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물들은 대체로 쓸개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그 진술의 과학적 진위는 증명된 바 없으나미학적 가치는 기꺼이 동의하는 바불필요한 무언가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건미(美)보다는 추(醜)의 표시일 수 있겠거니떼어내고 버려 가벼워져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없애고 비워내 자유로워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시가 그렇고삶 또한 그렇다상상력은 더하는 힘이 아니라솎아내는 힘에서 제대로 꽃 피고발목과 마음에 두른 굴레 툴툴 털어낼 수 있을 때빛 향한 자유로운 영혼의 시간 향유할 수 있는 것“주렁주렁 달고 있는” 장식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런 장식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이란 장식과 반대로 “떼어내고 버려”야 확보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미학적 가치’관에 따르면, 상상력도 통념과는 달리 “솎아내는 힘에서 제대로 꽃” 핀다. 상상력의 자유로움은 “발목과 마음에 두른 굴레 툴툴 털어낼”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이 시와 삶을 아름답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3-11-23
가끔은 풍뎅이가 날아오는 것이다 날아오는 풍뎅이는 향기를 물고 오는 것이다 저녁의 문 뒤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은 꿈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축축한 기억에 젖어 그늘이 된 여자는 우두커니 물드는 것이다 비 그치고 이미 물든 저녁을 그는 왜 날아왔는지 보랏빛으로 물든 저녁에 어떻게 향기를 입히는지 가끔은 풍뎅이가 되어보는 것이다 풋잠 속을 유영(遊泳)하듯 라일락은 흩날리고 여자를 물고 풍뎅이가 날아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절뚝거리는 것이다이 시 속의 ‘여자’는 삶에 지쳐 있다. 우리가 그렇듯이. 그녀는 “축축한 기억에 젖어 그늘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삶에도 ‘가끔은’ “향기를 물고” “풍뎅이가 날아오”기도 한다. 그 향기에 “우두커니 물드는” 여자. 풍뎅이가 그녀를 물고 날아가고, 그녀는 꿈꾸듯 “풋잠 속을 유영”하며 “풍뎅이가 되어”본다. 이 비행이 쾌활한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 비행을 삶의 절뚝거림으로 표현하듯이, 슬픈 ‘유영’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11-22
비 내리는 밤길 걷다가불 켜진 버스 정류장에서내 뒤를 따라오는작은 아이를 보았지잠시, 멈추어 서서가로등 불빛에 난사되는신기루 같은 아이에게말, 걸어 보았네그는 아무 말 않고가다 서기를 반복하며홀로 걷는 내게 보폭을 맞추며중년까지 따라올 기세네시인은 중년에 다다른 현재까지, 자신이 잊고 있었던 존재가 자신을 그림자처럼 언제나 쫓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 존재는 ‘작은 아이’로, 아마 어린 시절의 시인 자신일 테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망각 속에서도 존재해 왔으며, ‘신기루’ 같은 그 어린 아이는 “내게 보폭을 맞추며” 따라와 주었다는 것, 지금 삶을 살아가는데 지쳐 있다면 그 아이를 찾아 “말, 걸어 보”라고 시인은 우리에게 권한다. 문학평론가
2023-11-21
여기도 뺏기면 어디로 가나막막하여 하늘을 본다공항을 나는, 하늘을 뺏긴 새들1분마다 뜨고 내리는 비행기 엔진에순식간에 한 생애가 빨려든다공중분해 되어버린 새의 조각난 몸흔적 없다지상에도 지하에도어디에로 편입되지 못한 무소속의 엉거주춤서지도 앉지도 못한 회색 중간지대에짧은 햇살이 지난다기죽어서 욕심내어보는 한 줌 햇살언젠가는 온전히 품으리라차곡차곡 접어 넣는 눅눅한 희망반지하 방으로 밀려난 사람들. 시인은 모두 사연이 있을 그들을 “비행기 엔진에/순식간에 한 생애가 빨려”들어간 새들로 비유한다. 비행기 엔진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힘과 그 냉혹한 메커니즘을 상징한다. 새처럼 순진한 이들은 이 메커니즘에 빨려 들어가 산산조각 나는 것, 하지만 시인은 이들이 지하방에 내리는 ‘짧은 햇살’을 “언젠가는 온전히 품으리라”는 ‘눅눅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11-20
