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해길을 잃었다허기처럼 빛나는 이팝나무 꽃잎과옷소매에 묻어온 수크령들과눈 덮인 벤치에 앉아잠시 울었다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했고나는 꼭 한마디 할 말이 남았지만늘 처음과 끝의 중간쯤에 나는 서 있었고돌아와그곳에 두고 온 신발을 생각했다시에 의하면, ‘당신’을 잃는다는 일은 살아갈 길을 잃는다는 일이다. 길 잃음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을 때 일어난다. 기대와는 달리 “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떠나버렸기에. 시인이 집에 돌아오더라도, 당신이 가버린 길과 집으로 오는 길 “중간쯤에” 그는 서 있는 것과 같다. “그곳에” ‘신발’을 두고 왔기에, 시인은 이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3-01-30
늘어진 혓바닥은 자꾸 마르고말라서 침이 흐른다어디든 갈 수 있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멈취 서는 게 가장 두렵다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대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두 눈은 이제 먼 곳을 바라볼 뿐발바닥은 보이지 않는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도어디나 위험하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서어디라도 보아야 한다아픈 시다. 한때 “짖어대던 때”도 있었지만 혓바닥은 질질 침 흘리며 말라가고, “두 눈은 이제 먼 곳을 바라볼 뿐”인 나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돌아보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미 발은 부어있는데, “발바닥은 보이지 않”게 될 때다. 자신을 거들떠보는 이도 없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어디라도 보”면서 멈춰 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연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까. 문학평론가
2023-01-29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언제나 어느 나라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에 남는 칼자국언제나 피, 땀, 죽음그 위에, 언제나 노래가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언제나 너의 빛부사는 모습(형용사)과 행위(동사)를 꾸며주는 말이다. “삶은 부사와 같다”는 말은 행위와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나타나는지의 양태가 삶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삶의 양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시인에 따르면, “언제나 피, 땀, 죽음”-‘칼자국’으로 남은 상처-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편 “언제나 너의 빛”이 있다. ‘너의 빛’은 ‘노래-시’일 터, 이 시가 ‘피, 땀, 죽음’이 서린 ‘낫’의 삶에 “부드러운 향기”를 묻힌다. 문학평론가
2023-01-26
바닷가 돌집 아래슬픔끔찍했으나 오랫동안 지켜보았고울지 않았다바위는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옆자리에 쪼그려 앉아노래를 불렀다끝이 없다귀 없이 멀리 가는 새야,돌아보지 말아라점점 멀어졌다모든 것이 베개처럼 평평해졌다모래밭에 모래꽃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부분)사막처럼 쓸쓸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백사장. 바위마저도 “먼 바다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해안을 물들이는 바위의 그 노래는, 바다에 닿지 못하는 슬픔을 표현할 것이기에 저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하여 “바닷가 돌집 아래”에 배어 나오는 슬픔을 시인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리고는 끝없이 펼쳐진 슬픔이 끔찍해서 “멀리 가는 새”에게마저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결별하는 연인에게 말하듯이. 문학평론가
2023-01-25
살구나무 그림자에 누군가의 마음이 어룽댄다꽃 진 살구나무에 봄의 정신이 있다고믿는다옛사람처럼살구나무 그림자에 내 다리를 얹어본다바람은 내 그림자만 떠내어 흔든다흔들리지 않는 살구나무 가지에봄의 정신이 있다 (부분)시인은 살구나무 그림자에 자신의 “다리를 얹”는다. 그러자 “바람은 내 그림자만 떠내어 흔”드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흔들리는 것은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에게 일깨운다는 듯이. 이 일깨움에 따라 시인은 곧이어 ‘봄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는 살구나무 가지에” 있다고 선언하듯이 말한다. 모든 꽃이, 아름다움이 다 져버렸지만, 그 빈 가지에는 흔들리지 않는 봄의 정신이 현현하고 있다는 선언. 문학평론가
