 더 어린 나를 스승이랍시고 꼭 청해서 식사를 함께하고 선물도 주신다. 작년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인사 삼아 모두의 집에 초대했다. 용인, 청도, 대구에서 각기 바삐 사시는 분들임에도 귀한 걸음을 주셨다. 집들이선물을 걱정하시길래 기념식수 얘기를 했다. 좋은 방법이라며 배롱나무를 꼭 사 심어 달라시며 나무 팻말을 미리 써 두셨다. “아름다운 동행, 유복혜, 박영희, 오순옥, 2022년 8월 23일” 가을에 배롱나무를 사 심고 팻말을 박았다. 올여름 분홍색 꽃을 피웠길래 사진을 올려드리며 감사함을 전했다.5월엔 선덕여왕경모회원 14명이 1박2일의 워크숍을 했다. 뜻있고 값진 나무로 기념식수를 해야 한다기에 단아하되 멋스러운 수형의 향나무를 사서 미리 심어두었다. 다같이 기념식도 하고 팻말을 망치로 박는 퍼포먼스도 했다. “선덕여왕경모회 방문 기념. 2023년 5월 22일”44년 전 딱 한 해, 소선여중 교사로 만난 인연으로 아직도 연락을 이어 온 선생님들 모임이 있다. 만발한 백일홍꽃을 단톡방에 올려 꽃구경 오시라고 초대했다. 7월 어느 날, 서울, 부산, 함양, 대구에서 5분이 태풍을 뚫고 오셨다. 흰 꽃이 탐스러운 목수국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소선회 방문 기념, 박종선, 송경숙, 유진숙, 이숙화, 임신영, 2023년 7월 15일”지난주 울릉도에 일이 있어 갔다. 베리의 죽음 후 울적함을 달랠 겸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이 울릉도의 주황색 열매가 예쁜 마가목숲을 보고 난 후 그 나무에 꽂힌 듯했다. 기어이 세 포기 사서 배에 싣고 왔다. 오늘 마가목을 심었다. 셋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정성스레 심더니 한마디 했다. “이 나무는 베리 나무야.” 남편은 베리를 위한 기념식수를 한 거였다.

2023-09-13

한글서예로 꽃핀 내방가사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제14회 대구한글서예대축제 초대장과 도록을 받았다. ‘내방가사-한글서예로 담다’를 주제로 한 서예전이었다. 내방가사가 이렇게 꽃필 수도 있구나 싶은 반가움과 고마움에 내방가사의 역사를 짚어보고 싶었다. 마침, 짧은 인사말을 부탁받았기 때문에라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내방가사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문학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세종대왕 창제의 한글 덕분이다. 1443년에 창제 1446년에 반포된 한글,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였다. 그러나 조선의 공식문자는 한자였다. 대부분의 남성 양반에 의한 지배문학 역시 한자였다. 그런 면에서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한 백성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30여년 뒤, 1580년대 난설헌 허초희라는 천재시인이 ‘규원가’라는 가사를 지었으나 문학에 관한 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200여 년 후, 1794년 경북 안동 하회에서 연안 이씨가 집안의 겹경사를 송축하는 가사 ‘쌍벽가’를, 연이어 1810년경 기행가사 ‘부여노정기’를 창작하면서 드디어 내방가사가 한국문학사에 점을 찍기 시작하였다.이후 경상도의 여성들은 내방가사를 창작하고, 필사하고, 혼자 읽고, 돌려 읽고, 혼자 외고, 둘러앉아 낭송하는 향유의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적으로는 친척 내에서, 더 넓게는 혼인관계를 통해 전파와 전승의 향유를 지속하였다.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작품 수가 6천여 편이 넘을 정도로 경북 여성들만의 특별한 문학이자 문화가 되었다. 창작과 낭송의 전통이 안채의 담장을 넘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180여년 후인 1997년, 이선자 회장이 창립한 안동내방가사전승보존회 덕분이었다. 특히 총 24회나 개최된 전국내방가사경창대회를 통해 내방가사의 아름답고 기품있는 낭송 소리는 경북을 넘어 전국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고전문학인 내방가사가 현재도 향유되고 있는 현재성의 문학임을 증명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2022년 11월 16일, 내방가사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었다.“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보존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고, 기록유산에 담긴 문화적 관습과 실용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목적에 부합되면서 여성공동체의 집단문학적 가치를 인증받은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내방가사를 잘 지켜온 대구경북 여성들 덕분이다. 허난설헌으로 기산하면 443년, 연안이씨로부터는 229년의 내방가사의 역사에 이름없는 수많은 여성 작가들을 보태어야 한다. 내방가사전승보존회 이선자 회장의 노고와 대구한글서예협회 최민경 회장의 역량에 기대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인류사에서 기록물 등 수많은 무형유산들이 전쟁, 사회적 변동, 약탈 등에 의해 영원히 사라졌거나 멸종위기에 처해 있음에 비춰볼 때, 내방가사를 소중히 지켜온 대구경북 여성들에게 우리 문학, 문화, 역사가 크게 빚지고 있다. 2023년 8월, 대구한글서예대축제에서 만난 서예작품들은 문학이 서예로 비상하는 내방가사의 새로운 역사의 장이었다.