꽃의 부드러운 몸에는시간의 어둠과 빛이 새겨져 있다목을 길게 빼고그리운 쪽을 바라본다(중략)꽃은 시간의 손바닥을 펼치려 한다손에 짙게 밴 피비린내일본인인 우리의 죄가붉은 물시계 속으로 언제까지고 떨어져 내린다풀리지 않는 시간은얼음처럼 단단한 채이지만일본의 동북지방 재난 희생자에게 바친 기도는하늘 높이 퍼진다빛 쪽으로 향하는 것빛에 둘러싸여야 하는 것그 고통의 언어는새로 돋아난 영혼의 날개를 움직인다(한성례 옮김)1954년 생 일본 시인 사가와 아키는, 위의 시에서 일본 역사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는 ‘꽃’을 “시간의 어둠과 빛이 새겨져 있”는 무엇으로 상징화한다. 일본의 역사적 시간이 새겨져 있는 그 꽃 속 시간을 펼치면, “언제까지고 떨어져 내”리는 붉은 시간의 죄스러운 ‘피비린내’가 난다. 일본 외부 민족에 대한 폭력뿐만 ‘동북지방 지낸 희생자’에 대해서도 스며들어 있는 피비린내. 문학평론가
2023-11-19
어쩌다 풍랑이란 말 곁에 놀다풍랑이 풍란으로 그윽해질 때 있어내 마음이 그렇다네 눈빛이 그렇다풍랑의 성깔머리가풍란 꽃처럼 퐁퐁 터지며향유고래의 눈빛으로그렁해질 때가 있다내 번민이 그렇다네 눈총이 그러하다말이란 참 신기할 때가 있다. ‘풍랑’과 ‘풍란’은 성격이 다른 대상을 지칭하지만, 발음이 비슷해서 유종인 시인처럼 서로 유추해보게 되는 것, 그러자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풍랑은 “풍란으로 그윽”해지고, 풍랑 성깔머리를 닮은 풍란 꽃은 “향유고래의 눈빛으로/그렁해”진다. 나아가 풍란과 풍랑의 관계는 너와 나의 관계로 유추된다. 네 눈빛으로 내 마음은 그윽해지고, 네 그렁해지는 눈총은 내 번민과 닮았다. 문학평론가
2023-11-16
믿음이 부실공사다꿈은 냉동실에 처박힌 빵노동자 없는 노동배 아픈 욕망 배고픈 욕망절망스럽게 소비되는 절망끼니 같은 앰뷸런스 끼고일상에 중독된 죽음죽음에 중독된 일상무덤으로 출근하고관계에서 야근한다인력시장에 하루하루 나가 일을 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본모습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 없는 노동” 체제, 사람보다 노동이 중요한 사회. 미래 없는 하루를 위해 인력시장에 나오는 이들에게 ‘꿈’은 냉동고 속의 언 빵과 같다. 이들의 일상은 죽음의 기운에 중독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 일터가 무덤이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11-15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엄마가 두 팔을 활짝 편다엄마 팔이 쭉쭉 늘어난다엄마 품은 둥글어지고 움푹해진다공중으로 뛰어오른 아이가품 안으로 막 뛰어드는 찰나바람을 껴안은 플라타너스는푸르게 부풀어 올라 한껏 휘어진다(중략)엄마 품에 다 안겼는데도아이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엄마란 존재는 신비롭다. 물론 평범한 이들이 엄마가 된다. 그녀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만 엄마로서 살 때는 존재의 신비를 뿜어낸다. 엄마가 아이를 안기 위해 “두 팔을 활짝” 펴자 그 “팔이 쭉쭉 늘어”나는 것처럼. 엄마는 세계와 조응하는 존재다.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플라타너스도 바람을 껴안으며 “푸르게 부풀어” 오르듯이. 하여 엄마 품속에서 아이는 계속 뛰어다닐 수 있다. 바람이 멈추지 않듯이. 문학평론가
2023-11-14
