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 잡곡밥, 청국장, 도토리묵, 마늘, 고추 장아찌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엄마와 함께 소양, 해지는 들녘을 걸었다가팔랐던 내 마음도 어느새 평평해졌다엄마가 살아왔던 이야기들이 벼이삭처럼 자라는 해지는 들녘이었다차랑차랑 벼이삭을 흔들며 단내 나는 바람이 불었다고단하고 쭈글쭈글했던 엄마 삶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엄마 손은 고즈넉했으나그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으면문자로 요약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난 이 따뜻함에 기대어서로 품고 스며드는 시간 속으로 가고 싶었다평평한 들녘에 어머니와 함께 평평하게 손을 잡고 걷는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 주름으로 각인된 고단했던 시간들을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들을 건네면서 “쭈글쭈글했던” 시간들은 “조금씩 펴지”며 들녘의 “벼이삭처럼 자라”나고, 시인의 마음은 그 들녘처럼 “어느새 평평해”진다.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시인의 마음속에서도 자라난 것, 어머니의 이야기-문학-도 이삭처럼 평평한 세계에서 자라나는 생명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7
오랜 정원의 마술사는 더 이상마술을 하지 않는다그늘을 빌려와 그림자로 시체놀이를 한다모두가 액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그는 변기를 미술관에 걸어두었다미술관 앞에서 한 여인이 오줌을 눈다시인은 현대 미술 전시회에 변기를 걸어둔 뒤샹의 일화를 빌어 와서, 현실 자체가 되는 예술을 보여준다. 뒤샹의 변기는 액자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자체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 ‘예술품’에 한 여인이 오줌을 실제로 눌 수 있었던 것. 그런데 그 변기가 남성 소변기였음에도 오줌을 누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예술과 현실 공간이 전복된 저 미술관에서는 성의 상징적 질서 역시 전복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6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해서네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기약 없는 먼 훗날을 몽땅 끌어당겨서라도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납땜 냄새 찌개 냄새 땀 냄새에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운명처럼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재갈 물린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 여자의 시간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고는 있다만여자라는 시간은 제자리걸음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부분)위의 시는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광장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닥치는 일을 해야” 하는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녀들은 세상이 광장의 촛불에 주목할 때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사회는 그녀들을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며 가시화하지 않는다. 각종 일을 하지만 존재성이 박탈당하고 있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시인은 “재갈 물린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 여자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문학평론가
2023-02-23
그늘 한 점 없이 달아오른 하오언젠가 정물이 되어 버릴이 풍경의 말미를 생각한다길과 건물과 구조물은 점점반듯해지고 인부들의 근력은발아래 그림자와 비례할 것이다짧아지는 속도를 쫓다가길어지는 시간을 따라 지쳐 가겠지번듯해지면 번듯해질수록번듯한 곳에 남겨지지 못할 사람들그렇게 쫓겨난 늙은 노동자가더 물러설 곳 없는 철탑에 올라뜨겁게 타들어 가는 목숨의 말미를움켜쥐고 있다뜨거운 여름날 ‘하오’, 공사판 인부들이 반듯한 길과 건물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인부들의 근력은/발아래 그림자와 비례”해 약해지면서, 결국 그들은 공사판에서 쫓겨나게 될 터이다. 그렇게 인부들의 삶은 자신들이 속하지 못할 번듯한 세계를 만드는데 소모되며, 결국은 “더 물러설 곳 없는 철탑에 올라”, “목숨의 말미를/움켜쥐고” 자본에 마지막 항의와 생명의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2
