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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의 기울어진 독서벽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노벨상을 받은 한강의 열풍은 침체기의 늪에 빠진 우리 독서계를 순식간에 휘저었다. 서점가엔 그의 소설이 동이 나고 인쇄소에선 밤을 새워 그의 책들을 찍어내는데도 예약 없인 사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광풍 같은 열정은 정말 못말리겠다 싶은 생각도 하면서도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지 않으면 왠지 애국자가 아닐 것 같았다. 바쁠 거 없어, 이 바람이 어지간히 숙지막하면 사야지 하면서도 괜히 조바심이 났다. 은퇴 후엔 책을 사지 않으리라는 강한 결심을 하고 주로 집 가까운 공공도서관에서 대출카드를 만들어 두고 책을 빌려보던 나였다. 도서관 검색을 해 봤더니 역시나 한강의 책들은 모조리 대출되었다. 예전 ‘채식주의자’를 미국의 지인에게 주고 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이정희 교수께서 세 권의 그의 책을 가지고 있다시길래 나중에 빌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남편이 종종 가기를 즐기는 경주 라한호텔에 있는 경주산책이라는 서점에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원에게 한강의 소설 없죠? 라고 물었다. 있다며 그가 가리키는 곳, 서점 입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한강의 작품들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워낙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서점이라 아직도 팔리지 않은 책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혹시나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괜스레 좌우를 살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얼른 집어들었다. 나온 지 며칠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새 책이었다. 무려 128쇄, 28쇄나 되었다. 하여튼 책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마침내 나도 애국자(?)가 된 듯 설레며 책 읽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책들은 ‘채식주의자’와 같이 불편해하지 말고 잘 읽어야지 결심을 곱씹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밝힌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들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쓰인 그의 소설은 잘 읽혀지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사로 읽는 보통 소설과 달리 술술 읽혀지지 않은데다가 시 감상하듯 읽어도 만만치 않고 하염없이 더뎠다. 책 뒷면의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위안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도 두 권을 머리맡에 두고, 마치 어려운 숙제하듯이 번갈아 읽고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소설의 주된 테마로 삼은 소설가로 박완서가 떠올랐다. 박완서는 자전적인 체험을 소설로 쓴 ‘나목’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설이 작가의 인생과 가족사를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했다. 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로서의 현실, 가부장적 가정 구도, 전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여성, 중산층 등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아래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관찰한 작품들이 많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한 ‘그 남자의 집’을 책장에서 꺼내와서는 단숨에 다 읽었다.

2024-11-06

사찰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매월 3번째 일요일이면, 사찰 순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서두른다. 7월부터였으니 이번 달까지 4번째였다. 사촌언니가 몇 년째 다녔던 ‘청계사 108기도순례’팀에 나를 넣어주어 가게 되었다. 언니가 보여준 일정표에는 일 년 계획이 미리 짜여져 있었고, 전국 팔도를 망라했다. 낮이 긴 여름에는 대구에서 먼 곳인 전남 해남, 강원 동해나 금강산, 충남 계룡산, 경기 화성, 전북 완산으로, 해가 짧아지면 경남 밀양, 충북 영동, 경북 경주였다. 그렇게나 많은 절이 있다는 데에 한 번 놀라고, 내가 가보지 못하고 모르는 절 또한 많은 거에 두 번 놀랐다. 우리나라엔 1만7141개의 사찰이 있고, 그 중 전통사찰은 982개소라는 정보를 검색해 찾아 보기도 했다. 나는 불교도이긴 해서 새해엔 팔공산 거조암을 찾는 루틴이 있고, 일 년 한두 번 108기도하는 정도였다. 기도보다는 역사문화 답사 목적의 사찰기행이 훨씬 많았다. 나의 첫 동참인 7월 일정은 강원도 금강산 건봉사, 화암사였다. 금강산은 북한 쪽에 있는 산인데 우리 땅에도 금강산이 있다니 호기심이 컸다. 미리 검색해보니 강원도 고성에 있으며 우리나라 동해안의 최북단이자 금강산의 최남단에 있는 절이었다. 장마 끝이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고, 가는 동안 보게 된 강이나 작은 시내조차도 싯누런 큰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대구에서 거의 5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먼 곳이었다. 관광버스 두 대에 꽉 찬 동반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여신도들이었다. 절에 도착하면 그들은 모두 곧바로 대웅전, 극락전, 삼성당을 차례로 찾아들어가 정성껏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나는 삼배 정도만 하고는 절의 역사와 문화재를 찾아 기웃거렸다. 건봉사에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기념관이 있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화암사는 절 이름대로 우리나라 구비설화의 대표적 화제(話題)인 쌀바위 전설이 있는 절이었으며, 과연 절 건너 야트막한 산 위엔 매우 큰 쌀바위가 있었다. 50년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몰랐다. 이제야 이런 인연으로 이곳엘 올 수 있다니, 몰라서 부끄러웠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세상엔 정말 배우고 공부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공부한답시고 안다고 나섰다간 큰일 날 뻔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첫 시작의 강렬함은 이후의 일정엔 되도록 빠지지 않는 열정을 키웠다. 더구나 먼 여행의 동반들이 재밌고 좋았다. 차 안에선 각자 챙겨온 간식들이 좌석의 앞뒤로, 옆으로 넘나들며 나누어지기 바빴다. 내가 가져간 과일 몇 개를 나누어 덜면 가벼워질 줄 알았던 가방이 더욱 무거워지는 따뜻한 마법. 얼마 되지 않은 동참금을 내면 아침과 점심을 실하게 먹고-강원도는 멀다며 저녁식사까지 챙겨주었다- 먼 길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어디 있으랴. 남편에게 자랑했더니 남자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 기억엔 남자는 없더라며 손사래를 쳤다. 팔공산 갓바위에 종종 올라 열심히 기도하시는 안사돈께 말씀드려 한 번 동행한 적은 있다.

2024-10-30

나의 삼국유사와 선덕여왕릉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학원에 다닐 때였으니까 45년 전, 1979년이다. 햇수를 꼽아보니 아득한 세월이다. 한문원전강독 교재가 삼국유사였다. 삼국유사(5권 9편)에는 짧거나 긴 139개의 이야기가 있다. 5명의 학생이 매 주 두 명씩 돌아가면서 원문을 해석해서 읽고 발표하는 식의 수업이었는데 한 사람 당 4~5개 정도의 기사를 선택했는데 나는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기사들을 골랐다. 그 중 하나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는 당에서 보낸 모란꽃씨가 향기가 없으리라는 것, 영묘사의 개구리 우는 것으로 백제군의 침입을 알아차린 일,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낭산 남쪽 도리천에 묻으라는 이 세 가지 얘기로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찬탄하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과의 첫 인연이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삼국유사를 들고 경주 가서 그 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나 그때뿐, 삼국유사는 잊혀졌다. 표지가 너덜거리는 낡은 책은 서가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석사 후 바로 결혼했고, 몇 년 늦게 박사과정을 했다. 육아와 집안일에 출강에 박사과정은 무척 벅찼다.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자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저 ‘먹고 자고’가 소망일뿐이었다. 논문 쓰느라 소홀했던 아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쏟기로 했으나 무위도식했던 나날이었다. 무료하게 방바닥을 뒹굴던 어느 날 책장 속 낡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삼국유사였다. 벌떡 일어나 책을 꺼내드니 깨알같이 주석을 달아놓은 부분이 펼쳐졌다. 동시에 그 옛날 꿈꾸었던 욕망이 떠올랐다.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네…. 대강 옷 걸쳐입고 그 낡은 책 하나만 달랑 들고 차에 시동 걸어 무작정 경주로 달렸다. 경주에 들어서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대학교 때 답사, 그 후론 온 적이 없었고, 게다가 지금은 혼자다. 막막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수석에 얹혀 같이 온 삼국유사를 펼치니 딱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그래 여기부터 시작하자. 표지판이 제대로 있었던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사천왕사지 부근까지 갔다. 풀숲을 헤치고 기찻길을 가로 건넜다. 제멋대로 자란 풀이 우거진 조붓한 길옆으로는 키 큰 소나무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 무덤들이 으스스했다. 무서움을 이기며 한참을 오르자 저 위 커다랗게 빛나는 왕릉이 보였다. 좁고 컴컴한 소나무숲을 지나서였는지 유난히 밝은 빛이 능 위에 쏟아졌다. 내 기억 속의 선덕여왕릉은 언제나 형광색 연둣빛으로 눈부시다. 선덕여왕릉을 시작으로 2년 넘게 경주에서 삼국유사 현장을 누볐다. 책을 쓰신 일연스님의 걸음걸음에 내 발자국이 닿아서였을까 1996년 경주에 개교하는 위덕대 교수가 되었다. 삼국유사 덕분이라 했더니 남편이 그 낡은 책에 하드양장의 표지를 입혀 삼국유사라고 금박으로 새겨 선물해 주었다. 25년 동안 위덕대에선 ‘경주의 삼국유사 현장기행’ 개발에 매진했다. 선덕여왕을 주제로 한 ‘여왕 코스’를 넣어 숱한 답사객들을 안내했다. 그 옛날 대학원생으로 선덕여왕님을 만났던 내가 지금은 선덕여왕경모회장이 되어 능제를 모시는 초헌관으로 뵙는다. 오는 10월 27일, 17번째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선덕여왕릉에서 거행된다.

