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우듬지에살랑 바람이 스치면,맑은 하늘에검은 구름이 흐르듯,나도 무거운 걸음걸이로터벅터벅 나의 길을 따라가네,밝고 즐거운 모습들 사이로,쓸쓸하게, 다정한 벗도 없이.아, 바람은 고요하구나!아, 세상은 참으로 밝구나!폭풍우가 휘몰아칠 때도,나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는데.독일 후기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 그의 시를 노랫말로 슈베르트가 많은 곡을 작곡하여 유명해진 시인. 우리 모두 삶의 황혼을 “쓸쓸하게, 다정한 벗도 없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걸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하나 그때에도,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고 있는 세상은, ‘나’의 모습과 반대로 밝고 즐거운 모습일 테다. 하여, 이 고독의 비참보다는,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견디며 살 때가 차라리 더 좋았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문학평론가
2024-07-23
건물은 비상구를 전부 갖고 있는데사람만 갖고 있지 않다아니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다그저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스스로 폐쇄시키거나 열지 않는 사람들그중에 한 명은 기필코 내 어머니다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어머니는 어머니를 끝까지 탈출하지 않았다평생 누군가의 비상구만 되어준 이력(중략)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궁금했다비상구가 처음으로 열린 걸까마침내 닫힌 걸까누구나 자신의 현재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질 터, 하나 탈출하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기에. 대부분의 어머니들 역시 ‘어머니’로부터 탈출하지 않는데, 그들은 스스로 비상구를 폐쇄시키고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 때문일까. 그들이 죽었을 때엔 사랑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비상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시인의 의문이다. 문학평론가
2024-07-22
고층아파트 건물에는 꺼지지 않은 창들이 흰 별 몇 개로 떠 있고숲길 어둠에는 꺼지지 않은 가로등이 오렌지 별 몇 개로 떠 있고영빈관 침대에서 홀로 깨어나도 어둠을 지우지 못한 별 하나로 떠 있고암에 걸린 환자들이 남은 생을 별처럼 바라보는 이 적막 속에서창가에 또 하루가 오는 발자국을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있고원자력병원은 주로 암환자들이 치료받는 곳. “영빈관 침대에서 홀로 깨어” 있는 시인도 암환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는 암환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며, 일상적으로 보는 불 켜진 아파트 창문들이나 숲길 가로등들이 모두 별처럼 빛난다. 그 불빛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시인 역시 “어둠을 지우지 못한 별 하나”로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2024-07-21
내원골에 누워밤하늘을 바라본다나는 또렷하게 빛나는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맑은 물고기가꼬릴 흔드는 웅덩이처럼별이 첨벙댄다헤엄치는 물고기는쏘가린지꺽진지 잘 모르겠다물결 속에 보이는 별은산사람인지토벌군인지구분하기 어렵다맑은 날, 산에 올라 바라본 밤하늘의 놀라운 아름다움! 박우담 시인은 지리산 내원골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물결 이는 웅덩이로, 하늘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별들을 그 웅덩이에서 첨벙대며 헤엄치는 물고기로 비유한다. 그 비유는 나아가 지리산에서 서로 적으로 뒤엉켰던 사람들로 확장된다. 하지만 하늘의 별들은 누가 “산사람인지/토벌군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함께 빛나는 별들로 존재하기에. 문학평론가
