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풍을 앓던 동생 초상을 치르고망백이 넘은 누이는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방문요양사만 날마다 드나들었다이레 만에 구급차를 대동한 요양사에게 겨우부축받으며 문밖을 나서던 삭정이 같은 몸이무너지듯 마당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달래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중략)비애의 곡절이 끝나기도 전에 혼절한 그이를 실은구급차가 황급히 떠나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돌아서자 철없는 새끼고양이가 봄볕을 쬐며바닥난 슬픔 위를 뒹굴었다(하략)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슬픈 일은 연이어 일어난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비극은 문학작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비극은 자주 일어나는 바, 고대에서와는 달리 현대의 비극은 낮은 곳에서 볼 수 있다. 풍을 앓은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낸 누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는, 그 역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빈집 수돗가’에 한창인 작약은 이 남매의 비극적 삶을 더욱 짙은 슬픔으로 채색한다. 문학평론가
2024-02-20
단지 외로워서 제 몸에서 송곳니처럼 뻗은 가지들이필시 그 외로움으로 한 계절을 같이 해온 무성한 이파리들그러나 일찍이 병든 이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긴 손을 뻗은 채 서 있는 궁산 기슭의 서어나무 한 그루뱀의 혓바닥 같은 연이은 참사를 몰고 온 여름의 폭풍에도마냥 꺾일 듯 쓰러졌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며 해마다알을 품고 새끼쳐나가는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고 있다(중략)스스로조차 어찌할 바 모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지혜에 충실하게어쩌면 그 누구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비탄의 시간,(하략)모든 존재자들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저 ‘서어나무’와 까치도 그렇다. ‘까치집’은 두 존재자가 맺은 관계의 결실이다. 까치는 서어나무 위에 둥지를 지어 나무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나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며 보호한다. 이 관계 맺음을 통해 존재자들은 ‘연이은 참사’에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4-02-19
빛이 허약해지는 겨울에는바르게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거기에는 늘 새가 있고태양이 돌아누운 하늘은 새들의 것혀와 입술이 읽어주는 몸의 연애처럼기계가 읽어주는 쓸쓸한 소음처럼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책을 덮으면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등 뒤척이는 밤을 열면새들의 눈알이가지처럼 빛난다(하략)하늘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절이 있다. “빛이 허약해지는” 계절인 겨울이다. 빛이 약해야 하늘의 존재자들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새다. 겨울엔 “하늘은 새들의 것”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 진실은 시각을 넘어서는 감각. 키스할 때의 촉각이나 “쓸쓸한 소음”의 청각을 통해 “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로 현현한다. “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을 선사하는 날개로. 문학평론가
2024-02-18
오래된 사진 속 너는카페의 창가 의자에 앉아나를 바라보고 있다내가 바라보는 곳은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하지만카메라 너머의 사물들을 붙들 것처럼너는 흰 손을 뻗으며얼굴에 환한 빛을 밝히고 있지만(중략)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나는 네가 몸을 기울인 공간의 온도와습도를 상상한다손 끝에 닿은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위의 시에 따르면, 사진 속의 세계는 수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 있자면, 그가 “나를 바라보”며 “흰 손을 뻗”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은 “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한 사진 속 공간과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겹치는 ‘상상’으로 이끌고, 현 공간과 섞이는 사진 속의 세계는 “온도와 습도”를 가진 살아있는 세계,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세계로 현존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4-02-15