2023-09-06

녹슨 가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나이가 드니까 뭐든 편한 게 좋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까탈스러운 것이 없어지고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생각하면 매사 좀 귀찮아졌을 수도 있겠다. 사람과의 사이도 그렇다. 무던해졌다. 한창 혈기왕성할 땐 규칙어기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내 기준의 상식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린다 싶으면 가차없이 따지던 성깔도 엔간했다. 그 때문에 바른 말이랍시고 해서 고초를 겪은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이젠 느긋해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만다. 어머 내가 웬일이지? 스스로 느끼며 놀라기도 한다. 물론 절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 지금도 있어 괴로울 때도 있지만 어쩌랴 싶어할 뿐이다.옷입음새도 그렇다. 키도 작고 균형 없는 몸매에 어울리는 옷이 있으랴만 편한 옷을 좋아하는 내 취향까지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한 TPO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름 노력해왔다. 목적에 맞게 색상과 모양까지 신경써 입었다. 애쓰고 돈도 들였다.그러나 이젠 더 이상 옷에 대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신세가 되자 내 취향껏 편안함을 추구하고 즐긴다. 집에서는 더하다. 언젠가부터 목덜미에 뭔가 거치적거리는 옷이 불편했다. 되도록 목 주위가 휑하니 드러나는 옷만 찾았다. 꺼내입는 옷들이 맨날 그 옷이 그 옷이다. 티셔츠들이 많아 아무거나 꺼내 입다가도 목이 좀 죈다 싶으면 곧장 다시 벗게 된다. 이 많은 티셔츠를 입지도 않고 버려야 하나. 새로 사지 않아도 입을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궁리했다. 목덜미 부분을 가위로 오려내어 넓힐까. 박음질하지 않은 것을 멋으로 만든 옷도 있지 않은가. 정 안되면 감침질을 해서라도 입을 수 없을까 생각했다. 하고많은 시간도 있겠다. 한 번 시도해보자. 즐겨입었던 면티셔츠를 몇 개 꺼냈다. 둥근 목테두리를 전부 오려내어서 손바느질로 감치기엔 좀 힘들려나 싶었다. 만지작거린 끝에 앞섶 부분을 세모 모양으로 깊게 오려내고 그 부분만 감침질하면 수월하겠다는 궁리가 섰다.까짓 하다가 안되면 말 일. 뭐 시도해보자 싶어 반짇고리를 찾았다. 예전에 애들이 어릴 땐 늘 썼고, 또 남편의 흰 셔츠 단추를 달거나 바짓단을 공그르기하면서 자주 사용하던 반짇고리였다. 그러나 최근엔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열어보니 색색가지 실, 아이들 돌이며 백일날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흰 실꾸리 두 개, 올망졸망 여러 가지 단추통도 뚜껑이 열린 채로 있었다.크고작은 바늘이 꽂힌 동그란 바늘꽂이. 그 가운데 유난히 커다랗고 녹슨 가위가 자리잡고 있다. 여러 자질구레한 바느질공구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큰 무쇠가위는 엄마, 돌아가신 엄마의 가위였다. 요즘엔 스테인리스 가위에 손잡이 부분도 플라스틱으로 예쁘고도 사용하기 편한 가위들이 얼마나 흔한가. 그와는 달리 무겁고 불그스레 녹까지 슬어 볼품없는 엄마의 가위. 언제부터 나의 반짇고리에 들어있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엄마의 가위. 내 열 살 무렵부터 기울어진 가세 탓에 삯바느질로 가정을 지탱했던 엄마가 무겁게 무겁게 썼을 가위였다. 엄마의 온기가 밴 가위는 녹슬어도 썩 잘 들었다. 나는 이 가위만큼이라도 엄마의 말을 잘 듣는 딸이었을까.

