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처마 끝에 매달려집을 지키는 물고기바다를 품어본 적이 없고바다로 나아갈 생각도 없는가엾은 저 양철 물고기문지기 수행자로 살기 위해얼마나 허공을 쳐댔던 것일까가만히 다가가 보니비늘이 없다고개를 돌려보니아이의 어깨에 달라붙은그렁그렁한 비늘나 죽은 뒤에도관 속까지 따라와가슴에 곱다시 쌓일 것 같다집 처마 끝에 매달린 양철 물고기는 아내가 변신한 존재자다. 바다에 살면서 마음껏 헤엄치던 물고기 ‘아내’는, 어느새 양철 물고기가 되어 집 앞에 매달려 허공을 쳐대면서 문을 지키는 가여운 “문지기 수행자”가 된 것이다. 눈물 같은 비늘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가 겪어야 했을 슬픔과 기쁨의 결정체다. 아이에게는 그 눈물이 달라붙어 있다. 그 눈물을 통해 아이가 자라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9
연둣빛 새싹이 하트로 날고행복이 우체통에 배달되기를조롱의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새들이 지저귀기를고대하던 시간들이 틈과 틈 사이로 밀려 나온다무릎을 꿇고머리는 땅에 닿게 팔은 최대한 내밀어오체투지하듯흔적을 따라가다 보면분절된 신체들이그 시간으로잠시 내밀어지다거품 속으로 녹아든다 (부분)화자는 시인이기에 흔적들을 외면할 수 없다. 흔적들이 시의 공간을 마련해주기에. 그래서 화자는 흔적에서 밀려나오는 삶의 시간들에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오체투지하듯/흔적을 따라”간다. 마지막 연은 흔적에서 타인의 시간이 어떻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분절된 신체들로 현상하고는 “거품 속으로 녹아”들어버린다. 흔적은 시간의 “분절된 신체들”을 잠시 드러냈다가 곧 지워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8
물가에 혼자 앉아서이제 그만 고즈넉 저물어야지더러는 기우는 햇빛이 더욱 붉다고불끈 말하고 싶을 때에도쉬 표시나지 않게 기울어야지누군가의 등 뒤에서내가 이윽고 캄캄해지면아무렴 그게 바로 사랑이겠지가끔은 그리운 사람을 위해관솔 같은 상처를 태워꽃불 밝히자 스스로 캄캄해져서흐르는 물로 억센 연장을 씻고바람에 맡겨 젖은 이마를 말리고어디쯤일까 지금저녁강 돌아눕는 소리저물면 조용히 어두워지도록기울면 가만히 허물어지도록아무렴 그냥 두자 무심하게조금씩 더 낮아지면서상처를 태워 마지막 불꽃들을 발산하며 조금씩 캄캄해지는 노년에 다다른 자의 사랑 이러한 사랑이 더 붉고 뜨거울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것이 사랑인가. 허물어지고 캄캄해지면서도 그는 여전히 누군가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게 그 누군가를 뒤에서 받쳐주는 일 그것이 사랑임을 저물녘에 도달한 시인은 깨닫게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7
오랜 연인이 마주 앉아국화차를 우린다더 오래는 꽃과 하나였던 향기가그러나 마른 꽃잎 속에서말라붙은 눈물처럼 깡말라가던 향기가다시금 따뜻한 찻물 속에서핑그르르 눈물 돌듯 그렁그렁 되돌아왔다마치 한순간도한몸이었던 걸 잊은 적 없는 것처럼선을 넘는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수천 번 으깨고 짓뭉개도끝내 서로를 버리지 못하는 꽃과 향기처럼보내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마음으로그대도 도리 없는 꽃일 터인가? (부분)꽃잎이 “따뜻한 찻물 속에” 들어가자 향기가 되돌아온다. 향기엔 육체가 없다. 그것은 찻물이라는 젖은 꿈에 의해 상상되는 육체 없는 대상인 것, 그러므로 국화꽃잎의 향기와의 사랑은 꿈속 대상과의 사랑이다. 꿈이 사랑을 재생한다. 아마 꽃잎의 그리움이 꿈을 꾸게 만들었으리라. 그 꿈은 꽃잎을 향기롭게 만든다. 즉, 사랑을 이루려는 욕망이 꿈을 꾸게 만들고 꿈 쪽으로 삶을 움직여 삶에 존엄성을 부여한다. 문학평론가
2022-12-26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다만눈을 감고 있다.바다 밑에서 하늘 위에도 있는시간, 발에 차이는지천으로 많은 시간,장미는 시간을 보지 않으려고눈을 감고 있다.언제 뜰까눈을,시간이 어디론가 제가 갈 데로 다 가고 나면 그때장미는 눈을 뜨며시들어갈까장미가 시들지 않고 영원한 무시간 속에 놓여 있는 건 바로 “지천으로 많은 시간” 속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이다. 수많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보지 않을 때 무시간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시간이 어디론가 제가 갈 데로 다 가고 나면” 장미는 비로소 눈을 뜨고 비로소 시간적 존재-시들어 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세상의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선 바로 저 장미의 ‘순수한 모순’을 살아내야 하리라. 문학평론가