꽃 무더기 일제히 한 방향으로 예뻤다낱장의 꽃잎들이 가벼워 나도 사뿐 얹혀햇빛과 함께 흔들렸다돌아오는 길에 보고 말았다꽃들의 뒷모습을수만 개의 받침이 밑에서 만개하고 있었다한 아름 품었던 송이를 터뜨려 가슴 밖에 내놓고그 꽃잎 하나 질 때마다 비와 바람을 붙들고텅 빈 채 울고 있었다당신이 내 발을 붙들고울고 있었다꽃들에게도 뒷모습이 있었구나! 우리는 드러나 있는 꽃의 아름다움에만 심취하지 않았던가. 꽃들도 “꽃잎 하나 질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것이다! 한편 ‘받침’은 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는 “비와 바람을 붙들”지만, 결국 꽃을 잃고 “텅 빈 채 울고 있”다. 시인이 꽃의 뒷모습을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은 지는 꽃잎처럼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내 발을 붙들고” 당신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3-11-13
눈이 내렸다. 첫눈이다. 첫눈, 함박눈눈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눈부시게 하얗다 두께를 가졌다 밟으면 폭폭 찍히는 발자국누구의 발자국일까 일자로 줄지어 찍힌 이런 모양, 길고양이나 노루일 거라고 생각했다부드럽게 차가운, 차가우면서 따뜻한 흔적을 보며 우리도 자꾸 걸어갔다.누구도 먼저 말이 없었다첫눈은 계속 쌓였고, 쌓여서 눈부셨고 우리는 빛나는 그늘과 우리를 따라오는 그림자를 보았고 자꾸만 폭폭 찍히는 발자국을 보았다나무마다 목도리처럼 그늘을 두르고 서서 귀 기울여 새의 노래를 들었다당신도 허밍으로 낮게 노래를 불러주었다지금은 그것만 생각난다대개 첫사랑의 기억은 특정한 이미지들로 집중되어 현상한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첫눈이 오고 둘이 함께 “폭폭 찍히는 발자국”을 뒤로 남기며 “자꾸 걸어갔”던,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흔적”이 남아 있는 기억. “새의 노래”가 들리고 그늘이 빛났던 이미지들. 이 모순들이 아름답게 응축된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첫사랑의 기억에 따라오는 슬픔을 환기하기도 한다. 첫사랑은 대개 잃어버리는 사랑이니까. 문학평론가
2023-11-12
도솔암에서 이제 막 하산하여 선운사 마당 한가운데 들어서니 천지간 눈이 내린다 겨울 아침 절집의 고요란 이런 것인가 대웅전 뒷산 숲 그늘에 동백은 일러 피지 않고 어디서 날아든 동박새만 떼로 여행자를 반긴다낮별이 뜨고 무릇꽃이 피면선운의 눈발이 멎을 것인가선 채로 길을 떠나는 숲의 영혼 자작나무“천지간 눈” 내리는 절 주변의 고요한 풍경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시. 한데 여행자는 누구인가? 화자인가? 자작나무인가? 2연의 3∼4행의 ‘행간 걸림’이 절묘하다. 이 걸림으로 “선 채로 길을 떠/나는” 자작나무가 바로 ‘나’의 영혼임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여하튼 위의 시는 여행이란 공간 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특히 영혼의 여행은 자작나무처럼 “선 채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임을. 문학평론가
2023-11-09
사랑의 포로였고/슬픔의 포로였고/자유의 포로였다생각하면 나는,/죽음의 포로였고/허무의 포로였고/생명의 포로였다도대체 나는,/묶이지 않으면/살지를 못했다정말 그랬던 것 같은데,/감옥들은 오래되어/자꾸 낡아 가나생각하면, 요즘 나는/출소가 코 앞인 죄수처럼/기운이 좀 난다시인은 사랑, 슬픔, 자유, 죽음, 허무, 생명 등의 포로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시인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무엇인가에 “묶이지 않으면/살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나 맹렬하게 사는 사람들이 지독한 수형 생활을 할 터, 시인도 그러한 수형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출소가 코 앞”일 것 같다고 하는데, 도리어 독자로서 걱정이 된다. 해탈이 머지않았다는 뜻 같아서다…. 건강하시길! 문학평론가
2023-11-08