2023-08-30

효전(孝電)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으면 그냥요~라고 말한다. 나는 아 오늘이 금요일이네 인사를 대신하며 대화를 잇는다. 화젯거리가 있으면 길게 수다를 떨 때도 있지만 딱히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서로 지극히 일상적 안부를 묻고 대답하면서 짧은 통화를 끝낸다. 오히려 말할 거리가 없어 어색할 때도 많은 이런 전화, 꽤나 오래된 루틴이다.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갈 때쯤 해준 이야기다. 효문(孝蚊)이라는 말이 있단다. 조문효도(蚤蚊孝道)를 줄여서 하는 말이란다. 예전 어떤 사람이 효도하는 방법에서 나온 얘기였던 것 같다. 그는 여름밤 잠잘 때 파리와 모기를 쫓지 않았단다. 자기가 쫓은 모기가 부모를 물까 걱정해서 그랬단다. 또 어떤 이는 여름에 부모의 곁에서 굳이 윗옷을 벗고 잤단다. 그러면 모기가 젊은 자기의 피를 빠는 대신 부모를 물지 않을 것이라 부모가 더 편히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단다. 진실 여부를 떠나 우스갯소리 같긴 하지만 이 예화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효전(孝電), 효도전화다.이제 넌 집을 떠나 우린 자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난 매우 자주 널 걱정할 것이다. 그러니 안부는 주기적으로 하자. 네가 공부하거나 친구랑 있거나 어쨌든 뭔가를 하고 있을 거라면 내가 하는 전화를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네가 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니 전화는 네가 하는 걸로 정하자. 난 너보다는 자유로우니 받는 게 더 쉽겠지. 그 전화를 나는 효전(孝電)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아주 짧은 안부 인사라도 좋다. 그렇게 시작된 아들의 안부 전화가 햇수로 벌써 23년이 되었다. 대부분의 전화는 금요일 저녁참에 왔고, 아들임을 확인하면 아 오늘이 금요일이네라고 말하면서 받았다. 군생활을 하는 2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끊임없었던 일상이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후, 결혼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효전은 계속되었다. 결혼 이후엔 이만 끊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아니어도 가족들의 SNS로 아들의 무사한 일상을 접할 다양한 방법이 많아졌기도 하다. 더 바빠진 일상 탓에 부담이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말 그대로 그냥 하는 전화일 뿐이라고 생각해선지 여전히 금요일 저녁엔 전화가 온다. 뭐 유난하고 알뜰살뜰하고 자상한 모자지간이어서도 아니다.금요일 저녁의 루틴 말고도 아들의 전화가 간혹 있다. 한글맞춤법이나 한자뜻풀이를 묻거나 손녀들의 깜찍스러운 언행을 자랑하듯 알려줄 때도 있다.-며느리를 통해서, 또는 SNS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대부분이긴 하다-그중 아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화가 하나 더 있다. 그날엔 평소보다 좀 진중한 목소리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어? 금요일도 아닌데 웬일?이라며 반갑게 받고 아들은 그냥요~ 라고 한다. 일상의 대화를 잠시 잇다 보면 아차 내가 네 생일을 잊었구나. 또 네가 먼저 전화를 하네. 내가 축하 전화를 먼저 해야 했는데, 난 아들 생일도 자꾸 잊어버리네 호들갑을 떨지만 이미 늦었다. 아들의 그냥요~라는 목소리엔 제 생일이면 떠오르는 엄마에 대한 웅숭깊은 속정이 다 녹아 있다. 참 무심한 엄마다.

2023-08-23

무리하셨어요?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침에 눈을 뜨니 어지럽고 메스껍다. 바로 일어나지 않고 잠시 앉아 있다가 끙차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도 바로 다시 주저앉는다. 한창 더울 때라 더위 먹었나? 도로 누웠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감싼 채로 한참을 엎드렸다. 난 아픈 신호가 항상 두통으로 온다. 그걸 아는 남편이었다. 바로 병원에 가자며 일으켜 세웠다. 가까운 내과에 갔다. 증상을 얘기하자 의사가 묻는다. 무리하셨어요? 그럴 일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진료를 받고 링거도 맞았다. 이틀 분의 약을 지어주면서 안정하란다. 며칠 후에도 나을 기미가 없자 이석증인 듯하여 오희종신경과엘 갔다. 지난주의 일이었다.무리하셨어요?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2005년 여름, 이때쯤이었다. 며칠째 밤을 새우며 논문을 썼다.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희붐해질 쯤에야 컴퓨터 모니터를 껐다. 기지개를 크게 켜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바로 쓰러졌던가 보았다. 새벽녘에 화장실을 나온 남편이 화들짝 크게 놀랐다. 응급실로 가서 뇌사진을 찍는 등 온갖 검사를 하며 호들갑을 떨었으나 큰 병이 아니라고 했다. 전정기관의 이상이 의심되나 별 치료 방법이 없다며 집에서 안정하란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하늘이 뱅그르르 도는데도 그저 누워있을 뿐이었다. 며칠 후 남편이 용한 병원을 알았다며 데리고 갔다. 오희종신경과였다. 의사는 무리하셨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며칠밤을 샜다고 실토했다. 이석증이라는 병명을 처음 들었다. 신이하고 꼼꼼한 치료로 어지러움은 금세 말끔히 나았다. 깨끗해진 머리 덕에 신나게 운전하여 학교엘 갔다. 며칠만에 또 도졌다. 쉬라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또 한번은 2012년 겨울, 연말이었다. 입시며, 성적이며 한창 정신없을 때였다. 며칠째 열나고 오한이 들었지만 약을 지어 먹으면 낫길래 무시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 이를 딱딱 마주치는 사정없는 오한에 정신을 잃었다. 식구들이 혼비백산, 응급실로 날랐다. 치료를 받으면 나았다. 낮엔 일상생활을 했고 밤이 되면 또 열에 들떠 응급실을 들락거렸다. 외래진료를 받으라고 했으나 처리할 일이 태산이라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학교의 급한 불을 끈 뒤 퇴근길에 내 발로 느긋하게 병원을 찾았다. 당장 입원하라는 의사의 호통이 매서웠다. 며칠 새 병을 크게 키웠고 신장 수술할 수도 있다고 했다. 2주간 입원했으나 호전되지 않자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그제야 내 몸 돌보지 않은 후회를 했다.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았다. 병소(病巢)는 남아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그때 역시 의사의 첫 문진은 무리하셨어요?였다.일 욕심이 많긴 했다. 한창 일할 때는 다소 무리했음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이제, 은퇴 후 이렇게 느긋하게 놀고 있는데 무리라니 어이가 없다. 일주일에 3일 손녀 유치원 등하원 도와주기. 일주일에 한 시간 자원봉사와 두 시간 영화공부하기. 주말에 모두의 집에 가서 풀 뽑고 텃밭 가꾸기. 병든 강아지 수발들기 정도가 일상의 전부다. 최근 일주일 두 시간 서예공부 시작으로 기분좋은 흥분에 마냥 들떠 있는데 이게 어찌 무리인가. 몸이 쾌청하지 않으니 별 서운한 생각이 다 든다.