2024-10-23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미안함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속보〕노벨문학상에 소설가 한강… 한국 작가 최초 수상.” 지난 주 10일 저녁, TV를 무심히 보고 있는데, 자막으로 뜬 뉴스 속보를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나도 몰래 크게 손뼉을 쳤다. 옆에 있는 손자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더니, 저도 일단 같이 박수를 쳐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할머니 왜? 할머니 왜요? 우리나라의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을 받는대. 우리나라 소설가가, 그것도 여성이, 또 그것도 젊은 나이의 소설가가…. 흥분된 마음에 믿기지가 않아 스마트폰으로 검색 확인했다. 몇 개의 속보가 같은 문장으로 떴다. 그 속보 아래에 생전 해보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다. “오늘 같이 기쁜 날이 또 있을까요?” 그날 밤 위덕대 이정희 교수와도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로서의 기쁨을 문자를 주고받으며 설레는 밤을 잠 못 이루며 보냈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정말 몇 년만에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올해 85세의 손윗시누님이시다. 깜짝 놀라 받으니 하시는 말씀이다. “한강 소설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니 참 얼마나 훌륭하고 장한 일인지, 자네도 좋제? 문학 공부하는 자네가 생각나서 전화해 보네….” 이렇게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모처럼의 기쁜 소식에 한마음이 되었나 싶다. 누군가는 벼락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지구가 흔들렸다고 하고 심지어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는 “세상이 꼭 발칵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무어라 더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기쁘고 떨린 가슴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진정이 안 된다. 온 나라가 한강을 알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소설을 읽으려 할 것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그러면서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몹시 무안해진다. 2017년 여름, 미국의 브링검영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가게 되었다. 연구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대사관에서 면접을 봐야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 비자를 못 받을까 조마조마했다. 대기실엔 2~30명이 넘는 면접 대기자가 있었고, 여러 칸의 창구 너머엔 남녀 면접관들이 있었다. 여성면접관과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렸고, 바람대로 여성면접관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인사하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미리 얘기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전공을 물었다. 한국문학, 고전문학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녀는 대뜸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이지? 당황해서 되물었고, 한강의 소설을 얘기하는 걸로 곧 알아차렸다. 2016년, 영국에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그 책을 아는 것 같았다. 그즈음 나는 책을 사긴 했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 다 읽진 못한 상태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몇 페이지만 읽었고 그 이유는 재미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요란하게 손을 저어가며 꽤나 많은 얘기를 했다. 다는 못 알아들었지만 분명히 들린 말, 똑똑히 기억하는 말은 “불편했어요.(uncomfortable!)” 나도 그렇다고 냉큼 대답하며 마주 웃었다. ‘채식주의자’는 미국에 가져가서 다 읽은 후 거기에 사는 한국인 소설가에게 선물로 주었다. 갖고 있을 걸 그랬나 싶다.

2024-10-16

지구온난화와 환경미화원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더워도 너무 더웠다. 장장 40여 일 가까운 열대야를 기록하며 푹푹 찐 여름이었다. 마치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공항에서 바깥으로 나서면 훅 끼치던 열기와 같은 무더위를 매일 겪어야 했던 여름이었다. 예년 같았으면 한여름 열흘 정도밖에 켜지 않았던 에어컨을 24시간 풀가동했다. 두 개의 선풍기도 꺼지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10년도 더 된 선풍기 하나는 모터 과열로 고장이 나 버렸다. 더위를 잘 견디는 나는 여름나기가 겨울추위보다 더 수월했다. 여름철 더위 안부를 들으면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뭐 그리 덥지 않다고. 거의 에어컨이 있는 실내, 차안, 집에서 지내니, 더울 틈이 없다. 잠시 에어컨 없는 데로 나와 이동할 때는 따뜻하다고 느낀다며 여름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더 싫었다. 내복을 챙겨 입고 옷을 켜켜이 껴입어야 하는 겨울보다는 차라리 여름이 더 좋다는 나였다. 실제로 땀 빨빨 흘리는 여름이 추위에 덜덜 떠는 겨울보다 나았다. 그렇게 더위를 잘 이기는 나였으나 올해는 아니었다. 글쎄, 나이가 들면서 체질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버텨내기 어려운 폭염이었다. 폭염의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상승이요, 그 주원인은 지구온난화라고 한다. 2021년 6월 IPCC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 활동에 의해서만 200년만에 1.1도가 상승했다고 한다. 인간이 자초한 일이니 인간이 풀 수밖에 없다. 지구를 지켜야겠기에 일상생활에서 작은 변화를 감행했다. 내가 불편해지면 지구가 편하다니 감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세탁할 때 세탁망을 활용하면 미세섬유를 걸러내 수질오염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식기세척기는 물을 절약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식기세척기는 9~12L의 물을 소비하는 반면, 손 설거지는 최대 40L의 물을 사용한다니 편리함보다 환경을 위해 식기세척기를 자주 쓰기로 한다. 일주일치 식단을 미리 계획하고, 한 주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요리해 소분해 둔다. 일요일 저녁에 일주일치 야채샐러드를 만들어 두면 육류보다 더 건강한 채소 식단도 챙기면서 냉장고도 비우고 음식물쓰레기도 줄인다. 당장은 어렵지만 조만간 자동차도 하나 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까운 거리는 걷고, 혼자 이동할 때는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습관으로 나를 길들이기로 한다. 탄소포인트제에 동참하려 테라스에 작은 태양광발전시스템 설치도 해뒀다. 얼마나 에너지가 절약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실천해보는 뿌듯함도 있다. 폭염이, 기후변화가, 지구온난화가 나의 일상을 이렇게나 바꾸었다. 지구온난화는 손녀의 장래 희망까지 바꾸었다. 얼마 전이었다. 린이 환경미화원이 될 거라고 말했다. 평소 아픈 사람 병 고쳐주는 의사가 될 거라면서, 할머니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 않게 해주고, 주름도 펴 줄 거라던 린이었다. 커서 의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라던 린이었다. 왜 꿈이 바뀌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백번 지당하다. “지구가 안 아파야 사람이 살지요. 사람보다 지구가 더 중요해요. 그러니 지구를 지키는 환경미화원이 될래요.”