전화기는 쉴 새 없이 복음을 뱉어내느라 바쁘다대문 밖은 위험합니다가족도 조심하세요기쁨을 기쁨이게 하는 말씀은 이제 없다천당도 지옥도 말 한마디로거침없이 만들고 지웠지만예수도 부처도 전염병은 어쩌지 못한다니과학을 신봉하라백신, 또, 하나의 신이 탄생하고 있다‘코로나 사태’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젠 코로나 사태로 무엇이 일어났고 변화되었는지 성찰할 시간이다. 표성배 시인은 하나의 신이 탄생했다고 진단한다. 그 신은 ‘백신’으로 상징되는 ‘과학’이다. 어느새 백신이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 믿어졌고, 사람들은 백신에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신은 ‘기쁨’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불안을 파고드는 경고와 죽지 않으려면 백신을 믿으라는 무서운 ‘복음’을 전할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1
변방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를아무도 듣지 않는다변방에서 쏘아 올린 사랑의 로켓을아무도 보지 않는다변방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꽃향기를아무도 맡지 않는다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자신이 중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줄 모른다‘변방’에 있는 이들 중 다수가 중심에 들어서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기필코 중심에 들어가리라고 마음 먹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변방을 벗어나야 할 곳으로 여기니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있을 수 없다. 중심에 들어선 이들 또는 원래 중심에 있었던 이들 역시 변방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들에 관심 없다. 시인은 이렇듯 중심에 마음이 묶여버린 이들이 “중심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꼬집는다. 문학평론가
2023-02-20
서로를 보면열이 오른다 자취방 창가로 불어오는 여름높이 들어 잔이 넘치도록 마시는 여름거리에 쏟아지는 여름이마음을 와락 적신다어느 날은 햇살 아래 빛나는 너의 웃음이여름이구나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러한 여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우리의 여러모로 비슷한 일상이뜨거운 시절이라는 사실을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기억하자이 여름이 우리의 첫사랑이니까이제 시작이니까너와 함께 있으면 내 삶이 다 망쳐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래서네가 좋아최백규 시인은 여름을 사랑한다. 여름이야말로 사랑의 열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리라. 여름은 “햇살 아래 빛나는 너의 웃음”처럼 사랑스럽다. 여름날 “자취방 창가로 불어오는” 여름 바람은 사랑의 열기를 전해주면서, 잔을 “높이 들어” 술을 마실 때처럼 사랑에 취해 “마음을 와락 적”시게 이끈다. 하여, “거리로 쏟아지는” 여름의 “여러모로 비슷한 일상”은, 사랑으로 뜨거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9
가을의 말씀에는 은유가 없다.은유의 꽃이 사라지고은유의 잎이 떨어지고은유의 뿌리였던허기와 향기가 지워지고 나면원색의 하늘만 남아, 침묵의 하늘만 남아태초의 말씀,허공 가득한 바람으로그대의 한 생을 증언하고 있다.인간의 언어가 은유를 통해 탄생하고 작동한다면, 은유가 지워진 언어엔 무엇이 남을까? 시인은 “태초의 말씀”인 ‘침묵’만 남는다고 한다. 은유의 꽃, 잎, 뿌리가 모두 사라지고 난 후 남는 건 허공과 그 허공을 가득 채우는 바람뿐이다. 우리가 저 푸르른 가을 하늘의 허공을 보았을 때, 태초의 말씀이 침묵을 통해 들려온다. 그리고 그 ‘하늘-침묵’은 바람처럼 허공을 지나가고 있는 “한 생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6
안녕이란 말 어디에서 왔을까소란스런 거리에 서서“안녕”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면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물어 가네얼마나 많은 별리들이 사람들 앞에 있었을까바람 속을 떠돌고 강물에 섞여 흘러갔을까“안녕”하고 뒤돌아서면적막에 묻힌 집 한 채떠오르고잊혔던 이름들 등불처럼 내걸리네안녕이란 말 어디로 갈까허공에 매달려 반짝이는이름들아불멸의 노래들아이별할 때 말하는 ‘안녕’이라는 말. 이 시에 따르면, 이 말을 “읊조리면” “소란스런 거리”에서도 적막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은 가슴 아픈 이별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곳이다…. ‘안녕’이 시적인 말이라는 것을 이 시를 읽고 새삼 깨달았다. 시적인 말이란 “불멸의 노래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 노래들은 “잊혔던 이름들”이 내걸리는 ‘등불’을 의미하는데, ‘안녕’을 읊조리면 이 등불에 불이 켜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5