2023-08-16

텃밭2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황급히 불을 껐다. 텃밭에 가서 대파를 찾았다. 풀숲 더미를 뒤져 간신히 하나를 찾았다. 쑤욱 뽑아 뿌리를 털고 그 자리에서 흙 묻은 겉껍질을 깠다. 가까이 있는 수돗가에서 씻어 들어오면서 대충 비틀어 잘랐다. 제법 실하게 큰 고추 몇 개도 땄다. 한 개는 된장에 썰어 넣고 몇 개는 쌈장에 찍어 먹어도 좋겠다.한 달여 전, 안사돈께서 파 모종이 있으니 심겠냐고 전화주셨다. 작년에 들깨와 마를 심어주셔서 잘 키운 적이 있었다. 나도 한참을 못 간 터라며 같이 심으러 가는 게 어떠시냐고 여쭈었다. 흔쾌히 동행하셨다. 오랜만의 집엔 무성히 자란 풀이 반겼다. 풀에 뒤덮인 텃밭이 부끄러워 막무가내 엎드려 풀을 쥐어뜯어 뽑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오이와 가지는 새끼손가락만한 열매를 겨우 맺고는 노랗게 비틀려 있었다. 큰형님이 주신 호박 모종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였다. 딸기 모종을 살 땐 손주들에게 직접 따게 해야지 꿈도 야무졌다. 그러나 토마토와는 달리 딸기는 어찌된 노릇인지 열매가 달리는 듯하다간 지고 달린 열매조차도 볼품없는 데다가 흙에 묻어 맥없이 잎만 뻗치고 자라있었다. 제법 이파리 성성하여 향기로운 맛을 줬던 고수와 청겨자조차 키가 자랄 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고, 싱싱하여 아름답기까지 했던 상추마저도 잎색은 바래고 대신 상춧대를 높이 올려 꽃을 달고 있었다. 잎채소들은 한창 자랐을 때 더 자주 더 많이 따 먹었어야 했다. 예뻐서 아끼느라 먹을 시기를 놓친 거였다. 고추도 먹을 만큼 크게 자란 것이 대견스러워 따지 않았더니 며칠 후엔 발갛게 익는 거였다. 더욱 이뻐 두고두고 감상(?)하려 했는데, 그만 갈라지고 썩어버리는 게 아닌가. 주인 잘못 만나 제 구실을 못한 채소들에게 미안함이란….안사돈도 같이 풀을 뽑으시면서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를 막을 수 없다고 하신다. 약을 치지 않으려면 비닐로 멀칭이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가져오신 파는 마침 집에 있는 검은 비닐자투리를 땅 위에 덮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심었다. 그렇게 안사돈께서 소중히 심어주신 파였다. 멀칭 덕에 다른 곳보단 잡초가 훨씬 덜했고 텃밭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물을 주며 정성을 더했더니 제법 꼿꼿하게 자라주었다. 그러나 꽤 오랜 장맛비엔 속절없었다. 기승을 부리며 자란 풀더미에 가려있는 가엾은 파에 미안함마저 들었다. 농사는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던데, 자주 오지 못한 내 탓이 크다며 자책할 밖에….한해의 배움이 크다. 내년 텃밭을 일굴 때는 올해의 실패를 지혜로 삼아야겠다. 유기농퇴비를 듬뿍 섞어 땅심을 도와준다. 골을 파서 두둑을 크게 만들어 올리고 모종과 씨앗은 두둑에 심는다.-나는 골에다가 모종을 심었었다.- 아, 밭두둑엔 미리 넓은 멀칭비닐을 덮어 두어야지. 무엇보다도 내 발자국소리를 더 자주 듣게 해 주리라. 예쁜 모종과 씨앗에게 더 이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주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그래도 된장에 송송 썰어넣은 파향과 고추향은 달디달았다. 갓 딴 고추를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무니 서걱! 소리가 싱그러웠다. 이게 바로 텃밭의 맛이로구나 싶었다.