2024-07-18
울렁거리는 지층에서 태어났다검은 줄과 흰 줄의 팽팽한 줄다리기다(중략)얼룩이 상처라면덜룩은 그만큼의 공백얼룩이 눈물 자국이라면덜룩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늘울타리 밖의 삶을 기웃거리지만,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말은 이따금 제 안의 파도를 뚫고 나온다얼룩, 안간힘으로 울타리를 부순 흔적산등성이 다량논과 논두렁의 고단함 같은이젠 악기도 가구도 아닌 피아노처럼검은 말도 흰말도 아닌 모호한 말내가 만든 철창에 다시 갇히는 말얼룩덜룩 얼룩말. 시인은 “울렁거리는 지층” 같은 ‘얼룩’에서 상처에서 빚어 나온 눈물을, ‘덜룩’에서는 그 눈물 뒤에 드리워진 그늘을 읽는다. 얼룩말의 ‘얼룩덜룩’은 “울타리 밖의 삶”에 대한 욕망과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하는 그늘의 삶과의 갈등에서 그려지는 것, “제 안의 파도를 뚫고 나”오는, 음악의 울렁거림 같은 표현이 ‘얼룩-눈물’이며, 그 얼룩은 시인이 발하는 말(語)과 같음을 시는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7-17
시대는 우리에게 노래하라고 요구하고는우리의 혀를 잘라 버렸다.시대는 우리에게 거침없으라고 요구하고는거짓말을 늘어놓았다.시대는 우리에게 춤추라고 요구하고는우리를 강철 바지에 욱여 넣었다.그렇게 시대는 기어이 뜻대로요구한 개짓거리를 손에 넣었다.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20대 초반인 1922년경에 쓴 시. 이 시는 그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당시 세상에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젊은 세대의 시대에 대한 비판,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는 어느 시대나 공통되는 것 같다. 모든 시대는 젊은 세대를 찬양하며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펼치라 하지만, 결국 그 세대의 “혀를 잘라 버”리고 “강철 바지에 욱여 넣”어 ‘개짓거리를’ 하도록 강요해왔기에. 문학평론가
2024-07-16
어허, 부질없어라젊은 날 쉬지 않고 익힌 글과 검술 근심만 사고늙지 않고 명 늘일 도리 없는관속에 갇힐 서글픈 인생이라서귀염받다 버려지는 강아지처럼궁해져 말라가는 물속 붕어처럼사람마다 인간 세상 좋다 말해도꽃다운 시절은 잠시뿐인 것을어느새 “관속에 갇힐” 시간을 생각하며 “젊은 날 쉬지 않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부질없’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나이에 이른 김시습. 젊은 날에는 세상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명을 다하면 “귀염받다 버려지는 강아지처럼” 될 운명이며, “꽃다운 시절은 잠시뿐”이고 인생은 “말라가는 물속 붕어”의 삶과 같다는 처절한 탄식은,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지만 비껴갈 수 없이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4-07-15
나는 욕실에서/ 죽어 가는/ 입김이 좋다거울 끝자락부터/ 얼굴을 내미는/ 녹이 좋다고개를/ 들고/ 거울을 본다밤새 어디를/ 끌려갔다/ 왔는지목에/ 빨랫줄 자국/ 여러 개1984년 생 시인의 시로, 이제 막 40이 된 시인의 현재 마음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죽어가는 입김이 좋”은 마음. 거울이 시인의 마음을 은유하는 것이라 할 때, 시인은 자신의 마음 “끝자락부터2044 얼굴을 내미는2044 녹”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사라지고 녹슬기를 바라는 것, 그의 삶이 현재 어떻기에? ‘거울-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를 알려준다. “목에2044 빨랫줄”이 걸려 목숨을 담보로 끌려 다녀야 삶. 문학평론가
2024-07-14