2023-01-24
그래,나는 벌써 트럭이야짐칸에 실을 게아무 것도 없는단잠에서 깨어나면수정 이슬 털고부릉부릉?새 힘을 내어디까지 가야 할지?알 수 없지만 나는?트럭이지 길을 따라 가다길에서 멈춰 설? 눈 앞에 다가서는?한 줄기 흰 길 (부분)트럭의 삶은 어떠한 삶인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운행되는 기차와는 달리 트럭은 자유롭게 길을 돌아다닐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문득 트럭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짐칸에 실을 게/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 자신이 트럭처럼 “길을 따라 가다/길에서 멈춰 설” 운명이라는 깨달음이다. 시인은 길 위에서의 삶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 앞에 다가서는/한 줄기 흰 길”에 서서 새 삶을 출발하려고 한다. 문학평론가
2023-01-19
바다 위에 뜬 달저물어 가는 달이 어둔 밤바다에 머물다 가기를 기다렸다이곳의 지명은 고요한 달이 바다에 떠오르던 기억을 잊지 않는다어느 곳에든 분명 끝은 있다닿을 수 없는 어느 달이 손끝 저만치에서나마 파랗게 흔들렸을 이 세상의 끝에서나는 한 걸음조차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어둠보다 어두운 것을 자꾸 건너다보려고 한다달의 뒤쪽이 밤바다에 비칠 때가 있다고 한다 (부분)시인은 달빛을 기다리고 있는 이곳이 바로 “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저 바다 너머 저물어가는 달의 마지막 빛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란 “어둠보다 어두운 것을 자꾸 건너다보려고” 하는 것임을 은연중 깨닫는다. 저물고 있는 마음에 담겨 있던 ‘기억’을 되찾는 일이란 저 바다를 둘러싼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 즉 이 세계에 빛을 비추는 달의 뒤쪽을 보고자 하는 욕망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01-18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그 사람처럼 흔들린다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그렇게 흔들렸던 세월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누군가의 몸이 다시 앉을 그네시인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곧은’ 저항의 결연함은 흔들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며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이기에. 그래서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이어서 흔들림을 통해 흔들림은 번져나가고 그렇게 사랑은 퍼져나간다. “누군가 먼저 흔들렸”을 삶의 체온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그네는, 그렇게 흔들리면서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매듭이다. 문학평론가
2023-01-17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강물을 보는 순간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물살하루 종일 읽어도 한 페이지도 넘길 수 없었던수만 개의 문장, 수만 개의 기호들이물속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강물에 낚시를 담그고 있다사람의 시간을 버리고 물살의 시간으로 있는분침도 시침도 없는 시계가 좋다물고기의 비늘은 고정된 초침이라는 듯낚아 올린 물고기는 파닥거린다 (부분)시인은 물고기를 낚듯이 세계의 반짝이는 저 문장들과 기호들의 생생한 의미를 낚으려고 한다. 그런데 저 기호들의 반짝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물살의 시간으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물살의 시간’은 “분침도 시침도 없”다. 그 물살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물살의 흐름은 흐름 자체로 본다면 제 자리에 있는 것, 그 역설은 ‘사람의 시간’-시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야 인식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3-01-16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 들렀다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 주셨다머리가 없는목 잘린 순교의 산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무두정無頭釘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부활의 집’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한다. ‘절두산 부활의 집’이란 그러므로 삶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집이다. 시인은 병인박해로 순교의 성지가 된 절두산-천주교 신자가 목이 잘린 곳이어서 ‘절두’라는 이름이 붙었다-의 부활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결심을 한다.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얻어 이승에 남길 ‘못’은 목 잘린 순교자들처럼 머리가 없는 무두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3-01-15