2023-08-09

텃밭 1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작년 처음 이 집에 왔을 땐, 집을 둘러싼 넓은 빈터, 풀로 가득히 뒤덮여 있는 땅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감당하려면 계획을 세워야겠다 싶어 생각만 하고 풀만 없애는 중이었다. 상추 모종을 사서도 땅에 심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풀 속에서 이 여린 상추가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길쭉한 화분을 몇 개 사서 거기에 몇 포기씩 심었을 정도였다.여름 즈음 김장용 배추와 무 모종 한 판, 60포기씩을 사온 남편을 타박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심고 관리할 거냐면서 투덜댔다. 그래도 사온 걸 어쩌랴. 해가 잘 들 만한 터를 골라 풀을 뽑고 골을 파서 모종을 두 줄 나란히 심었다. 매일 사는 게 아니라 물 줄 일이 걱정이었다. 배추 모종 때문에 주말이 아니라도 틈날 때마다 가서 물을 주어야 했다. 비싼 배추를 먹을 판이었다. 작은 떡잎이 지고 쑥쑥 자라 제법 잎이 이들이들 커질 때 즈음엔 배춧속이 노랗게 꽉 차기를 기대하면서 끈으로 묶어주었다. 이웃 텃밭을 보고 흉내낸 거였다. 그러다 바쁜 일상에 배추를 까맣게 잊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화들짝 놀랐다. 배추가 생각났다. 저녁참에 잠시 틈을 내어 황급히 달려갔다. 큰 비닐봉지를 사 들고 가서 배추를 뽑아 담았다.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아서였는지 까맣게 벌레가 낀 배추가 많았다. 성한 걸 골라도 제법 많아 이웃에도 나눠주었다. 나물로도, 물김치로도 꽤 오래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신 이렇게 큰 농사(?)는 짓지 않으리라 결심이 섰다.올핸 수돗가 근처에 작은 텃밭을 일궜다. 물 주기가 편하다는 판단에 고른 터였다. 채소 모종을 이것저것 사 본격적으로 텃밭농사를 해 볼 참이었다. 미리 풀을 뽑고 유기농 퇴비를 사서 흙과 섞어 두었다. 모종은 오일장에서 사기로 했다. 옹기종기 나온 예쁜 모종은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구경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서너 개 정도의 작은 포트에 1~2천 원짜리 모종을 이것저것 샀다. 토마토와 고추는 기본, 파, 가지, 오이, 내가 좋아하는 고수와 청겨자도 샀다. 텃밭을 늘려가며 당귀, 명이나물, 땅콩에다가 양배추를 줄지어 심었다. 안동의 지인이 상추 모종을 잔뜩 보내주셔서 길게 한 줄 심었다. 심을 땐 시들하던 애들이 며칠 지나선 꼿꼿해지다가 제법 실해지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모두의 집에 가면 제일 먼저 들르는 최애 스팟이 되었다. 손주가 집주변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주워 모은 것이 10여 개나 되었다. 지줏대인 것 같다고 했더니 같이 세우자고 한다. 고추와 토마토 모종 옆에 손자는 망치로 박아 세우고 나는 끈으로 묶었다. 후에 제대로 된 지줏대를 사와 더 높게 세웠다.쉼없이 자라는 풀을 갈 때마다, 볼 때마다 뽑아주었다. 고추는 흰 꽃을 핀 데마다 고추를 맺고, 토마토도 조롱조롱 열매를 달아낸다.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는 손녀에게 작은 통을 하나 들려주며 토마토를 따보라고 했다. 네 대답하면서 달려가 토마토 넝쿨 아래에 쪼그리고 앉는다. 빨간 토마토를 똑 따서 하나는 통에 담고 하나는 입에 넣어 오물거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텃밭 재미란 이런 건가 싶었다.