2022-12-25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 할 기쁨조차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손을 놓아야 한다!서커스의 소녀가 어느 한순간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 되어 날아가며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그것이 내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부분)한 노시인이 살았던 역사엔 핏자국이 찍혀 있다. 혁명과 세기말, 수많은 청춘들이 캐터필러에 짓밟혀 흘린 피. 그런데 청춘들이 죽어 가는데도 시인은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마지막 잎새같이’ 삶을 지속했다고 회고한다. 시인은 이제 그 운명에서 손을 놓고 청춘들이 묻혀 있는 무덤가로 ‘서커스의 소녀’처럼 어느 한순간에 날아가려고 한다. 그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자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이 될 ‘순간’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2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첫번째 계단에는 결혼하기 전알던 여자를 눕히고그 바로 위 계단에는 그녀가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를 누이고 싶다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개미처럼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그 모든 계단들이 부챗살처럼 접혀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분)위의 시는 “-싶다”와 “-좋겠다”의 문형을 반복하면서 아이처럼 소망을 표현한다. ‘시 창작 연습’이란 기성관념에서 벗어나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소망-그 소망을 남이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까지-을 아이처럼 천진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연습이다. 이 연습의 핵심은 무언가 덧칠하는 수사를 배제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명징하게 그려내는 것일 터, 이때 시는 정직함이라는 순도를 얻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1
백 년을 넘긴 대추나무가서쪽으로 기우는 달밤입니다수평으로 퍼지다 직각으로 올라간얼마 되지 않은 대추나무가지에도이른 메밀꽃처럼 꽃이 핀 달밤입니다훤히 뚫린 개집 안 더 아픈 강아지가끈질기게 앓는 강아지의 등에 바짝 붙어흰털을 핥으며 실눈을 빗뜨는 달밤입니다만물이 상생하면서 이루어지는 우주 생명의 경이가 선명하고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시. 특히 강아지의 따스한 애린을 보여주는 행동은 어떤 인간 모습보다도 감동적이다. 꽃이 피어날 장소를 제공하는 대추나무도 타자에 대한 애린을 보여준다. 달빛은 세계 내 존재자들이 보여주는 애린의 세계를 감싼다. 그 달빛이 퍼져 나가는 달밤은 경이로운 생명의 세계가 자신을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는 우주적 공간이다. 문학평론가
2022-12-20
곳간 양철지붕은 비었다,비었다고 엄살을 떨지만터지게 익어가는 나락들을 붙들고들판은 숨죽였다.그쳤다 쏟아지다, 가을 소나기다시 멎는 고들고들한 정적 사이밤 내 들리는 풀비질 소리누가 하늘에 도배를 했나쓰고 남은 들판의 푸름을빗방울로 콕 콕 찍어 바르는 것을콩잎 쓰고 숨어 보던 도마뱀 한 마리아침 천정에 무늬가 살아 움직인다.맑고 경쾌한 풍경이 그려진 상쾌한 시. 세계를 푸르게 물드는 박명(薄明)이 다가온다. 하늘은 푸른색으로 도배되어 있고, 소나기 내린 후 맺힌 빗방울은 그 푸름을 사물들에 “콕콕 찍어” 바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빛과 색은 달라지는데, 시인은 이를 두고 “아침 천정에 무늬가 살아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밤-새벽-아침으로 변모하는 세상을 “콩잎 쓰고 숨어 보던 도마뱀 한 마리”는 바로 시인의 분신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2-12-19
놀이터 한켠의 시소에 여섯 살 여자아이와일흔의 할머니가 마주앉아 있다여섯 곡절의 노래로 늙은 꽃나무에 불을 매달면길 먼 사람의 발자국처럼 저녁 강의 물소리가서쪽 하늘에 고인다어린 묘목들만이 남아 그림자를 거두는 시간씨 빠진 꽃대궁의 하늘에 함박눈이 쏟아지고시소는 금세 손잡이처럼 외로운 모양으로 비어진다그 무엇도 누구의 것도 아닌 시간이늙은 우편배달부처럼 다녀가는 모양이다수천의 첫 하늘, 눈이 길게 내린다“놀이터 한켠의 시소에” 마주 앉아 있는 두 삶. 여섯 살 여자아이의 삶은 피어나고 있는 꽃과 같고 그 맞은편의 할머니는 이제 곧 져버릴 이파리와 같다. 할머니가 여자아이로부터 듣고 있는 “여섯 곡절의 노래”는 “늙은 꽃나무에 불을 매”단다. 삶에 남아 있을 불같은 기억들이겠다. 그 기억들은 죽음으로 통해 있을 “서쪽 하늘에” 이제 멀리 떠나가며 남겨놓은 “발자국처럼” “저녁 강의 물소리”로 고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12-18