어제보다 깊어진 동굴에서 깨어납니다떠나보낸 작은 새는 다시 돌아와내 가슴에 둥지를 틀고 붉은 알을 낳았습니다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굶주린 새에게 나의 살점을 떼어 줍니다새는 나의 살점을 먹고나는 새의 알을 먹고그것이 이곳에서 내가 택한 방식입니다눈먼 새를 가슴에 올려두고 기다립니다긴 겨울이 끝나고남은 살점이 모두 사라지고 뼈만 남게 되었을 때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겨울날, 동굴에서 홀로 거주하는 화자에게 찾아오는 이는, 화자가 떠나보냈지만 다시 돌아온 ‘작은 새’밖에 없다. 이 ‘새’는 시를 의미하지 않을까? 동굴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살을 새에게 주고 새는 자신의 알을 화자에게 주면서, 둘은 공생한다. 결국 화자가 ‘시-새’에게 자신의 살을 다 내어주고 뼈만 남았을 때, 시에 삶을 다 맡겼을 때, 그가 기다리던 누군가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어떤 희망을 화자는 품는다. 문학평론가
2024-07-11
장미는 완고하다묶여 있는 장미들은 고독한 늑대 같다향기를 내보는 데도 인색하다리본 묶인 비닐을 걷어내고 화병에 꽃아도묶여 있던장미들은 내내 완고하다절대 꽃잎을 벌리지 않겠다봉오리 끝에서부터 까맣게 말라간다쭉쭉 물을 좀 빨아들여봐물을 뿌려도 갈아줘도 요지부동이다피지 않는 장미매일 물을 갈아준다붉은, 연분홍 장미들아 왜 피어나지 않는 것이냐물을 먹으며 말라가는 장미들은꽃다발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물빛이 탁해졌다꽃다발에 묶여 있는 장미, 시인은 화병에 꽃아 그 장미를 돌보고자 한다. 하지만 “장미는 내내 완고”해서, “절대 꽃잎을 벌리지 않”고, “향기를 내보는 데도 인색”하다. 장미는 스스로 말라가는 것 같다. 장미는 왜 이렇게 완고한가. “꽃다발의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화려한 시절에 대한 기억들…. 그렇다면 “물빛이 탁해”진 것은, 과거와 현재의 낙차로 유발된 장미의 우울이 물에 풀어졌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7-10
그녀가 화장으로 덮은 덧없이 사라지는멍이 아니라, 그녀가 출구를 찾으며망원경에 눈을 너무 세게 눌러 찍힌 자국처럼 남은어두운 반점이 아니라, 난로 위 뼈다귓국 우리던솥에 몸을 기울이고선 그녀가 가다듬곤 하던목소리의 떨림이 아니라, 자기 치아 대신해 넣은 그 이가 아니라, 혹은그 공문서-그 직인과희미해진 서명-이미 바래고 있는,나달나달 닳은 모서리가 아니라, 날짜들과 그녀 이름이적힌, 역사처럼 추상적인, 그 작은 표지가 아니라.다만 그녀 육신의 풍경-쪼개진 빗장뼈,구멍 난 관자놀이-그녀의 자그만 뼈들이지.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모든 게 그러하듯.나타샤 트레스웨이는 1966년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이다. 이 시 제목의 ‘증거’는 무엇의 증거일까? ‘그녀’가 당한 폭력의 증거 아니겠는가. 그 증거는 직인이나 서명이 확인된 공문서 따위에 있지 않다. “덧없이 사라”질 살갗 위의 멍 역시 증거가 아니다. 증거는 “쪼개진 빗장뼈”나 “구멍 난 관자놀이”와 같은, 끔찍한 “육신의 풍경” 자체에 직접적으로 있다. “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폭력의 증거들. 문학평론가
2024-07-09
닭갈빗집을 운영하는 김사장한쪽 눈이 숯불에 하도 많이 드러나 상해간다고 한다숯불이 자신의 눈동자를 조금씩 파먹는다고그럼에도 이 일을 멈출 수 없다는 남자의 눈에서석류알이 쏟아졌다숯불로 고기 구워내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자신의 눈동자를 내준단 말인가한 번도 내 전부를 꺼내놓지 못한 나는석류를 손에 쥐고전전긍긍붉은 피톨들이 왈칵, 내 앞에 쏟아진다몸이 상하더라도 일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아마 한국의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고용된 이가 아니라, “닭갈빗집을 운영하는 김사장” 같은 이는 더욱 일을 멈출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의 눈동자를 내”주면서까지 일해야 하는 ‘김사장’으로부터 숭고함을 느낀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석류알’, 그 “붉은 피톨들”을 ‘왈칵’ 쏟아내며 일하는 그에 비해, 자신은 “석류를 존에 쥐고/전전긍긍” 하며 살고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4-07-08