2023-08-02

백일홍꽃밭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족히 60㎡는 넘는 제법 큰 밭이다. 작년 가을엔 구석에 밭을 작게 일구어 배추니 들깨니 심어 좀 뜯어먹긴 했다. 그래도 묵혀둔 자리엔 풀만 그득그득 자랐다. 부지런하기만 하다면야 온갖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테지만 천성이 바지런하지 않다. 게으른 자의 고민을 덜어줄 좋은 방법은 없을까 여럿에게 자문을 구했다. 혹자는 고사리를 심으라고 했다. 풀이 덜 자라고 봄에 고사리순을 뜯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예쁜 꽃도 보고 몇 년 후엔 뿌리를 캐먹을 수 있는 도라지를 적극 추천한 이도 있었다. 도라지가 꽃은 예쁘겠으나 몇 년에 걸친 농사라고 생각하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꽃집을 경영하는 친구가 백일홍을 추천했다. 씨만 뿌려주면 거의 손이 안 갈뿐더러 여름내 꽃을 볼 수 있다고 했다.나 역시 농사보다는 꽃을 즐기고 싶었다. 지난봄 남편과 같이 며칠에 걸쳐 풀을 뽑은 자리에 백일홍꽃씨를 마구 뿌렸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난 6월 초, 백일홍꽃이 한 송이 피었다. 며칠 뒤 가니까 또 몇 송이 더 피면서 사람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분홍, 연분홍, 다홍, 빨강, 주홍, 노랑색의 꽃이 홑겹으로 피다가 며칠 뒤엔 2겹, 3겹, 또 며칠 뒤면 4겹, 5겹, 6겹의 두터운 꽃송이를 마구마구 피워댔다. 남편도 백일홍은 성공했다고 뿌듯해했다.마치 꽃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루에 의자 꺼내어 앉아 꽃밭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간이 절로 갔다. 그야말로 꽃멍이었다. 어디 꽃뿐인가. 온동네 나비란 나비는 모두 우리집 꽃밭에 와 있는 듯했다. 세어 보다 수를 잃을 정도로 많은 나비들이 꽃을 탐하며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문득 사미인곡의 한 소절이 떠올랐다.‘찰하리 싀여디여 범나비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대족족 안니다가 향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저 나비들은 백일홍 향을 묻혀 어디로 날아갈까….혼자 보기 아까웠고 우리 가족만 보기에도 아까웠다.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여기저기 보내며 우쭐댔다. 꽃멍하러 오시라고 자랑삼아 유혹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소녀같이 흔연해하시는 어른이 가까운 청도에 계신다. 꽃보다 아름답게 노년을 즐기시는 분인데 얼마전 허리를 다치셔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시다. 꽃사진만으로도 감탄하시는데 직접 꽃을 봬드렸으면 하는 마음에 시간을 내어 모시고 와서 꽃구경을 시켜드렸다. 가까이 대구에 사는 후배도 꽃멍하고 싶다며 기어이 짬을 내어 와 한나절을 머물렀다.44년 전 대구의 한 여중에서 1년간 같이 교사로 지낸 인연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모임이 있다. 다섯 분의 선생님들이 대찬 장맛비를 뚫고 서울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와 모였다. 이 꽃 보러 오신 귀한 걸음인지라 하룻밤을 묵으며 함께 지냈다. 빗줄기 속에도 꽃빛을 잃지 않은 백일홍 덕에 꽃놀이만큼이나 황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이 꽃 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을 봤으면 싶었다. 나무판자에 글씨를 크게 써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집 앞 우물 위 덮개에다 올려 두었다. “집안에 들어와서 백일홍꽃 구경하세요”

