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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주들과 포항나들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어디로 놀러갈까 물으면 손주들은 십중팔구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포항을 자주 가게 된다. 포항은 바다뿐 아니라 의외로 즐길 거리가 쏠쏠하다. 지난달 내내 주말마다 손주들과 포항엘 갔다 왔다. 예전 아이들이 더 어렸을 적엔 해수욕장의 모래장난 정도였다. 몇 년 전 생긴 스페이스워크도 흥미로워 했다. 최근엔 줄이 길어 포기하고 멀리서 보는 야경으로 대신했다. 포항의 핫스팟 죽도시장은 갈 수 없었다. 손주들과의 포항행에서 죽도시장을 끼울 수 있는 건, 손자 건이 생선회에 입문한 이후였다. 포항여행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우리 부부와 아들내외, 그리고 손주 둘을 데리고 오후 느지막하게 출발하여 회만 먹으러 포항에 간 적도 있다. 송도바닷가에 새로 생긴 수협활어회센터가 조용하고 주차장도 넓은데다가 싱싱한 회를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어서 꽤 괜찮았다.몇 주 전엔 우리 부부가 손주 둘을 데리고 조손동행 포항을 다녀왔다. 손주들에겐 죽도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 아쿠아리움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물속에 손을 집어넣으려 해서 상인들에겐 다소 난처했지만 구경하는 아이들을 말릴 수도 없었다. 횟집골목을 누비며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큰 대야에서 펄떡이는 살아있는 물고기를 실컷 구경하고 나서야 단골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싸고 맛있는 회를 먹고, 전통시장 홍보행사기간이었던가 전통시장상품권을 되받아 얻어서 건어물과 주전부리도 살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죽도시장 건너편에 있는 포항함체험관에 가서는 배 안 곳곳을 오르내리고 누비며 즐거워했다. 손녀 린은 뱃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더니 느닷없이 애국가를 불렀다. 학교 입학해서 배운 모양이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지켜보았다. 진지한 표정과 꼿꼿한 자세로 4절까지 부르는 아이를 보며 나도 어느새 덩달아 엄숙해지고 말았다. 다소 날씨가 쌀쌀한지라 바닷가의 모래장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남편의 제안으로 장기읍성엘 올랐다. 건은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을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만리장성 아니냐며, 성 둘레를 완전히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조심하기를 당부하며 성벽 위를 조손이 손잡고 걸었다. 린은 할아버지와 손잡고 걸으며 “에효, 세상은 넓고도 힘들다”를 연발하며 숨차했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잡을 땐 천상 여자애다.지난 주 토요일, 건을 데리고 포항엘 갔을 땐 영일대해수욕장의 영일대를 보여주고 싶었다. 바다 위에 옛날 궁궐 같은 집이 있다고 했더니 용궁이냐며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정작 누각엔 한 번 오르내리는 것으로 흥미를 못 느낀 듯했다. 오히려 영일대 가다가 만난 마술버스킹 공연을 보며 신나고 우스워했다. 마술사가 벗어놓은 모자에 꼭 돈을 넣어주고 싶다고 해서 거금 만원을 지갑에서 꺼냈다.어제 건이 로봇과학 책을 보더니 로봇박물관에서 실제로 로봇을 보고 싶단다. 검색했더니 포항에 로보라이프뮤지엄이 있었다. 바로 가자고 하는 걸 겨우 주저앉혔다. 오는 주말에 가기로 예약했다. 아이들에게 포항은 꽤나 다양한 흥밋거리의 도시다.

2024-05-15

어버이날, 엄마를 부르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5월 8일이 예전엔 어머니날이었다. 그날이 되면 아침 일찍 학교 가기 전,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언감생심 생화는 꿈도 못 꿀 시절이었다. 빨간 색종이로 접어 만든 보잘 것 없는 카네이션을 엄마는 하루 종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시며 아버지는 왜 아버지날은 없나 하셨다. 전국의 많은 아버지들이 그런 불평을 하셨나, 그 원성이 통했나,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1973년부터는 어머니날이 어버이날이 되었다. 한 송이의 카네이션을 더 만들어 아버지께도 달아드렸으니, 아버지는 소원을 푸셨을까. 아버지의 가슴 꽃도 그날 종일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버이날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엄마가 더 사무침은 나 혼자만의 마음인지 모르겠다.귀가 어두운 엄마였다. 엄마가 꽤나 젊었을 때부터 귀가 어두워졌다는데, 그 연유에는 다양한 설이 있었다. 외가댁의 유전이라는 설도 있고, 나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잘못해서라는 설도 있고, 사업 실패해 경제력이 없어진 아버지 대신으로 30대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라는 설도 있었다. 세 가지 설 중 한 가지가 나와 관계된 거라, 왠지 귀 어두운 엄마에게 일말의 잘못을 했다는 미안함을 늘 가지고 있었던 나의 유년이었다. 커서는 돈 벌어서 엄마의 귀를 반드시 내가 고쳐주리라는 결심이자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대학 졸업 후 엄마를 이비인후과에 모시고 갔고, 당시의 의학으로는 절대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수술 대신 보청기를 맞춰드렸다. 그 후 보청기를 바꾸고 수리하고 배터리를 공급하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려 애썼다. 보청기를 했음에도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 잘 듣지 못한 엄마였다. 대신 엄마와 말하려면 손으로 엄마의 손목이나 팔을 툭툭 쳐서 내게 눈길을 돌리게 한 후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손짓과 과장된 표정으로 얘기하는 것이 큰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통하기가 쉬웠다. 모녀지간에 긴한 속엣말을 할 수 없으니 엄마도 나도 서로 많이 답답해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편지였다. 엄마가 내게 더 많은 편지를 썼고, 나의 편지와 답장은 아주 이따끔이었다. 게을러서이기도 했지만 편지를 쓰려 종이 위에 ‘엄마’를 쓰면 먼저 눈물이 났기 때문에 접었던 기억이 많다. 대학 4학년 11월, 전국적으로 큰 규모의 학생운동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학교를 가지 못했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취 중이었기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했다. 그 무렵 라디오에서 편지를 공모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평상시 잘 쓰지 않던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이 ‘엄마가 듣지 못할 편지’였지 싶다. 몇 달 후 당선되었다는 연락과 함께 부상으로 보내준 법랑냄비세트를 받았다. 라디오로 들은 나의 편지는 꽤나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 같은데, 편지를 쓴 나는 들으며 울었으나 정작 엄마는 끝내 듣지 못한 편지였다.엄마를 소리내어 부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자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입모양을 만들어 엄마…. 라고 소리낼라치면 눈이 먼저 답한다. 눈가가 스멀거리고 촉촉해지려 한다.

2024-05-08

경북도민행복대학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경북도민행복대학은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사업 중 하나다. 나이, 학력, 직업에 상관없이 경북도민이면 누구나 사는 지역 가까운 캠퍼스에서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2021년, 경북인재평생교육원이 출발하던 해부터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경북도민의 학습력을 높이고 행복한 학습공동체 문화 조성을 위한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명예도민학사, 명예도민석사 및 명예도민박사과정까지 있는데, 그 중 명예도민학사는 경북도내 19개 시·군의 대학이나 평생학습원 등에서 운영되고 있다.교육내용도 매우 다채롭다. 지역학으로서의 경북학을 중심으로 한 공통영역과 인문학, 사회·경제, 생활·환경, 문화·예술의 4대 특화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주 1회 2시간, 30주를 수업하며 출석 70% 이상에 사회참여활동 5시간을 수료하면 명예도민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명예도민석사과정 입학 자격을 얻는 시스템이다.4년 전, 은퇴하던 해,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으로부터 강사풀 등록지원 요청을 받았고, 그 후 여러 시·군의 캠퍼스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다. 내게 성인학습자 대상 강의는 낯설지 않다. 위덕대는 학령기 학생의 입학생 부족 상황을 대비해 2014년부터 성인학습자 학생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내가 은퇴한 이후 현재도 활발하게 평생학습사업을 하고 있다. 위덕대는 일찍이 성인학습자를 위한 기본 제도를 마련, 평생학습처를 만들었고 국가지원사업인 평생학습사업단에 선정되어 3년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평생교육원장, 평생학습처장과 평생학습사업단장을 수행하기도 했다. 평생학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재직 중 한국복지사이버대에서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였다.성인학습자들은 학령기 학생과 똑같은 학사일정을 소화하고 법정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한 만큼 처음 14명 정도의 입학생 중 4년 후 학사모를 쓴 분들은 그 절반도 안 될 정도였다. 입학 당시 60세가 훨씬 넘은 분들이 햇수로 4년 총 8학기를 무사히 마쳐 졸업식날 학사모를 쓸 때의 광경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벅찬 감격이었다. 그들 중 학교생활을 정말 보람있게 하셨던 세 분은 졸업 후에도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 연락하시고 함께 식사자리를 만드신다.며칠 전 김천의 경북보건대학교의 도민행복대학에 출강했다. 이 대학엔 4년째 출강 중이다. 해마다 다른 얼굴들을 만나지만 강의에 대한 열의나 태도는 다르지 않다. 30여 명 되는 수강생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신다. 2시간의 강의에 조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남성 수강생도 더러 계시지만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경북 내방가사’ 강의는 특히 보람있다. 강의 도중 잠시 쉬는 시간에는 반장이 이런저런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토론을 하는 모습이 여느 대학의 강의실과 다를 바 없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봉사일정도 공유하는 것 같았다. 만학의 즐거움을 누리는 어르신들이 보기에 좋고, 나는 그들에게 강의하는 것이 즐겁다. 무엇보다 도민들에게 이런 기회를 펼쳐 준 기관과 대학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2024-05-01