살아갈수록 좋은 날은 안 생기고닷새 장마다 낯익힌 어물전 끝냄이 할미팔다 남은 물가자미 세 마리 건넨다순례할미, 말없이 물가자미 받아들고나생이 한 단 들이민다나이롱 보푸재에 계란만큼 남아 있던 겨울 해는저만치 삿갓봉 목재를 기웃거린다손주 놈 골덴바지 말아 쥔나이롱 보푸재, 순례할미 손등 검버섯 새로한 줄 희멀건 힘줄, 숨 가쁘다 (부분)‘순례할미’와 ‘끝냄이 할미’는 팔다 남은 음식을 직접 교환한다. 나생이 한 단과 물가자미 세 마리는 화폐의 척도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계산이 아닌 애정 속에서 교환된다. 이러한 교환의 장에 겨울 해와 같은 자연물도 기웃거리면서 참여한다. 이렇게 가난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서로 돕는 자연스러운 연대를 낳으면서, 사랑에 기초한 민중의 생명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2-12-15
창문 밑에 매달린 고드름들 사이로,흐린 하늘에 목매달아 죽은 가오리연을 본다하늘을 휘젓는 연의 시체는 부드럽다까만 바람, 겨울은 낙타를 타고 걷는다이따금 땅바닥에 흩어진겨울의 부러진 발톱을 몰래 줍는다주워들고는 죽은 구상나무 뿌리에 기우뚱 심어놓는다구상나무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죽어 있다뿌리에서 또 다른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죽은 몸과 자라나는 슬픔 사이의 여백이 차갑다애인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갔다 (부분)겨울은 까만 죽음의 계절이다. 가오리연이 목매달아 죽는 계절. “애인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갔”지만, 시인은 여전히 이 죽음의 계절에 머물러 있다. 아니, 애인이 봄으로 갔기에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 된 것이겠다. 여기서 시인은 “겨울의 부러진 발톱을 몰래 줍”고는 “죽은 구상나무 뿌리에 기우뚱 심어놓는”다. 겨울의 파편들-아마 슬픔일-을 이미 죽어버린 뿌리에 심는 그 행위는 시 쓰기를 의미할 것이리라. 문학평론가
2022-12-14
동틀 무렵, 그렇게 우주가 사람의 마을로 손금처럼 내려오고 아직 저마다의 이름을 채 밝히지 못한 시간, 가난은 그래도 사람들을 먼저 깨워 이 시간을 온전히 지키라 합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과 저 산을 지나 우주 한 끝에 닿는 길을 당신이 먼저 걸어보라 합니다. 아마 그 몸에도 동이 트려나봅니다. 아직 잠든 식구들을 두고 시퍼런 눈으로 동트는 사람들, 그들이 한 우주가 아니겠습니까? (부분)명명되기 직전의 시간인 ‘동틀 무렵’, 식구들을 책임져야 하는 한 가장의 몸에 빛이 닿고 있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가난한 실업자들의 몸에도, 박명의 새벽이 시퍼렇듯이 “시퍼런 눈으로” 동이 튼다. 이들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삶의 욕망을 되찾기 시작한다면, 새로운 삶이 생성될 것이다. 나아가 이 새로운 삶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세계는 새로운 우주로 변모하면서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13
하나의 불꽃에서수많은 불꽃이 옮겨 붙는다그리고는누가 최초의 불꽃인지누가 중심인지알 수가 없다알 필요도 없어졌다중심은 처음부터 무수하다그렇게 내 사랑도 옮겨 붙고산에 산에꽃이 피네꽃밭의 모든 꽃이 스스로 중심이듯이, ‘촛불 시위’에서 촛불을 든 모든 사람은 스스로 중심이다. 촛불이 전염력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중심이 될 수 있어서 극도의 자발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인은 위의 시에서 촛불이 사람들 사이에 “옮겨 붙는”다는 일은 꽃이 피어나는 생명 현상-사랑을 통해 생겨나는-에 따르는 것임을 암시한다. 사랑이 옮겨 붙어 번져나가는 사건, 그것이 ‘촛불’이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2-12-12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만일 당신의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죽음은 허무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부분)이 시에서 놀랍게도 기다림과 임의 도래라는 사건이 동일한 시간에 중첩되고 있다. 물론 아직 임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셔요’라고 미래의 임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시인은 기다림이 임이 도래할 문을 열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다림이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이 시간의 흐름을 단절시키면서 현재 시간에 임이 도래할 수 있는 구멍을 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12-11