2023-07-26

줄무늬와 주름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전 독일 사는 사촌이 휴가로 귀국해 모처럼 우리집에 놀러왔다.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녀 린의 돌사진이었는데 우리 가족 외엔 아는 사람이 없어선지 누구냐고 물었다. 건이 쪼르르 달려가더니 사촌에게 자기를 번쩍 들어올려달란다. 독일 할머니 내가 가르쳐줄게요. 이 사람은 큰아빠고요, 이 아이는 서울 동생 은이에요…. 근데 이 사람은 누구지? 아 작은할아버진가? 열심히 가족을 안내해주고 있었다.내친김에 동생에게 두 아이들 결혼식 앨범을 꺼내 보여주었다. 건은 또 옆에 와서 참견한다. 큰아빠 큰엄마 결혼식에 엄마는 왜 없어? 그때 너희 엄마는 아직 결혼 안해서 여기 없지. 그럼 아빠는 왜 있어? 아빤 큰아빠 동생이니까 있지. 건의 물음은 끝이 없었고, 설명에 진이 질 지경이었다. 한복 입은 내 사진을 보더니 한참 들여다본다. 근데 이 사진에는 왜 줄무늬가 없어? 줄무늬? 우린 건을 바라보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의아해했다. 동시에 건에게 물었다. 줄무늬가 뭐야? 건이 대답했다. 할머니 얼굴에 줄무늬가 없잖아…. 아 주름…. 건이가 말하는 줄무늬란 얼굴의 주름을 말하는 거였다. 대답해 주었으나 궁색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적었고, 화장도 했고, 또 속말로는 ‘아마 사진사가 포토샵도 했을걸’이라며 설명하면서 동생과 나는 다시 또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어쩌면 주름살이라는 단어를 몰라서였겠지만 주름살을 줄무늬라 표현한 건의 표현력과 어휘력에 새삼 찬탄했다.지금 생각하니 주름보다는 줄무늬가 더 아름답고 적합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늬란 옷감이나 조각품 따위를 장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모양이라고 사전에 쓰여있다. 옷감에 수를 놓거나 조각에 새기거나 하여 예쁘게 장식하는 것이니 줄무늬란 줄로 장식을 한 무늬다. 얼굴의 주름은 장식을 위해 줄을 새겨넣은 무늬인 셈이다. 그에 반해 주름이란 피부가 쇠하여 생긴 잔줄, 또는 옷감이나 종이의 구김살이다. 일부러 새긴 무늬가 아닌 피부의 노화로 생긴 줄이요, 원래 팽팽하던 피부가 구겨져 생긴 줄이 주름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면 절로 생기는 주름이라도 되도록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열심히 노화방지에 애쓰고 또 원치 않은 구김살이니 펴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 아닌가.생각의 차이고 표현의 차이다. 나이들면서 저절로 생긴 주름을 무늬라고 치자. 눈가에 잘게 잡힌 눈주름은 실은 평생 열심히 보며 울며 웃으며 만든 웃음줄무늬이다. 또 나이들어 보이게하는 팔자 주름은 한평생 먹고 마시며 말하면서 입가 양옆에 새긴 무늬다. 그렇다면 두 눈썹 사이에 생긴 미간 주름은 걱정근심 고통을 이기며 참아서 만든, 미간에 새긴 세로 줄무늬이다. 돌아가신 엄마의 유난히 굵고 깊게 팬 이마 주름은 오직 자식을 위해 사셨던 극진한 모정의 삶이 새겨넣은 큰 가로줄무늬였던 셈이다. 이제부터라도 내 얼굴에 이런저런 자잘한 줄무늬를 새기려면 더 열심히 웃으며 말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아픔과 고난이 닥쳐도 지혜롭게 이기면서 미간과 이마엔 결고운 잔무늬를 새겨넣어야겠다. 손자의 재밌는 말 덕에 나의 남은 삶은 다시 더욱 여유로워질 터이다.

2023-07-19

봉숭아꽃 물들이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집 뜨락에 추억의 꽃씨를 심었다. 채송화, 분꽃, 봉숭아꽃. 부지런히 물을 줬는데도 자라기는 제각각이다. 씨가 가장 자잘한 채송화씨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한 송이 겨우 피는 흉내만 냈다. 제법 씨가 굵은 분꽃은 듬성듬성 던져 심었는데도, 노리짱하게 자라는 게 영 시원찮다. 봉숭아만 실했다. 가지런히 싹을 틔우더니 불그스름한 줄기가 쑥쑥 자랐다. 잎사귀를 내더니 어느 날부턴가 진분홍, 연분홍, 주황의 여리고 예스러운 꽃을 피워 내어 예쁘다. 언젠가 서울 손녀가 오면 손주들 다같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매번 갈 때마다 물을 주며 곱게 키웠다.아니나다를까 윤이는 봉숭아를 보자마자 반색을 했다. 그리고는 냅다 봉숭아꽃물들이기를 하겠단다. 어린 다른 애들은 봉숭아꽃도, 꽃물 들이기도 몰라 물어대는 중이었다. 어느 게 봉숭아예요? 물들이기가 뭐예요? 나도 할래요….꽃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며 기다리게 했다. 백반을 사왔다. 실, 비닐장갑을 내와 이벤트를 시작했다. 네 아이 모두에게 먼저 꽃을 따게 했다. 꽃과 잎을 고루 따서 마늘절구에 넣어 찧어 짓이겼다. 아빠 엄마들이 달려들어 찧은 봉숭아즙을 손톱과 발톱에 올려 주었다. 비닐장갑의 끝을 잘라 손가락마다 씌워주고는 인내심을 가르쳤다. 밤새워야 하는데, 봐주겠으니 낮잠 한숨씩 자야한다며 겁을 주었다. 잠시 조용했다. 어디 아이들이 가만있을 리 있겠는가. 십여 분이 지나자 먼저 바른 아이부터 씻어 달란다. 어쩌면 그 짧은 시간에도 제법 발그레하게 예쁜 봉숭아꽃물이 들었다. 발라 준 어른도 바른 아이도 신기해하면서 손톱 발톱 자랑을 한다. 한여름 대청마루엔 봉숭아꽃물 든 웃음소리가 차고 넘쳤다.옛날, 나 어릴 적엔 큰집에서 이런 놀이를 했다.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큰어머니께서 주신 하얀 명반을 큰 돌 위에 얹어 작은 돌로 깼다. 봉숭아꽃도 돌로 찧었다. 꽃과 잎을 함께 찧어서인지 봉숭아 찧은 물색은 누렇거나 검었다. 가루가 된 명반과 섞어 손톱 위에 얹었다. 큰어머니는 흰 천을 작게 오려 손톱을 감싼 후 실로 칭칭 감아주셨다. 다섯 손가락을 오무리지 않아야 했으므로 쫙 편 채로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흰 꽃이 오롱조롱 매달린 꽈리나무에서 꽃의 수를 세었다. 마당 한켠에 핀 키 큰 접시꽃에서 붉은 꽃송이를 따서 꽃의 밑쪽을 조심스럽게 반 갈라 코 위에 올려 꼬끼오해보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손가락 끝을 동여맨 실과 천에 시커먼 물이 들면 실을 풀었다. 통통 부은 손가락과 손톱엔 붉은빛이 돌았다. 도발적인 봉숭아물의 색기에 잠시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 후 여름마다 간 이모네나 외가댁에서도 어김없이 손톱물을 들였는데, 그 빨갛던 손톱의 색도 왠지 내내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여름 지나 가을쯤 반달만큼 남은 손톱이 겨울이 다 되어 희미해져 사라질 때까지 남들 눈에 띌까 감췄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도 이듬해 여름엔 또 봉숭아꽃을 찧었다.오늘 봉숭아꽃 물든 손톱을 하고 간 손주들이 내일 학교와 유치원에서 친구나 선생님께 손톱을 보이며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떤 느낌을 말할까 궁금해진다. 부끄러움은 절대로 아니지 싶긴 하다.