치매예방을 위하여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사후 시신기증서를 썼다. 2000년 어느 봄날이었다. 죽으면 없어질 몸이다. 땅에 묻기 전, 불 속에서 타기 전, 의대생들의 공부에 도구로 쓰이는 것이 더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내 몸이 공부용으로 쓰일 것이라 생각하니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되도록 온전히 그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되도록 내 몸의 병력도 제대로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수술할 일 있을 땐, 가능한 한 시신기증한 병원에서 했다.그때 아들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서명을 받으면서 동시에 유언 비슷한 얘기도 남겼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으니 제사를 지내지 마라. 만약 죽기 전에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나 스스로 판단을 못하게 된다면 지체없이 시설에 맡겨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아픈 노부모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난 24년 전에 오늘날에는 당연시되는 노후나 사후의 문화를 예견했나 싶기도 하다.당시 15살의 아들은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명절이나 제사 때라도 가족이 모이면 좋지 않아요? 눈 깜빡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네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라. 가족들이 모이면 그 때 어디 놀러라도 가렴. 그 곳이 외국이라면 그날 아침을 먹기 전에 잠시 생각해주면 되겠네. 아들은 볼멘소리를 툭 던진다. 난 제사음식이 맛있단 말이에요. 그러자 난 목소리의 톤을 더 높여 말했다. 그럼 네가 만들어 먹든가….그 당시 실제로 내가 가장 우려한 것은 사후의 일들이 아니었다. 늙어 죽지 않은 채 스스로 판단력을 잃고 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치매라는 큰 병이 가장 무서웠고, 지금도 그렇다. 평소에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자라 치매가 될까 끔찍하고 두렵다. 50대 일찍 돌아가신 선친도 84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도 초롱초롱한 기억력을 가지셨기에 가족력으로는 무결하지만, 내가 부모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면 어찌 장담하랴.평소 치매예방에 좋다는 처방을 들으면 반드시 시도해 본다. 무엇보다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머리맡에 책과 신문을 두고 읽으셨다. TV 보기 대신 두뇌운동에 좋다는 놀잇감을 찾아본다.예전에 주말신문에 꼭 있었던 십자말풀이를 즐겨했는데 최근 그와 유사한 모바일게임을 발견했다. 제목조차도 어쩌면 ‘치매야 잘가라’인 것이, 딱 내가 찾던 치매 예방게임이었다. 구독을 해두고 알림 설정까지 해 두고 ‘좋아요’도 누른 후 게임을 즐기고 있다. 무의미한 글자를 가로세로 24자 정도 나열해두고, 상하좌우 또는 대각선으로 세 글자 또는 네 글자의 유의미한 단어를 조합해 찾는 게임이다. 휴대폰을 많이 보는 것도 유해하다 싶으면 퍼즐을 다시 찾는다. 한 번 빠지면 밤을 새워 문제지만 취미로 즐길 만큼 자주 한다.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치매예방이 되기만 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2024-04-24

학습루틴 만들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작심삼일은 오랜 나의 루틴이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새 다이어리를 얻어 새로운 계획을 야심차게 적지만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끝이다. 새 계획을 적어 벽에도 붙여두지만 작심삼일이다.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예 못 지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며칠 못가 흐지부지된 것만은 확실하다. 까짓 3일만에 다시 작심삼일하면 되지라며 뻔뻔한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바쁜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모면하고자 하지만 끈기가 없는 성격 탓을 자책하면서도 좀처럼 고치지 못한 채 살았다.그런 내가 달라졌다. 지난달 첫날부터 시작한 수영과 서예공부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잘 실행하고 있다. 일단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시간 없어 못한다는 핑계를 쓸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나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어 오랫동안 나의 단점으로 꼽았던 작심삼일 징크스를 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수영은 30년 전에도 한 번 시도한 적 있으나 약 석 달 정도 다니고 그만두었다. 수영 시간 앞뒤로 챙길 게 많아 번거롭다는 핑계거리가 있었지만 끈기 부족 탓이 더 컸다. 퇴직 후에 다시 시작해보리라 했으나 코로나로 수영장이 문을 닫아 시작하지 못했다. 최근 집 부근의 수영장이 재개장해서 곧바로 등록했다. 수영을 평생 할 운동으로 꼽겠다는 의지로 매일반으로 등록했다. 옛날 배운 적이 있어 몸이 기억할 것이고, 쉽게 잘할 수 있으리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한 달 이상을 초급반에서 물 먹고 숨가쁘긴 하지만 결석 않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붓글씨 공부 역시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였다. 마침 대구한글서예협회장이신 최민경 교수님을 만난 고마운 인연으로 작년 7월부터 한글서예를 배우게 되었으나 2주만에 중단했다. 예의 그 못된 버르장머리, 작심삼일이 발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손녀 유치원 등하원, 허리 통증 등 이런저런 핑계가 생겨 버렸다. 그러나 3월부터 작심하고 시작하였다. 1주일 두 시간 공부하고, 집에서 매일 한 장씩의 숙제를 꼬박꼬박 챙기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배우고 익힌다는 뜻의 학습(學習)은 논어의 첫 문장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나온 말이다. 학습의 반대어는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친다는 뜻의 교수(敎授)다. 대학에서 전문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학습보다 교수하면서 40여 년을 살았다. 물론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야 했지만 학습이 목적이지는 않았다.오로지 나의 몸을 위한 수영을 학습하고, 나의 글쓰기 기량을 위한 학습을 해보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습(習), 익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 런던대 심리학과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좋은 습관이 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66일이라고 한다. 물론 개인차가 상당하여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18일만에, 못하는 사람은 254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이제 시작한 지 달 반이 지났고 아직은 순항 중이다. 내가 평균에 드는 사람이면 좋겠다. 66일이 지나 수영과 서예가 좋은 습관이 되어 평생 가면 더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작심삼일은 훌쩍 지났으니 왠지 조짐은 좋다.

