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의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어 본 세대들은 가난이 무엇이고 그때 그 시절의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겪었으니 잘 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살아남기 위한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묘사한 글에서 초근목피라도 구하려고 헤매는 흰옷 사람들 때문에 산천이 “하얗게 변했다.”고 했다. 영양가라곤 아무것도 없는 풀뿌리, 나무껍질로 배를 채웠으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만 볼록 튀어나온 모습이 목불인견이라고도 했다.
내전을 겪고 있는 지금의 소말리아나 우간다의 난민을 연상하면 그때 우리의 참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불과 40년 전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하면 지금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 내내 씨를 말리는 수탈을 당하다가 그나마 해방을 맞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일어난 동족상잔으로 국토가 몽땅 거덜이 났으니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던 탓이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잡초처럼 분연히 일어났다. 세계 그 어느 민족도 따르지 못하는 경제부흥을 일구었다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구었다는 독일 사람들조차 놀랐다고 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초일류로 거듭나겠다며 나아가고 있다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아파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적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때 허기라도 면하고자 마다하지 않았던 힘들고 어려운 작업장들은 모두가 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어렵고, 더럽고 위험하다는 소위 3D업종으로 분류되던 제조, 건설업분야는 상당수가 아시아의 저개발 국가 노동자들이 차지한 것이다. 빼앗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를 키워 낸 부모들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행복으로 알았다. 그리고 내 자식만큼은 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오직 대학에 밀어 넣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랬더니 지금은 대졸자들이 넘쳐나게 되고, 학력에 걸맞지 않은 자리는 회피하면서 취업난이라는 묘한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의 여파로 모두들 살기가 어렵다고 야단들이다. 그런데 그 살기 어렵다는 내용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옛날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영양소를 얻기조차 어려워서 사느냐 죽느냐로 고심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떵떵거리며 폼 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상대적 빈곤감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때 내란이 일어나서 곧 무너질 것처럼 얘기하며 천문학적인 통일 분담금 운운하던, 그 어렵다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도 안하무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상부 권력계층을 제외한 국민들 대다수가 다 같이 못사니 상대적인 비교 꺼리나 박탈감이 없기 때문이란다. 예전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어렵고 힘들 때는 서로 잘났다고 할 건더기도 없으니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지금 같은 불만은 훨씬 덜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같이 세계 최빈국이면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처럼.
힘들 때일수록 사람의 정은 더욱 돈독해진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땐 서로를 위로하며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고, 도우며 인정 있게 살았는데, 경제부흥으로 소득이 많아지고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차이가 벌어지면서 비교의식이 확산하다 보니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생활의 질을 말할 때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질의 많고 적음에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취업대란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욕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욕심의 정도가 정해진다는 논리에 비춰보면 해답이 보이니 말이다.