우린 겹치는 부분으로 있었습니다우린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에 행복을 찾은 듯했습니다붉은 겹꽃잎처럼꽃은 늘 먼 곳을 바라보았지요겹치는 부분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외출에서 돌아와 떠나고 없는 꽃을 보았습니다나는 곧 겨울이 올 것을 알고마당으로 나가떨어진 꽃잎들을 쓸어 모았습니다흰 눈발이 창을 두드리고침대는 차가워졌습니다흰 눈 속에 산새 한 마리 날아와 웁니다행복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시인에 따르면 ‘우리’가 형성될 때, 당신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 때 찾아온다. 그때 “붉은 겹꽃잎처럼”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겹치는 부분이 많아”지면 “꽃은 늘 먼 곳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꽃은 마당에 떨어지고, 당신은 떠나는 날이 온다. “흰 눈발이 창을 두드”릴 계절이 오면, “침대는 차가워”져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7
몇 시간 봉사하고/ 몇 배를 얻는 길이라면/ 밥집에 가야 한다밥집은/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밥을 위하여/ 밥을 찾는 곳밥을 먹는 사람과/ 밥을 나르는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는 곳밥집은/ 밥과 함께/ 밥이 되어/ 우리 모두 한통속임을 깨닫는 곳우리는 밥으로 살고/ 밥으로 죽고/ 밥이 되어 떠난다시인은 ‘명동밥집’에서 노숙자에게 식사를 배급하는 봉사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몇 시간의 활동으로 “몇 배를 얻는” 바, 그것은 “우리 모두 한통속”이라는 깨달음이다. 그 활동은 ‘우리 모두’ “밥을 먹어야” 해서 “밥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누군가 밥은 하나님이라고 했듯이, 밥 아래에서는 모두 평등하며 하나라는 것을. 밥으로 살고 죽는 ‘우리 모두’ “밥이 되어 떠”나는 존재다. 문학평론가
2024-07-04
멀리 가지 않고도지붕 아래 내려 온 별을 만난다.맑고도 아늑한 공기 한 웅큼.돌을 들어 올리는 풀꽃의 힘으로집을 들어 올리는 이 흰빛.나를 마중 나오시는 희미한 등불.비 오는 가을 오후,?시드는 숲 가의 집에서둥근 빛에 우리는 둘러앉았다.한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오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올 것이다.둥근 흰 빛에 한숨을 섞으며우리는 기다렸다.조바심이 흰 빛에 빨려 들어가도록.흰 빛은 이윽고 우리를 들어올렸다.팽창하여 대기가 되었다.이 흰빛은 우리이다.북풍이 세계에 선물한.“지붕 아래 내려 온” 별의 ‘흰빛’은 신성한 힘을 가졌다. “돌을 들어 올리는 풀꽃”처럼 죽음을 삶으로 상승시키는 신생의 힘을. 이 빛은 식탁에 강림한 둥근 빛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팽창하여 대기가 된 흰빛이 된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오지 못할”‘한사람’이 죽은 이라면, 그는 ‘대기’가 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터이다. 빛은 우리를, 죽음을 품은 신생으로 이끄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3
아들 없는 생일날에 미역국을 끓여놓고교과서보다 만화책을 좋아했던 아들을, 공부보다 공놀이를 좋아했던 아들을, 밥 먹는 시간 대신 자겠다는 아들을, 대학을 안 가고 돈 벌겠다는 아들을, 부글부글 물거품이 되어버린 아들을 가슴에 박힌 심장같은 아들을, 엄마를 기다리다 가라앉은 아들을이제는 저녁바다가 된 아들의 얼굴을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다. 참사의 희생자를 아이로 둔 부모는 여전히 ‘문득’ 아이의 얼굴이 생각날 것이다. 위의 시는 아들의 생일날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이제 저녁바다가 된” 아들을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엄마를 찾았을 아들의 얼굴은 심장이 되어 어머니의 가슴에 박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공부보다 만화를 좋아했던 아들의 모습은 더욱 그녀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4-07-02