이 밤대지 밑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내 잠을 깨운다지하를 흐르는 검은 물줄기가누워 있는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몸 가득히 어두운 말을 풀어놓는 시각죽은 자의 입에 물린 은전의 쓴맛이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부분)시인이 시체와 동화(同化)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으스스한 묘사로 전개되는 시다. “내 잠을 깨”우는 시체의 “웅얼거리는 소리”는 현실의 악몽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고, 시체들이 묻혀 있는 지하의 검은 물들로 변환되어 시인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하여, 시체가 물고 있었던 “은전의 쓴맛이/목구멍을 타고” 시인의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죽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 시인의 몸을 통해 살아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08
지금은 우리가 죽어가는 시간인생의 고통이 끝나는 시간신경통 같은 죽음, 죽음,갈망하면서 얼마나 거부했던 죽음인가 지금은 나무와 꽃들이 해골이 되는 시간인간이 독물든 흉기임을 인정하고 참회해야 한다서로 깊이 이해하고 다시 끌어안아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여기 우리 함께 있다는 것마지막 춤….천천히 마지막 춤을(부분) 시인이 “우리가 죽어가는 시간”의 ‘신경통’을 앓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 슬픔 역시 무너질 것이며 결국 길이 보이리라는 어떤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 희망은 세상이 곧 멸망할지라도 “서로 깊이 이해하고 다시 끌어안아야 한다”는 윤리를 뒷받침해주리라. 그렇기에 시인은 종말의 징후 앞에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마지막 춤’을 추리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12-07
나를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꿈꾸어야 한다, 단한 줄일 수도 있다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부분)“검은 페이지”는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도 있다는 것이 이 시가 전해주는 의미의 핵심이다. ‘나’에 대해 진술하다가 갑자기 ‘그들’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시가 ‘나’에 대한 단순한 넋두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의 내면이 검다는 진실을 시인은 말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문학이란 ‘거짓’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겠다. 문학평론가
2022-12-06
주먹을 쥐었다 펴면, 꽃잎도 없이 흩어지는구멍 숭숭 뚫린 한 움큼의 시절들겨울이 오기까지 너는 무엇을 견디며 살아왔느냐대파밭에 눈이 내리고 또 쌓이고속이 텅 빈 것들, 그래서 살아있는 것들새파랗게 뜬 생의 기력이 뿌리 끝까지 시들어지면매끈한 속살 드러내고 가지런히 돌아눕기 전에겨울, 대파밭으로 와서 총총 언 발로 서 있어야한다저마다 품은 주먹을 꺼내 강고한 울음으로얼어붙은 제 몸의 빛깔을 한번쯤 확인해야한다차디찬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하는 대파 줄기들어지러워라, 문득 배 속이 투명해지는 저녁이다.(부분)텅 빈 ‘대파줄기’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상징하겠다. 이 줄기들이 “차디찬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한다. 강렬하고 새로운 이미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빈 속’의 이미지가 “투명해지는 저녁”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여전히 저러한 이미지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할 날을 꿈꾸면서 얼어붙은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땅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12-05
노래하는 당나귀를 보았는가 무거운 짐 이고 지고앞만 보고 걸어가는 무심한 눈길짓누르는 돌덩이 아래서 흘러나오는경쾌한 노랫소리그에겐 이미 짐이 없다부서지기 쉬운 자들이 짐을 진다천천히 가지만 언젠가는 사막을 통과한다가녀린 나비가 바리케이드를 넘는다날개 한 잎 상하지 않았다 (부분)“무거운 짐 이고” 가는 당나귀의 “경쾌한 노랫소리”는 ‘무심’해 보이는 당나귀의 삶에 내재한 잠재력을 드러낸다. 그 잠재력은 “부서지기 쉬운 자들”인 당나귀의 존엄을 증명하며, “언젠가 사막을 통과”할 미래를 품고 있다. 노래 부르는 자는 “짓누르는 돌덩이”를 지고 있을지라도 잠재적으로 “이미 짐이 없”는 자유로운 존재다. 하여 저 나귀도 자유로워서, “가녀린 나비”처럼 “바리케이드를 넘”어 날아가리라. 문학평론가
202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