더 이상 사물을 읽으려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세계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사람들은 다만 자신들의 운명을 비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무당의 나라가 들어섰고미래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누군가가 종언이 왔다고 한탄했으나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물가에서 지나간 시대를 비춰주던 햇살만이아직도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사물의 시대를 비추고 있었다 (부분)시인에 따르면,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사물을 읽으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에게 “세계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비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세계와 접속하지 않기에, 그들에게 미래의 세계는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는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저 ‘햇살’이 여전히 사물에 빛을 비추며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4
늦은 산책을 하는데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앞서 걸어갔습니다.한쪽으로 심하게 기운 걸음으로손에 손을 의지해 중심을 기울이고한 손에 약봉지를 꽉 그러쥐고(중략)마주 잡은 노부부의 손을섣불리지나칠 수 없어더 느린 보폭으로 길의 주름 늘려가는데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좁은 골목이 통째 느려져다시 출발선에 선 듯 느른하여뒷모습만으로도앞모습이 화평하였습니다. (부분)시인의 눈앞에서 느릿하게 걸어가는 노부부. 자신의 생명줄인 듯 “약봉지를 꽉 그러”쥔 이 노부부는, “중심을 기울”여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부의 ‘느린 보폭’이 ‘길의 주름’을 더욱 늘려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삶의 황혼에 다다른 노부부가 역설적으로 이 세계를 “다시 출발선에 선 듯 느른”하게 하는 것인데, 이들의 뒷모습은 이 새로운 세계의 화평한 ‘앞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02-13
꽃은 시간 위에서 피어나고꽃은 시간 위에서 지네시간은 꽃이 되어 피어나고시간은 꽃이 되어 지네나는 당신 위에서 피어나고나는 당신 위에서 지네당신은 내가 되어 피어나고당신은 내가 되어 지네단순한 진술이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네 개의 단순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위의 시가 그러하다. 시간 위에서 피어나고 지는 꽃. 꽃이 되어 피어나고 지는 시간.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 위에서 피어나고 지는 나. 내가 되어 피어나고 지는 당신. 이 단순한 대구가 깊은 존재론적 인식-세계와 우리가 사랑을 통해 존재하며, 그렇기에 삶은 아름답다는-과 함께 그 인식 덕분으로 발생되는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문학평론가
2023-02-12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것은숲속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던제모습을 구겨지지 않게 펼쳐내려는단정한 날갯짓이지요나무가 바람에 흔들려주는 것은단정하게 다듬어놓으려는 제모습을헝클어지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욕심 버린 몸부림이지요바람에 흔들려주는 나무 앞에 서면몸 둘 바를 모르고 다소곳해지는 까닭은내 모습을 반듯하게 다듬어놓지 못한부끄러움 때문이지요.현대인은 점점 부끄러움을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에 시는 우리 현대인에게 종종 부끄러움을 일깨워주고, 그래서 사랑받는다. 윤동주의 시를 생각해보라. 어쩌면 시인은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발견은 시적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바람’의 ‘날갯짓’과 ‘나무’의 ‘몸부림’이라는 형상에서 단정함의 윤리와 자신의 부끄러움을 찾아내듯이. 문학평론가
2023-02-09
복면의 사내외줄 그네를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밀대를 밀며 간다백색 점프다줄을 당기고 늦추며포름알데히드가 휘발중인 흰 사슴이 뛴다늙고 병든 비둘기가 추락하던 난간벌거벗고 시위하던 사내구급대원들이 산벚나무 두 그루 밑동까지 잘라공기 매트를 깔아주던 실패한 자살자가 사는 12층도 새하얗다.빛바랜 잡초도 흰 귀를 달고허름한 아파트는 사라졌다소문은 표백되고 (부분)‘도장공사’는 우리의 일그러진 일상에 가면을 씌운다. 가령 “벌거벗고 시위하던 사내”가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살아가는 ‘12층’을 ‘새하얗’게 변모시킨다. 일상의 본 모습에는, 난간에서 추락하는 “늙고 병든 비둘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추락이나 병의 고통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져 있다. 하나 ‘백색 점프’를 통해 “허름한 아파트는 사라”지고 불길한 “소문은 표백”되는 것이 작금의 세상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8