2024-10-09

내방가사 세 자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역시나 내방가사가 인연이 된 또 하나의 모임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내방가사는 평생이다시피 내 인생을 바쳐온 연구 과제였고 성취였지만 소중하고 귀한 인간관계의 훌륭한 매개이기도 한 셈이다. 작년 봄, 대구한글서예협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중하고도 예의바른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경상도 억양도 아니었다. 매년 대구한글서예협회전을 개최하는데, 2023년의 주제를 내방가사로 하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좋은 기획에 귀가 솔깃했다. 당장 만나 얘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곁에 있던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한글과 관련 있으니 함께 만나자고 했다. 집 부근의 카페에서 만난 최민경 회장님은 단정한 올림머리에 기품있게 성장을 해 오셨다. ‘합쇼체’의 극존대어를 일상으로 쓰고, 예의가 몸에 밴 천상 서예인이셨다. 2022년 세계기록유산 아태 목록에 등재된 내방가사가 여성의 한글문학이니 한글서예전에 마침맞춤이라는 제안은 훌륭했다. 경북도한글문화콘텐츠민간위원장이었던 남편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한국국학진흥원에 연락해서 가능한 지원을 통해 전시를 유치하라고 권했다.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인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글날을 기념해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내방가사 작품을 선별하여 한글 서예로 옮겨 써 전시하는 걸로 정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국학진흥원 훈민정음 사업단의 담당연구원 박혜민 박사를 만났다. 나직나직한 말투에 다소곳한 그이는 아이디어는 풍부하고 일에는 빈틈이 없는 학자였다. 셋이 처음 만났지만 일에 관한 한 어찌 그리 손발이 척척 맞는지, 신기했다. 서예 작품 제작을 담당하는 최 회장님, 원본을 제공하고, 행정적 지원을 책임진 박 연구원의 역할에 보태 나는 약간의 자문을 하는 정도였다. 회원들과 함께 수차례 회의했고 그때마다 만난 우리 셋은 자매같이 정이 들었다. 대구한글서예협회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경북대 도서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릴레이특강도 했다. 경북도청에서 한 한글날 기념 전시는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지고 웅장하기까지 했다. 모든 행사는 끝났지만 우리의 만남은 끝낼 수가 없었다. 나는 최 회장님께 서예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은퇴 후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서예였다. 박 연구원은 최 회장님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최 회장님이 발굴 소개한 내방가사 작품으로 훌륭한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자 멘토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작년 말 송년을 겸한 자리에서 우리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잇자고 합의하고 우리 서로 자매가 되면 어떻겠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내방가사 세 자매’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린 서로 언니 동생이라 호칭하지 못한다. 처음 만나 부른 사회적 호칭이 워낙 견고했던 탓도 있지만, 셋의 관계가 다시 스승의 역할로 얽힌 때문이다. 하긴 예전엔 가족끼리도 사회적 역할에 따른 호명을 한 예가 있으니 뭐, 어떠랴. 호칭이야 어떻든 그리우면 이따끔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자매애 그 이상 아니겠는가. 나와 최 회장님은 매주 만나고, 그때마다 박 연구원과도 연락하고 만날 날을 기약한다. 어쨌든 이 좋은 인연을 이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2024-09-18

흰머리 소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내방가사를 인연으로 세 사람이 만났다. 20년도 더 전이었다.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지역 특화수업을 개설한다며 ‘경북의 여성문학인 내방가사’강의 요청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위덕대에 국문학과가 없어 교양국어와 작문강의만 하였던 터라 전공강의에 목말라하던 때였다. 그때 그렇게 만나 여태껏 인연을 이어온 귀한 분들이다. 유복혜 선생님은 청도에서 오셨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오실 때가 많았다. 강의를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히 들으시는지 강의하는 내가 송구할 지경이었다. 하회가 친정이라 어릴 적 듣고 자란 내방가사가 낯설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신 듯했다. 집안의 안어른들 암송하신 가사를 이제야 이론으로 배우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회가 있으신가 보였다. 기억력도 뛰어나 녹음해 들려드린 가사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시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배가 나보다도 십수 년이나 윗길이신데도 여리여리한 소녀감성이 있어 별호가 흰머리 소녀라 했다. 유 선생님의 학구열은 훗날 위덕대 2014학번 성인학습자로 입학하여 졸업하신 걸로 증명되었다. 무려 공로상까지 받으셨다. 이솔희 선생은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시인이었다. 수강자 중에선 나이가 어렸지만 나와는 오륙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여선지 이해도가 빨랐다. 시작 활동을 하면서도 전공공부 계속할 뜻을 비치더니 결국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유 선생님은 나를 스승이라며 꼬박꼬박 대접하시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한없이 배려적이지만 무례는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성은 닮지 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스승이시다. 이솔희 선생은 대학 강의와 다양한 문화기관의 사회 강좌도 열심이다. 줌으로 문학치료 강의를 하길래 유 선생님과 함께 신청해 배운 적도 있다. 최근 유튜브로 멀티단장시조를 매일 올리는 부지런함을 보면서 이 분 재능의 끝은 어디일까 생각한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그 중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기꺼이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습을 통해 바꿔라’는 말이 이어진다. 논어 속 공자님 말씀이다. 우리는 셋 중 어느 한 사람이 스승이 아니라 셋이 서로 스승이다. 처음엔 내방가사에 대한 내 알량한 지식으로 두 분의 선생으로 만났지만 20년을 동행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서로를 스승으로 삼아 기꺼이 따르는 사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했으니 셋은 완성의 숫자다. 우리는 셋이어서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해가 바뀌면 만나고 싶고 계절이 바뀌면 그리워진다. 만나면 고담준론에 행복하고 즐거움에 웃음소리도 맑고 높다.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이 또 어디 있으랴. 우리 모두 우아하게 늙되 마음만은 소녀같이 사시는 유 선생님을 닮자며 선생님의 별호를 우리 모임의 이름으로 삼았다. 흰머리 소녀.

2024-09-11

힘을 빼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힘 빼시고, 힘 빼시고” 매일 오후 8시부터 50분간 하루 10번 이상은 듣는 말이다. 버킷리스트에 있어 작심하고 3월초부터 시작한 수영이었다. 두어 달 쉬고 7월 초부터 다시 시작했다.초등학생부터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까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열대여섯 명 남짓 한 그룹이 되어 하는 수업이다.강사님은 모든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깍듯이 존댓말을 쓴다.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깨의 힘을 빼라는 말이다. 자꾸 몸이 가라앉는 게 어깨에 힘을 주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남들은 잘도 떠서 레인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단숨에 가는데, 난 거의 불가능하다.그 이유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 때문이란다. 내 딴엔 힘을 뺀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작심하고 어깨의 힘을 빼면 잠시 둥둥 뜬 듯하지만 곧 다시 가라앉으며 물을 먹고 콧속이 찡해지고 따가워진다. 원래 앞자리 썩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수업에선 앞자리는 커녕 자진하여 맨 뒷자리로 가 꼴찌를 자처하며 다른 수강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처음 수강신청을 할 땐 예전에 잠깐 했던 수영실력을 믿었다. 몸이 기억하리라. 그런데 영 아니었다.30대에 잠시 배웠던 수영을 몸은 절대 기억하지 못했다. 10대 때 바닷가에 살며 배운 수영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자진유급해서 초급반을 두 달이나 했는데도 수영 실력은 영 제자리인 것이 바로 힘빼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었다. 늙어 힘이 없고, 근육이 없고, 숨가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의 파리 올림픽 중계를 볼 때마다 종종 들리는 말도 ‘힘을 빼야 해요”였다. 양궁선수의 화살이 잠시 과녁의 가운데서 멀어지면, 사격선수의 총알이 중앙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직벽을 타고 오르던 클라이밍 선수가 맥없이 떨어지면 해설위원은 영락없이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양궁선수가 정확한 겨냥을 하려면 어깨의 힘을 빼야 한다는데, 저 무거운 양궁을 든 어깨의 힘을 어찌 빼라는 건지…. 선수들도 저럴진대 수영초보자인 내가 물속에서 어깨 힘이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나 위안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힘을 빼라는 건, 마음의 무게, 마음의 힘을 빼라는 것임을. 정작 나는 물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까봐 긴장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물에 절대 빠지지 않으니 믿으라고 했지만 난 몇 번 빠졌고, 허우적거렸고, 물을 먹었다.그러니 힘을 빼라는 말은 바로 몸의 긴장을 풀라는 말인 동시에 마음 속 긴장도 절대 갖지 말고 즐겨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라. 의심하지 말고 어깨의 힘을 빼면 가라앉지 않을 걸 믿어라. 믿어라. 그런 뜻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힘을 빼야 할 것은 어깨만이 아니다. 내 삶과 살림에서도 무게와 힘을 빼야 한다. 목과 어깨에 힘을 주는 힘자랑은 쓸모없는 허세요, 허망한 욕심이요,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다. 내 마음의 힘을 빼 더 낮은 곳에서 겸손해지자. 살림에서도 힘을 빼 최소함의 행복을 누리자. 그러나 지금은 어깨의 힘을 빼자. 그리하여 물 위에 둥둥 떠서 수영실력을 늘여 볼 일이다.