2024-04-17

오일장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작년 봄부터 모두의 집에 나무며 꽃을 심고, 텃밭을 가꾸면서 오일장을 자주 가게 되었다. 달성군에만 해도 규모가 큰 오일장이 몇 있고, 인근의 군 단위 지역의 오일장도 꽤나 크게 열려서 가볼 만하다. 오일장날을 메모해 두고 장을 찾아다니는 재미를 누린다. 인터넷에 전국오일장 앱도 있어 다운 받아 두었다. 현풍 장은 5일과 10일, 화원 장은 1일과 6일, 인근 성주 장은 2일과 7일이고, 4일과 9일엔 고령 장이 선다. 작년부터 남편은 주로 꽃나무와 연장을 둘러보고 사는 재미에 오일장에 푹 빠진 듯했다. 미리 날짜를 검색해 두고는 작정하고 오일장을 찾아가서는 나무 몇 그루를 사오곤 했다. 그렇게 사서 모두의 집에 심은 나무가 10여 그루는 넘을 것이다. 올봄 들어서는 모두의 집보다 이사한 아파트의 베란다에 둘 나무를 수집하듯 사오니 더 이상 둘 곳 없이 빼곡하다. 이 장 저 장 다니며 나무 구경하고 흥정하고 상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같다. 남편이 장을 보는 것이 내겐 낯설지가 않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와 몇 년 전 영양고택 어르신이 제삿장을 보는 걸 익히 본 적 있기 때문이다.나는 텃밭에 심을 채소 모종에 관심이 있다. 이맘때쯤 심을 모종의 가짓수는 얼마나 많고 또 심고 싶은 채소도 많아 골라와 심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년엔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와 상추는 기본으로 심고, 명이나물, 고수, 청겨자를 심었다. 더러는 따 먹었으나 오이와 가지는 손가락 정도로 열매 맺는 걸 봤을 뿐이다. 거름을 하지 않은 탓이 컸다. 올해는 작년같은 실패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주 고령 장에 가서 살충제와 영양제가 섞인 비료를 사와 미리 뿌리고, 검은 비닐로 덮어 텃밭을 손질해 두었다. 며칠 후 현풍장이 서는 날, 채소 모종을 잔뜩 사올 참이다. 현풍 장에 채소 모종이 가장 많다는 걸, 이 장 저 장 다녀 본 한 해의 미립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엔 간식거리도 많은데 듬뿍듬뿍 쥐어주는 맛보기를 얻어먹기도 뭣해 이것저것 사게 된다. 유과보다 거칠게 만든 넓적한 과즐이며, 돼지감자 튀김도 먹을 만하다. 화원 장에선 거창농장에서 바로 나왔다는 달걀을 보면 무조건 사야 한다. 값도 싸거니와 싱싱한 게 꽤 오래 냉장고에 두어도 노른자가 유독 짙고 탱글탱글하다.장보는 재미만큼이나 쏠쏠한 것이 장터음식이다. 현풍장과 성주장은 수구레국밥이 유명하다. 수구레는 소가죽 껍질과 고기 사이의 부산물이라는데, 그걸로 끓인 국이라고 했다. 값비싼 소고기를 못 먹는 서민들이 싸게 먹을 수 있었던 국밥이다. 가게 앞에 늘어있는 커다란 국솥에서 허옇게 오르는 김 사이로 식당으로 들어가서 국밥을 시켜 먹어 봤다.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있다는데 난 살짝 구린내 나는 그 맛이 역해 두 번 다시 먹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령 장의 뒷고기는 싸고 맛있다. 장터 길가에 함부로 놓여있는 둥근 양철식탁, 그 가운데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불 위에 석쇠를 얹고 구워 먹는 뒷고기를 작년 처음 먹어 보고 푹 빠졌다. 고령 장을 갈 때마다 찾게 되는 뒷고기 식당에 앉아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고기를 굽고 있으면 마치 장돌뱅이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2024-04-10

꽃대궐 아파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봄꽃 개화달력이 올해는 안 맞았나보다. 지구온난화로 해마다 개화시기가 빨라진다며 일찍이 정한 전국의 벚꽃축제가 꽃 없는 축제로 치러졌다는 소식이다. 봄 같잖게 추웠고 꽃샘추위와 잦은 봄비로 햇빛에 민감한 벚꽃이 더디 핀단다. 대구에서도 유명한 수성못의 벚꽃도 영 시원찮다. 지난 주말에야 핀 벚꽃이 듬성듬성 예쁘지 않은 모양새다. 한꺼번에 화르륵 펴서 찬란하고 눈부시다가 일주일도 안되어 난분분 훨훨 날아 떨어져야 벚꽃인데 피다 만 듯 보기에 안타깝다.수성못 남켠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다. 내가 이사왔을 때 이미 20년 가까이 된 아파트였다. 여기서 봄을 지낸 지 30년도 넘었으니 50년을 훌쩍 지난 낡은 아파트였다. 그런데 이 낡은 아파트의 봄은 동요 ‘고향의 봄’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봄이다. 높은 성채의 담과도 같은 도로변 석벽엔 치렁치렁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있고, 그 담 위로는 목련이 줄지어 있다. 아파트 들어서서 오르면 벚꽃 터널을 지난다. 봄이면 으레 피는 꽃들인데 무슨 대수랴 싶지만 나무들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50여 년 전에 비록 묘목이라도 최소 아파트의 나이보다 더 오래되었을 아름드리 큰 목련나무와 벚꽃나무의 아우라는 정말 압도적이다.내 나이 30대에 이사 와서 또 그만큼의 세월을 살며 늙었다. 10대의 아이들이 자라 일가를 이루어 떠날 동안, 아파트도 나만큼이나 노쇠하고 녹슬고 삐걱거리며 낡아졌다. 그러나 나무들은 해마다 겉껍질을 벗으며 더 자랐고 더 커지고 더 단단하고 더 굵어졌다. 4층 높이의 아파트보다 훨씬 더 큰 목련이 매단 꽃송이는 밤에 보면 마치 서양 궁전 볼룸의 커다란 샹들리에를 연상시킨다. 어린 손자는 두 손을 마주 모아쥐고 손가락을 위로 펼친 모양으로 꽃 흉내를 낸다. 벚꽃은 몽글몽글하게 한데모여 탐스러운 여느 벚꽃과 다르다. 가지를 축축 길게 늘어뜨려 불빛 축제 때나 봄직한 루미나리에 터널을 연출한다. 벚꽃송이를 가까이에서 본 손자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여모아 꽃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은 어떤 멜로드라마의 CG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떨어진 꽃잎이 만들어준 핑크 꽃길을 밟기 아까워하면서 또 며칠을 더 즐기는 봄꽃풍경이다.30년만 지나면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하는 요즘이다. 이 아파트도 당연히 그런 논의가 오고간 지 한참되었으나 지지부진한 모양새로 또 몇 번의 봄을 지내고 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 정떼지 못하는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무가 오래 살면 영험이 깃든다 했으니 저 나무들은 잘 알리라. 시뻘건 녹물에 벌레가 제집인 줄 아는 집, 겨울엔 몹시 추운 이 아파트의 불편함을 저 나무들은 잘 알리라. 사람이 늙고 병들면 갈 준비를 해야하듯, 사람이 지어 깃들어 살던 집도 낡고 허물면 떠나야 할 때가 됨을 잘 알리라. 이 아파트가 마땅히 헐리더라도 찬란하게 꽃을 피워주는 저 거대하고 당당한 나무들은 그냥 그대로 오래오래 살면 좋겠다. 자연이 만들어 낸 나무의 기운은 오랠수록 장대하니 외경심마저 든다. 이사를 나왔어도 봄을 제대로 즐기려 꽃대궐을 찾았다. 사진 찍는 젊은이들이 여럿 보인다.

2024-04-03

화전놀이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3월 들어서도 겨울과 봄이 서로 줄다리기를 했다. 겨울은 3월의 폭설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으나 결국 꽃피우는 봄이 이겼다.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를 지킬 겨를 없다는 듯 앞다투어 피워댄다. 꽃구경을 유혹하는 상춘(賞春)의 계절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눈으로만 하는 봄구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온몸으로 뱃속까지 봄을 느끼고 싶어 입맛으로 즐기는 상춘(嘗春)을 감행했다. 그 절정이 바로 화전놀이였다. 화전놀이는 꽃피는 봄날 마을 부근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꽃을 보며 놀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지져 먹고 노는 여성놀이이다.한국향토문화대전에서 화전놀이를 찾으면 저 북의 강원도 강릉에서부터 경기도 양주, 서울 도봉, 대구, 전북 남원, 전남 광주, 부산,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적으로 즐긴 전통적인 봄놀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화전놀이의 전통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시작했다.‘삼국유사’에는 “해마다 봄철이면 김유신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에는 온갖 꽃이 피고, 특히 송화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만화방창 가운데서 벌인 잔치엔 온갖 꽃지짐 또한 질펀했으리라 짐작된다.‘교남지’에는 신라의 궁인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하였다는 경주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를 소개하기도 했다.이렇듯 이미 신라시대에 모습을 갖춘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집안의 여성들, 특히 시집온 며느리들이 함께 모여 장막을 세우고 참꽃으로 지짐을 지져 먹으며,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다. 남성들도 낭만적인 화전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부정기적인 봄맞이 풍류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화전놀이와는 구별된다. 또 남성들에게는 가벼운 여가 활동이었으나 여성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공식적인 집단나들이였다는 점에서도 문화적 의미에 차이가 있다.역사도 깊고 전국적으로 보편적이었던 화전놀이지만 경북의 경우는 특별하다. 조선 후기부터 화전놀이와 내방가사가 만나 화전가가 창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도 경북 여성들은 화전놀이의 과정과 소회를 담은 화전가를 짓고 즐겼다. 화전가의 창작과 낭송이 화전놀이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경북 여성들의 화전놀이는 남성들의 화전놀이, 그 이전 시기 여성들의 화전놀이, 음주가무로 풍물을 즐기는 다른 지역의 화전놀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경북 여성들은 놀이날이 되면 미리 준비한 음식과 조리도구 외에 반드시 지필묵(紙筆墨)을 챙긴다. 현장에서 화전가를 지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2009년 청도 비슬산에서 류복혜 선생님이 이끄는 영남화전놀이보존회에서 전통에 가까운 화전놀이를 펼쳤다. 안동의 내방가사보존회원인 안어르신들을 모셨더니 우아하고 품격있게 화전가를 읊으셨다. 2018년, 경주 양동마을에서 벌인 화전놀이에서도 그들은 내방가사를 거침없이 낭송하셨다. 오는 3월 30일, 대구 가창 한천서원에서 화전대회를 한다고 한다. 팀을 나누어 화전을 예쁘게 지진 팀의 우열을 가리는 모양인데, 화전놀이의 현대적 변용이요, 전통놀이를 잇는 새로운 형태인 셈이다.