스며든다는 건온 생을 걸려 닮아가는 일이다천천히 스며들어젖어드는 줄 모르고 있다가헤어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흠뻑 젖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나로 물든 너를 바라보는 일이다그제야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겠다그리고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길Good Bye!시에 따르면, 스며듦은 “온 생을 걸려” 이루어진다. 하여 스며듦은 서로를 닮게 해서 상대방이 자신처럼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우리는 서로 스며들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스며듦을 발견하도록 하는 사건은 이별이다.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흠뻑 젖어 들어갔음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헤어질 때가 되어야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7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어느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왜 우시냐고 물으니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아버지에게도 아버지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일 수 있음을 잊고 산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만 하다는 듯이. 위의 시는 누군가의 아들로서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기억은 ‘사십 년’이 넘도록 스며들어 있는 특정 장소에 대한 감각-‘할아버지 냄새’를 통해 상기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3-02-06
니코틴 때문이 아닐지 몰라내가 재떨이를 헤집는 이유뜨겁던 몸들퀴퀴하다생살에 비벼 끄던간절한 말들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깊이 빨아들인다입술까지 닿는 꽁초의뜨거움시에 따르면, ‘마흔’에는 꽁초를 찾는 삶을 살아간다. 아직 불태울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는지 찾는 삶. 지금 재떨이에 ‘퀴퀴하’게 누워 있는 꽁초들은, 그래도 발갛게 뜨거웠던 삶, “간절한 말들”이 타들어 갔던 삶을 살았던 것들이다. 하나 그 말들을 “생살에 비벼 끄”게 되었던 것인데, 화자는 기어코 꽁초를 찾아 불을 붙인다. 그리고 이제야 ‘입술’까지 타들어오는 말들의 뜨거움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5
나는 완전에 가까운 그의 결단을지천명처럼 믿네그에게 하루 14시간의 작업이나단수(斷水) 같은 월급이문제가 아니었네위장병이나화장실조차 막는 금지도문제가 아니었네바늘로 졸음을 찌르며배고파하는 어린 여공들에게풀빵을 사준 일이문제였네내게 인정으로 배수진 치는 법을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최후까지 알려줄 것이네시인에 따르면, 전태일은 적개심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 동료들을 연민하는 ‘인정’으로 배수진을 쳤다. 그 ‘인정’은 연민의 대상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의 일어남이다. 전태일의 ‘결단’-그의 죽음-은 그 인정이 더이상 밀릴 수 없는 최후에 다다랐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정은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근본적인 가치임을, 전태일은 시인에게 가르쳐주었다. 문학평론가
2023-02-02
우왕좌왕은 없다좌충우돌은 없다내 발자국은 없다 그러나 내 동선은 남는다너도 없다얼굴도 없다누군가 없는 네게 경고한다너는 그곳에서 살고 있으며너의 모든 경유지와 목적지는 기록된다지워지지 않을 너의 과오는 남는다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세상이다 (부분)시인은 운전자의 필수품인 내비게이션이, 자동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 삶의 양태를 상징한다고 본다. ‘좌충우돌’과 ‘우왕좌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 삶의 내비게이션은 최적화된 삶의 양식을 지시하면서, 그에 따라 가게 되는 “경유지와 목적지”를 모두 기록한다. 지워질 권리는 허용되지 않는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인간을 위해 개발된 ‘내비게이션’은, 어느새 인간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1
하루 종일 하늘이 무거웠다먹구름이 잔뜩 물을 들이켰는지한낮도 한밤중 같았다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창문을 마구 흔들어 덜그럭거렸다문이란 문을 죄다 닫아걸었더니틈을 찾는 바람의 울음이 휘잉 휘이잉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고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댔다들판에 배곯은 승냥이 울음 같은사랑이 두려웠다이름을 불러가며빙빙 도는데나는 여기 없는 척 숨을 죽이고악착같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우리 마음에는 폭풍우가 잠재해 있다. 시인은 그 마음 속 폭풍우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폭풍우의 전조는 마음에서 사랑이 일어나기 직전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방문을 “승냥이 울음 같은” “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 대는 바람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이다. 시인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슬픈 거짓말”이었다 문학평론가
202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