연못가 버드나무에선바람이 불 때마다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 툭 놓여났다공중을 물들이며 스스륵 잠기는 물고기(중략)버드나무는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고요하다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연못 속에도나뭇잎에서도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어느 저녁나도 툭 놓여나겠지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텐데연못과 그 옆에서 연못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버드나무와 이 풍경을 보고 있는 ‘나’는 서로 감응하며 미메시스된다. 하여 연못의 물고기는 버드나무 나뭇잎이 되며,‘나’ 역시 물고기처럼 “툭 놓여”날 테다. 이러한 마술의 현현은 미메시스가 마음에서 일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못과 버드나무와 ‘나’의 마음은 미메시스로 인해 물처럼 뒤섞이며 깊어지고, 이 마음속에서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14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아기 숨결 같은 눈이라니뒤척이는 진창으로 내려와 점점이입김 내불고 숨을 놓는다깊어 가는 골목마다빈 나뭇가지마다 고요한 뜰에아기 살결 같은 눈이 쌓여먼 나라웅숭깊은 창을 열면칠흑의 어둠 속거룩한 성자겨울밤 가만히 쌓이는 눈. 순결하고 아름답다. 시에 따르면, “아기 숨결 같”은 이 눈은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 듯 자신의 고요한 숨결을 이 세상 위에 놓는다. 세상은 어떠한가. “뒤척이는 진창”이다. 이 진창의 골목 구석까지 내리는 눈은 세상을 더 깊게 만든다. 하여, 눈 내리는 창밖 세계는 더욱 ‘웅숭깊은’ ‘먼 나라’로 현현한다. 눈이 ‘칠흑의 어둠 속’을 밝히는 ‘거룩한 성자’로 이 세상에 도래했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2024-02-13
인생에 악착같이 밀착해야지그것을 맹렬히 붙들어야지이 날의 달콤함이 가시기 전에나의 체온으로 영원한 온기를 남겨야지모든 나라에 미치는 끝없는 바다는변덕스러운 파도에 쓰고 짠나의 고통을 쪽배처럼 흔들흔들실어 나르겠지만나는 남겨야지, 저 언덕에 나의 흔적을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던 나의 뜨거운 시선을그러면 가시나무의 매미는 노래하겠지나의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하략)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여성 시인 안나 드 노아이유의 시. 사람이 삶에서 가장 욕망하는 것은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것 아닐까. 예술가들의 본질적 욕망은 거기 있는 것 아닐까. 세계라는 바다는 “나의 고통을” “실어 나”르지만, 그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뜨거운 시선”을 시로, 형상으로 표현하고, 이 세계 속에서 품게 된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 노래하면서 이 바다를 항해한다. 문학평론가
2024-02-12
한 왕관처럼대지의 이마에한 왕관처럼날아가고 있었다 새들이멀리서 보았다그리고 나는 바로 거기에서 소리쳤다축하한다대지여, 축하한다.인도 현대시인인 께다르나트 싱의 시. 짧지만 응축적이면서 황홀한 시다. 시인은 대지 위를 나는 새들을 “멀리서 보”고 있다. 그 새들의 비상은 마치 대지의 이마 위에 씌워진 왕관 같은 모습이다. 이 세계의 왕이 대지라고 할 때, 비상하는 새들이 대지가 이 세계의 왕임을 드러내기에 그렇다. 시인이 대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건, 새들의 비상으로 비로소 대지가 세계의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일 터. 문학평론가
2024-02-07
사랑이란….하늘을 향해 나는 것매 숨결마다 장막을 백 개씩 뜯어내는 것처음엔 한 숨 한 숨 끊고처음엔 한 걸음 한걸음 끊는 것이 세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심장아, 네게 축복이 있길사모하는 자들의 무리 속에 도달하기를보이는 곳 너머의 그곳을 바라보길가슴속 골목길을 달리기를오 심장아,이 숨결은 어디서 왔는가오 심장아,이 두근거림은 어디에서….오 새여, 새들의 언어를 말하라나는 들리는 소리에 숨겨진 신비를 알고 있다 (하략)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의 시. 중세 시대에 놀랍게도 루미는 사랑에 대한 확 트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사랑은 신과의 사랑을 의미하겠지만, 사람끼리의 사랑 역시 저 이미지는 생생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하여, 사랑은 ‘새들의 언어’로 소통한다. 사랑이란 “하늘을 향해 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랑에 빠진 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지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06
택배 받아 내용물 다 들어내고빈 포장 박스를 뜯어 해체한다.당초의 얼개대로 접고 붙인 부분들을일일이 찾아 뜯고 다시 편다.사람도 접히고 붙여진 몇 굽이 곡절들로생을 포장해 미움도 사랑도 담아내지만언젠가는 여기 이렇게 뜯어 펴는 박스처럼 해체되리라.다만 길고 짧은 시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만이 남아 식으리라.여섯 면의 곽이었던 몸피가 분해되면 납작하게 평면으로 쭈그러든다.그렇게 용도 폐기된 상자가 골판지 낱장들로그동안의 크고 작았던 삶에 상관없이원래의 면목대로 고물상 한옆에 쌓인다.반납되곤 한다.인생은 ‘포장 박스’ 같다. 삶은 “몇 굽이 곡절들”을 “접고 붙”이면서 포장 박스가 되고, 그 박스 안에 “미움도 사랑도 담아”낸다. 하나 용도를 다한 포장 박스가 해체되듯, 인생 역시 원래대로 “평면으로 쭈그러”져 저 세상으로 반납될 것이다.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가” 얼마 동안 남아 있다. 