2024-09-04

양념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나는 여형제가 없다. 위로 세 살 터울의 오빠, 아래로 연년생인 남동생 가운데다. 엄마는 종종 남들에게 나를 가리켜 양념딸이라고 했다. 양념은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쓰는 참기름, 들기름, 깨소금, 간장, 소금, 파, 마늘 등등의 온갖 식재료를 일컫는다. 음식은 원재료도 좋아야 하지만 맛깔나게 하는 건 무릇 갖은 양념들이다. 왜 양념딸이지? 궁금했지만, 재미없고 무심한 아들들만 있는 것보단 하나 있는 딸이 마치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걸로 미루어 짐작했다. 알고 보니, 양념딸은 고명딸의 사투리이고, 아들 여럿 있는 집의 외딸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고명딸의 고명은 무엇인가.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 음식에 꼭 필요한 게 아니어도 음식을 더 예쁘고 맛있어 보이게 치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떡국 위에 얹는 노란색, 하얀색 달걀지단과 붉은 소고기 꾸미, 까만색의 김과 같은 색색의 웃기나, 감주 위에 동동 띄워 얹는 잣과 같은 것, 곧 서양요리의 토핑이 바로 고명이다. 양념이든 고명이든 간에 음식을 맛나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듯, 양념딸이나 고명딸은 아들 많은 집에 양념처럼 맛내고, 고명처럼 예쁘게 얹힌 하나뿐인 딸이라는 뜻이니 고마운 치사가 아닌가. 실제로 아버지와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무던히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지지해 주셨다. 아들과 딸을 전혀 차별하지 않는 두 분이셨다.어느 날 엄마에게서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한 얘기를 들었다. 예전 내가 초중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귀한 흰쌀밥 대신 보리밥을 주로 해먹었다. 미리 한 번 삶은 보리쌀을 밥솥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흰쌀을 한줌 넣어 지은 밥이다. 밥을 푸는 순서에 따라 흰쌀이 좀더 섞였다. 엄마는 아버지 밥을 먼저 푸고 난 뒤, 3남매 도시락밥을 펐다. 그 다음엔, 얼마 남지 않은 흰쌀과 보리쌀을 모조리 두루 섞었다. 그 순간 누구 밥을 먼저 푸나 항상 고민했다는 엄마. 맏아들 밥을 먼저 푸려니 양념딸이 걸리고, 딸 밥 먼저 푸려니 막내아들이 밟혔다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훗날 이 얘기를 남동생에게 했더니, 금시초문이라면서도 누나가 우리 삼남매 중 항상 우선이었어. 가난했지만 누나가 해 달라는 건 거의 다 해줬잖아. 우리집은 남아선호가 아니라 여자우대였어 한다. 그런가? 그렇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양성평등 부모님 덕에 난 매사에 남자애들과 겨뤄도 앞장섰고, 당당한 사회생활도 그 덕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집에서 제대로 양념이나 고명의 역할을 했는진 모르겠다.당시 여형제 많은 친구와 이종들이 있었다. 아들 보기 위해 딸을 줄줄이 낳은 게 확실한 이모님이 계셨다. 이종사촌들은 그 남동생을 귀히 아끼고 극진히도 보살폈다. 맏딸로 여동생만 넷을 둔 내 친구는 6학년 때 어머니가 남동생을 낳았다며 신나게 자랑했었다. 어쨌든 여형제 많은 이종사촌이나 친구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오빠나 남동생보다는 여형제가 더 다정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언니나 여동생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최근 사촌언니들과 가끔 만나 언니의 살가운 온정을 느끼며, 언니 없는 설움을 푼다.

2024-08-21

손주들의 좌우명(座右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방학이라 서울에서 내려온 손녀 둘과 대구의 손주 둘, 합해 넷이서 함께 할 프로그램을 찾던 중에 모두의 집이 있는 육신사 마을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일찌감치 신청해 두었다. 지난 토요일, 한국인성예절교육원에서 주관하는 ‘가족과 함께 묘골(육신사) 시간여행을 맛보다’라는 체험 프로그램에 손주 넷과 함께 참여했다.미리 본 일정표를 보니 다소 빡빡했다. 4학년 윤은 괜찮겠지만 나머지 1~2학년 아이들이 버거워할까 걱정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선생님들이 친절히 지도하는 선비체험, 승경도놀이, 민화문자도 그리기, 연 만들기 등은 아이들이 시간을 잊을 정도로 흥미로워했다. 워낙 사촌 끼리 사이좋기도 한 아이들은 매 시간 모든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들으면서 웃고 즐기고 재미있어해 덩달아 나도 흐뭇했다.마지막 프로그램은 가훈 만들기였다. 가족들이 상의해서 가훈을 만들어 발표도 하고 액자에 끼워 집에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생들은 가훈 대신 좌우명을 써 보라며, 자신의 자리 오른쪽에 써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문구라고 설명했다. 막내 린이 해맑게도 묻는다. 왜 오른쪽에 붙여요? 왼쪽에 붙이면 안돼요? 가까이 두란 뜻이니 왼쪽에 붙여도 돼. 웃으며 대답하신 선생님은 미리 연습할 종이 하나씩을 나누어 주신다. 애들이 과연 좌우명을 생각해 쓸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나는 미리 내가 갖고 있던 가훈을 아이들에게 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이들은 자기들의 좌우명을 생각해서 거침없이 적는다.‘한길로 가는 사람은 철창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4학년 윤의 좌우명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할수록 자유롭고 나중에 이룰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다. 듣고 보니 비유도 절묘하다. 우리는 ‘한 우물을 파라’고 배웠는데 요즘은 이 말이 맞겠네요. 선생님과 눈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비겁하면 죽고 용감하면 산다.’ 2학년 손자 건의 좌우명은 승경도 시간에 들었던 이순신 장군 얘기를 들어서 생각한 걸까? 아, 물론 건이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비겁은 악덕이요, 용감해야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걸지 모른다. 예전에 났으면 아주 훌륭하고 멋진 장군이 되었을 거라는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한다. ‘착한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며 쓴 은이. 기독교계 유치원을 2년이나 다닌 티를 낸다. ‘착한’, ‘천국’, ‘나쁜’, ‘지옥’을 굵게 써 제법 캘리그라피 디자인을 했다. 글자 ‘나쁜’에는 악마의 뿔을 두 개 달아 더 크게 경계했다. 막내 린은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어두컴컴한 길로 간다.’라고 정성스럽게 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속담도 제법 많이 아는 린이라, 어디서 본 문구냐고 물었더니 제가 스스로 생각해낸 거란다. 배우지 않으면 왜 어두운 길로 가는데? 공부를 안하면 아무 것도 모르니까 어둡고 답답하지. 공부를 많이 해야 잘 보이고 환하지. 할머니는 그것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래, 이 할미는 오늘도 너희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2024-08-07