2024-03-27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 책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영국의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수필집이다. 그녀가 1928년에 영국의 두 개의 여자대학교에서 한 강의를 기본으로 1929년에 출간한 책이다.여성의 지적 생활이나 사회적 역량은 경제적인 뒷받침과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향후 백년 후면 여성의 지위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할 것이며,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도 예견했다. 그녀 사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는 그녀의 예언대로 되어있는가.한 평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시대가 바뀌어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되었으나 지금도 자기만의 방을 애타게 갈구하는 여성, 그 방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여성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1993년,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듬해, 여성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했다. 영미여성소설론 수업 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버지니아의 통찰력과 예지력과 용기있는 목소리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덕에 나는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에 제대로 눈을 떴다.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위덕대 교수로 임용이 되면서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 ‘자기만의 방’인 연구실을 얻는 동시에 버지니아가 말한 ‘지적 자유의 물적’ 토대인 급여생활자가 되었다. 그녀의 예언인 100년보다 더 빠른 68년만에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경제적인 능력을 획득했다. 임용 당시 나는 나를 사회적 인격으로 가능하게 한 위덕대를 위해 뼈를 묻어도 좋겠다는 다짐을 했고, 정말 열심히 강의와 연구와 봉사를 하는, 사회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나의 연구실, ‘자기만의 방’은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할 필요없이 출입문과 창문을 제외한 벽과 천장까지 가득 빼곡하게 책으로 메워졌다. 25년이나 지나자 책은 책장마다 이중으로 꽂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넘쳤다.2020년 12월, 25년간의 학교생활이 끝날 즈음 저 책을 어쩌나 걱정되었다. 집엔 이미 남편의 책들로 가득했다.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1만권의 책을 덜어내고도 방방마다 넘쳤다. 나보다 2년 먼저 퇴직한 남편은 서재를 마련했지만, 난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때 마침 의성에 사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그가 사는 시골마을에 작은도서관이 생겼는데,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마침맞게 서로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접점이 생겼다. 그 많은 책을 싣고 가다가 트럭의 타이어가 터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잠시 헤어지자 생각했던 나의 책들은 4년 동안이나 의성에 가 있었다. 가끔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의성까지 가서 가지고 오곤 하면서 책들에게 한없는 미안함이 있었다.지난 달 이사하면서 여분의 방이 생기자 남편의 첫마디가 “당신 책 가져오자”였다. 10개의 책장을 새로 사들였고 이사까지 남편이 주도해주었다. 그렇게 나의 책들은 무사히 돌아와 나의 ‘자기만의 방’에 안착했다. 잠 오지 않는 밤이나 일찍 잠 깬 새벽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으로 가서 돌아온 나의 책 냄새를 즐긴다. 제자리를 찾은 책들이 기뻐하며 수런거리는 소리도 듣는다.

2024-03-20

추억의 맛, 시금장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남은 살쯤이었을 것이다. 막내이모가 결혼하던 겨울이었다. 외갓집 마당에서 올린 혼례식은 끝나도 당일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을 더 묵는 손님들이 많이 있었다. 자연 잔치분위기는 며칠 더 이어졌다. 나도 아예 방학 내내 있을 참이었다. 어린 손이어도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부엌일도 거들고 심부름을 곧잘 하면서 밥값을 했다. 나의 큰 소임 중의 하나는 상차림이었다. 열 개도 훨씬 넘는 작은 개다리소반을 마루에 쭉 나열해 두고는 독상을 차리는 것이었다. 상마다 수저를 놓고, 작은 종지 같은 반찬그릇에 일일이 반찬을 덜어 담았다.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추위가 문제였다. 밥상을 행주로 닦으면 금방 살얼음이 끼었고, 수저는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곤 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발도 몹시 시렸다. 발가락을 구부려 바닥에 닿는 면을 최소화해 종종걸음하며 반찬을 담았다. 문어숙회를 찍어 먹을 초고추장도 담고, 각색전 옆에 둘 깨소금간장도 덜어담았다. 그 중에 시금장이 있었다. 작은 단지에 담겨있는 시금장은 된장보다는 색깔이 거무튀튀하고 살짝 묽었다. 그 장을 한 숟가락씩 떠서 작은 종지에 덜어담았다.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비주얼이라 맛보고 싶지 않았다. 시금장은 소스가 아니라 그대로 반찬이었다.대학생이었을 때 큰집에서 시금장을 다시 봤다. 어릴 때 봤던 거라 눈에는 익숙하나 맛은 본 적이 없어 쭈뼛거리고 있었다. 온 식구들이 모두 맛난 반찬 같이 시금장을 먹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 부드러운 단맛과 꼬들꼬들 씹히는 무말랭이의 식감도 섞인 오묘한 풍미였다. 첫 맛임에도 진작 먹어 본 듯도 한 익숙한 맛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까지 처마 밑에 매달려 있던 깨주메기가 없어졌다. 고운 보리등겨 가루를 물로 반죽해 뭉쳐서 납작하게 눌러 가운데 구멍을 뚫어 도넛 모양으로 만든 깨주메기를 새끼나 나무 꼬챙이에 끼워 건조시켰다. 다 마르면 불에 구운 깨주메기는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다가 시금장을 만든다고 했다. 장 만드는 과정은 못 봤지만 며칠 전까지 있던 바로 그것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시금장의 맛을 안 알게 된 나는 결혼 후에도 시어머니의 솜씨로 만든 시금장을 종종 먹었고, 어른들은 젊은이가 시금장을 잘 먹는다며 대견해 하셨다.외할머니, 외숙모, 큰어머니,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시금장을 먹지 못했다. 언젠가 안강 장날 시금장을 판다길래 사 먹었더니 옛날의 그 맛이 아니었다. 또 경주의 한 식당에서 단골에게만 조금씩 준다는 시금장을 얻어먹어 봤는데 감질났다. 인터넷에서 시금장을 검색하면 팔기는 하나 맛에 실망할까 선뜻 구매할 용기가 안 섰다.며칠 전 큰형님과 통화할 일이 생겼다. 마침 자네 주려고 시금장 좀 담아 놨네 하시는 형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타다닥 손뼉을 쳤다. 목소리의 톤도 절로 높아졌다. 정말요? 직접 담으셨어요? 와 맛있겠네요. 과연 예전 먹었던 바로 그 맛의 시금장이었다. 남편은 살짝 거부감 드는 비주얼 때문에 근처에 놓지도 못하게 한다. 매 끼마다 간장종지에 한 숟가락 듬뿍 떠서 내 쪽에 감추듯 두고 아껴아껴 먹는다.