우리 집 처마 끝에 매달려집을 지키는 물고기바다를 품어본 적이 없고바다로 나아갈 생각도 없는가엾은 저 양철 물고기문지기 수행자로 살기 위해얼마나 허공을 쳐댔던 것일까가만히 다가가 보니비늘이 없다고개를 돌려보니아이의 어깨에 달라붙은그렁그렁한 비늘나 죽은 뒤에도관 속까지 따라와가슴에 곱다시 쌓일 것 같다집 처마 끝에 매달린 양철 물고기는 아내가 변신한 존재자다. 바다에 살면서 마음껏 헤엄치던 물고기-아내-는, 어느새 양철 물고기가 되어 집 앞에 매달려 허공을 쳐대면서 문을 지키는 가여운 “문지기 수행자”가 된 것이다. 눈물 같은 비늘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가 겪어야 했을 슬픔과 기쁨의 결정체다. 아이에게는 그 눈물이 달라붙어 있다. 그 눈물을 통해 아이가 자라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3-01-12
연둣빛 새싹이 하트로 날고행복이 우체통에 배달되기를조롱의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새들이 지저귀기를고대하던 시간들이 틈과 틈 사이로 밀려 나온다무릎을 꿇고머리는 땅에 닿게 팔은 최대한 내밀어오체투지하듯흔적을 따라가다 보면분절된 신체들이그 시간으로잠시 내밀어지다거품 속으로 녹아든다 (부분)화자는 시인이기에 흔적들을 외면할 수 없다. 흔적들이 시의 공간을 마련해주기에. 그래서 화자는 흔적에서 밀려나오는 삶의 시간들에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오체투지하듯/흔적을 따라”간다. 마지막 연은 흔적에서 타인의 시간이 어떻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분절된 신체들로 현상하고는 “거품 속으로 녹아”들어버린다. 흔적은 시간의 “분절된 신체들”을 잠시 드러냈다가 곧 지워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1-11
물가에 혼자 앉아서이제 그만 고즈넉 저물어야지더러는 기우는 햇빛이 더욱 붉다고불끈, 말하고 싶을 때에도쉬, 표시나지 않게 기울어야지누군가의 등 뒤에서내가 이윽고 캄캄해지면아무렴, 그게 바로 사랑이겠지가끔은 그리운 사람을 위해관솔 같은 상처를 태워꽃불 밝히자 스스로 캄캄해져서흐르는 물로 억센 연장을 씻고바람에 맡겨 젖은 이마를 말리고어디쯤일까 지금저녁강 돌아눕는 소리저물면 조용히 어두워지도록기울면 가만히 허물어지도록아무렴, 그냥 두자 무심하게조금씩 더 낮아지면서상처를 태워 마지막 불꽃들을 발산하며 조금씩 캄캄해지는, 노년에 다다른 자의 사랑. 이러한 사랑이 더 붉고 뜨거울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것이 사랑인가? 허물어지고 캄캄해지면서도, 그는 여전히 누군가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게 그 누군가를 뒤에서 받쳐주는 일, 그것이 사랑임을 저물녘에 도달한 시인은 깨닫게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1-10
매화는 방 안에서 피고바람에는 눈이 내리고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나는 바닥에 엎드려 시를 읽고 있었다누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한편 쓰면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았다가출한 아버지는 삼십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고그래서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했다아내는 무채를 썰고 있었다도마 위로 눈 내리시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무생체와 들기름으로 볶은 뭇국을 좋아했다매화는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하였다동생들은 관절염에는 수술이 최고라고 말했고저릿저릿한 형광등이 매화의 환부를 내려다보았고환부가 우리를 키웠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부분)매화는 어머니와 동일화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저릿저릿’하게 “매화의 환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방안에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삶이 퍼져나가는 듯하다. 매화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동일화되는 하얀 눈은 아내가 무채를 썰고 있는 도마소리가 되어 방안에도 내린다. 이 어머니의 환부와 같은 방안에서 시인과 동생들은 자랐던 것, 그래서 “환부가 우리를 키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1-09