일상을 이벤트같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일정을 적어두고, 달력에 빈칸이 있으면 왠지 불안했다. 해야 할 일을 놓친 건 아닌가 자책까지 했다. 학교 강의시간표를 기본으로 학회 발표, 교내외 각종 회의 등 요청이 있으면 되도록 참여했다. 거절할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시간은 많지 않았고 자연 가족은 희생해야 했다. 매년 남편과 아들의 생일에 팥밥과 미역국을 식탁에 올렸으나 외식하고 선물이나 하는 정도였다. 가족 대신 일 중심으로 살면서 이게 맞나 의심 한 번 없었다. 온갖 이벤트를 만들어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일벌레로 살았다.정년을 몇 년 앞두고, 서서히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자, 비로소 가족이 눈에 밟히고 가슴으로 들어왔다. 습관은 버리지 못하는가 보았다. 달력에 빼곡하게 뭔가를 적어두는 버릇은 여전해서 수첩과 종이달력이 아닐 뿐, 휴대폰의 달력에 가족들의 생일을 먼저 표시했다. 그 사이 네 명의 가족은 열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친정식구, 사촌언니들, 안사돈, 오랜 친구들의 생일까지도 색깔을 달리해서 표시해 두고 인사라도 하려 애썼다.가족들의 생일파티를 가장 먼저 챙겼다. 서울의 큰아들네는 선물이나 축하문자로밖에 못할 때가 많지만, 누구든 생일 앞뒤로 대구에 오면 꼭 챙겼다. 외식으로 때우는 대신 집에서 파티를 준비했다. 이벤트 무대를 학교에서 집으로 옮긴 격이다. 그렇게 요 몇 년, 해마다 손주들의 생일파티를 기획했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이벤트 과정이 있을 뿐 뭐 별 건 없다. 손주들의 식성에 맞는 음식과 생일상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폼 나는 음식을 장만했다. 색감 풍부한 어린이용 생일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흉내냈다. 준비하면서 즐겁고, 손주들의 웃음소리에 행복하고 사진으로 남아 흐뭇한 이벤트가 바로 손주들의 생일파티였다.작년엔 아들과 며느리 생일을 집에서 준비했다. 마침 내외의 생일이 하루 사이인지라 한 번 장식을 해두면 두 번 쓸 수 있어 더 편하다. 손주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로 기획(?)했다. 미리 장만한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상 위에 올리고, 상차림을 하는 모든 과정에 저희들이 함께해서 즐기도록 했다. 포스트잇에 문구를 맘대로 쓰라고 했다. 아빠, 엄마, 사랑, 해요, 건, 린 ♡. 이렇게 한 장씩 써서 미리 달아놓은 풍선과 가랜드에 붙인다. 미리 준비해 둔 꽃과 케이크를 아빠 엄마에게 주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전달하고, 꽃다발 전달 후 둘이 붙어서서 머리 위 큰 하트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해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저희끼리 미리 연습한 듯, 이벤트 즐기는 할머니의 유전자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특별한 날만 하는 게 이벤트가 아니라는 게 요즈음 드는 생각이다. 손주들과 함께 있으면 일상이 이벤트다. 해마다 자라고, 다달이 다르고, 나날이 새로워서 행복하니 이것이 이벤트다. 지금은 방학이벤트가 성업 중이다. 극장, 어린이세상, 교통랜드를 거쳤고, 오늘은 박물관으로 간다. 며칠 후 서울 손녀들이 오면 더 큰 이벤트가 있어야 할 것. 우리가 사는 육신사 일원에서 행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묘골 시간여행을 맛보다’라는 체험행사에 참여할까 일찌감치 예약해두었다.

2024-07-31

이벤트 만들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달 경주시가 2025년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개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자 2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1996년, 위덕대학교 개교 원년, 3월에 개교하고 5월경이었다. 신생학교를 알릴 홍보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 해 설립되어 태국의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ia-Europe Meeting: ASEM, 아셈)가 제3회 회의를 대한민국에서 개최하기로 결정, 경주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아셈 유치 경쟁을 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이로다. 위덕대가 있는 경주시를 위한 일이면서, 학교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당시 위덕대에는 학생은 1학년 400명밖에 없었으나 학생회와 동아리도 있었다. 학생회장 등 지도동아리 학생들은 선배가 없어 심심하던 차였다. 시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아셈유치서명운동을 하쟀더니 좋다며 신나했다. 서명지를 만들어, 일단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을 상대로 워밍업을 했다. 반응이 좋자 학생들은 더욱더 신났다. 수업 없는 주말엔 경주 시내로 나가자며 뜻을 모았다. 마침 5월이라 관광객과 특히 단체 수학여행단이 많이 오는 때였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위덕대 홍보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는 대릉원과 불국사를 홍보 장소로 정해서 2팀으로 나누었다. 홍보용 현수막도 만들었다.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 홍보 덕에 제법 많은 서명을 받아냈다. 이틀째, 지역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왔고, 월요일 아침 신문 1면에 꽤 큰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1차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학생들과 환호했다. 1주일간의 운동으로 약 2000명 정도의 시민과 관광객의 서명을 얻는 성과를 거뒀다. 서명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학생들과 논의 후, 경주시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학생 대표 몇몇과 함께 경주시장님을 찾아 전달식을 가졌다. 이 행사 또한 경주시에서 보도자료를 배포,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학교 홍보를 위한 우리의 의도는 100% 달성하였지만 아셈회의 경주 유치는 실패, 2000년 아셈회의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이 행사로 광고비 없는 학교 홍보가 가능할 거란 예상은 적중했다. 그 후 위덕대에 재직했던 25년 동안 참 많은 이벤트와 행사를 벌였고, 이를 방송과 신문 등 각종 매체에 알리는 홍보역을 자처했다. 그 중 기억하는 이벤트는 ‘더사랑한데이’였다. 2009년 겨울, 종강 무렵이었다. 교수회의 중에 기말고사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밥 한 끼 해먹이자 제안했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으로 만들기로 해서 일은 커졌지만 기쁘게 동참하신 교수들과 함께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 준 이 행사는 그 후 매 학기말에 열리는 학교의 전통이 되었다. 2014년부터 성인학습자들이 많이 입학했다. 그들에게 재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고맙데이’를 제안했다. 나이 상관없이 함께 공부하고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작은 파티였다. 이 또한 위덕대 평생학습자 날의 시초가 됐다.

2024-07-24

방과 후 수업 참관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손주들의 방과 후 수업을 참관했다. 아이들이 수업을 파한 후 매일 방과 후 수업을 듣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 대신 할머니라도 가면 손주들이 좋아하겠지. 보내준 시간표를 보니 두 아이의 수업이 달라 남편과 함께 갔다. 손자의 바둑 수업엔 내가, 손녀의 방송댄스 수업엔 남편이 가기로 하고, 중간 휴식 시간 서로 연락을 해 교실을 바꾸기로 했다.안내된 교실로 들어가니 20명이 좀 넘는 1, 2학년 학생들이 있었다. 교실 뒤에 마련된 자그마한 학생용 의자에 앉았다. 쉼없는 선생님의 주의와 훈계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쉬 안정되지 않았다. 주목하지 않고 옆자리의 친구와 떠드는 아이, 무슨 용무인지 몰라도 자꾸 선생님께 가는 아이, 번쩍 손을 들어 선생님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아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선생님께 가서 귓속말을 하는 아이 등등….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칠판의 바둑판을 이용해 수업을 계속하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짝끼리 대국하는 시간이 되자 교실은 비로소 조용해졌고 책상 사이로 다니는 선생님의 훈수가 가능해졌다. 후에 들으니 바둑 수업은 주의력이 없어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한 아이들의 학부모가 신청한 경우가 많단다.그날 이후 금요일까지 모든 방과 후 수업 참관을 자처했다. 창의수학, 미술, 농구, 실험과학, 바이올린 등 모두 7과목의 수업을 참관했다. 아이들의 외할머니와 동행했다.대부분의 수업이 한 반 약 20명 전후의 학생들이었고, 10명 내외의 학부모, 주로 엄마들이 왔는데, 우리 손주들은 할머니라도 반겨했기에 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조무래기들을 데리고도 수업을 이어가는 선생님들의 수고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참관기를 쓰면서 선생님의 노고에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수업도 있었다. 개인적 지도가 필수적인 악기 수업의 경우, 20명이 넘는 수업은 애당초 무리였다. 학생들의 개인차도 있을 건데다, 3개월을 넘게 수강한 학생과 1개월이 채 안된 학생들이 섞여있었다. 학생의 수업 빈도 노출이 다르면 개인차는 더 클 거였다. 학생마다 진도가 다르니 수업의 질이 좋을 리 없었고, 학생들의 수업 만족도 역시 좋을 리 없을 건 불본 듯했다.며느리에게 참관기를 피드백해주면서 얘기를 나눴다. 방과 후 수업은 학교의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난 후에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다. 공교육의 역할을 늘리고 사교육을 억제하는 정책이니 교육비는 과연 쌌다. 프로그램이 다양해서 저학년에겐 비교적 선호되는 제도인가 보았다. 더구나 우리 손주들 같이 맞벌이 부모의 아이들이라면 방과 후의 학원 순례를 줄이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문제는 수업의 질이다. 이왕지사 하는 거라면 수업의 질도 담보되면 더 좋지 않을까. 수업의 성격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아무리 실력있는 교사라도 한꺼번에 많은 학생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거였다. 참관 후 내린 결론 하나. 이번 여름방학부터 바이올린은 반드시 학원에 보내기로 하자.