2024-03-13

주간계획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매년 3월과 8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시간표를 만드는 일이다. 네모난 표에 여러 개의 칸을 만든다. 구획된 칸 안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야간 9시 30분까지, 한 학기 동안 수업할 강의명과 강의실까지 상세히 적어 넣은 시간표다. 매주 책임져 강의해야할 시간은 보통 9시간인데 많으면 주 12시간이 넘기도 한다.강의의 종류는 서너 종류가 때론 버겁기도 하다. 그럼에도 강의시간을 피해 적당한 시간을 잡아 학생과의 면담 가능시간도 반드시 정해 넣는다. 내가 연구실에 없을 때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서 연락처도 꼭 적어둔다. 석 장을 프린트해서 연구실 바깥문에다가 붙이고, 내가 앉은자리에서 시선이 닿는 바로 앞 벽에도 붙인다. 하나는 집에 가져가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이렇게 25년 동안 시간표를 한 해 두 번씩 만들던 습관은 나의 머리와 몸에 깊이 배어있었나 보다. 3월이 시작되자 시간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은 2월경부터 조바심이 났다.코로나로 인해 은퇴 후의 버킷리스트를 거의 실행하지 못했다. 코로나를 벗어났어도 마찬가지였다. 2년 동안 손주들의 유치원 등하원 지원을 해주면서 버킷리스트는 자연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월 23일자로 손녀가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드디어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 수 있겠다며 생각하자 유예해 두었던 버킷리스트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목록을 꺼내 살폈다. 우선 건강을 위해 꾸준히 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훑었다. 요가, 필라테스, 실내클라이밍, 자전거 타기…. 주위의 강한 권유가 있어 수영을 선택하고, 마침 코로나로 문 닫았다 재단장하여 문 연 집 가까운 수영장을 바로 찾았다. 적당한 시간을 정하고는 매일 가야하는 빡빡한 일정을 만들어 버렸다. 처음엔 혹사일지 몰라도 몸에 배면 괜찮겠지 마음을 다잡는다.또 하나는 한글서예를 배우는 것이었다. 서예는 실은 작년 7월 시작했다. 그러나 손주들의 일정이 우선인지라 시간 빼기가 쉽지 않았다. 또는 손주 등하원 지원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 종종 허리를 다치거나 감기를 앓는 등, 몸이 이기지 못할 경우가 생기자 자주 빠지게 되었다. 아예 해를 넘겨 좀더 자유로운 때를 기다려 미루기로 했던 거였다. 재도전으로 결심을 굳혔고, 집에도 연습 공간을 만들 여건이 되자 3월 1일부터 바로 시작하였다. 이제 매일 저녁 한 시간의 수영과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정도의 한글서예 시간이 확정되었다. 그러고도 메워야할 시간표의 빈 칸이 남아있다. 급히 먹는 밥에 체할라 우선 2개 과목으로부터 준비운동을 본다. 새 시간표에 적응하여 여유로워지면 내일배움카드로 유튜브아카데미도 등록할 참이다. 명절이나 가족 모임이 있으면 일정계획을 세우고, 음식리스트를 작성하고, 맛집을 찾는 등 계획표를 만들곤 하는 나를 본 며느리가 말했다. 어머니는 MBTI가 J형인 거 같아요. 맞다. 난 정보를 수집하고 세부계획 짜서 실행하는 조직적인 성향인 ISFJ이다. 그런 성격이 다분하기도 하지만 실은 25년을 정해진 강의시간표에 맞춰 산 경험과 이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24-03-06

이불 빨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사한 김에 이불을 빨았다. 몇 년전부터 흰 시트의 오리털이불만 고집하는 남편 때문에 잔잔한 꽃무늬가 있거나 색깔 있는 이불들은 거의 버리고 없다. 흰 이불의 껍데기를 벗겨 세탁기에 넣어 빨고 삶고 건조기로 돌려 말리기만 하면 되니 빨래가 쉽다. 속통도 건조기의 이불털기나 살균 기능으로 돌린 후 뜨거운 채로 꺼내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부풀리면 다시 뽀송뽀송해진다. 따끈한 햇빛과 바깥바람을 쏘여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지 꽤 오래 된 듯하다.50년도 더 전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모두 큰 도시로 가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원래 살던 읍내에도 중고등학교가 있으나 교육열이 넘쳤던 부모님의 판단에서였다. 주말이면 셋 중 한 명이 번갈아 일주일치 반찬을 가지러 집에 갔다. 차비 문제도 있지만 주말에도 공부하라는 오빠의 엄한 단속에 나와 남동생은 엄마가 보고 싶고 집밥이 그리워도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중학교 2학년쯤 화창한 봄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나는 이웃의 친구를 찾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우다 곧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할 거라는 친구였다. 친구는 같이 강으로 가서 빨래를 하자고 했다. 빨래를 집에서 하지 않고 어디를 가냐는 내 말에 큰 빨래는 강에서 하면 더 좋다며, 소풍같이 바람도 쐴 수 있다고 했다. 못 가게 하는 엄마를 졸라 거죽에 빨간 깃을 댄 겨울이불의 광목호청을 뜯어 양철함지박에 담았다. 빨래방망이와 비누를 챙기고, 양은도시락에 밥과 김치도 야무지게 쌌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친구 따라 한참을 걸어 간 강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적당하게 넓적하고 평평한 돌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물에 적신 이불호청은 열서너 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큰 빨래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능숙하고 요령있는 친구를 힐끗거리며 낑낑대니 친구가 많이 도와주었다.빨래터 한쪽엔 불을 피워 커다란 드럼통에 빨래를 삶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의 돈을 주면 되나 보았다. 알 턱이 없었던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빨래까지 삶을 수 있었다. 빨래를 가져다주면 물이 펄펄 끓는 드럼통에 넣어 기다란 막대기로 휘휘 저으며 푹푹 삶았다. 건져 함지박에 담아주면 물가로 가져가 방망이로 탕탕 두들겨 비눗기를 뺐다. 어쩌면 양잿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얗게 흰 호청을 친구랑 맞잡고 둘둘 말아 짜서 자갈이 깔린 강가로 나간다. 많은 빨래들 틈에 자리를 봐서 빨래를 펴두고 돌멩이로 네 귀퉁이를 눌러 이불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까지 꼼꼼한 친구를 따라했다.빨래가 마를 동안 쨍쨍한 땡볕 아래 따끈한 돌밭에 앉아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한참을 친구랑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학교 얘기, 외국인 영어선생님 얘기를, 친구는 곧 취직할 공장이 있는 대도시의 삶에 대해 꿈꾸듯 얘기하였다. 뜨거운 돌멩이 덕에 빨래는 쉬 말랐다. 네모반듯하게 개어 함지박에 담았다.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서도 한껏 물오른 우리의 수다는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코피를 쏟아 엄마 속을 태웠다.

2024-02-28

빗자루에 대한 단상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빗자루는 먼지나 쓰레기를 쓸어 내는 청소도구인데 본말은 ‘비’다. 엄밀히 말하면 빗자루는 ‘비’의 ‘자루’이고 청소 도구는‘비’가 맞지만 ‘비’에는 마땅히 자루가 있어야 하니 ‘비’를 그냥 빗자루라고 부른다. 예전 방을 청소할 때는 당연히 빗자루를 써서 먼지를 한켠으로 모아 쓰레받기에 담고, 걸레질을 했다. 진공청소기가 나오기 전의 청소 풍경이다. 진공청소기도 진화하여 긴 줄이 달린 굉음 큰 유선청소기에서 시작하였고 이젠 무선청소기가 대세다. 물걸레질은 물론, 스스로 움직이며 구석구석 청소하는 로봇청소기까지 있으니 요즘 아이가 빗자루를 알까. 빗자루를 청소도구가 아니라 마녀의 교통수단으로나 알고 있을 거다.며칠 전 이사를 하면서 청소를 하게 되었다. 유선청소기, 무선청소기에 물걸레청소기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마뜩찮았다. 그것들은 구석과 틈새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쓰레기를 대충 치우는 정도였다. 알뜰살뜰한 청소에는 역부족이었다. 쓰레잘비라는 신박한 빗자루가 있어 사용해봐도 뻣뻣한 게 마음대로 청소되는 느낌이 없었다. 빗자루가 없을까? 차 트렁크에 눈 올 때 쓰려고 사둔 짧은 빗자루가 보였다. 바닥에 앉은자리 모양새로 엉덩이를 밀면서 먼지를 쓰니 이것만한 게 없다 싶었다.예전 방에서 쓰던 빗자루는 예쁘기까지 했다. 빗자루의 목을 청홍색실로 묶기도 하고 왕골끈으로 매듭묶어 치장도 했다. 방빗자루는 벼의 줄기를 길게 묶어 마디마디를 조인 비였다. 자루 부분은 단단히 조여 묶었고 아랫도리의 쓸 부분은 부챗살처럼 퍼져 아름답기까지 했다. 부엌에서는 수수비를 썼고, 댑싸리나 대나무를 통째로 묶어 만든 길고 커다란 마당비도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방빗자루는 진공청소기에 밀려 거의 사라졌지만 마당비는 절간의 너른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 군대 생활관 등에서는 아직도 많이 쓰인다. 다만 재질이 싸리나무나 대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어졌을 뿐이다.꿩의 긴 꽁지깃을 모아서 맨 장목비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꿩의 깃도 아름답지만 손잡이나 깃을 모아 묶는 색색의 끈도 멋스러웠다. 빗자루라기보다는 벽에 걸어두는 장식품 같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방에서 자주 봤던 개꼬리비도 있다. 꼬리가 긴 개의 꼬리만을 잘라 안의 것을 발라내고 나무심을 박아서 맨 비인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이불을 거두고는 개꼬리비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방을 돌며 비질을 하셨다. 폭신한 털이 보들보들 예쁘다고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개꼬리라는 걸 알고는 기겁을 한 기억이 있다. 오래 쓰면 털이 닳아서 꼬리 속의 거죽이 다 드러나 보였다.서양의 비는 나무막대 끝에 마른 풀을 단 빗자루였다. 긴 나무막대가 있으니 마녀가 하늘을 날 때 요긴하게 탈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빗자루의 나무막대기 중간에 걸터앉아 타는데. 막대기와 볏부분에 걸터앉아 방석삼아 타는 경우도 있고, 스케이트보드 타듯 두 발로 서서 타기도 한다. 현대에는 청소기가 빗자루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청소기나 로봇청소기를 타고 다닐 수도 있겠다. 로봇청소기를 타는 고양이를 본 적도 있다.