눈물겹지만, 그 온기만으로도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4-02-05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하루 일이 끝나면 흑맥주 한 잔괭이를 세워두고, 바구니를 내려두고남자도 여자도 커다란 맥주잔을 기울이는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린 가로수가어디까지고 이어지고, 노을 짙은 해질녘에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로 흘러넘치는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는가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시인은 ‘~없는가’라는 문형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찾기 힘들어진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거리,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시인에 따르면, 일 끝나고 함께 일한 남녀 모두 흑맥주를 마실 수 있는 마을은 아름답다. “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도 아름답다. 또한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사람의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쑥 나타”날 때, 그 ‘사람의 힘’ 역시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2024-02-04
지그시 두 손으로 감싸면 꼭 심장을 쥔 것 같다불은 견딘 것들은불의 성질을 그대로 닮아서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사람의 심장도밥그릇 크기로딱 그만큼 뜨거워졌다따듯한 밥그릇을 심장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사실 밥은 우리의 삶을 살게 해주는 것 아닌가. 심장이 우리 생명을 지탱해주듯이. 한데 시인의 유추는 더 나아간다. 따스한 밥과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 이의 심장을 동일화 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 먹이겠다는 마음 역시 밥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 그 마음은 불처럼 뜨겁다. 그래서 그것은 불을 견딘 밥처럼 “불의 성질을 그대로 닯”는다. 문학평론가
2024-02-01
숲을 찾았다.사라지지 않을 물과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 바뀐다.저물녘과 새벽만 바뀌지 않는다.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죽기 전까지 함께 할 것들이 나를 살린다.화분에 쌓인 돌을 오래 보았다.부정한 입술이 맑아졌다.시인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살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가난하다. 시인에 따르면 집이나 자동차, 사람마저도 변한다. 부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한낮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것들은 ‘부정함’을 끌고 온다. 반면, 낮밤이 교차되는 ‘저물녘과 새벽’은, “화분에 쌓인 돌”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의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입술을 대었”을 때, 부정한 삶은 맑아질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31
백일 갓 지난 딸아이를 둘러업고 덤프트럭을 타고배달을 나설 때나의 바다는 일 단과 이 단 사이에서태풍주의보신호등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환하게 묵례를 하고 있었고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멈춘 사거리에서 출렁,좌회전을 할까직진을 할까어린 딸은 조수석 등받이에서염소 울음만큼 작고 가늘게 울었고여기서 시동을 끄면 집은 난파다땀에 젖은 작은 배 한 척을 다시 한번 고쳐 쓴다직진이다목구멍이라는 거대한 파도를1톤 덤프트럭으로 힘껏 들이박는다매일 바다를 항해하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화자도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백일 갓 지난 딸아이를 둘러업고 덤프트럭을 타고” 배달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진로를 선택할 때에도 ‘직진’을 선택해야 하는, “시동을 끄면 집은 난파”되는 삶. 먹고 살기 위해 채워져야 하는 그의 ‘목구멍’ 안에는 언제나 큰 파도가 친다. 하나 감동적이게도, 화자는 이 파도를 “덤프트럭으로 힘껏 들이박”으며 돌파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30
순서도 없이 한 줄로 늘어선 불안함이 주저앉아반찬 통에 묻은 밥알처럼 말라붙어 가는 공간 속표정 없는 사람들의 집에서 가져온 숟가락에만 표정이 묻어 있는단 한 번의 외출로 어떤 사람은 마중을어떤 사람은 배웅을 위해 뛰어내려야 하는 공중정원 새들도 찾아오지 않는 무겁고 탁한 공기 속을 휘저으며희미해져 가는 가족의 이름을 반복해서 속으로 부르다그 이름에 곧 반사적으로 뛰어내려야 하는이곳은 결국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 인생들을 등 떠밀어내는불안한 공중정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있어본 이들은 위의 시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곳은 언제 비보가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함’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그곳을 언제 추락할지도 모르는 ‘공중정원’이라 부른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곳이라는 의미겠다. 중환자실에 가족을 둔 이들은 불안과 걱정으로 지쳐 표정을 잃어버리고,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된다. 중환자 가족을 둔 이들의 슬픔에 대한 시적인 조명. 문학평론가