2024-07-17

방치농법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3주 정도 비웠던 모두의 집에 들어간 순간, 와…. 말문이 턱 막혔다. 우물 부근엔 내 키보다 더 자란 뽀얀 개망초꽃이 뒤덮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마당도 마치 풀밭 같아 주인없는 폐가 느낌이었다. 작년 백일홍이 찬란했던 꽃밭터도 개망초꽃밭이 되어 있었다. 이를 어쩌나. 풀밭을 그대로 두나, 꽃밭을 만들기엔 너무 힘들고 시간도 늦었지 않을까 머릿속을 굴렸지만 답이 안 나왔다.그러나 텃밭은 그렇지 않았다. 3월과 4월에 흙을 일구고 풀을 뽑고 퇴비를 섞어 찰진 텃밭을 일구었다. 작년 기승부리며 자란 풀 때문에 채소 재미가 적었기에 미리 대비한다고 검은 비닐을 사서 멀칭도 해두었다. 오일장 서는 곳마다 가서 사와 심은 채소 모종들은 키높이를 맞추어 심었다. 가장자리엔 키가 높이 클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그 앞줄엔 쑥갓과 고추모종을 나란히 심었다.양배추, 오이와 콜라비는 앞쪽으로 몇 포기씩 줄을 맞추어 깔아주었다. 호박과 옥수수와 들깨는 담장 저켠으로 좀더 멀찍이 심었다. 자주 물 주러 가서 오목조목 자라는 모습을 즐기고, 하얀 고추꽃, 노란 오이꽃과 호박꽃을 흐뭇하게 보면서 왠지 큰 수확을 할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도 있었다. 양배춧잎, 콜라비잎, 들깻잎과 쑥갓을 따서 쌈 싸먹는 재미를 누리다가 5월 중순부터 거의 3주를 못 갔다. 미처 세우지 못한 고춧대를 아들에게 부탁했고 아들은 약속을 지켰고 사진까지 보내줬다. 그 덕분에 조롱조롱 맺혀있는 연두색 고추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많이 열렸다. 누렇게 달린 늙은 오이와 꼬부라진 오이가 여럿 뒹굴고, 그 옆엔 새끼손가락만한 오이가 꽃까지 단 채 여럿 맺혀있었다.애기 머리통만큼 큰 자색 콜라비도 실하게 자라있었다. 자라다 무게를 못 이겨 흙 위에서 뒹굴고 있는 토마토는 잎 속에 붉고 푸른 열매를 감추고 있고, 익어 터져버린 열매가 땅 위에 그득했다. 마치 하얀 마가렛꽃처럼 앙증맞고 예쁘게 꽃 핀 쑥갓은 해맑게 생글거리고 있었다. 양배추는 넓고 푸른 잎마다 벌레들이 구멍을 내어 멀쩡한 게 없었다. 양배추에 농약을 심하게 친다더니 과연 그렇겠구나.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땅을 덮은 검은 비닐의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풀들과 엉겨있었다. 풀을 뽑아주지 못한 터에 이 사달이 난 거였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잎 사이를 비집고 방울토마토를 땄다. 다 자란 고추를 골라 따고, 늙은 오이와 젊은 오이도 비틀어 따고, 콜라비도 그 중 큰 놈을 하나 골라 뿌리째 뽑았다. 호박더미를 뒤지니 애호박도 숨어있어 두어 개 건졌다. 향기로운 들깻잎도 잎 넓은 것으로 몇 장 땄다. 순식간에 바구니 두 개가 그득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감탄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수확한 채소들이 엄청났다.방치농법이란 말을 듣고 옳다구나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확물이 생기니 딱이다 싶은 말이었다. 더 알아보니 자연농법이란 게 있다. 자연이 짓고 인간은 시중드는 농법이라고 한다. 게으른 농법이 아니라 예사농사보다 품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난 그저 방치를 최소화해서 싱싱한 밥상을 차려준 채소들에게 고마움의 예를 갖출 정도의 위인일 뿐이다.

2024-07-10

선거홍보판과 그라피티 독일여행기(下)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마침 우리가 갔던 때가 유럽의회 의원선거기간이었던가 보았다. 독일의 튀빙겐, 슈튜트가르트, 뮌헨,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엔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도 선거홍보판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었다. 처음엔 하나같이 웃는 얼굴의 그 사진이 무엇인지 몰랐다. 동생이 선거홍보판이라고 했다. 모조지 2절 정도 크기의 빳빳한 종이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의 얼굴이 크게 박혀있고, 당명과 당의 선거구호가 쓰여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홍보판이 길가 가로등에 묶여 있었고, 어떤 곳엔 가로수 밑둥에 네 면으로 둘러 묶어붙인 것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현수막에 비해 훨씬 사이즈가 적었다. 평소에도 우리의 현수막을 도시의 흉물로 여겨 보기 싫어하는 나였기에 유럽의 홍보판은 훨씬 간소해서 도시의 미관을 그다지 해치지도 않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몇 년 전 미국에서의 경험도 비슷했다. 어떤 집의 정원에 사람의 얼굴이 크게 박힌 피켓이 꽂혀져 있어 매우 궁금해했다가 그것이 선거홍보판이라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개인의 정원에 저렇게 꽂아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꽂은 것인지 궁금해 하는 내게 돌아온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그 정원의 주인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의 피켓을 자발적으로 꽂는다는 거였다. 선거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깨끗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치열하게 치러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두 대륙에서 받았다. 우리의 선거홍보물을 ‘도시의 붕대’라고 불리는 현수막에서 저런 좀 더 자그마한 부착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귀국 후 유럽의회 선거 후의 판세를 분석하는 뉴스기사를 봤다. 우리가 버스를 탈 때마다 봤던 튀빙겐의 그 환한 미소의 여성 후보는 당선되었을까 궁금하긴 하다.그러나 그 아름다운 도시의 미관을 심히 거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그라피티(graffiti)였다. 그라피티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길거리 여기저기 벽면에 낙서처럼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공공장소의 벽면뿐만 아니라, 상가의 벽면, 대학 건물, 지하철역 벽면과 지하철과 기차의 표면에도 빈틈만 있으면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주로 검은색의 페인트로 크고 작은 글씨를 쓰거나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린 정도여서 그라피티를 예술이라 명명해야 한다면 이는 그림이 아닌 낙서였다. 어느 도시 건 어떤 건물이든 분별없이, 가차없이, 빼꼼한 데 없이, 함부로 휘갈겨 놓은 거니, 낙서였다. 독일의 그 고풍스러운 거리,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 비엔나의 오래되고 아늑한 골목의 작은 가게 벽에까지 그려진 낙서엔 화가 치솟을 정도였다. 그라피티를 운운할 때면 예술이냐 범죄냐로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선 엄연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얼마 전 경복궁의 담장을 훼손한 낙서로 온 국민이 분노한 적도 있지 않은가. 최근에는 그라피티를 거리의 예술로 대접하여 공공장소의 개성있는 벽화로, 또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그라피티까지도 있다고 들었다. 또는 사회정치적 메시지로도 인정하고 21세기의 문화현상으로 여기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현장을 목도해보니 예술로 용인하긴 힘들었다.