너무 깊이 잠들어 차고지까지 들어가 버린 사람의 꿈을 보았네 아주 슬프고 쓸쓸한 꿈이었네 꿈에서 깨고 나서야 그게 내 꿈인 줄을 알았지만 깨기 전에는 이렇게 슬픈 꿈이 내 꿈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네차고지에 들어간 열차는 언젠가 다시 차고지를 나오겠지만 꿈속에 들어간 사람의 꿈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를 않네 꿈에서 깨어나도 꿈이 어두운 차고지에 혼자 남아 있다면 어쩌나 그런 생각에 도무지 꿈에서 깰 수가 없었네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가. 꿈이 차고지에 들어간 것인가 꿈꾸는 이가 차고지에 들어간 것인가. 알쏭달쏭한 시다. 내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꾸는 꿈. “꿈에서 깨어나도” “도무지 꿈에서 깰 수가 없었”다는 역설. 열차와는 달리 꿈의 차고지에 들어간 사람은 그 속에서 나올 수 없다. 깊이 잠든 이가 이런 꿈의 회로에 갇히게(‘폐색’) 될 터, 그것은 “아주 슬프고 쓸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평론가
2023-11-07
여름날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소파에서 TV 연속극을 보던 아내하마처럼 하품 몇 번 쏟아 내더니입을 쩍 벌린 채 자고 있다한평생 저를 끌고 다니느라고달팠을 몸 잠시아내와 한통속인 세탁기와 청소기와냉장고도 함께 자고 있다여전히 제 안의 고단함을 길어 올리는 아내온 우주가 아내의 쩍 벌린입속을 드나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저 들숨 날숨에 달려 있다가족이란 입 벌리고 자는 모습을 보고 보여주는 사람들 아닐까. 경계심이 없기에 서로의 눈앞에서 입을 벌린 채 잘 수 있는 이들. 시인은 입 벌리고 자는 아내 모습이, “세탁기와 청소기와/냉장고”와 함께 사는 그녀의 고단한 생활을 보여주는 듯 해 안쓰럽다. 아내의 고달픔은 한 가정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아내의 벌린 입이 내뱉는 숨에 “온 우주가” 달려 있다는 시인의 진술은 과장만은 아니다. 문학평론가
2023-11-06
오래된 정원에서 다시 거닐면서오오! 말없이 노란 그리고 빨간 꽃들이여,너희들 역시 애도하는구나, 너희 제신(諸神)들이여,느릅나무의 가을철 황금빛이여.파르스름한 자그마한 늪가에 미동도 없이 솟아오른다,갈대는, 저녁이 되니 지빠귀들도 침묵한다.오오! 이제는 너 또한 조아려라 너의 이마를선조들의 쇠락한 대리석 기념비 앞에.게오르크 트라클은 독일 표현주의 시인으로, 그가 그려낸 풍경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위의 시는 그의 시풍을 잘 보여준다. ‘노란 그리고 빨간 꽃들’은 뭔가 불길해 보인다. 가을 저녁이 드리운 늪가의 음울한 분위기 속에 피어 있기 때문이리라. “선조들의 쇠락한 대리석 기념비”는 트라클적 세계를 상징한다. 생동감을 잃고 점차 시들어가고 있는 세계를. 시인은 독자들에게 이 ‘쇠락’에 이마를 조아리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2023-11-05
우리의 웃음은 슬픔의 가면이 아니요,우리의 선량함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애처롭게 여긴다,합당한 만큼보다 훨씬 더 많이, 지나칠 정도로.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경이로운 존재다,세상 그 무엇도 이런 놀라움을 안겨주지는 못하리니.밤하늘에 뜬 찬란한 무지개도,새하얀 눈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도.우리가 잠들면꿈에서 이별이 보인다.그래도 그것은 좋은 꿈,그것은 좋은 꿈이다,언젠가는 깨어나기 마련이므로. (부분)사랑에 빠진 이들은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향유하는 이들이다. 아마 경험해본 이들은 알리라. 시인이 말해주듯이 연인 앞에서 웃는 웃음은 ‘슬픔의 가면이 아니’며 순수하게 샘솟는 웃음이라는 것을. 처음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상대방은 “너무도 경이로운 존재”로 현현한다. 왜냐고? 마법처럼 저이 앞에서 마음이 들뜨지 않는가! 연인들에게 사랑은, 이별의 상상조차도 곧 깨어날 꿈으로 여길 정도로 강력하다. 문학평론가
2023-11-02