2024-01-29
내 손을 잡아, 그리고 춤을 추자, 너와 나,그때처럼 손을 줘,한 송이 꽃이 되자, 나와 나,한 송이 꽃, 그걸로 충분해.같은 춤을 추자, 너와 나,같은 스텝을 탐색하자,바람에 나풀대는 어린 벼처럼,하나되어 흔들자, 그걸로 충분해.네 이름은 장미, 내 이름은 희망,하지만 이름 따위가 뭐라고,우리는 산꼭대기에 있을 텐데,춤만 추면 되는데, 그걸로 충분한데.삶의 본질을 찌르는, 가슴 벅차게 하는 시. 너와 내가 손잡고 춤추면서 ‘산꼭대기’의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삶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나 “그걸로 충분한데.”라고 끝맺는 마지막 행은, 우리가 아직 이 춤을 추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근심과 욕심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벗어나 ‘너’와 “같은 스텝을 탐색”할 때 우리는 ‘충분한’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28
감아도 감아도당신은 내 품 밖에 있습니다당신을 오르느라 핏물 배인 내 여린 손가락들모른 척 당신은 먼 하늘만 바라보네요몸이 있다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안았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어서당신 몸 속을 파고 또 파고 들었지만통나무 같은 당신은 매일 밤 나를 토해내네요차이는 게 일이라그리움조차 하얗게 말라버렸지만감고 감는 일밖에 나는다른 사랑을 모릅니다시인은 사랑의 전도사 아닐까. 그러나 시인에겐 교리가 없다. 그는 사랑의 속성을 새로 발견하여 우리에게 전한다. 위의 시의 사랑은 어떤가. 슬프다. 화자는 당신의 “몸 속을 파고 또 파고 들”며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당신은 “매일 밤 나를 토해내”니 말이다. 이젠 그 사랑은 끝나 “그리움조차 하얗게 말라버렸”다. 하나 사랑은 그 “감고 감는 일” 자체에 깃든다는 진실을, 화자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1-25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 거주한다공처럼 튀어 오르기도 하고공을 벗은 바람이 되기도 한다.바람은 불과 놀며술이 되고 황금도 되나니우주는 정보가 갈 수 있는 한계라는 말은철없는 말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 거주하는 것이문제이다.높은 천장을 갖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시인에 따르면, ‘시인’이란 존재는 변신의 귀재다. ‘시인’은 튀어 오르는 공이 되다가도, “공을 벗”고 공 속 바람이 되어 “불과 놀”면서, “숲이 되고 황금도” 된다. 하지만 ‘시인’은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 거주”한다. 별을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시인’의 능력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우주와 시인 사이엔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 “높은 천장을 갖고 싶다는” 희구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의 우주를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1-24
나는 어리둥절하다저 망치는 언제부터 나에게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나내가 스스로 못대가리임을 자각하는 순간망치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뽀족한 내 몸이 사정없이 들어가 박히는저 몸은 누구의 것인지나는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사랑도 망치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나는 내 몸이 두렵다사랑은 불현듯 몸을 통해 찾아온다. 과격한 사랑의 도래도 있다. ‘망치’ 같은 사랑이 그것. 그야말로 그 사랑은 우리를 가격한다. 망치에 맞은 우리의 몸은, 당신의 몸에 못처럼 “사정없이 들어가 박”힌다. 사랑은 ‘나’의 의지를 무시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사랑은 마치 “나에게/적개심을 가”진 것처럼 ‘내 몸’에 침입하는 것, 두려워할 만하다. 하나,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도래를 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문학평론가
2024-01-23
오래전 나도 당신도 없고 그러니 어떤 단어도 추억할 수 없는 골목에 모두 잠들어 아무도 깨우지 않게 생활이 돌아눕는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에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그 가만 새벽에 어린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을 것이다 고요는 잎보다 먼저 꽃을 흔든다우리는 살다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어떤 고요의 세계와 마주할 때가 있다. 순수한 현재만이 있는 세계. 생활 속에 있는 생활 너머의 세계. 추억도 없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저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이 그런 세계일 테다. 하나 그 현재의 고요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가만 새벽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어린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고요가 흔드는 꽃의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