2024-07-03

“만져봐야 알지” 독일여행기(中)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외사촌이 사는 튀빙겐에 거처를 정해두고 인근 도시를 다니면서 늘 기차를 탔다. 낮의 기찻길 차창 밖은 전형적인 독일 시골 풍경이었다. 멀리 비스듬하게 야트막한 언덕은 모두 포도밭이라고 동생이 얘기해 주었다. 가까운 둔덕도 온통 푸르렀다. 남편이 저기 있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은 들판, 초원, 평원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물음은 거기 푸른 들판에 심은 작물을 묻는 것이었고, 동생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남편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슈트트가르트에서 튀빙겐으로 오는 길이었다. 셋이 서로 마주앉아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웬 남성이 양해를 구하더니 남편 옆 빈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어디서 왔느냐며 불쑥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이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단다. 놀라는 우리에게 남편의 휴대폰을 슬쩍 봤더니 한글이 보여서였다며 웃었다.이참에 남편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지 차창 밖의 푸른 들판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이 유창한 독일어로 묻고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먹 진 왼손의 새끼손가락부터 차례로 펼쳐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동생은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아마도 몇 가지의 작물 후보를 꼽는가보다 생각하며 동생의 통역을 기다렸다. “밀인지, 보리인지, 귀리인지 모른다. 만져보면 알 수 있는데…. 잘 모르겠다.” 맞는 말이긴 하다. 가까이 가서 보거나 직접 만져봐 알 수 있다는 그의 대답은 지극히 정확했다. 우리는 그의 말에 크게 동의하면서도 그 말이 왠지 몹시도 우스웠다. 그렇게 얘기의 물꼬를 튼 김에 우리는 튀빙겐에 도착할 때까지 유쾌한 수다를 나눴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우리는 그의 대답을 곱씹고 흉내내며 웃고 또 웃었다.며칠 후 비오는 저녁이었다. 동생이 평소 자주 가는 산책길 옆에 저런 밭이 있다며 가서 직접 만져보자고 했다. 엄청나게 크게 펼쳐져 있는 밭엔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두 가지 작물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만져 봐도 별무소득이었다. 농촌에 산 적이 없는 우리였다. 네이버 렌즈로 사진을 찍어 검색했더니 보리라고 했다. 그 옆 밭도 보리란다. 아직도 정확한 답을 못 찾은 우리는, 만져봐도 모르겠다며 깔깔댔다. 마침 거대한 트랙터를 몰고 오는 농부가 있었다. 동생은 손짓으로 차를 세웠다. 트랙터의 굉음까지 멈추고 얘기를 나누는 동생을 지켜보면서 나는 궁금증에 조바심이 났다. 그와 헤어진 후 동생은 나를 밭 가까이 데려갔다. 이건 밀이고 저건 보리래. 그런데 왜 웃었느냐는 내 물음에 동생은 대답했다. “밀은 빵을 만드는 거고, 보리는 맥주를 만드는 거래. 저기 보리밭은 자기 건데, 맥주를 만드는 게 아니고, 소를 먹이는 거래. 그렇다고 소가 취하지는 않는대. 아마도 우리가 밀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드디어 농부를 만나 우리의 의문을 풀었고, 남편에게 밀과 보리라는 명쾌한 답을 전했다. 독일에서 만난 두 명의 남성은 독일인답게 진지해서 유쾌했다.그 후 여행 내내 셋 중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 물으면 먼저 이렇게 대답했다. “만져봐야 알지….”

2024-06-26

걷고 보고 듣다 독일 여행기(上)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퇴직하자마자 곧바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 끝날 무렵엔 2년간 유치원을 다니는 연년생 손자와 손녀의 등하원을 돕느라 또 미뤘다. 지난 3월로 막내 린이가 학교에 가게 되자 이젠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 제일 위쪽에 있는 이 여행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독일에 외사촌 동생이 살고 있었다. 20년도 훨씬 전에 음악공부를 위해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음악치료를 더 공부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생이다. 휴가 때마다 귀국하면 반드시 만나서 웃음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친동생 같이 살가운 사이다. ‘네가 있을 때 독일살이 하고 싶다.’며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말했더니, 반색을 하며 오라고 했는데, 앞서의 사정으로 미뤄진 지 4년이나 지났다. 동생은 해마다 휴가계획을 잡으면서 나의 독일행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이번 여행은 작년 11월에 동생이 2024년 휴가 계획을 세우며 잡은 일정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다에 합의하면서 우리는 신나게 여행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점찍듯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은 싫다. 대신 며칠씩 한곳에 머물기. 이왕지사 먼 길 가는데 독일만 가기는 좀 아까우니, 주변국가의 도시도 몇 군데 둘러보기. 우리 내외 나이가 있으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말자. 이상이 나의 요구 조건. 남편은 독일의 시인과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을 사서 탐독하더니, 그들의 흔적들을 찾고 싶단다. 동생은 음악 전공자다운 이벤트를 제안했고 나도 대찬성. 두 편의 오페라와 한 번의 연주회가 추가되었다. 우리의 요구와 동생의 제안으로 세상에 둘도 없을 멋진 일정이 되었다. 2주를 훌쩍 넘는 비교적 긴 일정이었다.동생이 사는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튀빙겐에서 며칠을 머물며 독일살이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아파트를 빌려놓았고,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나와 남편의 교통카드까지 발급해 두었다.걷지 말기는 애시당초 제외였다. 또한 걸어야 보였다. 우리는 하루 평균 1만5000보 이상 걸었다. 2만6000보까지 걸었던 날도 있었다. 매일 만보기의 기록개신을 확인하면서 놀라고 대견해 했다. 밤이면 잠에 골아 떨어졌고 이튿날 또 멀쩡해졌다. 스스로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즐겁게 걸었다. 남편은 좀 힘들어했지만 잘 참아주었다. 덕분에 우린 도착한 날 밤에 딱 한 번만 택시를 탔을 뿐이었고, 모두 뿌듯해했다.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부분의 도시는 고풍스러운 언덕 위의 성, 서양 미술양식의 성당과 교회, 그리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자세히 보고 즐기며 만끽했다.또 하나, 동생이 추천한 음악 프로그램은 충만했고, 여운은 길었다. 뮌헨오케스트라의 ‘토스카’와 비엔나오케스트라의 ‘투란토트’, 비엔나모차르트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내가 직접 보고 듣게 되다니,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의 귀호강이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생각난다. 나의 이번 여행은 ‘걷고 보고 들어라’였다.

2024-06-19

다시, 뜨개질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예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잠시의 여유 시간이 나면 뜨개질을 하곤 했다. 어느 여름방학 땐 굵은 실로 소파덮개를 짜기도 했다. 그 즈음 지역신문에 정기칼럼을 연재 중이어서 ‘뜨개질’을 제목으로 한 글을 게재하였고, 몇 년 전 펴낸 수필집 ‘고비에 말을 걸다’에 싣기도 했다.또 어느 겨울엔 긴 목도리를 짜서 식구들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적도 있다. 솜씨는 없으니 패턴도 없는 민무늬, 그저 짜기 쉬운 걸로 길게만 짜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 큰아들, 작은아들 차례로 목도리를 짜서 목에 휘감아주었다. 아들들은 고맙게도 결혼 후인 지금도 그 목도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엄마가 짜 준 것이라고 며느리에게 말했던지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나도 노랗고 포근한 느낌의 실로 목도리를 만들어 감고 다녔다. 학교의 친한 교수가 탐을 내어 선뜻 드리고, 다시 하나 더 짠 기억도 있다. 손주들이 넷이나 되고 막내 린이 걸음마를 떨 때쯤엔 민소매 원피스나 셔츠를 짰다. 첫 손녀 윤에게는 분홍원피스, 은에게는 연두색, 린에게는 노란 원피스를 짜 주었다. 손자인 건에게는 하늘색 민소매 셔츠를 입혔다. 그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며느리들에게 미리 사이즈를 물어 적당히 맞추면 될 정도로 쉬운 뜨개질이었다. 다 짠 옷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입혀 사진 찍어 보내주니 그걸로 만족했다. 뜨개실이 부드럽지 않고 다소 거친 감이 있어선지 아이들이 입기를 꺼려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옷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궁금치도 않다. 그저 내 손으로 손주들의 옷을 짜면서 애들에게 입혀 보는 설렘을 즐기는 것으로 족했다.그리고 한동안 뜨개질을 잊었다. 바빴던가 보았다. 2년 동안의 유치원 다니던 손주들이 학교에 가자 쉬는 틈이 많아졌다. 문득 뜨개질이 떠올랐다. 집중해서 할 일이 없을 땐, 손이 심심하다. 무료하게 TV라도 보는 시간이 되면 특히 더 생각이 났다.마침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계획도 있어 결국 뜨개방을 찾았다. 여행은 설레고 좋지만 비행기를 타는 게 항상 두렵고 지겹고 고역이다. 책도 읽고, 작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퍼즐을 가지고 간 적도 있지만 시간은 더디 흐르고 몸은 고되고 힘들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뜨개질이었다. 14시간이나 걸리는 비행시간을 마냥 견뎌야 할 것인데, 뜨개질이 시간 죽이기에는 최고의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실을 사고, 적당한 소품으로 손가방을 골랐다.미리 연습 삼아 하나를 짰더니 한 3일만에 가방 하나를 완성했다. 코바늘로 짜는 거라 사이즈와 패턴도 넣고 내 맘 대로 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풀어도 될 것이니 심심풀이로는 제격이다.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아 짜투리 실로 휴대폰 케이스도 두어 개 짜봤다.문득 중학교 때 생각이 난다. 아마 가정 시간에 코바늘 뜨개질을 배웠을 것이다. 스승의 날, 선생님께 드리려 만년필 케이스를 짰다. 담임선생님께는 분홍과 연두의 색으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줄무늬로, 작년도 담임선생님께는 흰색과 파란색으로 무늬를 짜 넣은 자그마한 만년필 케이스를 짜 드렸다. 예뻤던 여선생님들이셨는데,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2024-06-12