2024-02-21

설 명절 문자폭탄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지난해까지는 정당현수막이 난립하여 무척 불편했다. 어느 날부턴가 지역 국회의원 사진이 크게 박힌 현수막이 네거리에서 내내 펄럭거리고 있어 저이는 현수막으로 정치하나 비난했더니 그 옆에 또 다른 정당의 현수막이 질세라 걸렸다. 촌스러운 빨간색,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의 굵은 글씨 현수막으로 빈틈없이 빼곡하게 둘러싸인 네거리는 차라리 음산했다.우리나라에 유독 많은 현수막을 두고 ‘현수막은 도시의 붕대’라고 누군가가 힐난한 걸 기억한다. 정치광고는 상업광고에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문구의 끝판왕이었다. 현수막 정쟁이요, 깎아내리기 비방 경연에 방불했다. 생업을 위한 홍보가 아닌 정치광고 아닌가. 얼마든지 디지털 시대에 맞게 삼박하게 할 수 있을텐데 현수막이라니 그 구태의연함에 기가 찼다. 내용은 또 얼마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가. 한창 글눈이 트여 간판의 글자나 거리의 글자를 보이는 대로 또박또박 읽는 6살 손녀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자의 뜻을 부지불식간에 물어댄다. 할머니 탄핵이 뭐예요? 친일매국 뭐예요? 민생은? 각성하라는? 대답하기 부끄러워 말꼬리를 다른 데로 돌린 적이 많았다.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구청에 신고 전화한 친구가 있었다. 정당 활동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 표시하거나 설치하는 현수막은 허가가 필요없어 함부로 붙여도 되는 법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그러면 그렇지 법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저희를 위한 법을 은근슬쩍 잘도 만들었구나 공분했다. 전국민이 같은 생각이었을 테고, 지속적인 민원이 와글와글했다는 뉴스, 인천과 광주의 지자체가 따가운 민원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법적 공방이 있었다는 뉴스, 그 후 난립해 지저분하던 현수막이 작년 봄부턴가 좀 숙지막해진 듯했다. 국회의원 그들도 낯 뜨거워 자제하기로 했나 싶었더니 개수와 게첨 장소의 제한을 두는 가이드라인이 새로 만들어졌다나 뭐라나….4월의 국회의원 선거를 두고 작년말부터 오는 전화와 문자는 더 심각하다. 시시때때로 오는 여론 조사 전화를 차단하기 위해 스팸 차단 앱을 깔았다. 전화번호 아래에 여론조사, 혹은 선거홍보임을 알려주어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있어 유용하고 고마운 앱이었다. 그러나 가히 폭탄 수준인 문자는 차단할 방법이 없다. 광고문자와 달리 무료수신거부 전화번호가 없는 문자가 더 많다. 무작위로 보내는 것이라면 불편하고 나의 정보를 알고 보내는 것이라면 두렵기도 하다. 해가 바뀌면서 새해 인사를 시작으로 오기 시작한 문자는 설 명절 대목을 맞은 듯하다. 설연휴 잘 보내시라, 잘 보내고 있느냐, 잘 보내었냐며 나날이 알뜰살뜰 챙기는 설날 전후의 문자들. 연휴 마지막 날엔 명절증후군 없는 연휴 마무리하시고 내일 또 힘차게 시작!하란다. 수십 명의 국회의원 예비후보에게서 하루 수십 건의 문자가 쉼없이 띵똥거리는 것, 여간 큰 스트레스가 아니다. 알림 소리가 싫어 꺼 두었다가는 정작 요긴한 메시지를 놓치게 되니 켜둘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자 폭탄의 해방구는 어디 없을까. 귀찮고도 심란하다.

2024-02-14

역귀성(逆歸省)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설날을 집에서 쇠지 않은 지 꽤 여러 해다. 차례는 성묘로 대신하고 설날엔 가족여행을 같이 했다. 모두 모이면 10명, 경주나 부산엘 갔다. 심지어 대구라도 집 아닌 호텔에서 만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명절 연휴를 즐긴다. 며느리들에게 명절증후군 따윈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나의 결심과 용단이 늘 뿌듯하다.얼마 전 남편 생일로 온가족이 모인 김에 설날 장소를 상의했다. 며느리들에게 멋진 제안을 해보라고 했더니 핸드폰을 꺼내들고 날짜를 확인한다.올 설날은 예년보다 좀 늦어 2월 중순께 있다. 큰 아들이 업무 때문에 2월 내내 많이 바쁠 거란다. 특히 인사이동이 있어 설 연휴를 비우기가 어렵단다.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설연휴를 온전히 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좋다. 올해는 모이지 말자. 각자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걸로 하자. 만약 아버님이 서운해 한다면 내가 설득시키겠다. 아들들의 직장형편을 잘 아는 남편은 얼마든지 이해할 양반이다. 그러자 오히려 며느리들이 서운해 하는 기색이었다.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큰며느리가 운을 뗐다. 그래도 설날인데 오고 싶어요. 애아빠는 일하고 우리 셋만 올게요. 작은며느리도 저도 같이 쇠는 게 좋아요 박자를 맞춘다. 우리가 서운해할까봐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난 괜찮다며 오히려 우리끼리 온천이나 가고 싶으니 설모임은 생략하자. 그러자 큰며느리가 제안했다.그러면 이번 설날 모임은 서울로 정해요. 호텔은 제가 알아볼게요. 형편이 여의찮은 사람은 두고, 아버님 어머님과 우리들만이라도 함께 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잠시 또 정적. 고맙고 기꺼웠다. 좋아 그렇게 하자. 대구 손주들이 서울 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다. 저희끼리도 종종 서울로 오라거니 서울 구경하고 싶다거니 얘기하는 걸 본 적 있었다. 그렇게 뉴스에서나 듣던 말 그대로 역귀성이 결정되었다.친구 중에 안동 명문가 종녀가 있다. 4대 봉사와 묘사에 명절 차례까지 1년 10번 넘는 제사로 손마를 날 없던 엄마의 골물을 늘 안타까워하던 친구다. 친구도 서울에 터잡고 살고, 남동생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자손 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십수년 전,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위로 2대 조상을 매혼하는 결단을 내렸고, 당신이 귀경하셔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했다. 역시 안동 혁신유림다운 결정이라면서도 놀랐다. 그런 발상의 전환과 실천이 오히려 전통을 잇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 노릇은 그렇게 하는 거라 존경심이 생겼다.큰 며느리는 호텔을 예약했고, 명절 서울 계획을 짜느라 부산하다. 서울 나들이가 처음인 대구의 손주들과 합류할 아이들을 위해 궁궐과 롯데월드를 꼭 넣겠다고 했다. 한복 입혀 경복궁엘 가 수문장 교대식을 보여주고 싶다. 애들이 롯데월드에 가면 나는 짬내어 종묘를 구경하고 싶다. 큰아들이 전화했다. 명절 교통정체로 힘들 거라며 미안해 한다. 무슨 소리, 역주행이라 막히지 않고 수월할 거라고 말하니 펄쩍 뛰는 소리를 낸다. 아이고 어머니, 역주행은 큰일나요, 역귀성입니다. 늙으니 헛말이 자주 나온다.