그것은 노래였다가 웅얼거림이었다가 그냥 허공이었다가저녁답 산 너머 절집 쇠북소리처럼날아가다 기진맥진의 흔들림만 남아 또 다시 허공이 되는,가을볕 휘감던 저녁이면쌀을 씻던 당신의 손과그 물소리를 한없이 생각한다다시 가을,음울한 교과서를 펼쳐놓고밤새 외우다가 잠이 든다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이 시의 첫 단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제목을 보면 ‘가을 햇살’이라고 생각된다. ‘노래’였지만 ‘웅얼거림’으로 졸아들다가 허공이 되고만 가을 햇살. 그 햇살은 노래처럼 아름다웠을 것이다. “저녁이면 쌀을 씻던 당신의 손”을 비추던 ‘가을볕’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기진맥진한 흔들림만 남아” 있다가 사라질 뿐이다. 쌀 씻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에. 문학평론가
2023-11-01
내가 당신을 떠날 때세상은 힘없이 둥둥 울린다.마치 늘어진 북처럼.나는 삐죽한 별들을 보며 당신을 부르고바람의 등줄기를 향해 소리 지른다.하나씩 하나씩빠르게 스쳐가는 길거리들은내게서 당신을 멀리 밀어내버리고,도시의 등불이 내 눈을 찔러서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내가 어째서 당신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날카로운 밤의 모서리에 스스로 상처 입기 위해서?‘나’는, ‘나’ 자신도 이유를 모르지만, 사랑하는 ‘당신’을 떠나야 했다. 시는 당신을 떠난 이후 ‘나’에게 일어난 고통을 묘사한다. 세상은 “늘어진 북처럼” 둥둥 울리고, ‘나’는 밤하늘 별을 보며 당신을 부르지만, 거리는 당신을 밀어내버린다. 또한 도시 등불에 눈이 찔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밤은 ‘나’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른다. 이별의 고통을 도시적 서정을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2023-10-31
어디서나 푸른 숲들은 아프다 한다불법 다이아몬드 채취꾼들이 마구잡이로 파헤치는지구의 대형 산소 공급원이며날것 자연 슈퍼마켓인 아마존 밀림싸움터로 나가는 전사들처럼 얼굴에 전투 문신을 그린원주민들이 정부 환경정책담당관을 만나철저히 단속해줄 것을 요청하지만글쎄, 영 미덥지 않은 눈치다한편 우리는 어떨까?저 남미(南美) 아마존의 원시림처럼마구잡이 벌채를 하고 땅 갈아 엎고 그 위에우뚝 제주2공항을 건설해도 괜찮은 것일까푸른 숲과 땅이 벌건 맨살을 드러내고온몸 뒤틀며 몹시 아프다고 신음할 것 같다아마존 밀림 개발이 허용된 후 밀림이 ‘마구잡이로’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은 남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 훼손이 그 지방만의 문제가 아님을 환기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제주2공항을 건설한다고 숲과 땅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지구 훼손은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류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시인은 말해준다. “얼굴에 전투 문신을 그린/원주민”이나 우리는 같은 지구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3-10-30
이렇게 살면 폐인이 될 것 같아짐을 챙겨 옆방으로 갔네이렇게 살면 귀신이 될 것 같아다시 짐을 챙겨 옆방으로 갔지이렇게 지내면 정말 귀신도 못 될 것 같아짐 챙길 새도 없이 옆방으로 갔어(중략)밤이면 불을 켜고 가스 불에 국을 데워돈 내지 않으면 모든 게 끊어지네끝은 끝 방고요와 평화불이 꺼지면버스를 타고종점까지 갔다 돌아와야지나는 젖겠네시인의 궁핍한 생활이 구체적이면서도 절제되어 묘사된 시. “돈 내지 않으면 모든 게 끊어지”는 막막한 현실에서, 시인은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옆방으로 전전하다가 ‘끝 방’에서 고요와 평화에 들어서고 싶다고 희구한다. 그 희구는 소멸에의 욕망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최악의 상황마저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 역시 담고 있다. “불이 꺼지면/버스를 타고/종점까지 갔다 돌아”오겠다는 다짐으로 표현되는 의지. 문학평론가
2023-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