뿌리와 날개(下)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식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식물이 서로 반대인 두 방향으로 성장한다. 한쪽은 중력에 이끌려 땅 속으로 파고들며, 다른 한쪽은 반중력으로 허공으로 치뻗는다는 것을 신비롭다고 했다. 괴테라고 하면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를 쓴 독일의 대문호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직업은 이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하다. 시인, 극작가, 소설가, 연극감독, 철학자는 물론, 자연 과학자였으며, 바이마르공국의 재상이었으니 정치가이기도 하였다.괴테는 식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날마다 스케치하면서 꽃과 잎과 뿌리가 변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점에서 괴테는 디테일의 끝판왕인 셈이다. 그 결과 자연과학자였으며 미술가이기도 하였다. 세밀하게 식물을 스케치하여 관찰한 결과를 ‘식물변형론’으로 썼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기행문 ‘이탈리아 여행’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감탄한 나머지 ‘색채론’을 집필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과학자로 끝나면 괴테가 아니다. 식물을 깊이 관찰한 결과를 조상과, 가정과, 아이들의 교육에까지 생각을 확장했다. 그래서 남긴 그의 명언이 있다.‘우리가 아이에게 줄 유산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날개이다.’뿌리는 식물의 밑동으로서 보통 땅속에 묻히거나 물체에 박혀 수분과 양분을 줄기를 지탱하는 작용을 하는 기관이다.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의미로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괴테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는 ‘뿌리론’이 우리나라 문학작품에도 있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하여 창작한 한글시가인 용비어천가의 2장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피고 열매가 많으니라.”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기초가 튼튼한 나라여야 꽃 피고 열매 맺듯 안정되고 번창할 것이라는 비유의 절창이다. 영원무궁한 조선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는 나무의 깊은 뿌리같이 조선의 초석이 튼튼해야 한다는 노래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힘차고 튼실할 것이고, 꽃이 탐스럽고 향기로울 것이며, 단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 자명하다. 아이들에게 뿌리는 조상이자, 부모이자, 가정일 터. 그러니 조상과 부모와 가정의 역할은 튼튼한 뿌리가 되어 아이들이 스스로 힘차고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줄 뿐이다.그러면 날개는 무엇일까. 날개는 새나 곤충처럼 허공을 나는 동물의 양쪽에 붙어있는 기관이다. 이는 땅 속에서 땅속으로 내리뻗는 뿌리와 다르게 기댈 곳 없는 공중을 날기 위해 생긴 것이다. 또한 날개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돋거나 자라는 것이니, 뿌리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생기는 것이다. 조상과 부모가 날개를 준다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격려와 지원과 응원을 아낌없이 주면 되는 것이다. 괴테는 식물을 깊이 관찰하면서 동시에 성찰하는 교육철학자가 되었다. 역시 괴테는 괴테다.

2024-05-29

뿌리와 날개1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간 모두의 집에는 텃밭과 꽃밭엔 물론, 마당에도 풀이 잔뜩 자라있었다. 모자를 챙겨쓰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장화로 바꿔 입을 겨를 없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로 풀을 뽑는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몸을 구부려 풀을 뽑다가 억세지도 않은 것 같은 풀줄기에 스친 손바닥이 아렸다. 그제야 장갑을 찾으러 툇마루에 올라 걸터앉았다. 한 10여분이나 되었을까. 잠깐 사이에 이마며 뒷덜미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숨을 몰아본다. 연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쥐어뜯으니 풀은 뿌리째 뽑히지 않았다. 이제껏 한 일은 도로아미타불. 다시 호미를 찾아 본격적으로 마당으로 나선다. 사람 사는 집이라면 최소한 마당에만은 풀이 없어야 한다. 몇 주 동안 집을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삼키며 개망초 줄기를 움켜쥐어 뽑고, 뿌리를 캐낸다. 주저앉은 채 온 마당을 돌아가며 크게 자란 풀을 대강 감추었다. 댓돌 아래 꽃밭엔 연분홍 메꽃이 보라색 초롱이 무더기져 피어 있다. 지난 달 꽃씨를 뿌린 자리엔 연한 떡잎들이 오종종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꽃모종 가까이의 풀까지 없애고서야 허리를 폈다.텃밭은 그나마 풀이 덜 자랐다. 채소 모종을 심으면서 비닐을 꼼꼼히 깔아준 덕분이다. 대신 채소들은 무성히 자랐다. 오롱조롱 빨간 딸기를 맺고 있는 딸기 모종을 뒤져 딸기를 따 입에 넣으니 달다. 다시 하나 더 따려고 보니 벌레가 주위에 가득하니 있다가 부산스럽게 흩어진다. 달디단 딸기향에 모여들었나 보다. 그래 익은 딸기는 너희들 먹어라. 그 옆자리에 심은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아선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줄기 아래엔 토마토가 제법 달려 있다. 내일 꼭 다시 와서 토마토와 고추에 지지대를 세워주어 하늘 보고 쑥쑥 커서 맘껏 열매 맺도록 해야겠다.자주색 콜라비의 단단하고 둥근 줄기가 땅 위에 솟아 있는 걸 봤다. 우리가 먹는 부위가 뿌리가 아니라 줄기임을 알았다. 며칠 전 남편이 케일잎이 많이 컸더라며 따오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실은 콜라비잎이었다. 꽤 큰 콜라비 하나를 뽑았더니 둥근 줄기 아래에 무뿌리같이 생긴 뿌리가 있다. 그 옆에 심은 오이 무더기도 뒤적여보니 제법 굵은 오이도 두어 개 달려 땄다.마당과 텃밭을 대강 돌보고서야 집 앞 우물가 꽃밭을 둘러본다. 토끼풀이 무성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포기한 곳에 어디서 꽃씨가 날아와서 자리를 잡았나 노란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고혹적으로 붉은 꽃양귀비도 적당히 섞여있어 돌보지 않은 주인장을 무색케 한다. 고맙기도 해라. 작년 심은 장미 두 그루는 담장을 기어올라 바싹 붙어 꽤나 많은 붉은 꽃을 매달고 있다. 보리수나무엔 빨간 열매가 튼실하다. 블루베리도 열매를 맺었고, 손자의 석류도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는 꼭 석류를 보여주고 싶다.무심히 풀을 뽑는다. 가끔은 도 닦듯이 풀 뽑는다는 옛 친구의 말을 새기면서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풀을 뽑는다. 보기 싫고 성가시니, 텃밭의 채소를 방해하므로 뽑을 뿐이다. 성찰할 틈도 겨를도 없다. 그러나 천재적 사상가는 달랐다.

202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