2024-02-07

한복을 즐겨 입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자료 사진을 찾으려 앨범을 뒤질 일이 생겼다. 내 삶의 이력마다 한복을 입은 적이 유난히 많음을 알았다. 70년대 대학졸업식, 여학생은 한복 위에 졸업가운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은박무늬가 반짝이는 파란 공단치마에 하늘색 저고리는 당시 유명한 화장품 모델의 한복을 그대로 베낀 옷이었다.내 한복 이력의 하이라이트는 웨딩드레스다. 결혼식장을 정하니 식장에서 신부옷을 무료로 빌려준다고 했지만 희어야 할 웨딩드레스는 하나같이 우중충한 잿빛이었고 여러 사람이 입어 때 탄 옷을 입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문 웨딩샵의 웨딩드레스는 아름다웠으나 너무 비싸 이 역시 아니라 싶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폐백용 한복을 맞추러 간 서문시장 한복집에서 눈에 띄는 흰 한복감이 있었다. 하얀 본견에 우아한 철쭉꽃이 그려져 있었다. 꽤 유명한 한국화가가 그린 그림이란다. 그것으로 웨딩드레스를 짓고 싶었고 남편도 찬성했다. 한복집 사장님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주겠다며 적극 추천했다. 한복을 맞춰두고, 면사포와 부케를 주문하러 다시 웨딩샵으로 갔다. 신부용품을 모두 무료로 대여해 줄 거고, 한복에 어울리는 부케와 생화족도리까지도 만들어 주겠다. 대신 결혼식 때 사진찍기를 허락해 주고 사진을 웨딩샵에 제공해 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그 후 그 웨딩샵엔 나의 사진이 꽤 오랫동안 걸려있었다.결혼식 당일, 한복을 입을 거니 너무 짙은 화장을 말라는 나의 요구에 신부화장도우미는 업신여기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나의 한복은 그 자리의 모든 웨딩드레스를 압도할 정도로 희고 눈부셨다. 부러움의 눈초리와 탄성에 좀전의 업신여김을 모두 보상받았다. 그 한복은 석사 졸업식, 큰아이 유치원 졸업식, 연주회에 초청 받거나 제법 격식을 갖춘 공연을 보러 갈 때도 파티드레스 삼아 즐겨 입었다.엄마의 회갑연 때 맞춘 한복은 동생 결혼식과 대학원 박사학위 졸업식 때도 입었다. 북경세계여성대회에 가서는 국위선양을 톡톡히 했다. 꽃분홍 저고리에 수박색 치마의 화사한 한복 덕에 외국인들과 사진 찍느라 진땀을 뺐다.십수년 전, 천연염색으로 들인 쪽물 옥사, 홍화물 모시, 감물과 녹찻물의 삼베 천을 주신 유복혜 선생님 덕에 내 한복의 리스트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지고 고급스러워졌다. 독일의 세계도서박람회나 브라질 한민족네트워크에 참석하여 한복의 맵시를 알렸다. 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열리는 외국인 초청 행사 때도 한복을 입었다. 한국인은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 모든 한복을 가지고 가서 한국인여성들에게 입히기도 했다. 쪽빛 치마 하나에 흰 저고리, 노랑저고리, 옥색저고리를 맞춰두면 세 벌이나 있는 셈, 이렇게 한복이 많으니 두 아들 결혼식 땐 따로 옷을 짓지 않아도 되었다.며칠전 겨울용 누비치마저고리를 샀다. 꽤 도발적인 붉은 저고리와 검은 치마였다. 평소 내가 즐기는 색상은 아니었으나 늙을수록 고운 색을 입어야 한다는 지인의 조언에 귀가 얇아졌다. 오는 설날, 손주들이 한복차림으로 절할 때 이 누비한복을 입고 답례를 하고 싶다.

2024-01-31

한옥의 겨우살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한 추위가 매섭다. 지난 며칠은 겨울답지 않게 겨울비까지 내려 포근한가 싶더니 어제오늘은 제법 춥다. 이럴 땐 집안에만 있고 밖엘 나가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선 더욱 그렇다. 주말 이틀을 집안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 문득 모두의 집이 걱정되었다. 그 동네 묘골의 집들은 모두 한옥이다. 외관으로는 한옥고택이지만 엔간한 집들은 겨우살이를 위한 채비를 해 두었다. 툇마루나 큰 마루에도 나무나 유리로 된 문을 달아내었다. 겨울 냉기와 바람을 적당히 막아야 실제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옥의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은 선에서 한 장치다. 그러나 우리 집은 겨울바람과 추위에 온전히 노출된 집이다. 온전히 옛집 그대로의 모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 지낼 요량으로 방안에 커튼을 달거나 비닐막이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작년 겨울, 모두의 집에서 몇 번 잔 적이 있었다. 바깥에서 씽씽 바람소리 들렸으나 방바닥이 따뜻하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4중으로 된 문의 틈새로도 칼바람이 들었다. 바늘구멍으로 든 황소바람을 실감했다. 보일러의 온도를 최대로 높여 방바닥은 뜨거운 데도 코끝은 시렸다. 이불을 함부로 차대는 어린 손주들 챙기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그곳에서 자고 오면 애들은 어김없이 감기에 들어 고생했다. 올핸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 겨울 석 달은 없는 집 삼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세와 수도세는 더 많이 나오고, 보일러의 기름은 수시로 점검해야 할 정도로 많이 쓴다. 혹시 수도가 얼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약하게 물을 틀어 두었다. 화장실엔 동파를 막으려 라디에이터를 켜두고 방안의 냉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보일러도 틀어두어야 한다.예전 어렸을 적 외갓집의 겨울이 생각난다. 오래된 고택이었다. 아궁이에 잔뜩 군불을 넣고 방엔 이불을 넓게 깔아 온기를 가두었다. 아궁이의 숯을 가득 담은 청동화로를 방 한쪽에 두고 방안을 덥혔다. 그 화로에 밤을 구워먹었다. 외할아버지께서 고방에서 내주신 꽁꽁 언 홍시도 화롯전엔 얹어 녹여 먹었다. 화로의 불씨가 거의 꺼질 때면 멀리 머리맡으로 밀쳐두고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잤다. 방바닥은 발이 닿으면 뜨겁지만 머리맡의 자리끼에 살얼음이 끼고, 코끝은 시렸던 겨울밤이었다. 아랫목의 온기가 가실 무렵, 새벽이면 외할머니는 군불을 다시 한 번 넣으셨다. 제일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화장실은 밤엔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곤히 주무시는 외할머니를 깨웠다. 촛불을 켜 든 외할머니를 앞세워 화장실엘 갔다. 외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추위와 무서움에 떠는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그 날 후론 방 밖 툇마루에 요강을 갖다 두셨다. 무서움은 덜했으나 한기는 여전했다. 주방과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우리의 한옥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한가. 뜨거운 방바닥에 코끝 쨍하게 시린 추억이 아련하긴 해도 아파트의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에겐 한옥의 겨우살이가 두렵고 버겁다.

2024-01-24

손주들과 극장 나들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전 며느리가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찍은 사진을 가족 SNS에 올렸다. 학교에 올라가는 손자의 뒷모습이다. 사진 속 손자의 등짝엔 무거운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크게 툴툴거리는 소리도 보였다. “이게 무슨 방학이야 라고 하면서 갔네요”라는 며느리의 문구에 왈칵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맞아 왜 아니겠어…. 모름지기 방학은 평소 맘껏 못했던 것을 누리는 해방구가 아닌가.늦잠도 자고 뒹굴거리면서 놀아야 한다. 학교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다양한 체험이나 여행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 어렸을 적엔 방학 내내 외갓집, 이모집, 큰집으로 가서 실컷 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대 나의 손자는 방학임에도 방학을 누릴 수 없다. 한 달 남짓의 방학 중 단 3일을 쉬고는 다시 등교한 것이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방과후 수업을 위해서다. 학기 중이라면 급식을 할텐데 방학 중엔 그것도 없어 도시락을 무겁게 메고 학교에 간다.월요일과 목요일엔 컴퓨터, 화요일엔 미술, 수요일엔 주판, 금요일엔 로봇과학, 토요일의 축구까지 일주일을 꽉 채운 방과후 수업. 9시에 돌봄교실에 들렀다가 오전에 시작하는 수업을 마치고 돌봄교실에서 점심 먹고 친구들과 좀 놀다가 학원엘 간다.학원에서는 수학과 미술, 피아노 등등을 공부하고 마치면 또 태권도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저녁 6시가 훌쩍 넘는다. 수업을 하는 것 빼고는 학기 중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한숨도 돌릴 수 없는 손자의 방학 스케줄은 듣는 나도 숨이 막히는데 저는 오죽하랴. 그러니 이게 무슨 방학이야라는 볼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느리가 보낸 사진과 사연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단 며칠만이라도 손자의 숨통을 트게 해주고 싶었다. 평소 며느리의 육아와 교육에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 철칙을 한 번만 깨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부탁 아닌 협박을 했다. 단 며칠만이라도 쉬게 해주자. 이런저런 체험도 하고 여기저기 놀러 다닌 후, 학교에 열심히 다니겠다는 다짐을 받자. 힘들지 않겠냐는 며느리를 안심 시킨 후 스케줄을 짰다. 유치원 다니는 손녀의 방학과 겹쳐 같이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계획 중의 하나는 극장 나들이였다.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았더니 마침 상영중인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공중예의를 지켜야 하는 극장에서 혼자 둘을 감당하기는 벅찰 듯하여 안사돈을 소환했다. 안사돈도 흔쾌히 동참하셨다. 안사돈은 나의 도발을 적극 지지하셨다. 애들의 빡빡한 스케줄에 숨가빠하셨고, 며칠을 외갓집에서 머물게 할 수도 없음에 안타까워하셨던 터였다. 손자와 같이 모바일로 사전예매를 했다. 자리를 찾아 지정한 것도 손자였다.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통통 튀듯 걷는 발걸음에 신남이 묻어있었다. 커다란 팝콘과 핫도그를 사 들고 자리를 스스로 찾고, 자리도 제 마음대로 지정한다. 쉼없이 재잘거리며 간식을 맛있게도 먹던 손자는 영화가 시작되자 몰입하여 팝콘도 핫도그도 옆에 앉은 할머니도 잊어버린다. 잠시라도 방과후 수업도 학원 수업도 잊었으면 좋겠다.