아무리 애 터지는 슬픔도시간이 흐르고 흐르면흐릿해지지시간은 흐르고흐려지지장소는어디 가지 않아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영원할 것 같은영원한 것 같은아플 것 같은아픈 것 같은장소들이야기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억 속에? 시간 속에? 하지만 위의 시에 따르면, “애 터지는 슬픔도/시간이 흐르고 흐르면/흐릿해지”는 것. 흐름은 흐릿함을 가져온다. 하나 이야기가 흐릿해지지 않은 곳이 있다. ‘장소’다. “장소는/어디 가지 않”는 것, 슬픈 이야기가 묻혀 있는 장소들에 가면 슬픔은 되살아난다. 그곳에서 아픔은 “영원할 것 같”고 “영원한 것” 같이 나타난다. 공간이 시간보다 더 영원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1
오늘 하루 내가 바라는 건먼지 구름 까치집 엉겅퀴 푸른 하늘아무것도 아닌 것들만 잔뜩 바라보는 일이다압셍트 한 잔을 놓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화가처럼가장 가까운 나무 한 그루의 색을 바꿔주는 것결국 그 말이 아무 의미도 아닌 것처럼결국 그 손길이 허공인 것처럼가벼움을 가지는 것내가 정말 원하는 건개 한 마리가 짖는 소리에도앞서 간 네 마음을 따라잡지 않은 채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것뿐이다마음도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무심해지는 것. 온갖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해방되어 “가벼움을 가지”고 싶을 때. 어쩌면 그때 “가장 가까운 나무 한 그루의 색을 바꿔주는” 예술이, 시가 잉태될 수 있을지 모른다. 말을 의미의 족쇄로부터 놔주고, “앞서 간 네 마음을 따라잡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만 잔뜩 바라보”며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이 ‘하염없는’ 평화로움을 마음에 되찾아줄 때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6-30
곧게 자란 나무가 없다굵고 반듯하게 자라면서도어깨가 굽은 소나무수많은 가지 살피느라 허리가 휘어진 소나무햇살 찾아 제 키만 키우는 소나무하나같이 못난이로 자라서로에게 치어 자릴 비켜주면서그렇게 몸 비비 틀면서저도 모르게 숲이 되고 있다거북이등껍질 같은 울음을 꺼내바람에 날리는 사방푸른 그늘들반듯하게 자라나려는 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한다. 반듯하게 자란다는 건 타자들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 그 삶은 “어깨가 굽”거나 “허리가 휘어”질 수밖에 없기에. 하나 이러한 삶들이 모여 “저도 모르게 숲이 되”고 “푸른 그늘들”을 만들어낸다. 한데 ‘곰나루’는 동학 농민의 정신이 깃든 곳. 저 “몸 비비 틀면서” 숲을 이루며 울음을 “바람에 날리는” 소나무들은 동학 민중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2024-06-26
아직도 시인은 자고로휑하고 추운 불모의 다락방에서굶주리고 떨면서, 꽃의 노래와 그대와같은 그러한 것들에 맞게 시를 만들어야만 한다.아직도 자고로 시인의 존재는아름다움의 이름에 굴복해야만 한다.꽃과 그대와 노래가 있는 한 죽지 않을아름다움, 아름다움이 살 수 있는 동안에는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미국의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의 시. ‘아직도’라는 말은 ‘지금도’라는 말을 불러온다. ‘지금도’ 역시 ‘시인’은 “굶주리고 떨면서” “아름다움의 이름에 굴복”하는 삶을 살며 “시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기에. 시인은 여전히 가난과 추위를 겪으며 살아간다. 시는 돈이 되지 않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꽃의 노래와 그대”로부터 시를 길어 올려 아름다움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