오랜 세월편리와 속도와 효율에 길들여진 자들이실속 없는 배낭을 메고 어디로 은신할 수 있을까누림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고오직 견뎌야만 하는이 시간의 폐허로부터 구해줄 동아줄을어느 하늘이 내려줄 것인가더러 조마조마해지는 맘 달래라고 보낸생존배낭,그 속에 친절하게 넣어둔 초콜릿 비스킷 따위는 꺼내먹고나침반만 그대로 두었다, 하나뿐인 지구 밖으로은신할 순 없으므로,험한 일 닥치더라도 생존의 무거움 털고가벼워지는 희망의 향방은 가늠하며 살고 싶어 (부분)시인의 후배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생존배낭을 보내왔다. 하지만 시인은 “편리와 속도와 효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저 배낭을 메도 “어디로 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생존배낭 속 먹을거리를 다 먹어 없애지만, 나침반은 남겨 놓는다. 나침반이 아직 “희망의 향방”을 가리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간의 폐허로부터 구해줄 동아줄”을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1-08
늙은 경비원이 깜빡 졸았을 때모퉁이를 지난 누군가는 낯선 그림자와 마주쳤고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살해하고살해당하기 충분한겨울의 자정무심코 베인 상처는 아물고아가는 깨어나지 않는다겨울의 푸른 빛,이제 자정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시간에누군가는 잠들고누군가는 책상 앞에서식은 카디건을 걸치며아침이 아니야아직 늦지 않았어입김에 손을 비비며깨어난다 (부분)시인은 “살해하고/살해당하기 충분한/겨울의 자정”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세상에 폭력이 일반화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 세상은 한 주기의 끝인 ‘겨울의 자정’과 같아서 살해 사건이 일어나기 ‘충분’하다. 미래를 상징하는 아가는 깨어나지 않고 새로운 시간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아침이 아니어서 늦지 않았다며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아침을 미리 당겨 글을 쓰는 사람이다. 문학평론가
2023-01-05
나는 귀를 막고 노래합니다보세요다리 아래 젖지 않는 불을물을 꺼트리려는 불의 노력을아름다워라 이 세상, 아치 다리 아래로도축장의 피가 흐르고청둥오리 목덜미에 해는 밝으니사체를 묻은 땅에 그해 가장 붉은 꽃이 피어도돌아가지 않아요트럭이 지나가는 다리헤드라이트 불빛이 얼굴을 훔쳐 달아나도물과 불이 나를 앞질러 해일처럼 일어서도 (부분)다리 아래 세상은 죽음의 ‘피-불빛’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유혹은 마치 세이렌의 노래와 같다. 그렇기에 “나는 귀를 막고 노래”하는 것, 그것은 오디세우스처럼 저 유혹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시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앎은 물에 비치는 불이 물에 “젖지 않”고, “물을 꺼트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며 얻을 수 있었다. 이 노력 덕분으로 희생자의 피는 물에 젖어 들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3-01-04
못둑길에 산딸기, 볼이 쏘옥 들어가도록 빨아 당긴 담뱃불 같다길에 서서 노부부가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산딸기, 할아버지가 풀숲 헤치며 성냥불 긋듯 미끄러져 들어가 “오만 손길이 다 댕기갔네” 하나씩 따 모은다오므린 손바닥에 따 모은 산딸기, 바알간 불덩이를 할머니 입으로 하나씩 밀어 넣어주며 “맛이 어떻노, 어떻노?”할머니 볼 발갛게 불붙어 탄내가 솔솔 났다위의 시는 생생하게 붉은 산딸기의 이미지와 늙은 노부부의 이미지가 대조되면서 노부부가 그 붉게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전화되는 ‘풍경’을 보여준다. 붉은 산딸기는 젊음의 생명을 상징할 터, 저 길가에서 그 생명은 한껏 빨아들인 담뱃불처럼 붉게 타들어 가고, 노부부는 그 젊음-‘바알간 불덩이’-을 따먹는다. 그러자 할머니의 볼이 담뱃불처럼 붉게 타들어 가는 것이다. 다시 불같은 청춘을 맞이한 것처럼. 문학평론가
2023-01-03
2023-01-02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 들렀다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 주셨다머리가 없는목 잘린 순교의 산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무두정(無頭釘)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부활의 집’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한다. ‘절두산 부활의 집’이란 그러므로 삶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집이다. 시인은 병인박해로 순교의 성지가 된 절두산-천주교 신자가 목이 잘린 곳이어서 ‘절두’라는 이름이 붙었다-의 부활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결심을 한다.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얻어 이승에 남길 ‘못’은 목 잘린 순교자들처럼 머리가 없는 무두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