2024-01-17

내일배움카드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은퇴 후 버킷리스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은퇴 전에 작성된 목록엔 단연 여행 계획이 많았다. 퇴직 후 바로 감행할 것을 코로나19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손주들의 유치원 등하원 봉사에 묶여 또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작년 말 베트남여행으로 워밍업했으니 올해는 유럽 여행을 바로 감행할 참이다. 마음 바뀌지 않으려 얼리버드로 비행기를 예매했고, 계획도 꼼꼼히 짜 두었다. 수영, 요가, 자전거 타기, 하루 5천보 걷기 등의 체력 단련 리스트도 꽉 차게 버티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는 실천했고, 게으르고 끈기없는 탓에 접었다. 실패했을 땐 재도전이 필요하니 새해 새 다짐으로 다시 시작할 것. 손녀의 유치원 봉사가 끝나면 바로 차를 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걷기를 생활화할 거다. 틈나면 자전거의 타이어도 점검해 둬야겠다. 이보다 더 많은 것은 학습목록이었다. 한국사능력시험이나 일본어 회화공부는 잠시 제쳐둔다. 대신 새해 새 계획으로 새로운 접근을 하자. 한글서예 공부는 계속할 것이고, 최근 한자공부에 눈떠 재미있어하는 손녀와 한자검정시험에 도전해 볼 요량으로 급수시험 대비용 한자책을 사 두었다.나의 버킷리스트는 유기체처럼 살아있어 새롭게 생성추가된 것도 있다. 자격증 도전하기. 격조했던 후배가 전화를 했다. 퇴직 후의 근황을 물었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소개하면서 실패담을 얘기했다. 나보다 퇴직이 몇 년 더 남은 영문학 전공 후배의 계획은 나와는 달랐다. 평생 인문학을 했으니 퇴직 후엔 전혀 다른 계열의 공부를 해 보고 싶단다. 어떤 공부에 관심 있냐고 물으니 그녀의 답은 구체적이되 도전적이었다. 30년 넘어 영문학을 공부했다. 인문학은 인간 정신에 관한 학문이다. 퇴직 후엔 인간의 몸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다. 간호학 같은 걸 공부해볼 생각이다. 인생의 절반은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계획은 참신했다. 동행이 있어야 실천하기 수월할 거라며 동참을 제안했고 난 흔쾌히 맞장구를 쳤다. 후배도 스승이요, 이 또한 후생가외였다. 집 가까이 간호학원을 검색하여 전화했다.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던 학원에서는 혹시 내일배움카드를 갖고 있냐고 물었다.그래서 알게 되었다. 내일배움카드는 취업준비생, 이직을 준비하거나 업무역량을 키우고 싶은 재직자, 나 같은 은퇴자,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경력단절여성의 역량개발에 필요한 훈련비를 국비로 지원하는 제도다. 생애에 걸쳐 직무능력습득과 향상을 위해 국민 스스로 직업능력개발을 할 수 있도록 1인당 500만원 한도 내에서 훈련비를 지원한다. 내친 김에 바로 카드 발급을 위한 서류를 준비, 대구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갔다. 인터넷으로도 된다지만 그 자리에서 신청했고, 은행에 가서 카드 발급을 받았다. 틈나는 대로 국비 지원 프로그램을 탐색하고 있다. 간호조무사자격증을 위해 간호학원을, 최신 매체를 공부하고 싶어 유튜브아카데미를 점찍어두었다. 나도 유튜버가 될 수 있을지 모를 일 아닌가. 오늘 길에서 지게차, 굴착기 국비무료교육 현수막을 보았다. 몸 쓰는 일이니 이것도 좋네. 당장 전화 걸어 자격증 취득을 알아봐야겠다.

2024-01-10

손녀와의 소꿉놀이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린이는 할머니 집에서 잘래 하면서 집에 가기 싫다고 하는 손녀다. 나도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평소 바쁜 아이들의 일상 때문에 쉽지 않다. 아침에 유치원에 갔다 오후에 학원에서 피아노며 미술을 배운다. 저녁에 두 손주를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밥을 해 먹이면 아빠엄마가 퇴근 후 데리고 간다. 숙제도 있을 테고 씻고 잠자기에도 여력이 없다. 여간 빡빡한 게 아니다. 주말엔 저희 4가족이 완전체로 살아야 할 거라 싶어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며칠전 모처럼 집에 데려와 잤다. 유치원 방학 덕분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지만 같이 자는 건 오랜만이다. 책도 읽고 수다도 떨며 기분좋게 잠들었는데 밤에 기침을 좀 하더니 목이 간지럽단다. 저희 집보다 다소 추운 집 탓인가 걱정스럽다. 오랜만에 같이 잘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프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병원에 갈래? 좋단다. 손녀는 병원에 가는 걸 좋아한다. 그 이유를 잘 안다. 어릴 땐 막대사탕 얻는 재미였다. 울며 진료실을 나오면서도 사탕을 챙겨 쥐었다. 그러나 이젠 간호사가 줘도 사탕은 받지 않는다. 대신 약국에 들어가면 눈이 반짝인다. 장난감코너에 몸과 눈이 먼저 간다. 아빠엄마는 턱도 없을 걸, 할머니와 할아버진 뭐든 잘 사준다는 걸 잘 안다. 그깟 5천원 남짓의 것, 두말 않고 사주니 병원길은 장난감 사러 가는 길인 셈이다. 작은 소꿉놀이세트를 골라 계산대에 올린다. 할머니랑 소꿉놀이 하고 싶어.포장을 여니 투명 원형 통 속에 다소 조악하고 작은 동물인형이 다섯 개 들어있다. 제 눈엔 예쁜가 보다. 할머닌 뭐가 이뻐? 선심쓰듯 날 보고 하나를 고르란다. 그건 할머니, 그리고 나머진 각각 아빠, 엄마, 오빠, 이모라 하기로 한다. 유성펜으로 인형 밑에 제가 이르는 대로 적었다. 원형통도 버리는 게 아니었다. 각각 밥, 국물, 반찬, 죽이란다. 또 적었다. 포장지도 쓸모가 있었다. 침대와 아기침대로 정했다. 그 역시 글씨로 적었다. 헷갈리지 않아야지 싶었다.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면서 같이 웃으며 얘기하고 떠들었다. 빈 종이상자를 주니 놀이터를 만든다. 펜으로 화장실과 출입문과 미끄럼대를 그린다. 교실도 만든다. 창문을 그리고 책상 몇 개와 사물함과, 꽃도 군데군데 그렸다. 인형들을 데리고 놀이터도 갔다가 교실에 가서 공부도 했다. 그리고 돌아와 밥 먹이고 잠을 재웠다.이튿날 눈 뜨자마자 또 놀잔다. 밥 먹을까 하면서 밥, 죽, 국물을 챙겼더니 오늘은 수영장에 놀러간단다. 수영장 그릴 빈 상자를 주어야 하나. 그런데 놀이터가 수영장이란다. 밥, 국물, 죽, 반찬이라고 쓴 원형통은 보트이자 튜브고, 침대는 수영장의 코치가 앉는 곳이란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잘못한 것을. 난 한 번 정한 역할과 구실과 장소와 용도는 고정된 것이라 생각했고. 펜으로 적었더니 아니었다. 린이의 상상 속에서는 작은 원통은 때론 그릇이고 때론 보트다. 상상의 공간에서는 놀이터가 호수로, 교실이 운동장이 될 수도 있음을 난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교실에서 공부하고 놀이터에서 논 건 가족이 아니라 모두 친구들이었구나. 소꿉놀이는 그렇게 하는 거였다. 내가 틀렸고 손녀가 옳았다.

202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