2023-07-12

아주 작은 자원봉사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난 몹시 게으르다. 집안일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 집안일 중 밥하고 반찬하는 것-난 이 두가지 일을 창조적인 일이라고 한다.-이외에 빨래며, 설거지와 같은 소위 가사재생산적 일은 정말 하기 싫고, 해도 표시 안나니 더욱 하기를 미룬다. 생전 내 집에 다니러오신 친정엄마는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닦으며 혀를 끌끌 차신다. 넌 어려서도 따라 다니며 치워 줘야했어. 어찌 그렇게나 뒷손이 없는지, 시집가서도 그 버릇 못 고쳤으니 쯧쯧….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자아이 둘이 어지르는 건 더욱 만만찮았다. 미루다미루다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청소하는 생색을 내면서 툴툴거렸다. 남자 셋이 어지르고 여자인 나 혼자 치우다니 힘들다 힘들어. 곁에서 큰아들이 슬쩍슬쩍 장난감을 치우면서 한 마디 거든다. 엄마, 셋이 어지르는 게 아니라 넷이 어지르잖아요….아이들이 학교 다니고, 내가 직장 다니고부터는 내내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아들들이 커서 대학으로, 군대로 가면서 남편과 둘만 있게 되자 집안일이 간소해졌고, 도우미 없이 그럭저럭 꾸려 나왔다. 아침마다 쓸고 닦고, 매끼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바지런함이 늙어서야 돌아온 건 아니었다. 잔소리라곤 전혀 없는 남편 덕분에-그렇다고 도와주지도 않지만- 그저 대충 치워가면서 사는 중이었다.그러다가 최근 난 갑자기 부지런을 떨고 있다. 목요일 아침, 아니 수요일 저녁부터 집안일로 부산하다. 왜냐하면 목요일 오전 약 1시간 동안 자원봉사를 하러 가기 때문이다. 자원봉사 한답시고 내 집꼴을 제대로 건사 안한다면 위선이라 싶어 깨끗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우리집은 모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은퇴 후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가 자원봉사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재능기부 정도는 했으나 시간이 생기면 반드시 하고자 결심했던 터였다. 자원봉사자 모집공고는 없나, 구청소식지를 살펴보고 길에 걸린 현수막을 살펴보던 중에 지산종합사회복지관 공고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봉사 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따뜻한 밑반찬을 전달해 줄 차량배달 봉사자 모집” 딱 이거다 싶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이후, 10가구 정도에 반찬 배달하는 일이었다.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 매우 가벼운 일이었다. 곧바로 담당사회복지사에게 연락하고 목요일 만나 동행하며 길을 익혔고, 주소지를 쓴 종이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지 벌써 7주째다. 첫 주엔 골목을 찾느라 헤매고, 네비게이션을 봐도 뱅글뱅글 도는 길을 진땀깨나 흘렸다. 시간대가 택배차량과 겹치는 골목엔 멀찌감치 차를 세워두고 뜀박질을 해서 배달하곤 했다. 대부분 남자어르신이 혼자 사시는 집이었다. 10집 중 한두 집은 어르신이 계시지 않아 문 앞에 반찬꾸러미를 걸어 두고 사진을 찍어 두어 착오가 없게 했다. 처음엔 겸연쩍은 듯 반찬 꾸러미를 그냥 받던 어르신들이 서너 주가 지나자 인사를 건네주신다. 더운데 수고가 많습니다. 길 찾기 힘드시죠? 길가 담벼락에 난 쪽문으로 만나는 한 어르신은 꾸러미를 건네 드리면 파란색 이온음료캔을 챙겨주신다. 점심 전에 꼭 따뜻한 국과 반찬으로 식사하시라 싶어 부지런히 배달하는 중이다.

2023-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